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마마, 소인 대령하였나이다."
중전마마 옆에서 금침 펴고 침수 준비를 하던 김상궁이 한무릎 다가앉았다.
중전마마는 오래도록 쓰던 봉서를 접었다.
그리고는 김상궁 앞에 밀어놓았다.
"내일 자네가 아무래도 궐 밖으로 좀 나갔다 와야 할 것이네."
"옥동으로 나가리이까?"
"그러하게. 4월 스무 날이 사가의 조모님 기일이라네. 팔자도 기박하여 또 나흘 후가
돌아가신 어머님의 기일이지... 말로만 딸이지 두 분 제사에 한번도 나가보지 못한터라.
이것이 어찌 딸년의 도리라 할 것인가? 허고 윤상궁, 자네는 교태전에 가서 화초장
두 번째 칸에 들어있는 패물함을 가지고 들어오시게."
"패물함을요?"
"그러하네. 그 화초장 안에는 물목도 있을 것이오. 이 중전이 대례 적에 예물로 받은 것에
대한 것이니 그것도 잊지 말고 챙겨 오시오."
항시 곁에 붙어있던 두 사람이 사라진 지금 홀로가 된 중전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자리옷
차임으로 창문을 열었다.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에 추적추적 내리는 밤비 소리가 유난
히도 처량하였다. 내 마음처럼 쓸쓸한 소리로구나.....
"마마, 인제는 주무시옵소서."
윤상궁이 돌아와 보자기에 싼 것을 받쳐드리었다. 김상궁이 채근하였다.
중전마마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하던 일이 있음이라, 마무리하고 금세 침수 할 것이니 그대들도 나가서 침수하오."
두 상궁이 절을 하고 물러나갔다. 그러나 금침 안에 들어가는 대신 중전은 패물함을 열었다.
침촉 하나만 킨 호젓한 방안에서 물목과 자개함 속의 패물을 짝 맞추어 점검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모두다 실상 내 것이 아닌 터로 다 내어놓고 가야지. 다짐하는 가슴이 아릿하게 아팠다.
'혼인할 적에 평생 백년해로 할 것이며 금슬 좋게 살자 하는 맹세로 이런 귀한 보물들을
받은 것인데.... 전하의 안곁으로 살아온 지난 내 세월이 이 패물 보아지기 부끄러울 정도로
밉상이었구나. 차라리 폐서인 되어 사가에 나가면은 집 바깥에 아니 나오고 살아도
지금보다 나을 것이다. 허울좋은 허수아비, 볼모신세라. 그나마 사친의 곁에서 인간답게는
살 것이니 나는 폐서인 되어도 괜찮다. 괜찮아. 괜찮아. 전하의 잘난 모습 더 이상 아니 보아도
다시는 뵙지 못하여도 나는 상관없다.'
천한 잉첩 치마 자락에 휘둘려 정궁을 박대하고, 매사 흡뜨이 노려보시는 것도 모자랐다.
오직 일편단심 순결한 마음을 능멸하고 오해하여 당신의 위엄을 해치는 일로 생각하는
지아비에 대하여 무엇이 희망이 있다고 이토록 갖은 수모 망극함을 견디며 살 것이더냐?
중전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첫날밤 나를 버리고 월성궁 가실 그때부텀 실상 나는 차라리 목을 매고 죽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것이 나의 솔직한 심사이니 나는 괜찮아. 궐서 나가면 아예 단념을 하고 살 참이니
이것이 나은 것이야.'
일일이 비점까지 찍어가면서 물목과 함 속의 패물을 맞추었다. 하나도 틀림이나 빠짐이 없다
확인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쓸쓸하고 처연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스며들다 만다.
햇수로 세 해로 교태전에 앉은 중궁마마로 살면서 패물함은 조금도 늘지도 줄지도 않았다.
말은 사직의 안지존이요 국모요 여인으로 최고라 하였으되 가난하기 이를 데 없음이니
중전마마, 문득 이마를 괴로 휴우- 한숨을 내쉰다.
