소설리스트

136화 (136/200)

투호는 조용한 성품의 중전이 제일 즐기는 놀이였다. 귀가 달리고 입구가 좁은 황동 항아리를 

열 보 바깥에 놓는다. 차례로 화살 열 개를 집어넣고 많이 넣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정신 집중에 도움도 되고 좁은 곳에서도 누구나 할 수 있어 궐내 여인들이 즐겨하는 놀이였다.

중전마마께서도 교태전 뒤란에 단지를 갖다 놓고 종종 궁녀들과 함께 즐기신 터였다. 

그래서 제법 실력이 만만찮았다. 하니 전하께 대어서 모자랄 것이 없다 자신하였다.

그리하여 단지를 갖다 놓고 시작하였겄다.

헌데 문제는 전하께서는 사내시라. 팔 힘이 훨씬 세니 던지는 족족 단지 안에 화살이 쑥쑥

날아 들어가는 것이었다. 연해 중전이 세번 다 지고 말았다.

무정하셔라. 전하께서는 전혀 봐주지 않으신다. 승부욕이 강한 버릇은 이것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니,

화살 휙휙 날려 세 번이나 연달아 이겼다. 내기로 건 비단 세 필을 전부다 아깝게 뺏기고 말았구나.

중전도 은근히 약이 올랐다. 조그만 얼굴을 붉히여 새큰거리는 숨을 진정하려 애를 썼다. 

왕의 눈에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도 모르고서 말이다.

윤상궁이 화살을 다시 모아다가 두 분께 내밀어 드리었다. 이참에 한번 반드시 이겨볼란다. 

아주 작정을 하였다. 중전은 옷소매를 걷었다. 숨을 모아 화살을 겨누다가 곁에 붙어서 있는

왕더러 눈을 흘겼다.

"곁에 서 계시면 저가 정신이 산란하단 말입니다. 저만치 비켜 나가 계시어요."

새치름하게 투덜대는 중전 앞에서 왕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흥, 서투른 장인이 연장 탓만 한다더니 말야. 실력이 없어 졌다 말은 끝까정 아니 하는구먼. 

짐이 곁에 있어 정신이 산란하다고? 아, 좋소. 이만치 비키면 되겠지? 흥, 못 넣기만 하여 봐!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왕은 짐짓 을러대고는 한 발자국 물러났다. 중전은 다시 숨을 모아 정신을 집중하였다.

몸까지 기울이며 화살을 던졌다. 아이고 경사로다. 운이 좋은 것인지 갑자기 실력이 생긴 것인지

몰라도 말야. 연하여 세 개를 정곡으로 집어넣었다. 마냥 좋아서 지엄한 신분도 잊고 깡충깡충

뛰며 손뼉까지 치시는구나. 중전마마 편을 드는 궁녀들이 박장대소, 지화자 격려하였다.

지어미의 고 귀여운 모습에 눈이 먼 상감마마, 가슴이 두근두근, 쿵덕쿵덕, 제멋대로 뛰놀았다.

하여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화살 일곱 개를 넣은 중전이 이겼다.

상으로 내건 옥 노리개가 냉큼 굴러 오는구나.

"태사혜 한 켤레 생기는 줄 알았더니 옥 노리개를 잃고 말았도다. 짐도 분해서 못살것이니 다시 하여!

이번서는 절대로 아니 질것이다. 짐이 봐준 것도 모르고 그저 잘났다 좋아만 하지, 엉?"

"흥, 실력 탓이지 봐준 것이던가? 현명한 이는 이길 때 그만두는 사람이라 하더이다. 신첩은

힘들어 못할 것이니, 내일 또 하지요."

"요 앙큼 좀 보소? 뉘가 다시 달라 하였나? 슬며시 옥 노리개 집어들고 냅다 도망을 가는구먼?

핫하하. 연하여 힘드니 허면은 명일에 다시 하십시다."

