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그이를 따르는 자들위 학풍을 일러 실학이라 하는데 짐이 정사를 보는데 다소간 도움을 받는 때가 많다오."
"실로 성군이시옵니다.마마의 자를 성덕이라 올려야겠습니다.홋호호,지금은 무슨 자를 쓰시옵니까?"
"욱제라 이리하오.해 돋을욱(旭)건질 제(濟)를쓰는 터요.아침 해처럼 빛나는 군주가 되어 만물을 비우고 그해처럼 가난한 백
성을 구제한다 이말이니 아바마마께서 짐에게 그 이름을 주시면서 그리 살아라 하신뜻이라."
"실로 전하의 위엄과 어진것에 맞은 방명이옵니다."
"한번 그이름으로 짐을 불러보시오?"
갑작스런 말에 중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지엄하신 지존의 귀한 이름을 입에 담는다는 것은 불충이고 무도한 일이라 하였다.
"신첩은 못하옵니다!어찌 마마의 함자를 사사로이 입에 담을 것입니까?"
"그 이름이 있되 한번도 뉘가 부르지 않아서 짐에게 그이름이 있는줄도 잊고 사오.핫하.만약 우리가,중전,사가에서 만난
처녀 총각이었다 할진대 서로를 무어라 불렀을까?"
중전이 배싯 웃었다.사가에서 인연을 맺은 사이라 생각을 하니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신첩 또한 마마를 남들이 하느대로 이름 불러 욱제 도련님이라 이리하겠지요?"
"이것봐!짐이 사가의 총각일진대 겨우 그이름을 써먹는군!허면은 짐은 그대를 소혜아씨라 부르겠지?참 다정하게 들리지 않아?
저기 말이야,중전.우리가 사가에 살았다 하면은 지금처럼 부부의 인연이 닿아 만날 수 있었을까?"
"부부지연은 삼천 겁의 인연이 닿아야 맺어지는 것이며 그는 천지신명이 점지하사 이루어진 운명이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반드시 맺어지는 것이라 하였습니다.마마와 신첩은 반드시 만났을 것입니다."
동굴속 두분 마마.모닥불 피워놓고 한가하게 이런저런 속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동안,산 아래에서는 온통 난리가 났다.
잠시잠깐 중전에게 말을 태워 줄것이다 하여 산막을 나가신 전하께서 아무리 기다려도 아니 오시는구나!심상찮다 싶어 윤재관
을 위시한 지밀위사 너덧이 장막 근처 주위를 말을 타고 아무리 돌아다니며 소리쳐 왕을 불러도 그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
아이쿠,큰일 났도다.새파랗게 질린 별운검 호위무사들이며 몰이꾼들이 입나팔을 하고 두 분 마마 부르면서 온 산을 다 뒤지는
데 종적을 찾을수가 없구나.개코라 별명이 붙은 사령 몰이꾼이 문득 피 냄새를 맡았다.점점이 끊어지면서 이어진 선혈 자국이
몇 리를 이었다.계곡 넘어 옆 봉우리 쪽으로 그 핏자국이 달아난다.긴장하여 호위무사들이 다가가 보니 화살을 목에 맞은 어
린 범 한마리가 바위틈에 웅크리고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별운검들과 몰이꾼들은 그놈 목에 박힌 화살이 왕이 쏜 것
임을 재빨리도 알아차렸다.
"이 맹수가 마마 말을 덮친 것이면 혹여 용체에 변이 난것 아닐까?"
"흑운(상감마마 말의 이름)이 다리가 바람같이 빠른 터이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네.게다가 이놈이 정통으로 화살을 맞았어.
사람 상하게 할 정도로 힘을 쓰지는 못하였거든.아마 이 근처로 두분 마마께서도 피해 계실 것이야.이 근처로 자세히 돌아
살펴보세나."
이러는데 몰이꾼 하나가 달려왔다.예에,헝겊이 달려 있사옵니다!하고 소리쳤다.그럼 그렇지.두 호위무사는 싱긋 웃으며 눈빛
을 주고 받았다.