지난 삼 년 동안의 세월을 돌이키니 그저 눈물과 한숨이 전부였다.
가슴에 멍이 든 것만이 남은 흔적이었다. 내가 차라리 심장도 감정도 없는 목석이라 할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커다란 눈에 다시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돌이켜 지난 세월을 헤아리니 그저 보람도 즐거움도 하나 없는 기막힌 세월이었구나.
이 못난 것이 얼떨결에 삼간택 올라 중궁전에 오른 일부터가 실상 어긋난 일,
일어나서는 아니 되는 잘못이었던 게야. 명문대가 뒷곁 당당하고 미색 뛰어나며
순후하고 인품 훌륭한 여인들 중 한 사람이 중궁전에 올랐어야 하였다.
그랬어야 전하께서도 지존의 위엄에 걸맞은 지어미 보신 것이며 사직의 안주인이라
당당한 사람을 앉혔다 칭송 받으셨을 것인데, 못나고 어리석은 내가 감히 중궁전
차고 앉아 삼 년이나 주인 노릇을 하였던 것이 오히려 주제넘은 것이었던 게야.'
문득 손길에 힘이 툭 떨어졌다. 자개함 가장 깊은 곳에 개켜져 있는 비단 수건을 꺼내
들면서였다. 용문이 정교하게 수놓아진 하얀 비단 손수건이다. 가례 올린 직후인데
처음 맞이한 왕의 생신 날에 선물로 장만하였던 손수건. 감히 드리지는 못하고
그저 깊이깊이 간직하였던 것이다.
여린 열다섯의 방심이 수줍었다. 멀리서 홀로 그리워하며 사모하였던 늠름한 지아비
모습을 생각하며 정성 어린 연정을 한 뜸 한 뜸 수놓았던 이것. 정표라 하여
귀퉁이에 자그맣게 중전마마 자신의 이름인 소혜의 혜를, 그리고 다른 귀퉁이엔
주상 전하의 자인 욱제라는 두 글자를 수놓았다.
보잘것은 없으나 간직하시면서 소첩을 조금이나마 생각하여 주십시오 하는 눈물겨운
정성. 그러나 차마 드리지도 못하였던 안타깝고 수줍은 그 마음.
중전은 손수건에 수놓아진 지아비 왕의 아름다운 이름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그 고귀한 이름. 이분을 차라리 아니 만났다면 이 몸의
이 심란한 고통은 없었을 것인데. 전하께서는 내가 전하를 깊이 사모하였다는 것은
평생 모르시겠지. 혼인한 이래로 단 한번도 다정하거나 따뜻하지도 않았고
백년해로할 지어미로 대접해주지도 않았던 무정한 그 님.
그러나 나는 사모하였도다. 중전은 자신도 모르게 그 손수건을 자신의 보드라운
뺨에 갖다 댔다.
'평생 전하께서는 이 몸의 그 마음 따위는 바라지도 않으실 것이다. 못나고 매사
못마땅한 터이니 그저 내가 눈밖에 없어져 주었으면 싶으실 것이야. 전하께 내가
드릴 수 있는 정성이란 이 날서 깨끗이 폐서인 당하여 물러남이다.
내일서 먼저 전하를 알현하여 폐서인 시켜 달라 먼저 주청 할 것이야.'
왕이 기별도 없이 불쑥 서경당을 찾아 들어온 것은 파루가 막 자정을 알리는
야심한 그때였다.
텅 빈 교태전으로 자기도 모르게 발길을 옮기었다. 아차차, 비는 지금 서경당에
계시지. 면구하고 헛웃음이 났다. 괜히 비 오는 밤에 산보를 하신다고 장내관만
딸리고 어둔 후원을 빙빙 돌았다. 늙은 생강이 그냥 매운 것은 아니다.
장내관이 주상의 안타깝고 속상하고 답답한 그 눈치를 못 채면 능구렁이가 아니지.
