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200)

선이 년이 받아와 뿌리고 있는 이가루는 명국서 들어온 화약이었다.뉘든 들어와 불씨만 당기면 확 하고 타오를 물건이다.

저는 그저 한발 물러나 있으면 되는 것이다.밤이면은 당연히 궐 곳곳에 불을 밝힐 것이니 아무것도 모르고 그방에 등불을 

붙이는 다른 무수리 년이 홈빡 뒤집어쓸 계교였다.

선이 년 재빨리 보란듯이 요 껍질 벗기어서 방을 빠져나갔다.금침 세답거리 이고서 천역덕스럽게 우물가로 방뎅이 흔들며

걸어간다.아무도 이년 고약한 행적을 본 바도,짐작한 바도 없으니 중전마마 안위가 진정 근심이로구나.

대궐 안에 오붓한 밤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수리가 이방 저방 돌아다니며 불을 켜기 시작하였다.회임하신 후에 중전마마는 도통 어두운 것이 싫다 하

였다.그저 환한 것이 좋다 하시니 밤에 침수하실 적에도 불을 끄지 않는 터다.그래서 교태전 모다 환하게 불을 밝히는 중이다

선이 년이 화약가루 뿌려놓은 방에 무수리가 들어갔다.어둔 방바닥에 무엇이 뿌려진 줄도 모르고 불씨를 당기었다.갑자기 확~

하고 불꽃이 튀어 소스라친 무수리가 그만 엉덩방아를 ?었다.바닥에 떨어진 촛불이 화약에 닿아 투다다닥 불꽃이 터져 삽시

간에 솟구쳤다.당황한 무수리가 어쩔줄을 몰라 하는데 얼떨결에 옷자락에 불이 붙었다.으아악!비명을 지르며 불붙은 치맛자락

을 마구마구 털었다.몸부림을 치며 뛰쳐나오나 이미 화마에 먹히었다.겁나게 시작된 불길은 이내 방문을 넘어 서온돌 침전을

먹어 들어가며 처마 위로 넘실거리는 중이었다.

"불이다,불!불이야ㅡㅡ!"

"교태전에 불이났소ㅡ!"

중궁의 하늘 위로 벌써 화광이 치솟고 벌건 불길이 넘실거린다.편전에 앉아 그날 돌아오기 시작한 암행어사들을 알현하사

교변을 듣자오시던 왕이 바깥의 소란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것이 무슨 소란이냐?왜 이리 시끄러운고?"

"전,전하!큰일이 났습니다!교태전에 불이났습니다요!"

내관이 아뢰어 소리치는 말에 갑자기 가타부타 말씀도 없으시다.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듯이 뛰쳐나가시었다.

체면이고 체통이고 안중에 없다.혹여 회임한 중전마마 옥체에 변란이 있을까 오직 그것 하나 근심함이었다.

'제발 무사하오,중전!고이고이 피하시오.제발.'

궐 곳곳에서 달려온 무장들이며 궁녀내관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불을 끄고 있었다.급한 김에 전각마다 마련된 드므의 물까지

퍼부어 불길을 잡았다.숨을 헐떡이며 달려들어 온 왕은 불길 잡느냐하는것에는 관심도 없다.

오직 중전마마 안위만을 묻자오신다.

"중전은 무사하시느냐?지금 중전은 어디 계시느냐?"

"전하,진정하시옵소서.윤 상궁이 부액하고 박 상궁이 업어서 부용정으로 피신하시었습니다.옥체에는 아모 탈도 없으니 근심

마옵소서."

"불이 대체 어찌 난 것이냐?어찌 이리 궐안 방비가 허술한 것이냐?"

중전이 무사하다 하니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상감마마,훤한 이마에 퍼런 심술 세우고 책임을 묻자하며 호령하시었다.

중궁의 아랫것들과 내외금위 무사들이 쩔쩔 맸다.중궁의 서 내관이 찬찬히 지금까지 살펴낸 전마을 고변하였다.