눈치 빠르게 김상궁이 쟁반에 냉수 대접과 물수건 담아 공손히 바쳐 올렸다. 어수 닦으신 다음,

두 분 마마 시원한 나무 그늘 평상에 앉았다.

오뉴월 복중이라 하나 그늘 아래 바람이 선들. 금세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짙은 나뭇잎 사이로 투명한 햇살이 점점이 은가루처럼 물결지며 떨어진다. 행궁이 높은 언덕 위에

앉아 있는지라 멀리 눈 아래로 관아를 중심으로 벌려 선 송양 부중 고을이 한 눈에 다 보였다.

유유히 흐르는 은강이 깨끗한 깁처럼 치렁치렁 흘러간다. 한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숲이

강 둑 위로 벌려있고, 송림사이 날아갈 듯한 정자 하나가 서있다. 이름하여 그 유명한 월탄정이다.

조용한 물결이 도도히 흐르고 고운 모래밭은 하얀 진가루 뿌려놓은 듯이 아름답구나. 노구(휴대용

작은 솥)를 걸어놓고 천렵하는 머슴들. 발가벗은 채 퐁당퐁당 강물로 뛰어든 동자들이 물놀이를

하는 귀여운 모습들이 다 보였다.

"신첩 비단필은 당장에 내어놓아라 호령하시더니 말여요. 어찌 옥 노리개는 냉큼 아니 내놓으시는고?

지금 당장 주셔야 할 것이다."

소반과가 올려졌다. 서늘한 밀수 대접에다 무르녹은 천도며 우등산에서 진상된 수박, 참외까지

계절 과일이 함께 상에 올랐다. 중전은 얼음 동동 띄운 밀수를 마시며 새침하게 말하였다.

"준다 하였으니 보채지 마오! 흥, 중전이 어질고 성정이 느긋하다 하더니 말야. 보아한 고로

짐보다 더 급한 것이야? 궐로 돌아가 줄 것이야. 느긋이 기대려 보시오."

"참말이셔요? 전하께서 주시는 옥 노리개이니 실로 귀물일 것입니다. 가슴이 설렙니다."

"옥 노리개 장하다 하여도 중전만은 못할 것이오. 그대 속살이 참말 옥덩이 아니오?"

에구머니! 중전마마의 옥안이 순식간에 발그레 변하였다. 행여 누가 지아비의 그 방탕하고 

노골적인 말을 엿들은 것은 아닌지. 자라목이 되어 둘레둘레 살피었다. 다행히 아랫것들은

두 분 마마 다정한 한때를 방해할까봐, 멀찍이 서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부끄러운 말을 들은 

사람이 없다. 뉘가 곁에 없었기 망정이지 실로 우세할 뻔한 것이 아니냐? 중전은 민망하여

새큰 거리며 눈을 흘기었다. 왕이 호탕하게 웃으며 통통하고 무르녹은 오얏 하나를 집어 중전

입 앞에 내밀었다.

"자시오. 중전께서 오얏을 장히도 좋아하는 것을 짐이 알고 있소이다. 후에 짐이 이것만 보면

중전 생각이 날 것이야. 허긴 그래. 그대 입술 맛이 요것보다 더 맛나지 않소?"

"전핫!-"

아이고, 참말 망측하고 면구하여라. 중전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푹 가리고 말았다.

불쑥 입으로 맛난 오얏 살이 파고 들어왔다.

"요 맛을 짐이 이 밤에 필시 맛볼 참이야."

요 징글맞은 분 좀 보시오. 부끄럼 많은 지어미를 희롱하고 놀리는 재미가 아주 단단히 들었다.

슬그머니 귓속말이라. 중전은 꿀떡달디단 과육을 삼키며 그 복숭아만큼 볼을 붉히었다.

"신첩을 항시 요렇게 놀림감 삼으시니 참말 민망하여요. 저가 어찌 살 것입니까? 

실로 짓궂으셔라."

