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생각만 하라 하여라."
"망극하옵니다. 전하. 소인이 감히 어찌 지존마마의 속사정까정 알아 주제넘게 나설것입니까?
다만 쇤네는 웃전이신 중전마마께서 내리신 분부를 받자옵나니, 이를 가납하여 주옵소서."
윤상궁이 두 손으로 왕에게 비단 손수건을 바쳤다. 차마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왕은 물끄러미
윤상궁의 손에 있는 비단 수건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중전마마께서 다만 이것을 주시면서 한마디만 하였나이다. 이 마음이 내 마음이라.
알아주지 않는다 원망하신 대전마마의 마음은 그럼 어떤 것인지요 하셨나이다."
"이 마음이 내 마음이라. 짐의 마음은 그럼 어떠한가 물었다라....?"
왕은 사납게 윤상궁의 손에서 손수건을 빼앗듯이 낚아챘다. 비웃음이 한가득 선명한 입술에 물렸다.
"계집이 감히 먼저 사내에게 이별을 할 적에 손수건을 보낸다 하더니 미리 폐비될 줄 알고 이런 것을
보낸 모양이로구나. 같잖은 것이 할 만한 짓이다. 짐이 이를 가납하였으니 짐의 마음 또한 어떤 것인지
저도 짐작하겠지."
"어찌 펴보지도 않고 그 마음을 짐작하시는지요! 전하, 감히 쇤네가 죽기를 각오하고 한 말씀을
올리옵니다. 중전마마 마음 또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진대 어찌 그리 잘 안다 짐작하시어
노화만 내시나이까? 한번만, 단 한번만이라도 중전마마 뜻을 다르게 헤아려 주십시오.
역정을 멈추시고 중전마마 마음을 읽어주십시오. 수줍음을 무릅쓰고 이 수건을 굳이 내보내신
뜻을 보아주십시오."
"웃기는구먼. 허먼 네 말은 중전이 다른 뜻으로 이것을 보내었다 그 말이냐?"
"정표이옵니다. 손수 마르고 수를 놓아 만드신 정성이옵니다. 신이 이 수건의 내력을 잘 알고 있음이라.
작년 전하의 생신 날 중전마마께서 선사하고자 직접 만드신 것입니다. 차마 올리지 못하고 패물함 깊이
간직하신 것입니다.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왕이 고개를 휙 돌렸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듯 눈빛이 문득 흔들렸다.
기대 반 역정 반. 혹은 면구함 반이었다. 재우쳐 묻는 목소리가 성급하였다.
" 참이냐? 너가 중전의 사주를 받고 짐을 기만하려 함이 아니냐?"
"부대 펼쳐보십시오. 중전마마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옥루가 떨어져 얼룩이 진 수건의 내력을 제발
올바르게 보아주시옵소서. 수줍어 차마 말씀하지 못하는 중전마마 깊은 마음을 제발 한번만 헤아려
주십시오."
"...... 짐승 이제 그 사람 아니 보련다. 막막하고 쓸쓸하니 아니 보련다. 이제 와서 그 마음을
보여주면 또 무엇 하겠느냐? 짐과 비는 부부지연을 맺어서는 아니 될 사람들이었다. 서로 괴로운 터로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 그것이 도리일 것이라. 짐은...... 이제 도무지......"
미련이 남아, 그래도 미련이 남아 수건을 펼쳐보았다. 그대의 손길이 닿은 이것을 간직하여도 될까?
짐에게 남은 마지막 정표이니, 그대를 그리워하듯이 이것이라도 간직하여도 될까?
그대 떠난 빈방에 누워 긴 밤을 지새워야 할 날이 수없이 많을지니....
왕의 시선이 문득 여러 겹의 문을 넘어 중전이 앉은 안방 쪽으로 향하였다.
짙은 물기 같은 것이 그의 눈 속에 가라앉았다. 이것이 그대의 마음인가? 진심인가?
너무 바라여 차마 믿지 못할 이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인가?
혜(慧)
정교한 수로 놓은 이름자 하나. 그의 휘(이름) 옆에 수줍게 자리한 혜(慧)라는 글자 한자.
평생 마마 옆에 선 지어미라. 이렇게 마마 함자 곁에 신첩의 어린 이름 하나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첩의 마음입니다. 잘라내고 잘라내도 남는 마음. 아프고 괴로워도, 사무치고
눈물이 나도 신첩은 마마의 안곁이옵니다.