"중궁전 무수리가 불을켜다가 아마 실수로 촛불을 놓친 듯합니다.금침 두는 방 안이라 불길이 삽시간이 솟구쳐 이내 번져 간

듯 하옵니다. 그 아아는 치마에 불이 붙어 화상이 심하니 죽을 둥 살둥이라.전의가 업고 갔습니다만 살기가 힘들것이다이리

합니다."

"어찌 그토록 조심성이 없을꼬?쯧쯧.회임하신 터에 무척 예민하신 중전 생각을 그리도 못하는가?짐이 부용정 갈 것이다.오늘

서는 교태전에 못 계실것이니 우전전 침전에 자리 마련하여라.게서 며칠 계시게  할 것이다."

주상전하 그렇게 마무리하고 돌아서시되 흠칫 등골이 써늘하였다.중전께서 무사하시니 다행이다.불이야 날수 있고 무수리 실

수가 너무 명백하니 무어라 더 이상은 캐지 못하였다.하지만 자꾸만 불길하고 심상찮은 이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연의 일치다.짐이 알기로도 궐 안에서 화재가 난것이 여러번이 아니냐.무수리의 실수라 하지 않는가.단순한 사고인 게야.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놀란 마음을 진정하려 하되,쉬이 편안해지지 않는 이심사는 대체 왜 이런가?

왕은 설깃 고개를 돌렸다.재성이 있는 남쪽이다.한동안 남쪽 허공을 응시하는 왕의 눈빛이 더없이 싸늘하였다.

회임하신 연후에 졸음이 많아진 중전마마.주무시던 참에 불이났다한다.곁에서 시중들던 박 상궁 등에 업혀 부용정으로 피신

하시었다.놀란 가슴 진정하시어 죄정하신 이후에 비로소 윤 상궁이 무수리 아이 실수로 불이 났다 아뢰었다.

"바로 마마 침수하시던 곁방이니 금침 놓아두는 방 말입니다요.정화가 부싯깃을 치다가 아마 그 불똥이 솜을 튄 듯합니다.

게는 불을 켜지 말라 할것을 잘못하였습니다.마마께서 요 근래 어두운 것을 싫어하시어 곳곳 모다 불을 밝힌 거인데 이런 

사고가 난 것이라.사람들이 빨리 대처를 하여서 이 정도로 잡힌것이 천만다행입니다.주상전하께서 대경실색하셨을 것입니다"

죄라 하면 오직 하나.부싯깃 한번 잘못 친 그 무수리.이미 궐 바깥으로 옮겨진 터였다.궐에서는 왕실 가족 이외에는 병이나

서도,죽어서도 아니된다 하는 법도 때문이었다.화상이 깊어 소생 가능성이 없는지라 전의가 그 당장에 사가로 내보내시오  

하였다.불에 타 일그러지고 흉칙한 몰골,혼절한 채로 장옷에 돌돌 말려 외가마 태워 사잇문으로 불쌍하게 내보내진다.

죄을 물을 것도 없이 그 이튿날로 숨을 거두었다.선이 년이 부린 야료에 불쌍한 무수리만이 전부 뒤집어 쓴것이다.

중전마마 다음날 아침에 그소식 전하여 들으셨다.말릴 사이도 없이 커단 눈에 눈물이 글썽하였다.비단치마 자락에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정화 인생이 참으로 불쌍타!장례라도 잘 치러주어야지.김 상궁 자네가 그 아이 사가로 한번 다녀오시오.한번 실수로 죽음에

이르니,팔자가 그리 기박하구려.뉘가 불을 내고 싶었을까?그방이 허드레 물건 간수하는 곳이라 종이며 금침이며 탈 것이 많

아 항시 조심하라 하였거늘."

아름답고나,국모의 어진 덕이여.중전마마 손수 천한 무수리를 위해 백미  몇 섬과 수의감 포목.장례비조로 은전을 하사하시

었다.김 상궁을 사가로 내려 보내 문상을 하시니 그부모,흙바닥에 엎드려 중전마마!하고 감격의 울음을 터뜨렸다.

낮은 데를 가려 보살피시고 인정을 베푸시니 인덕은 저절로 따라온다.