동굴속.
그렇게 산 아래서는 난리가 난줄 모르고 두분마마,어깨를 맞댄채 정답게 속삭이고 있었다.중전이 말하기를 어디에 어떤 모습
으로 있든지 부부지연은 반드시 맺어지는 것이라는 말에 왕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용안이었다.문득 중전의 손을 잡고 청
하였다."저어,우리말이야.중전 혼인을 다시 할까?"
동그랗게 뜬 중전의 눈을 바라보며 왕은 진심을 다하여 말을 이었다.
"어,그러니까.짐이 왕이 아니고 중전도 왕비가 아니라 생각하고 하는 이야기거든.짐과 그대가 만나 부부지연을 맺을 것이면은
우리 둘의 마음이 얽히고 맺어져 하늘에 맹세하여 혼인을 하는것이 옳은 것 아니야?"
"그건 그렇지요,마마."
"네 예전에 우리가 가례를 올린 것은 그저 형식이었어.그대는 억지로 끌려 들어온 것이고 짐은 딴 여인 마음 두어 얼굴 한번
바라보지도 않고 치른 혼인이니 그는 거짓인 게지.인제 그대와 짐이 마음으로부터 은애하고 서로를 사모하니 비로소 하나가
되었지 않소?이런 때에 우리가 혼인을 하는것이 옳다싶어.저어,소혜낭자,짐이랑 혼인하여 줄것이오?"
아무말 없이 왕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던 중전이 방그레 웃었다.욱제 도령 상감마마께서 청혼하는 그 말씀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였다.
"마마의 말씀이 진정이며 아름다우시니 이몸 소혜는 그저 감읍하며 따를 것입니다."
아무도 보아주는이 없이,호화스런 예장도 없는 거친 동굴 안에서 두 마마,마주 꿇어앉아 맞절을 하고 은애지정을 맹세하였다
하나 거짓 없는 진정의 두마음만 있는 참된 혼인식이었다.
"이날서 천지신명에게 맹세하기 이씨가문 독자 규는 김씨처자 소혜를 맞이하여 일편단심 사모하니 죽어서도 끊어지지 않는
부부지연을 맺자 합니다.태어나기를 다른날 다른곳에서 태어났어도 부부지연 맺어 한몸으로 살아가기 일심동체라.평생 같이하
고 같은날 죽어지어 죽어서도 같은 유택에 누워 영면하기를 기원하니 이날서 우리 둘의 정은 뉘도 못 끊을 것이며 아무도 갈
라 놓지 못할 것입니다."
공손히 맞절하여 예를 들이고 나서 지아비는 지어미 머리쪽의 금비녀를 찔러주고 지어미는 지아비의 상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러고서 장도칼 뽑아 무명지 찔러 피를 내니 두분 마마의 피가 한데 엉기었다.그 피로써 하늘과 당의 신명에게 부부가 되었
음을 고명하였다.혼인을 치른 동굴의 토지신에게도 제물을 드려야 하니 중전은 손가락의 금지환을 뽑았고 왕은 줌치 안의 금
돈을 꺼냈다.깊은 바닥에 그 패물을 묻었다.토지신이며 삼신할미에게까지 축복을 받은것이다.
"고변하니 이날 욱제와 소혜가 천지신명 증인삼아 혼인을 하였나이다.
이 제물 흠향하옵고 앞날을 밝혀주십시오.허고 자식을 점시하사 이 혼인의 결실을 이루어주시기 비옵니다."
왕은 낙엽위에 호피 잘옷을 깔았다.그리고서 수줍어 얼굴 붉힌 지어미의 손을 잡아 그위로 이끌었다.신방이었다.모닥불이
이글이글 타올라 타닥타닥 불티가 날리었다.젊은 야생의 짐승처럼 뜨겁고도 싱싱한 두분 지존의 옥체가 마침내 합하여졌다.
초야,이토록 수줍고도 뜨거운 말이 어디 있을까?