"그만 서경당으로 듭시지요."
"누, 누가 게로 간다더냐? 이런 고얀 놈을 보았나? 짐은 그깐 것은 다시 아니 본다
하였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냅다 고함부터 질렀다. 말씀은 그리 하면서 왜 고즈넉하게
불이 켜진 서경당 쪽만 바라보고 계시느냔 말이다. 무엄함을 무릅쓰고 장내관이
상감마마 도포자락을 질질 끌었다.
"궐까정 걸어가실 참이면 비에 용체 젖으시어 고뿔드시리라. 마른 의대 갈으시고
하룻밤 서경당에서 침수하십시오. 사랑채이니 중전마마를 아니 보이어도 되옵니다."
"그, 그럴까? 허, 허지만 짐이 간다 말하지도 말아라! 그것이 짐이 저를 용서한
줄 알고 마냥 기고만장할 게다. 흠."
발길에는 신이 났으면서도 끝까징 억지로 끌려 들어가시는 척 하였다.
그렇게 봄비 오는 밤에 왕은 장내관에 밀려 서경당으로 들었다.
마른 의대로 갈아입으시고 보료 앞에 앉았는데, 짐짓 장내관은 모르는 척 금침 내립니다 하였다.
"음음음, 벌써 침수하더냐?"
"누가요? 아, 중전마마 말씀이옵니까?"
"예에 또 누가 있다고?"
말귀도 못알아듣는 멍청한 놈이로고! 왕이 눈을 부라리며 장내관이 앉은 쪽으로
놓여있는 서안을 발길로 걷어찼다.
"불이 켜져 있나이다."
"지금이 대체 몇 경이냔 말이다. 지금까정 침수도 아니 하고 대체 무엇을 한다던가?
허고 아무리 짐이 조용히 들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인기척이 있는데 한번은 나와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 그렇습지요."
"여하튼 무정하고 쌀쌀맞은 이로다. 대체 청승맞게 이 시간까정 무엇을 하는지
짐이 한번 볼 것이다. 문을 열어라!"
서경당은 겉으로 보면 담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구분되어있고 가로막힌 듯 하나
사실은 사랑채에서 안방까정 일직선으로 문만 열면 바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다.
장내관이 속으로 실죽 웃는 것도 모르고 상감마마, 근 보름만에 보는 어린 지어미가
그저 그립다. 늘 보고싶고 궁금하여 성급하게 제 손으로 먼저 문을 열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애써 외면하여 노력하였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본다 내치리라
매 시간마다 결심하여 보지만 자꾸만 그립고 가까이 하고 싶은 애틋한 마음을
그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안방에 가까워질수록
더욱더 두근대는 심장. 둥둥 북을 울리는 것 같이 세차게 뛰노는 마음이 마지막
문고리를 잡은 손에 전율로 흘렀다.
방문을 열었다. 자리옷 차림의 중전이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모든 것을 다 단념한 얼굴로 패물함을 챙기고 있는 모습.
순간적으로 왕은 공포에 질리고 만다. 중전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을 칠 것이다 하는 직감.
평생 자신은 이 여자에게서 사랑 받지 못할 것이다 하는 절망감. 심장이 덜컥 하고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터지는 것이 또 애맨 억지였다.
"한밤에 쓸 데 없이 패물함을 왜 내려놓고 난리이냐? 흥, 쫓겨나기 전에 미리 보따리 싸가지고
달아날 궁리인가?"
소스라치게 놀란 중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저 멍하니 왕을 바라보다 달달 떨리는
목청으로 변명을 하였다.
"저, 전하, 망극하옵니다! 신첩이 감히 어찌 그런 뜻이겠나이까? 신첩은 그저,"
"닥쳐라! 보자하면은 모를 일이더냐? 야반도주라, 이 꼴 보아하니 네 속을 알만 하다!"