하늘도 감동하실 것이니 어찌 중전마마께서 천복을 받지 않으랴"

하지만 애꿎은 생목숨 하나 말짱하게 해친 희란마님.지금 분함에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머리카락을 아드득 쥐어뜯고

있다.불이야 저들 꿍심대로 잘났지만 목적이었던 중전 년  머리털 하나 상하지 못하였다니.이런 빌어먹을 일이 있나!

희란마마 애타고 분하여 찬물만 연신 들이킨다.악한 심화가 도무지 꺼지지 않으니 어찌하리오.

실로 고년 복이 천복이다!이사이로 시퍼렇게 내뱉는데 앞에 앉은 교인당도,거복이 놈도 굴먹은 벙어리였다.

"하늘이 주신 복은 당할 자가 없다 하더니,참말 중전 고년은 천복을 타고난 년이다.응?아이고,분하여 못살것이다!생살을 씹

어 먹어도 시원찮은 터, 죽일 년."

빠각빠각 이를 가는 희란마님.

이판사판 막가자는 뜻이다.어찌하랴,중전마마께 반드시 위해를 끼치고야 말겠다 결심,대결심인데......

아아,상감마마,차라리 그전에 이 악인의 목을 베고 끝내셨어야지요.어찌하여 살려두어 이날의 화를 자초하신답니까?쯧쯧쯧.

오호통재라. 중전마마에게 닥친 마지막 위기로구나.모다 숨죽이고 다음 대목으로 넘어가오.

 =====제11장  국면 전환========

문밖은 한창 좋은 시절.

춘삼월 지나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고 다시 흘러 사월 초파일 행사에다 청명 곡우 지나니 오월이로다.

단오절 잘 지내고 망종이라.모시옷도 준비하소.삽상한 여름치레 시작하여야 할때다.

붉고 하얀 모란꽃이 금원에 가득 피었다.스치는 바람에 얄보드레하고 난만한 꽃잎을 뚝뚝 떨어뜨렸다.그아래로 철 늦은 

창포가 칼같이 꼿꼿이 서서 보라 꽃잎을 펼치었다.

금원 서경당.

"그리하여 자왈,매사 조심하여 사물을 바라보며 깊이 판단하여 헤아릴 것이면 이가 바로 군자의 덕이라,하였나이다 오늘은

이만 하옵지요,마마."

주렴을 친 아랫목,보료에 앉으신 중전마마,열심히 공부중이다.한 칸 떨어진 윗방에 서안을 펴놓고 강학을 하던 대제락

심우정이 책장을 덮었다.연해 소반놓고 기다리던 윤 상궁이 두분에게 차를 올렸다.

"남도서 말차 단지가 진상된 고로 이 중전이 직접 화로에 올려 놓고 볶았답니다.향기가 그만하니 드셔보시지요.어제 전하

께도 올려드렸더니 향기가 무척 좋다 기뻐하셨답니다."

비단실보다 더 가늘게 잣아 지은 모시 치마에 저고리.금박무늬로 봉황 아로새겨진 모시 당의로 성장한 중전마마,옥구슬

구르듯이 낭랑하고 보드라운 목청으로 스승께 차를 권하였다.

수태하신 지 어인 여덟 달이 되어가니 만삭이다.아랫배가 둥실하니 만월 처럼 부풀어 오르시고 몸도 많이 나셨다.

허나 고운 옥안에 기미 하나 없고 옥잠화 모양 단아하고 고와지시기만 하니 어인 조화일까?오뉴월 복중에 잉태하여 몸이 

무거움이라.은근히 힘이 드신것도 같지만 정좌하여 책을 펼친 자세는 하나 흔들림이 없었다.

후원 깊숙한 서경당에다 출산을 대비한 산실을 정하였다.상감마마 세자시절,종종 거처하셨고 생모 희빈마마와 선대왕께서

찾아오시어 쓰다듬어 주셨던 곳이니 주상 당신의 마음의 고향이다.

행복한추억이 어린 이곳에서 우리 아기씨를 출산하오 하명하시었다.