"짐은 참말만 한느 사람인 걸? 틀린 말 한 것이 무에 있소이까? 실로 그대 살결은 고운 수밀도에

옥덩이라 하여도 모자랄 것이니 그 비밀은 짐만이 아는 것이야. 그대의 모든 것은 장히 향기롭고

맛난 것이니 짐더러 없는 말을 하였다고는 못할 게야.흠흠흠."

못들은 척, 모르는 척 왕의 어수가 중전의 손을 더듬어 움켜쥐었다. 다시 한번 다짐을 하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몰라요! 중전이 잡힌 손 탁 털어 내는구나. 하지만 왕은 끝까지 작은 그

손을 놓지 않는다. 말을 하여봐. 짐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데? 계속 지분거리고 짓궂게 군다.

허나 농처럼 하시는 그 말씀이 전부다 진심이다. 두 분 마음이 절로 두근두근. 마주치는 눈길이

함뿍 정해로 젖었다. 

밤마다 온천탕에 들어가 장난칠 쳤다. 물장난에 서로 얼려 쓰다듬는 짜릿하고 달큰한 놀음질이다.

닿는 손길하나, 부딪히는 눈빛 하나까지도 전부다 그대를 사모한다는 고백. 중전은 왕이 실로

그녀를 아끼고 귀하게 대접한다 함을 사무치게 느끼었다. 다정하니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안는 

그 손길이 더없이 정답고 사랑스러웠다. 서투른 새신랑처럼,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뜬 수줍은

떠꺼머리총각인양, 중전을 향한 왕의 모든 것이 은근하고 정다웠다. 뜨겁고 열렬하였다.

중전 또한 지아비의 한결같은 정성과 은애지정을 대하면서, 가슴에 남아있던 저어함이나 섭섭함을

깡그리 다 씻어내렸다. 인제는 아무런 주저함 없이 즐겁다 말하고 은종 울리는 고운 웃음까지 

간간이 내었다. 지아비 전하를 향한 눈빛이 곱고도 정겨운 터다. 허나 대낮에 깊은 밤의 정염을

암시 받은 터라, 지아비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짐짓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아, 사흘 후면은 도성으로 다시 환도할 참이니 이렇게 즐거운 때가 신첩 생에서 다시 올까

싶습니다. 마냥 아쉽습니다. 저가 아무래도 온천을 너무 좋아하게 된 모양이어요. 허나 원로라,

한번 행차하려 해도 너무 번잡하고 힘든 터로 다시는 즐기지는 못할 것이니 정말 섭섭합니다."

주상께서 송양에 내려오신 후 너덧새 째. 낼모레로 환도를 하시어야 한다. 늘 엄한 법도를 지키며

살아야 하고 지켜보는 눈들이 매서운 궐 안 생활이라. 칼날을 밟듯 항시 긴장하고 지내셨다.

헌데 송양에 내려오시어 그저 마음 편하게 지내신 후이니, 중전은 솔직히 이곳을 떠나시기 싫었다.

중전의 한탄에 왕이 싱긋 웃었다.

"원자 낳으소. 그러면 상급으로 짐이 다시 데려와 주께. 중전께서 산후 조리차 오신다 하면은

구설도 피할 것이야. 중전께서 예를 심히 좋아하시니 아기씨 낳아질 적마다 내려옵시다 그려."

빈말일지라도 전하께서 약조를 하신 것이 즐거웠다. 빨리 다시 회임하여서 짐에게 아기씨를

낳아주오. 잃어버린 아기에 대한 상심을 끊어보시오 하는 뜻이다.

그때였다. 문 바깥에서 무어라 무어라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되오! 하는 나인의 목청에

그래도 정성입니다 하는 낯선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문 밖의 소란스러움에 중전이 고개를 돌렸다.

"바깥이 어찌 이리 소란하오? 윤상궁이 나가 보시오. 긴히 전하를 찾는 일이 아닌가 하오."