소혜,신음처럼 지아비 입에서 나오는 그이름이 정겹고 향기로웠다.마마,여인은 나무를 얽은 넝쿨처럼 든든한 사내의 품에서
가려린 새처럼 떨었다.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이 맞부딪쳐 하나가 되고 어느새 풀어지는 옷깃이 땅바닥에 흩어졌다.
듣는이,보는이 하나 없는 이 차가운 맨바닥에 왕의 잘옷 하나 깔았을 뿐인 초라한 신방에 지금 열풍이 치고 있다.
구름같이 틀어 올린 왕비의 수발이 풀어져 삼단같이 바닥에 펼쳐졌다.왕은 지금 그 위엄있는 입술을 들어 외씨같이 새하얗고
예쁜 발을 삼키어 잘근거리고 있다.여인이 온몸을 뒤틀며 신음하였다.가장 은밀하고 또 가장 숨기어온 그것을 사내가 탐하여
핥아 내리니 그것은 은밀한 샘을 자극하는 것보다 더한 쾌감이며 동시에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여인의 팔이뱀처럼 사내의 목을 감는다.달디단 숨소리가 격한 터이니 어느새 여인의 작은손이 사내의굳건한 철주를 더듬어갔
다.뜨겁고도 맥동치는 그것은 작은 여인의 두손으로도 넘치는 괴물이다.사내는 진서리를 쳤다.격한 신음이 터지니 바로 범울
음이라.표효하며 그사내는 맹수처럼 여인의 몸 안으로 돌진했다.뿌듯하게 사내가 여인의 몸에 채워진 바로그순간,그 예민한
샘이 요동치며 진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침입한 일물을 감싸 안아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젊디젊은 더운피가 격랑을 치는 보령 스물셋,열아홉의 나신.구슬처럼 흐르는 땀방울이 향기로 피어오르고 얽히는 눈빛.하나
된 옥체가 바로 생의 열락이요,환희이니 이제 두 사람은 더이상 왕도 아니요,왕비도 아니다.단 한 사람,이 든든한 사내를
믿고 바라보며 살아가리라 결심한 여인이며 그 여인만을 은애하며 평생 아끼고 사모할 것임을 맹세하는 사내일 뿐이다.
비바람 불고 천둥 벼락 치는 소리에 혼절하기 몇 번째.학이 날듯이 혹은 나비가 날듯이 또는 용틀임하듯이 서로에게 얽히어
영육 모다를 나누었다.마침내 중전은 왕이표효하며 깊은 샘에 생명을 나누어 주듯이 분출을 하였을 적에 자신이 그의 씨앗을
받아 회임하였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어느새 모닥불이 재만 남아 꺼져 가고 있었다.여인에게 세찬비를 내려준 사내의 몸도 서서히 식어가고 있다.
비록 낙엽더미위에 호피 잘옷을 깔았다 하나 험한 동굴 바닥이었다.그위에서 마치 야생의 맹수와 같은 왕의 거칠고 무거운
몸을 받아들였던 중전이다.등이 얼얼하고 아팠다.그러나 왕비는 차마 등이 아프다 말을 하지 못하였다.격하고 지친 호흡을
두 수밀도 사이에 묻고 고르고 있는 그를 잠시라도 더 편하게하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대는 짐의 보물이야!세상서 제일가는 보물!"
지칠 대로 지쳐 어느새 잠에 취한 왕이었다.중전은 그가 짧고도 곤한 잠에서 깰때까지 꼼작도 않고 그렇게 가슴에 안고 누워
만 있다.
두분 마마 이런 파격은 유래도 없음이라.두 지존의 달콤한 사랑놀음질 때문에 깩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위 뒤에 숨어서 사람
들을 몰아낸 윤재관도 꼼짝 못하기는 마찬가지다.왕도,왕비도 얼마후 동굴에 나타난 그가 너무 빨리 도착하여 두분 마마
격렬한 교합을 훔쳐보고 말았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신다.