주상께서 직접 산실로 정하여진 안방에 용사비등 하는 어필로 편액을 하사하셨다. 정심각. 바른 마음으로 바르게 태교하여 

훌륭한 원자를 생산하오 기원이 담긴 이름이었다.하여 중전은 산실청을 차린 지난달 말에 거처를 옮기시었다.

중전마마께서 만삭이 되어가니 도제조와 권초관을 임명하고 산실청을 차리었다.홍준을 비롯한 내의원 3제조가 동시에 돌려

번을 선다.어의,내의,침의,의약동참 하여 스무 명이 넘는 산실청 관리들이 대기하였고 경험 많은 궁궐의 조산부들과 의녀

들이 배속되어 중전마마의 출산을 대비하였다.

더 반갑고 든든한 것은 사친인 김익현이 서경당 사랑채에 숙직하면서 중전마마를 지키는 일이었다.유모가 따라 들어와 중전

마마를 보살피고 있고 게다가 창빈마마께서도 입궐하시어 시중을 들고 계신 것이 제일 반가운 일이었다.

"신첩에게는 사가의어미가 없습니다.출산하고 조리하여 주실분이 계셔야 하는데 신첩께 창빈마마를 보내주십시오.우리 아이

도 창빈마마께 훈육을 부탁하렵니다.전하를 이토록 바르고 활달하게 훈육하신 분이라.그 얼마나 반듯하고 어진분입니까?"

출산 후 몸조리를 핑계 대며 중전은 상감마마께 정업원의 창빈마마를 다시 입궐케 하여 달라고 간청하였다.항시 그 마음의

못인 그분과 주상을 화해시키고 싶었다.마음은 있되 서로가 단호한 자존심이라.여전히 뻣뻣한 상감마마.은애하는 중전께서

아기씨출산 후 몸조리를 부탁하겠다는 데야 어쩔수 없다.

억지가 반이었던 고집을 꺾고야 말았다.직접 어가를 타고 나가 창빈마마께 솔직하고 곡진하게 사과하였다.

공손하게 부탁드리었다.

"비가 생모를 어린 날 잃었기로 어미의 정을 모릅니다.인제아기씨를 출산하자 하나 매사 두렵고 불안한가 봅니다.하여 창빈

어마마마를 곁에 두고 가르침받고 의지하고자 하니 허락하십시오.짐의 허물은 덮어두시고 어진 곤전의 덕만 생각하시사.

그이를 도와주십시오.부탁드리옵니다."

"주상전하의 지난날 허물이야 영명한 성총 밝히시사 성군되신 그 덕으로 벌써 잊었나이다.중전마마께서 귀한 아기씨 회임

하사 직접 부탁하시는 데야 어찌 이 어미가 거절하리이까?주상 닮으신 씩씩한 원자를 낳으시지 못하면은 이 어미가 중전마마

호되게 다스리리라."

그날로 창빈마마는 다시 입궐하시었다.왕대비전하,잘되었다 옥루까지 보이시며 치하하시고,밝은 도리 찾으시사 인의효덕 바로

잡으셨다 선비들이 칭찬한다.이 모든것은 바로 조용히 주상전하 허물을 가려 덮는 중전마마 내전의 덕이 아닐 것인가?

조용하고 정결한 곳에서 거처하시면서 밤낮으로 태교에 힘쓰시구나.워낙에 심성이 어질고 밝은 데다가 좋은 공부에 고운 말씀

만 하시고 옳은 생각 하시며,바른 글만 읽으시니 환하고 아릿다운 덕성이 어찌 더 빛이나지 않으랴?

중전마마,찻잔을 놓고 대제학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듣자오니 스승께옵서 둘째 따님을 년 전에 출가시키었다 하더니다."

"어찌 하찮은 미신의 딸년 일까정 알고  계시는지요? 말씀은 맞사옵니다만은...제 딸년을 어찌 보시었나이까?"

대제학 심우정이 놀라 부복하였다.중전마마 옥안에 그리움이 어렸다.