"짐은 없다 하여라! 아니다, 오수 즐긴다 하여라, 여하튼둥 인정머리라곤 없단 말야. 잠시도

쉴 틈을 안주는 것이야! 에구, 지겨워!"

지레 짐작이라. 바깥에서 의논드릴 일이거나 주청하러 사람을 보낸 것으로 오해하였다.

왕이 불퉁하게 내뱉었다. 중전과의 잠시간의 망중한이라, 은근히 오가는 정분을 방해 당한듯

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용안에 불만이 완완하시다. 문 밖으로 동저을 살피러 나갔던 윤상궁이

벙싯 웃으며 다시 돌아왔다.

"마마, 별일은 아니옵니다. 송양 부윤의 안해이옵니다."

"그이가 어찌 들었던가?"

"성상께서 예에 계옵시니 이 고을의 수장된 도리로 어찌 성상의 한때를 모시지 못할 것인가? 

별찬을 마련하여 들었나이다. 가납하여 줍사이다 간청하는군요. 어찌하올까요?"

"정성이 아닌가? 아름다운 일이구먼. 당연히 가납할 것이야. 마님을 모시오. 보아하니 도령도 

같이 온 것 같은데, 내가 그 집 아기 한번 보고 싶구나."

듣자하니 기특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중전마마께서 방긋이 웃으며 혼쾌히 반겨 주시었다. 

왕도 불만스러웠던 용안의 기색을 풀었다. 기특하도다 칭찬하였다.

"그 집안 아기들이 모다 함께 온 줄 아옵니다. 감히 지존의 옥안을 알현하는 일인지라,

일생의 광영일지니, 한번이라도 뵈옵고 인사를 드릴 것이다 합니다."

망극하고 어려워서 고개도 채 들지 못한 마나님. 그녀 뒤로 졸졸 따라오는 아기들이 크게는

열 서너 살부터 돌백이까정 여섯이라. 위로 졸졸 넷은 여아들이요, 아래로 아들 둘이었다.

뒤따라 온 머슴놈이 지게 위의 짐을 부렸다. 고리짝에 가득한 음식 치레가 너덧이 넘었다.

돌박이 아기는 유모 품에 안기었다. 똘망똘망한 눈초리가 제법 귀엽다. 

고놈 눈망울이 머루알 같구나 하시며 한번 안아 주시었다.

"고것 참 영리하게 생긴 아해로다. 송양 부윤이 염직하게 일을 잘하는 고로, 이 놈도 

그 핏줄이라 자라면은 볼만할 것이야. 상선은 무엇하니? 이 놈에게 엽전이나 한 꿰미 내리거라.

귀한 음식을 진상받은 고로 무엇이든 선사를 하여야 할 것이 아니던고? 중전도 한번 안아 보시오."

상감의 권대로 중전마마 역시 미소를 지으며 젖 냄새 나는 어린 아기를 안아 들었다.

낯에 낳는 아기의 살이 어찌 그리도 부드러운 것인가? 문득 중전마마 어진 얼굴에 안개 같은

우수가 내렸다. 옆에 앉은 왕만이 재빨리 그 어둔 기색을 읽어냈다.

"저이가 지금 필시 잃어버린 아기씨 생각을 하는 것이겠다?"

아기를 품에 안은 중전의 모습이 참말로 잘 어울리거든? 생각하였다. 미소 지으며 잠시 

흐뭇해 하다가 퍼뜩 찬물이 정수리에 끼얹은듯이 정신이 들었다.

잊혀지지 않는 일이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전이 모진 그의 구박에 살 뜻을 잃고

목을 맨 후에 잘못되어, 그만 잃어버린 아기.

그것은 왕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크고 아픈 상처였다. 감히 아프다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감추기만 해야 할 그것.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덮어버리지만 시시각각으로 떠올라 그를 

깊은 죄책감과 슬픔으로 적셔들게 하는 그 일.

중전이 회임하였던 그 태중 아기는 홀홀단신 전하께서 단생 처음 얻을 뻔한 귀한 아기였다.