=====제10장 회임=======
섣달 강추위가 몰려든 날이다.중전마마 생신날이 돌아왔다.저녁 무렵 상감마마,내전에 들어오셨는데 어수가 들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중전마마,뾰로통한 얼굴로 짐짓 앵토라졌다.
"흥,좋은 선물 잔뜩 하여주께 하시었거늘!신첩이 오직 이날만 기다리며 전하의말씀을 참으로믿었사와요.흥,그런데 빈손이시
라?몰라요,신첩이 섭섭하여 죽을 것이다!"
욕심이란 도통 없고 소박한 성정인줄 뉘보다 더 잘아시었다.허니 섭섭한 듯 부리는 중전마마 심술이 애교인줄 모를것이더냐?
왕이 싱긋 웃으며 보료에 좌정하였다.
"짐이 그대를 위해 준비한 것이 없을까 봐?거참 성미도 급하지?엉?기대려 보시오,엄 상궁은 들라."
상감께서 들라 하시자 엄 상궁이 붉은 보자기에 싼것을 안고 들어왔다.중전마마 앞에 벙긋 웃으며 놓아드리었다.
"천엽향매요.엄동설한에 꽃망울을 틔웠기로 기이하여 짐에게 진상을 한 것인데 중전에게 드리려구요.중전에게 드리는 짐의
생신 선물이요."
키가 서너 치밖에 안되는 작은 나무인데 가지는 울통불통 풍상이 짙어 얽히고 비틀어지니 몇십년은 묵은 희귀한 매화 분재
였다.동애포는 야스다국과 왕래가잦은 곳이라 그곳의 풍습이 흘러 들어온 것이 많았다.분재 기술도 그중 하나이다.늙은 가지
에 맺힌 분홍빛 섞인 하얀 꽃망울이 처녀아이 볼처럼 화사하게 툭툭 터지는 중이었다.맑은 향기가 삽시간에 온 방을 채웠다.
매운듯 청신한 매화 향기가 꼭 봄을 맞이한 듯하다.바깥에서는 난분 분난분분 한설이 내리는데 방 안은 봄빛이니 실로 기이
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귀한 보석 황금 패물보다 향기로운 화초를 더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시는 중전마마이시다.매화마냥 고운미소 입가에 맺으며
반짝반짝 눈빛이 맑다.어린아이처럼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시니 조용한 성품에도 이토록 귀하고 좋은 선물에 흥분을 하신것
이다.
"아,이토록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은 신첩이 본 바가 없습니다.이토록 곱고도 희귀한 것을 어찌 신첩에게 주십니까?편전서
두시고 전하께서 완상하시지요."
"편전보다 중궁전에 놓인 매화 분이 더 어울리는걸?내전에 향기가 가득하니 짐의 발길이 어찌 예로 옮겨지지 않을 것인가?
언젠가 그대가 짐에게 매화꽃 수놓은 가리개를 주셨기로 짐은 꽃으로 화답합니다."
왕은 빙그레 웃으며 덕담을 하였다.헌데 어쩐지 용안이 상기되어 있으시다.개구쟁이 소년처럼 눈을 찡긋하였다.
"꽃 화분은 작년 턱으로 치십시다.실상 짐이 준비한 선물이 따로 있지요,올해 생신 선물이오.아마 중전께서 가장 좋아하실
일일 게야?"
마음에 그득한 기쁨이라.내가 더 바랄것이 없도다 하였다.헌데 좋아할 선물이 하나 더 있다하니 의아하여 중전은 왕의 용안
만 올려다본다.빙긋이 웃으며 주상께서 문쪽으로 고개 돌리시었다.
"비가 보고잡다 하신다.그대는 들어오라."
아랫문이 스르르 열리었다.천천히 고두하여 들어오는 한 사내.
누비 도포 차림으로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글 스승 강두수가 아닌가?중전은 너무 놀랍고도 반가워 차마 입밖으로는 발
설할수 없었던 소원이 이루어졌다.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중전마마 앞에서 강두수,엎드려 깊이 절하였다.