갑자기 왕은 미친 듯이 그 문을 열어 제쳤다. 난폭하게 사납게.
어김없이 억지를 부리고 애먼 트집을 잡아 또 울려버린 어린 아내 곁으로 달려갔다.
사모하고 사모하여 도무지 어찌할 수 없을정도로 은애하고 좋아하는 그 사람 차마 사모하여
달라 떼를 쓰기도 면구하고 염치가 없지만 마냥 바라게 되는 아름다운 사람에게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참말 이것이 그대의 마음이라면, 궐에서 나가지 않게 할 것이야. 죽어도 놓지 않을 터인데
그래도 괜찮은 것이야? 응? 나중에도 아니놓을 것이야. 짐 때문에 또 괴로워하고 울어도
절대로 보내주지 않을 게야. 놓아 달라 아무리 애원하고 빌어도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거야!"
마지막 문을 열고 선 채 왕은 막무가내로 소리쳤다. 옆얼굴을 보인 중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다시는..... 짐을 싫다 하여도 그래도, 그래도 아니 놓을 것이니까, 이 밤에
짐이 그대를 보내주려고 하였는데, 그대의 소원이었잖어. 사가로 보내줄려고 하였는데
아니 간다 하는 건 그대이니까! 중전이 먼저 말한 것이야? 응? 짐이 강요한 것이 아니고
아니 간다 한 것은 그대이니까....."
"...... 아니 나갈 것입니다. 신첩의 자리는 .... 오직 한 곳. 마마의 곁이옵니다. 신첩이
죽는 날까정은 오직 소원이라, 마마의 옆이면 하옵니다."
왕은 털썩 왕비의 옆에 주저앉아 버렸다. 덥썩 손을 잡았다. 으스러져라 힘을 주었다.
바라보면 고운 사람이 꿈처럼 사라질까 두렵다. 틀림없이 잡혀있는 작은 손. 얼어붙어 도
무지 녹지 않던 심장을 천천히 풀리게 하는 봄날 햇살 같은 온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작으나 한없이 포근한 이 손을 놓고 어찌 살것이라고 짐은 감히 그대를 놓아준다 하였을까?
"....... 짐을...... 짐을...... 미워하여도 상관없다."
"어찌 하늘같은 지아비를 감히 미워할 수 있나이까?"
"원망하고 아니 보아준대도 짐은..... 할말이 없는 사람이니."
"원망하지 않나이다."
비로소 주저주저 왕의 시선이 중전의 옆얼굴로 다가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볾 전 그가 후려갈겼던
여린 볼을 망설이며, 두려워하는 손이 다가가 어루만졌다. 커다란 손이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놀라
흠칫하는 중전 앞에서 문득 왕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대는 짐을..... 두려워하는구나."
귀 기울여 듣는다 해도 알아들을 수 없을만큼 낮은 목소리. 그 속에 가득 담긴 후회와 회한.
죄스러움이 빗소리처럼 축축하였다.
"허기는, 짐이 그런 짓을 하였으니.... 그대가 이럴 만도 하지. 다 짐의 탓인데, 다 짐의 탓인데, 허기는....."
"신첩이 너무 경솔하였나이다. 감히 마마의 성총만을 믿고 하여서는 아니 될 일을 하였습니다.
마마의 면구하고 민망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탓이니 신첩도 더 이상 무어라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 잘하여 볼 것이다. 잘 하여 볼 것이야. 성군되려 노력할 것이니, 그러니까.... 짐을, 짐을....."
"....... 신첩은 언제나 마마를 믿나이다."
서경당 안방의 불이 꺼졌다. 장내관이 중문을 닫고 돌아서며 윤상궁을 향하여 눈을 끔뻑하였다.
"날도 좋을시고! 이런 날 회임이라도 하신다면 여한이 없을 것이네"
"누가 아니랍니까? 천신이 부대 도우시기를 바라옵니다."
"이제 생각허니 말이오. 대전마마께서 은근히 어지간히도 중전마마를 아끼시고 좋아하시는가보이."
"어진 심덕 이길 장사 없나이다. 일이 이리 되어야 순리이지요. 저는 교태전으로 돌아가
중전마마 방 소제나 다시 시켜야 할 것 같나이다. 주인이 비운 방이라 영 냉기가 도는 것이...
상선 영감도 돌아가시지요?"