회임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지아비 전하 당신의 실책으로 잃어버리었다. 어진 지어미의 명까지

도 경각에 달렸던 참이다. 허니 민망하고 부끄럽고 참담하며 아픈 기억이 어찌 금세 지워지랴.

'중전이 빨리 다시 회임하여야 할 터인데. 그래야 내 마음도 편안할 터인데. 옥체 회복되시어

덩실하니 잉태하시어 금세 원자를 안고 웃어야 할 것인데.....'

왕비는 귀여운 남의 집 아기를 안고 흐려진 눈망울을 억지로 가누고 있었다.

입가에는 마소라, 까르르, 까꿍! 하고 얼러주고는 있으되 칼로 가슴을 저며내는 듯한 괴롭고도

서러운 그 심사를 왕인들 읽지 못할 것이냐?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중전의 시선과 왕의 시선이 마주쳤다. 우중 안개같이 흐려진 눈빛이 급히 온화하게 풀렸다.

행여 그가 상심할세라, 다시 한번 아파할세라. 이내 억지로 웃음을 머금는 중전 앞에서 왕은

말로는 드러내지 못하는 미안함에 가슴 아프다. 그저 슬프다.

"신첩은 괜찮습니다."

"아오이다. 알고 있소. 하지만 짐이 아픈걸. 더없이 미안하고 괴로운걸."

말로는 드러내지 못하고 그냥 눈빛으로만 주고받는 속내. 두 사람이 같이 앓고 있는 병.

같이 이겨내야 할 상심. 왕은 팔을 내밀어 중전의 앞에서 아기를 다시 받아 안았다.

"이 놈이 어린 터이되 장히 무겁고나. 아마 밤에 그대 팔이 아플 것이야. 데려 가거라."

빙긋이 미소 지으며 듣기 좋게 가렸다. 아무 일도 아닌 듯 스쳐 지나갔다. 그 뒤로 말씀은 한마디

아니 하였다. 허나 서로 오가는 눈빛으로 나누는 이야기들. 서투른 위로가 아렸다.

괜찮소이까? 하고 묻는 눈빛에 신첩은 상관없나이다, 하는 중전마마 눈빛이 같이 얽힌다.

귀여운 저 아해같이 토실토실 반짝이는 눈망울을 가진 우리 아기씨를 금세 안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은 똑같다. 왕은 중전의 손을 꽉 잡고 토닥토닥 하였다. 차마 말로 할 수 없었던 그의

서투른 위로였다.

"밤에 저 강까정 한번 가 볼 것이오? 행궁 안에만 계시기는 답답할 터이니 몰래 한번 나들이

다녀옵시다 그려. 짐이 데려가 줄 것이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못하고 뜬금없이 그렇게 말하였다. 중전은 왕이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시는지 알아차렸다. 지금 그는 미안하오, 상심하지 마오. 짐이 더 아프오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중전은 가만히 지아비 든든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온기 전해지는 작은 몸을 한 팔로

감싸 안으며 왕은 사무치게 슬프고 미안하다. 두 분 마마. 망연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그 아기씨 그리워한다. 침묵한 채 서로에게 의지한 채 같은 슬픔의 병을 이겨내려 애를 쓴다.

'아가, 미안하구나. 못난 부왕을 용서하여다오.'

밤이 소리없이 내렸다. 약조한 대로 왕은 중전을 말 등에 태우고 인적이 끊긴 송양행궁 후문을

넘었다.

"아이고, 신첩은 무서워 탈 수가 없습니다."

중전으로서는 난생 처음 타보는 말이다. 식겁하여 아니 가리라 발버둥치는 중전을 안고 왕은

살살 꼬시었다. 

"짐이 잘 안아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도록 잘 잡아 주께. 한번만 타보란 말야. 참말 즐거울 것이야.

깡고집이다. 결국 왕이 이꼈다. 당신 무릎 사이에 중전을 앉히고 훌쩍 올라탔다.