"중전마마,신이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총을 입자와 위리안치 풀리어 며칠전서 환도하였나이다.미거한 신에게 위로하시기 많
은 고생을 시켰다 하시면서 금일 중궁전 들어와 마마의 어진 옥안 알현하라 윤허하신고로 신이 그저 가슴이 악히어 눈물만
떨어지옵니다.마마,그동아 강녕하셨는지요?"
"아아,실로 기쁜 일이오!스승께서 먼곳서 고생하시는 생각을 할적마다 이 중전이 속이 끊어지듯이 아팠기로,이리 돌아오시어
강건하신 모습 뵙자하니 그저 기쁘고 반갑나이다."
중전마마,기쁘고 감사하여 고운눈에 눈물까지 글썽하였다.학사의 얼굴과 지아비 전하의 용안을 번갈아 바라보며 좋아 어쩔줄
을 모르신다.그 형용이 반갑고도 고마워 두 사내 모다 벙긋이 웃었다.
"보아!역시 이일이 제일 기쁘리라 하였지?학사는 알것이야!중전께서 스승인 그대를 이토록 귀하게 여기고 있다함을 말이야.
핫하.중전,짐이며 학사에게 술한잔 아니 줄것이야?잔칫집에 선물 장하게 안고 왔거늘 물 한 그릇도 아니 준다니 실로 인심
도 야박한지고!"
전하 싱긋 웃으시며 농을 거시었다.이제 중전마마 마음에 자신이 생긴것이니,학사와 중전 사이 오가는 친밀한 눈빛이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으시다.지어미 좋아하는 모습에 그저 기쁘고 흐뭇할 뿐이다.
중전마마 급히 나인 재촉하여 정갈한 주안상 올려라 하여 손님을 접대하였다.그리하여 강두수, 그밤 내내 중궁전 모든 사람
들에게서 장한 환대를 받고 중전마마께서 내린 주안상 받아 과분하게 두분 마마와 맞상대를 하는 광영도 누리었다.
왕이 강두수에게 술잔 내리시었다.솔직히 그동안 다소 미안한 처분이라,이술잔 받고 지난일을 잊어버리오 당부하였다.
강두수 황공하게 왕이 따라주시는 어주를 한잔 받아 마시었다.강두수 눈에 비친 중전마마와 왕이 다정하신 그모습이 더없이
아름다웠다.실로 천생연분이로다.늠름하니 훤출하신 미장부이신 전하와 얌전하니 총명하고 순후하며 고우신 중전마마의 그
모습은 바로 그림이었다.잠시도 손을 놓지 못하겠다는 듯이 굳이 중전마마 손을 잡고 계신 왕인데 그것은 보란듯이 억지로
꾸민것도 아니고 그저 무의식 중에 자연스럽게 잡은 것이었다.하물며 그 수줍고 법도 어김없는 중전마마도 작은 손 빼지 않
고 당연하다는 듯이 앉아 계시니 두분 마마 사이가 비길데 없이 다정하다 함의 증명이랴.
밤이 이슥하여 강두수는 중전마마께서 고생하신 안해께 가져다 주오,하시는 고운 비단 필품에 안고 중궁전 월동문 나서는구나
담담한 미소가 어렸던 강두수의 얼굴이 착찹하니 안개 낀 듯 흐려진 것은 그때였다.
'이제 다시는 구중심처 이곳에 들어올 일도,중전마마 뵈올 일도 없구나.'
명경지수같이 담담하고 맑던 그의 모습에 슬픈 파랑이 일었다.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심란함의 물결은 가라앉지 않는구나.
더없이 섭섭하고 가슴이 아렸다.언감생심,감히 올려다 보아서도 아니되는 지엄한 분이되,더없이 아름다우신 그분께 매혹당한
것은 강직한 선비인 그로서도 어쩔수없는 일이었다.은밀하고 애틋한 사모지정은 퍼내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
어진사내 강두수의 깊은 속내에 담겨 있는 비밀은 깊고도 첩첩하였다.
'아마 이 무엄한 심사를 정녕 전하께서 아시면 나는 당장에 능지처참을 당할 것이야.'