"그 동무는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으되 간택 때 이중전과 함께 말을 튼 사이입니다.동무가 활달하고시원시원하며 심덕이 아름

다워 두고두고 교우하자 약조하였는데...운명이 갈려 이중전은 궐안에 남고 동무는 출궁하시었지요.언제고 한번 동무를 다시

뵙고 싶습니다.기별하여 주십시오."

"전하겠습니다.참으로 딸년이광영이옵니다.홍산 최씨 가문 종부가 되었사온데 미거하고 어리석어 아비 망신만 시키는줄 아옵

니다."

대제학이 나가고 김 상궁이 들어왔다.대청으로 심부름을 보낸 터다. 중전마마 고개를 돌렸다.

"대전에 나간 일을 알아보았는가?"

"예,마마.대전의 진노가 크시니 용마루가  날아갈 지경이라 합니다."

"....백성의 고혈을 빠는 탐관오리들의 실정을 들으신 것이니 어찌 심기가 편안하시랴.자네는 대청 다시 나가서 소상히 동정

을 잘 살피고,퇴청하시는 호조좌랑 한번 ?자 이르시게."

"분부받자옵니다."

바깥의 그늘에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인데 편전의 공기는 차고 엄하다.죄우로 벌려앉은 중신들,두렵고 떨리어서

고두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지난 가을 전하께서 내보내신 어사들이 속속들이 돌아오기 시작하였다.주저리주저리 지방 관속들의 실체를 명확하게고발하

였다.이제 상감께서는 항시 괜찮사옵니다,그저 잘되고 있나이다 말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 확실하게알게 되시었다.

사리사욕에 눈이 먼 간신배들이 성총 가리우고,인의 장막을 친후,전횡하여 벼슬자리 팔아먹고 백성고혈 쥐어짜는 일들이

모다 밝혀진 참이니 어찌할 것이더냐?

용상에 앉으신 전하.영라도 땅에서 돌아온 암행어사 이규광의 고변을 받자옵고 계시다.구구절절 아뢰는 말에 한숨뿐이다.

생각하였던 것보다 죽도에 근거지를 둔 해적의 침입에서 발생한 피해는 더 막심하였다.탐관오리들의 탐학은 더없이 기가 

막히었다.당신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백성들이 더없이 고생을 하고 궁핍하게 살고있음이랴.선대 장조대왕께서 이십여

년을 고심하여 이룩해 놓은 부국의 기초가 뿌리서부터 흔들리고 있다함을 알게 되었으니 이를 어쩌랴?

"인간들이 보자보자 하니 하는 짓거리가 더없이 고약하도다.짐을 기만하고 속여먹기 이토록 무엄하다니!영라도 땅 육십여

부중에서 관속들이 염직하니 일을 잘하고 윤택한 곳은 반도 아니된다 함은 무슨 뜻인가?백성 고혈 짜서 제놈들 배불리고

왕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 아니냐?백성들은 고생하며 모다 짐만을 원망하였을 것이니 어찌 잠자리가 편안하였을 것인가?"

이 모든일은 바로 잉첩에게 홀리어 허수아비 노릇을 하였던 어리석은 왕 자신의 실덕 때문이다 싶었다.

어찌 주상의 마음이 편안하시랴?벌써 미간에 격한 심줄을 퍼렇게 서 있었다.

도무지 진정할 수조차 없을 만치 노엽고 기분이 나쁘다.격하고 열불나는 심사로 따지자면 뉘든 눈앞에 있는것들 죄다 당장에 

박살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용상에 앉아 발을 구르며 길길이 중신들을 향해 삿대질을 하시었다.

"눈들이 있달지면 보라!예에 앉아서 그저 좋나이다 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인 줄 알았더냐?참으로 한심하다!도무지

믿고 일을 맡길 이가 없어!눈이 있으면 보고,입이 있으면 말을 해보라!언제고 애먼 중전의 누명 들추어 폐서인하여 죄를 

주라고는 떼지어 들고일어나기 잘하더니 말야.어째서 이런일에는 전부 입 봉하고 벙어리마냥 도사리고 앉아만 있는 것이냐?

참으로 녹을 받는 처지로 망극하고 부끄러운 줄 알라!"

"망극,오직 망극하옵니다.전하!"