한 팔로는 낭창한 허리 안고 한 손으로 천천히 말고삐 손수 잡아 달려가시는구나.

처음에는 중전의 사정을 생각하여 천천히 말을 움직이게 하였다가 금세 중전이 두려움 가신 얼굴을

하자 자, 갑시다! 하고는 말배를 발로 걷어찼다.

달려가는 말 등에서 두려워 중전은 눈을 꼭 감고만 있었다. 처음서는 두려워 그저 죽을것 같았는데

서서히 익숙해지니 은근히 그것. 아주 재미있도다!

이렇듯이 지존 두 분께서 잠도 아니 주무시고 행궁을 빠져나갔다. 아무도 모를 것이야 의기양양하였지만,

사정이 어디 그런가? 윤재관 이하 호위지밀들은 지존의 눈에 뜨이지 않게 몰래 따라가느라 곤욕을

치른다. 

휘영청 달이 그저 밝구나. 따각따각 두 분이 탄 말 발굽소리가 고요한 들길에 울려 퍼졌다.

가슴 안에 중전을 품고 한 손으로 말고삐를 잡은 상감마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급할 것도 없고 서둘 것도 없으니 한가롭게 밤길을 지나간다. 지아비 품 안에 든든히 기대어 있으니 중전도 

처음의 두렵던 마음이 설풋 사라지니 애교 있게 말을 걸었다.

"말 타기가 이리도 재미있는 줄 알았다면 신첩도 애시당초 말타기를 배웠을 것입니다."

"언제고 짐이 가르쳐 주리라. 우리 함께 사냥도 가고하면 좋지 않겠소?"

"참말 호연지기라 하더니 말여요. 마음이 탁하니 트이옵니다. 언제고 격구장에도 한번 데려가

주시어요. 신첩이 실로 궁금하여요. 전하의 격구 솜씨가 궐 안팎으로 일등이라 아주 소문이

장하더이다. 타구채 휘감아 치는 솜씨가 바로 바람과 흡사하다구요. 누도 마마 앞에서는

적수가 없다 아주 감탄, 감탄을 하였습니다. 정말 그러하십니까?"

"핫하하. 소문이야 무엇이든 항시 과장되이 나는 것 아니겠소? 허나 격구에 있어서 다소간 

짐이 솜씨가 있다 이리 합디다. 짐이 조만간 보여 드릴 것이오."

말씀은 겸손하시었다. 허나 지금 왕의 속내는 마냥 즐겁다. 기쁜 빛이 용안에 가득하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젊은 상감마마. 늘 씩씩하시어 말타기며 활 솜씨며 격구 솜씨는 소문난 것이

아니냐. 당신 스스로 누구에 대든 빠지지 않는다 싶은 자랑거리를 중전이 칭찬하고 인정하여

주니 절로 어깨가 으쓱하여졌다.

"언제고 중전이 말타기를 다 배우면은 짐이 사냥터 한번 데려 가께. 허니 궐에 돌아가 열심히

배우시구려."

"...... 월성궁 여인은 말을 잘 타지요, 마마?"

왕은 흠칫 하였다. 중전이 희란 누이의 일에 대하여 입에 담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돌아 본 작은 얼굴에는 투기심이 아니라 진실로 부러운 빛이 가득하였다.

"신첩이 말도 잘 타고 씩씩하게 화살도 날릴 줄 알았으면 전하 마음 다소간 들 수도 있었을

것을..... 떨어져 있는 그동안 곰곰이 많이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전하께서 이 몸을 멀리 

하셨을 적에 원망만 하였지요. 허나 신첩 역시 노력이 부족했습니다.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헤아려서 가려 배우고 익히었다면, 다소간 전하께 말도 잘 통하고요, 우세가 덜 하였을 것입니다.

저가 월성궁 여인에게 부럽고도 못 따라갈 일이 있었다면 바로 그 일이랍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애틋하였다. 거짓 하나 없는 진심. 진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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