그는 다시 한번 돌아서서 아득한 중궁전 처마를 바라보았다. 그낯빛은 애틋하고 쓸쓸하고 적요로운 것이었다.
'중전마마,부디 행복하옵시오.이 학사,무엄하게 마마의 아름답고 어진 옥안 가슴에 담고 잠시간 헛된 꿈을 꾸었기로 뫼시고
강학하던 그때일은 가장 즐거운 추억이라.평생 가슴에 담고 살겠나이다.인제 다시는 뵙지 못할것이나 평생 흘리실 눈물은
이미 지나간 터이니 이제 행복만 남으셨습니다.주상전하께서 이미 마마 깊이 사모하시고 은애하심이 한결같으니 그 사모지정
은 평생 갈것이라.차마 그 아름다우신 옥안,다른 이가 보는 것조차 아까워 하실 참이니 그럼 깊은 사랑은 오직 중전마마 한
분만이 받으시는 순정이옵니다.부대 어진 국모되시어 평생 전하의 좋은 곁이 되시옵소서.'
강두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터벅터벅 궐문을 나서는구나.평생 중전마마 고운 옥안을 다시는 뵙지 못할 것이다.깊은 가슴에
은밀한 상처를 안고 돌아간다.이리하여 중전마마를 사이에 두고 왕과 대적한 그 마음의 비밀은 끝났다.천지간 그 누구도
학사 강수두의 진실한 마음은 모를 것이니.순결한 사모지정 깨끗하게 자르고 돌아가는 사내의 등뒤로 달빛이 맑고 차다.
허나 세월이 흘러 흘러 이십오 년후,강두수와 중전마마께서 사돈의 인연으로 다시 만날 줄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운명이다.
전하께서 침수하시다가 갑자기 깨신 것은 그날 밤이었다.
검고 깊은 숲 속이었다.수하도 없이 사냥을 나가신 전하. 호랑이 한마리를 딱 맞대면 하였다.이마에 왕자가 선명한 백호였다
퉁방울 같은 눈에 불을 담고 전하께 벌컥 덤비었다.얼떨결에 맨손으로 그놈과 뒤엉켜 싸우다가 담박 그놈 발톱 아래 깔리고
말았다.영물스런 백범이 허연 이를 들이대고 위협하는 순간,왕은 헉!소스라쳐 잠에서 깨었다.얼마나 놀랐으면 이마에 진땀이
송송 돋아 있었다.
꿈이라 하여도 찍어낸 듯 더 이상 생생 할수 없었다.다시 떠올리는 순간, 그맹호가 이빨을 들이대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떠
올라 몸이 오싹하였다.왕은 머리맡의 자리끼 대접을 들어 입술을 축이며 뇌리 속에 흔들리는 두려움을 간신히 씻어냈다.
'짐이 호랑이 꿈을 꾼것은 처음이다.이토록 생생한 것도 처음이거니,혹여 이것 중전이 원자를 회임할 태몽은 아닐까?용맹한
사내아이의 징조야.짐을 능가하는 성군이 될 어린놈이 중전 태서 나올 꿈인 게다.'
생각한 다음에야 해치우고 말지.혼자 마음속에 넣어만 두고 미적거리면 욱할 욱자 욱제 임금이 아니지.옆에서 곤히 잠자던
중전을 기어코 깨우고야 말았다.다짜고짜 회임하였소?하고 캐물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지.눈에 잠이 반은 물려 중전마마 맹한 눈으로 지아비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를 못하는
눈치였다.그러거나 말거나 왕은 손목을 부여잡고 채근하였다.
"대답하소.혹여 옥체 달라진 데가 없소?달거리 그만 하시고,입덧하시고 혹여 그런 기미가 없냐니깐."
"아이고,침수하시다 말고 어인 엉뚱한 하문이셔요?"
"짐이 태몽을 꾸었으니 그러하지!요것이 필시 원자를 얻을 태몽이야.정말 옥체 달라진 기미가 없소이까?"