"암만. 두 분만이 정해가 첩첩하고 그저 살뜰하여 함께 하심이라. 인기척이 나는 것을 싫어하실
것이네. 같이 돌아가세."
문득 잠이 깨었을 때 틀림없이 품 안에 담겨 있는 온기. 작은 새의 날개 짓 마냥 자그맣게
바스락거리며 돌아눕는 느낌이 전해지고 금새 또 편안한 듯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렸다.
무의식 중에 든든한 팔이 자신을 감싸고 있음을 느낀 듯 하였다. 향기로운 머리타래를 지아비
푸근한 가슴에 비비며 어린 아내는 가까이 더 가까이 파고들었다.
새벽의 냉기가 다소간 쌀쌀하였나 보다. 가슴에 닿는 중전의 몸은 서늘하였다. 차갑게 식은
느낌이 전해졌다. 왕은 한 손을 더듬어 손에 잡히는 대로 이불깃을 끌어당겼다. 하나로 얽힌
그들의 몸을 끌어 덮었다. 잠 속에서도 편안하고 따스한 포근함을 느낀 것일까?
희붐한 미명 속에서 중전의 연분홍 입술에 고운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잠결에 짓는 웃음이
너무 고와, 그의 품 안에서 울지 않고 이제는 미소 짓는 사람이 너무 감사하여 가슴에 어떤
응어리 같은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왕은 가만히 손을 내밀어 하얀 이마에 흩어진 아내의
구름 같은 수발을 낱낱이 헤아려 쓸어보았다. 서늘하고 영리한 이마에 살며시 입 맞추었다.
'진정 사모해. 그대를 사모해.'
사모하고 또 사모하여 이 마음을 잃어버릴 정도로 그대를 은애해. 짐의 마음과 그대의 마음이 같거니,
이제 짐은 여한이 없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대를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을 알기에 이제는 짐
역시 꿈속에서도 행복해.
수줍은 고백처럼 왕은 고니의 목처럼 유려한 선을 그리는 하얀 목에 혀를 내밀어 지분거려 보았다.
야들한 살갗에서는 꽃내도 아닌, 지분 내도 아닌 기이하고 청량한 향기가 서려 있었다.
오직 한 사람. 중전의 몸에서만 맡을 수 있는 아름답고 고운 체취. 그것의 비밀을 찾듯이
다시 한번 탐욕스럽게, 하얀 목덜미에 발간 꽃잎 같은 흔적이 새겨지도록 세차게 빨아보았다.
그래도 잠이 깨지 않는 무정한 사람이 미워 슬며시 이를 세웠다. 귀 아래 그늘이 진 보드라운 살을
가만히 물어버렸다. 이래도 잠이 아니 깰 것이야? 채근하듯이 채송화 꽃잎 같은 작은귀 볼을 잘근잘근 씹어보았다.
아직도 반쯤 졸음이 물린 눈이 반쯤 열렸다. 순간적으로 확 달아오르는낯빛.
이렇게 아름답고 수줍은 알몸으로 님의 품에 안겨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어찌할 바를 몰라 바둥거리는 작은 몸을
숨막히도록 끌어안았다.
밝아오는 시각도 아랑곳 없이, 무조건 사랑을 조르는 지아비 품 안에서 눈을 떴다.
밤늦다이 강건하고 지치지도 않는 지아비의 날가슴 아래 깔려 은어처럼 요동치며 흠뻑 젖어들었다.
삼경이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자꾸만 빨려 드는 졸음의 너울 안에서 다가오는 손길, 입술의 온기.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 올렸을 때 시선 바로 위에 짖궂으면서도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본능이었다.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삽시간에 인식하는 사내의 싱싱하고 사나운 욕정을
깨달은 후 민망하여 붉어지는 그 얼굴이 마치 술에 취한 해당화 같았다.
아, 흑......
짧게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가 토막토막 거친 숨소리와 얽혀 끊어졌다. 검은 눈동자 속에 입술을
질끈 깨물은 얼굴이 들어있다. 예고도 없이 밀려들어온 그를 한가득 받아들이고는 충격 같은
쾌락에 젖어 아뜩해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았다. 순간을 망실케 하고 이지를 혼미하게 만드는
육욕의 거친 파도 안에서 미약한 날갯짓으로 파닥거렸다.
뜨겁고도 민감한 입술이 새벽 빛 속에 오똑 솟은 젖꼭지를 물어가자 깨물린 분홍빛 입술 사이로
의미 모를 중얼거림이 다시 새어 나왔다.