입은 있으되 할 말이 없다.중신들 고개 조아리고 이구동성.그말뿐이다.

그런 꼴들 앞에서 왕은 더 노화가 치밀어 올랐다.암행어사들이 올린 장궤 두루마리들을 전전긍긍 죄인마냥 꿇어 엎드린 

신하들을 향해 격하게 내던지었다.멀리 날아간 두루마리가 심지어 공조판서 허유인의 얼굴에 정통으로 맞기까지 하였으되

누가감히 나서서 왕의 치솟는 격한 노화를 만류할 것이더냐?왕은 용상의 팔걸이를 부서져라 주먹으로 두들겼다.

"황공하옵니다,망극하옵니다.그 딴 입에 발린 소리들 말고 좀 쓸모있는 말을 하여보라.아주 꼴값들 잘 떨고 있구먼?

짐더러 옳은 정사를 펼치라 말은 못한 주제에 그저 향락만 하여라 부추기기는 잘하였었지?그런 인간들이 조하를 채우고 

있으니 짐이 무슨 성군이 될 것이야?천하의 폭군이 되지 않는 것만도 다행한 일이지!"

"제발 고정하시옵소서,전하!감히 어떤 입이 성상의 위엄을 두고 폭군이라 하겠나이까?그저 진노를 푸시옵고 아름다운 하교

를 하여 주시기를 비옵나이다."

영의정 한영회가 그나마 침착하게 고개 조아리며 감히 한마디 아뢰었다.허나 왕의 노염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발로 용상의 기단을 걷어차며 버럭버럭 고함치는  왕의 노화를 막을 자 그중에는 아무도 없었다.

얼마 후 격한 노염이 다소 가라앉았다.왕은 두려움에 굳어져 석상이 된 중신들을 내려다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짐이 깊이 생각한 것이니 당장에 죄주고 벌주는 것만 이 능사가 아니라 싶기도 하다.이미 일어난 일들을 가려 상벌

을 다하여 일을 처리하되 큰 공이 있는 한은 앞의 실책을 불문에 부칠수도 있는일. 당장에 급한일은 함평의 식량 사정 구휼

하는 일이며 아래 지방 해적들 발호를 막는 일이라.그 문제를 잘 의논하여 당장 처리하시오!이미 어시들이 부패한 지방 관

속들을 대강은 처분하였다 하니 급한 불을껐다 싶어.허니 경들은 성심을 다하여 짐의 근심을 덜어주오."

처음의 서슬 푸른 호령질로 보아서는 당장에  목들을 뎅겅뎅겅 자를 것같이 격하였다.추상 같은 고함소리로 얼을 빼놓더니.

슬쩍 돌려치며 달래고 은근히 격려함이라,신하들 혼백을 제 맘대로 움켜쥐고 다그치는 요령이 한결 더 세련되시다.참으로

위엄이 높으시고 사리분별이 밝으시니 그저 격하여 고함만 지르시던 옛적의 모습에 대면 한층 성숙하여지시고 주상된 기틀이

딱 잡힌 것이다.

일을 잘하면은 앞의 실책 어지간히 묻어두고 그만큼 대접하겠다.은근히 달콤한 꿀물을 눈앞에 흔들어대었다.허니 특히 뒤가

마려운 구석이 있는 신하들은 오직 제 살길이 예에 달려 있다 싶어 죽을 참으로 잘하여 볼것이다 각오를 단단히 하며 분주

하게 대전을 물러나는구나.

왕은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옅게 지으며 지켜보고만 있었다.지금은 어차피 그 뿌리가 깊고 대세이니 당장에 모다 쳐내지는

못하리라.허나 아무리 너들이 날뛰어보았자 결국은 다 잘라 버릴 것이다 속으로 다짐하시는 그심중을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아까 무릎 꿇고 앉은 중신들을 내려다보던 상감마마.이놈,저놈하고 월성궁 보따리들을 눈으로 헤아려 보니 반을 훨씬 넘어갔

다.그렇게 대세를 이룬 터이니 짐을 감히 능멸하여 기만하고 제멋대로 정사를 농단하였겠지.속으로 혀를 찼던 것이다.