"....열흘이나 지난고로 이번 손님이 아니 오시어서.......저가 내일서 할마마마 찾아뵙고 진맥하여 보려고 하였지요.무어.
안즉은 확실하지도 않은데 어찌 입밖으로 감히 발설하리요?"
"어이쿠!중전.회임하였구나.회임하였어."
상감마마 벌떡 일어나 환호작양하시었다.달거리 아니한다는 말만큼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노?자리옷 차림으로 벌떡 금침에서
벗어났다.냅다 손수 문을 열고 나와 숙직내관을 찾았다.
"너 나가서 당장 홍준이 입시케 하여라.중전 진맥 좀 하여야겠다."
"맙소사!망측하여라.아니라 하면 무슨 망신이람?밝은 날 하시지 귀찮게 이밤중에 사람을 부르셔요?"
중전마마 질색을 하였지만 이미 발동이걸린 터,성급한 기대로 들뜬 왕을 막을 수가 없었다.이제나 저제나 기대리는 소식이
아니더냐.정궁께서 외임을 한 것이니 이제야 비로소 사직이 반석이며 열성조 앞에 낯을 들것이다 하였다.경사로고!싱글벙글
마냥 좋은 왕이다.잠자다 말고 얼떨결에 끌려 들어온 전의태감 홍준.눈곱도 떼지 못하고 윗목에 좌정하였다.중전마마 팔목
에 묶인 실이 넘어갔다.숨을 가다듬고 진맥을 하는데 왕도,중전마마도,문 옆에 앉은 아랫것들도 모다 두근두근,간이 달달달
한참 동안 눈을 감고 태맥을 살피던 홍준의 얼굴에 환하게 햇살이 번졌다.벙싯벙싯 웃으며 고두하였다.
"전하,감축,또 감축 드리옵니다.회임이십니다!짐작이 맞사옵니다.이제 석달이 넘어가는 고로 팔월 초이면은 아기씨마마께서
탄생하실 것입니다."
경사났네,경사났어!얼씨구나,좋다.지화자 좋다!
우리 중전마마,드디어 사직 보전할 아기씨를 회임하시었구나.
상감마마,좋아 어쩔 모르며 중전마마를 등에 업고 방 한 바퀴를 냅다 돌아칠 기세이다.보령 늦어 간신히 얻어질 아기씨.
게다가 태중 아기를 한번 잃어버린 후에야 다시 얻게 될 금자동이가 아니냐.먼동이 터 오르는 하늘위로 왕의 호쾌한 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도 희부연한 새벽.중궁의 전령비자가 냅다 왕대비전이며 부원군댁이며 자운궁으로 달려간다.부왕 되실 상감마마.입이
간지럽고 좀이 쑤셔 가만있을 수가 없다.날름 자랑질을 해대야지.성급하게 분부하시기를 이리저리 다 알려라 난리를 쳐댄
때문이었다.덕분에 낯을 차마 들지 못하고 수줍은 중전마마에게 옆구리를 호되게 꼬집혔다.
"흥,짐이 무엇을 어찌하였다고 손톱 치켜들고 이러는 것이니?우리 아기씨가 요 고마운 태중에 있다고 자랑 좀 하겠다는데
참말 이럴것이니?흐흐흐."
고운 사람이 고운 일만 골라서 하는구나!좋아 어쩔 줄 모르는 상감마마.질색하여 도망치는 중전마마 딱 잡아 눌러놓고 치마
를 훌러덩 걷어 올렸다.어수로 아직은 납작한 중전의 깨끗한 아랫배를 슬슬 쓰다듬으며 원자는 게 있느냐?짐짓 느른한 괭이
소리를 내었다.
"너 이놈,열달 동안 예에 잘 계시다가 때되면 고이 나오너라.모후마마 너무 힘들게는 하지말고 씩씩하니 잘 자라야 한다."
"공주면 어찌하시려고 이러실까?내참."
"아,원자라니까!두고보소.짐의 태몽이 맞을 것이니.범처럼 씩씩하고 영명한 놈일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