벌써 이마에 퍼렇게 핏대가 섰다. 주먹을 움켜쥐고 왕은 성큼성큼 그녀 곁에 다가와
이까짓것! 하고 중전의 손에서 패물함을 잡아채 엎어 버렸다.
"이토록 매사 하는 짓이 어리석고 간교하니 짐이 무엇이 곱다 할 것이냐? 나갈 참이면
다 빼어놓고 나가라!! 짐이 준 것을 장히 싫다 하니 다 내어놓고 나가란 이 말이다!!"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왕은 그 패물함을 발로 걷어 차버리었다. 심지어 그녀가
찌르고 있던 비녀까지 잡아채 내팽개쳤다. 입귀가 절로 비틀어지고 눈에 불이 시퍼렇게
튀었다. 그의 노염이 너무 장하니 두려운 나머지 왕비는 바들바들 떨면서 한마디도 못하고
그저 멍청하게 앉아있을 뿐이다.
"같잖고 멍청한 것이 이토록 하는 짓이라 싹수가 없으니 짐이 무에가 곱다 할 것이냐?
그래, 꼴에 염치는 있다 할 것이야? 못난 제 주제를 알아서 이리 먼저 궐 밖으로 나가준다
하니 그것은 짐이 흡족하구나! 네 마음대로 하여라 네깟 것이 있든 없든 짐은 아모 상관도
없느니라! 왜 가락지는 아니 빼는 것이냐? 짐의 어마마마가 주신 것이라. 내놓고 가라.
짐이 준 것은 다 내놓아라. 다 내놓으란 말이다! 짐 마음도 모르면서! 짐의 마음은 하나도
모르면서!! 너깐 것은 필요 없다! 짐도 너깐 것은 아니 사모하리라! 죽어도 아니 찾을게다!"
격하고 울컥하였다. 흥분하여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왕이다.
심지어 그녀의 여린 손가락에 끼워진 황금가락지까정 모다 빼어 바닥에 내팽개치고 발로
짓밟은 행패를 부리고서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것으로도 분심이 아니 풀린 터라
심지어 문기둥까지 다시 한번 발로 걷어차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고래고래 고함질치고 호령한 후에 방을 나서는 뒷모습은 너무도 쓸쓸하고
외로운 것이었다. 마치 어미에게 버림받은 어린아이처럼......
그저 석상처럼 앉아서 왕이 하는 패악질을 감당하고 있던 어린 왕비의 눈에 그 쓸쓸한
모습이 박히고 말았다. 주르르 흐르는 눈물. 중전은 툭 고개를 떨구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저만치 데구르르 굴러간 옥가락지를 다시 주웠다.
그녀에게 귀한 것은 용잠도 아닌 보배 떨잠도 아닌 옥가락지 하나.
둘이 몰래 솔포 안에 숨어 나눈 수줍은 입맞춤.
그리고 왕이 끼워준 가락지 빛은 왜 그리도 곱든지. 치맛자락에 놓인 비단손수건 위로
똑똑똑 맑은 눈물이 흘러 얼룩을 만들었다.
'마마의 마음을 모른다고 신첩을 능멸하였는지요? 허면은 마마께서는 신첩의 마음을
보신 적이 있을까요? 한번이라도 신첩의 마음을 진정 보아주신 적이 있을까요?
이 옥가락지 받으며 천하를 얻은 듯 행복하고 떨리었던 신첩의 마음을 진정 보아주신 적
있으신가요? 그때의 마음이 몰라준다 호령하신 것이 그대의 진심이라면 나는 대체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요?'
"...... 윤상궁, 게 있는가?"
"예, 중전마마."
"대전께서는 나가셨는가?"
"아니옵니다. 사랑채에 계시나이다"
중전의 손아귀에 힘이 지그시 주어졌다. 소매들어 흐르는 눈물을 닦아버렸다.
"들어오게."
"예, 중전마마."
중전은 윤상궁 앞에 지금껏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내밀었다.