" 시, 시각.... 이..... 아, 아.... 마, 마마... 제.... 제발."
"쉿! 이제 그만..... 듣지 않을 거야. 이젠 짐 마음대로 할 것이야!"
응석하듯이, 고집스럽게 숨차고 들뜬 목소리가 화답을 하였다. 싱상학 물결치는 사내의 딱딱한 몸 아래
보드라운 선을 그리는 여인의 곡선이 일그러졌다. 촉촉한 여인에게 파고든 사내의 근육이 수축하고
이완되며 조금씩 조금씩 여린 샘을 잠식하여 들어갔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꽃이 피고 물이 흘러내렸다.
깨어나려는 아침처럼 서로에게서 피어나는 생기를 호흡한다. 둘이 함께 거니는 무릉도원.
이제 어린 그녀도 지아비 품속에서 뜨거움을 느낄줄 안다. 마냥 파고들어 그녀를 움켜쥐고 약탈하는 이 일이
사실은 함께 나누는 소중한 쾌락이고 황홀함이고 끝간데 모를 아뜩한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함께 신음하고 움직이며 함께 얽히어 거침없이 높다란 고개를 넘어버렸다. 단숨에 하늘 끝까지 무지개를 타고
올라갔다. 길게 터지는 숨소리, 자그맣게 울려 퍼지는 나른한 교성. 그날의 아침은 어제도 그제도 그러했듯이
뜨겁고 달큰하게 시작되었다.
"이제 그만 기침하셔야지요?"
병풍 친 장지문 바깥으로 아랫것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두런두런 나기 시작하였다. 소곤거리는 귀여운 목청이
날가슴을 간질였다. 가녀린 입김이 따스하다. 아직도 남은 쾌락의 여진을 음미하며 땀이 밴 짬짤한 맛도
느껴지는 이마를 혀로 쓸었다. 늘 아름다운 몸을 안고 게으름 피고 싶은 마음도 몰라주고 자꾸만 나가라
재촉하는 중전이 야속하였다.
"알았으니 그만 채근하오. 시각 되면 어련히 일어날까?"
"조강 있으시다 하여 일찌감치 나가신다 하여놓고서요."
"허구한 날 하는 조강. 하루쯤 늦어진들 어떠할까? 쳇. 비는 꼭 이렇게 짐을 들들 볶더라?"
"마마께서 서온돌에 늦게 나서시어 하실 일을 아니하시면 저가 민망하여서 그러하지요."
"흥 괜스리 짐만을 핑계 대는구먼. 중전이 늦잠 잔 탓을 짐에게 뒤집어 씌우는 게야?"
새초롬하게 노려보는 눈망울에 웃음기가 배었다. 왕은 느른한 웃음소리를 내며 살며시 몸을
일으키려는 아내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짐을 버리고 어딜 가려고? 자그많고 고운 발.
평생 버선 안에 갇혀 있어 하얗고 귀여운 발목을 꼭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잠시 소리 없는 실랑이질이 벌어졌다.
요것, 어디 참을까 두고 보아라? 왕은 끝내 빠져나가려 앙탈하는 중전의 발바닥을 손가락으로
간질이기 시작했다. 간지럽다 키득이며 눈을 흘기며 작은 몸부림이었다. 짓궂으셔요.
노려보는 눈매가 봄바람처럼 온유하였다.
"딱 한 다경만 더."
"그리 하나 이리 하나 기침하시는 것은 똑같으시면서 뭐."
"그래도 어디 같은가? 자 이리 오소. 아니 오면 또 괴롭힐 것이야!"
짐짓 웃음을 물고 협박하였다. 손가락을 세워 또 간질이려 하였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이던 중전이 마지못한듯, 활짝 벌린 팔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두 입술이 다시 합쳐졌다.
달콤한 타액이 서로의 목으로 흘러내렸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이 행복하였다.
둘이 함께인 지금 마음이 하나로 맺어진 지금, 세상에 부러울 것 엇는 두 사람이었다.
"마마님. 방 소세......"
"쉿! 안즉 기침 아니하시었다. 두 분이 함께 다정하신듯 하니 조용히 하여라."
중전마마 단장차비를 마련하고 이제나 저제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던 박상궁
금침 개키는 일을 하는 나인 선이년더러 나지막한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말로는 순응하는듯 두 손을 모으고 한 옆으로 공손히 물러서는데 고개 숙인 눈매에 번쩍 교활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박상궁 바깥에 있는가?"