'흥,이날서 사지에서 벗어났다고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들!일단 큰죄하나 얽어  눈에 띄게 설치는 인간들 여남은 명 본보기로

쫓아내고 나서 슬슬 지방 관속부터 하여 완전히 물갈이를 할것이다!두고 보아라.짐이 너들 흉측한 심사 몰라서 그냥 놓아두

는줄 아느냐?짐이 이미 샅샅이 네놈들 탐학을 조사하고 있으니 어디 두고 보자꾸나!"

그렇게 전하께서 호령질하여 혼을 내신 참이라.그 밤으로부터하여 근 열흘이나 날이면 날마다 두 서넛씩 관복 벗기어져 궐문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수모를 당하는 중신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물론 벽파의 썩은 간신들이다.그중에는 정안로의 

오른팔인 이조판서 이훈이며 한성부윤 민충재이며 공조참판 서인직도 포함되어 있었다.다는 아니되 조정서 정안로를 호위하여

힘깨나 쓰던 사람들이 그렇게 대놓고 잘려 나가니 전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 보일 것인가?

그 며칠 사이로 정안로가 궐에 들어도 뉘든 외면하고 아는척을 하지도 않게 된 것이 자연스런 세상인심이었다.

그는 인제 죄의정이란 감투가 그저 무거운 짐이요,오욕 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그렇게 재 심복들을 하나하나 골라내어 단번에 

잘라내시면서도,그런데 전하께서 굳이 저에게는 아무런 다른 빛이 없으시고 물러나라 하는 말씀도 없으시다.

이는 또 무슨 뜻이냐?

정안로,그것은 왕이 제게 주는 벌이라 느끼었다.육신의 고통보다 더 큰 정신적인 형벌.마치 짐승을 사냥하듯이 차근차근 저를 

몰아붙이어 결국 파멸시키고야 말겠다는 뜻인데 짐승인 너를 죽이기 전에 그동안 실컷 마음 고생하여 보라! 이런 뜻이다.

자다가도 식은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나기 몇 번.그럴때마다 정안로는 왕이 저를 얼마나 미워하고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지 

아프도록 깨닫고 있었다.

'그때가 언제일까?'

정안로는 풀기 없는 헌옷처럼 후줄근한 자신의 주름진 손을 깍지끼며 지금 딱 죽어버려야 하는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하였다.

오직 하나 그를 구원해 줄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은 안해인 정경부인이었다.

'그나마 전하께서 부인은 귀하게 여기시니 그 지아비인 나를 아무리 실책이 크다 하여도 주살하시지는 않으실 것이야.또한

중전마마께서 어지시니 그래도 정승인 나를 살려는 주시겠지.그저 죽은 듯이 조하 물러나 엎드려 살것이면 전하께서 다소간 

노염 풀리시어 여생이나마 평안하게 해주실 것이야.휴우ㅡ그저 큰마마가 원망스럽구나.그 처신이 경박하고 강팍하여 매사 

주상 성미 건드리어 성총일랑 홀라당 빼앗기고 재성에 유배되듯이 쫓겨난 이후로 나에 대한 전하의 노염이 더 격하여진 것이

니,이 딸년이 내게는 원수나 다름없구나.'

주상이 딸년에게 퍼주는 성총에 기대어 한시절 잘 지냈을 적에는 이런 생각 하였을까?그저 그 딸년 금이야 옥이야 떠받들며

먼저 나서서 옳고 그름 가림없이 장단에 춤을 춘 것은 생각도 나지 않는가?제 죄는 두어두고 마냥 희란마님만 원망이다.

이로 맺어진 사람들의 말로는 부녀지간이라 하여도 이렇게 배신으로 끝이 나는구나.

정안로는 애첩의 풍만한 품속에서 누워 있어도 비바람 부는 돌판에 홀로 서 있는것 같은 막막함을 느끼었다.머리카락 한올

같은 가느다란 희망에 목숨을 의지하는 심사가 바로 그러할지니 종말을 기다리는 도살장의 짐승이 바로 제 신세와 똑같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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