눈물 젖어 얼룩진 마음을 건넸다.
"대전께 가져다 드리게. 이 마음이 내 마음이라. 대전마마의 진심은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구먼."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허공을 향하여 사납게 부릅뜬 눈빛만이
형형하였다. 네깐것 따위는, 네깐것 따위는! 차마 새어나오지 못하는 고함소리.
왕은 한 손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이를 악물었다. 폐비? 시켜주지, 암 시켜주고 말고!
'그게 소원이라면, 폐비하여 주마. 나가거라, 그래. 나가 죽어버리거라. 다시는 짐의
눈앞에 뜨이지 말고. 다시는 짐 같이 불측한 사내 눈에 뜨이지 말고...'
아니 본다. 다시는 아니 본다.
너 따위는, 절대로 짐을 바라보지 않는 너같은 계집은.... 다시는 아니 본다.
죽어도 아니 볼게다. 죽어도 다시는 너를..... 그리워 하지 않을 게다.
몰래 사모하여 그리워하고 못내 잊지 못하여 아파하는 일 같은 것은 아니할 게다.
버림받기 전에 먼저 짐이 너를 버리련다. 짐이 먼저이니라. 짐이 너를 버린 것이야.
네가 아니라 짐이 먼저이니라. 짐이 너를 버린 것이다.
"전하."
조심스런 장내관의 목청이 바깥에서 들려왔다. 왕은 용안을 가로막은 손을 내렸다.
메마른 눈 속에는 이미 빛이 꺼져 있었다 얼음이 부서지듯이 쌀쌀맞게 대답하였다.
"무엇이냐?"
"윤상궁이 중전마마 분부 받자와 말씀을 아뢴다 하옵니다."
"더이상 그이에게서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느니라. 물러가라 하라."
"하, 하오나......"
"듣기 싫대도! 허고 날이 밝으면 교서를 내릴 것이니 승지를 들라 전하여라."
이 마음이 다시 흔들리기 전에, 그대를 놓아주겠어. 왕은 쓸쓸하게 웃었다.
더 시각을 끌면 또 약한 짐의 마음이 흔들릴 테지. 아무리 바라도 얻을 수 없는
그대의 마음을 소망하여 곁에서만 빙빙 돌며 그대를 괴롭히는 짐의 못남을 이제는
그대도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을테지. 폐비하여 줄 것이니 짐을 떠나.
다시는 그대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니, 가난하게 바라여 그대를 상처 내는 못난 이 사람을
그대도 버려. 짐은 어차피 혼자인 것을, 천하에서 홀로인 것을.....
왕의 입꼬리에 메마른 미소 한줄기가 산산이 흩어졌다. 쓰디쓴 자조의 미소였다.
짐의 팔자에 무슨 복이 있다고 그대 같이 어질고 고운 泳汰?욕심내게 되었을까?
차라리, 욕심 많고 기승스러운 터이나 짐이 주면 그저 좋다 하는 희란 누이 치마폭에 휩싸여
세월아 네월아 하고 살아가는 혼몽한 군주였으면.....
'그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는데... 감히 그대를 욕심 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황의 입가에 아프디 아픈 자조의 미소가 뚝뚝 흘렀다. 이토록 못나고 어리석은 짐이 감히
무슨 마음으로 곱다운 그대의 진실한 사모지정을 바라였을까? 무슨 염치로, 무슨 자격으로.
"장내관 있느냐?"
"예, 전하."
"교자 대령하여라. 짐은 우원전으로 돌아가련다."
훌쩍 일어나 문을 나서던 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바깥에 알현을 허락지 않았던 윤상궁이 무릎을
꿇고 고집스럽게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냐? 저 방의 사람 변명따윈 아니 듣는다 하였거늘. 말하지 않으면 제 마음을 모른다더냐?
이미 짐이 짐작하고도 남음이라. 날이 밝으면 소원대로 폐비하여 줄 것이니 걱정말고 사가로 나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