"예, 중전마마."
"대전께서 사랑채 건너가실 것이네. 소세차비 해드리게나. 자네는 곁방 들어와서 나의 의대 차비 하게>"
마침내 방안에서 하명이 떨어졌다. 내관이 열어드리는 문으로 여전히 자리옷 차림이신 상감마마께서
나서시었다. 안즉은 들어와 소세하여라 하명이 없으신 터라 감히 들어가지는 못하고 힐끔 곁눈질로
들여다본 안방, 얇은 속적삼 차림을 한 중전마마 금침으로 반만 옥체 가린 채 비스듬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망신인 줄도 모르는가? 점잖은 지존들께서 날이 훤하게 밝도록 사랑 놀음질에 세월 가는 줄
모르며 방탕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구나 선이년, 입을 삐죽였다.
그날 오후. 사가의 어미 보러 잠시 나간다 살그머니 궐을 나온 선이년. 휑하니 달려간 곳은 월성국이었다.
미주알 고주알 중전마마와 상감마마 그 정분 꼬아 바치니 희란마마 눈이 뒤집혀 새큰거리는 숨을
어깨 너머로 내쉬었다.
"참이더냐? 날마다 상감께서 중전 고년에게 승은을 주더란 말이냐?"
"예, 큰마마. 참으로 폐비할까 하며 서경당으로 내보내실 적에는 서슬 푸르러 당장에라도 내치실
것 같더니, 유야무야. 다시 교태전 돌아오신 이후 두 분이 참으로 한 쌍의 원앙이라 이리 합니다."
"흥, 같잖은 년. 갈 까마귀 주제에 아랫도리 그 맛으로 주상을 감히 미혹하려 한다 그 말이 아닌가?
콱 뒈져 버릴 일이지, 질기게도 버티고 앉아 내 팔자를 말아먹으려 드는고나.
흥 내 너를 가만히 둘 줄 알더냐? 지금에야 네년 천하라 이리하여 기고만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만 어디 두고 보아라. 내 너를 가만 두는가. 반드시 주상 성총 그 물길을 돌려 네 년을
수모 주고 목을 베고 말 것이다."
"내가 작정하고 망치려 드는데 어디 남아나는 정분 있을줄 알더냐? 두고 보아라."
이를 아드득 물었다. 중전이 있는 북쪽을 노려보는 눈빛에 퍼런 얼음가루가 펄펄 날렸다.
희란마마, 무엇인가를 바라는 선이년 앞에 비단 주머니를 휙 내던졌다. 은덩이가 든 주머니가
무거운 소리를 내며 선이년 치마폭 위에 떨어졌다. 누가 볼세라 빼앗아 갈세라 선이년 얼른
주머니를 채어 들었다.
"그 안에 부적이 들어있을 것이다. 대전마마 베개에 집어넣어라. 할 수 있겠느냐?"
"암만요 큰마마. 중궁전 금침 간수는 이년이 하는 일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오냐 허고 말이다. 앞으로도 하나도 빠짐없이 중궁전서 벌어지는 일을 나에게 고변하여야 한다. 재물은
섭섭지 않게 보답할 터이니 명심하여라."
"예, 마마. 아주 작은 것 하나도 남김없이 잘 살피어 아뢸 것입니다."
어찌하든 아주 작은 꼬투리라도 잡아 중전과 상감마마 새로 돋는 수줍은 정분 잘라내고 비틀어
버리겠다고 작심한 희란마마. 그 눈과귀가 된 선이년이 날 세운 대꼬챙이처럼 중궁전에 시퍼렇게
박혀있으니 이것 참으로 근심이로다. 이년의 모함과 구설이 훗날 커다란 환란이 될 것이다.
그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그저 신임하여 궐로 돌아온 선이년 앞에 앉혀 두고 어머님 병환이 어떠하냐
인자하게 묻자오시는 중전마마이시다.
<제2화> 백중날 달 놀이
언제나 조용하던 중궁전이 오랜만에 부산하였다. 들락날락 오가는 모든 궁녀들의 얼굴에 들뜬
기색과 웃음기를 감출 수가 없다.
그 날은 바로 백중(百中) 날이었다. 음력 7월 보름인 이 날은 백종(百種). 중원(中元),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한다. 이 무렵에 여러 가지 과실과 채소가 많이 나와 '백가지 곡식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