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200)

성마르게 이맛살 찌푸린 혁이 놈,거만하게 조그만 턱을 치켜들고 있다.도무지 반성하는 빛도,두려워하는 빛도 없다.

제 어미 성총 장하였으니 항시 주상전하를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던 것을 보아왔고,게다가 은근히 귀밑 속살거리기 잘만 하면

은 훗날 너가 이 나라 임금이 될 수도 있을것이다 교육받았다.허니 눈에 보이는 것 없고 교만하기 이를 데가 없음이다.

고개를 조아리고 빌기는 커녕 뻣뻣이 서서 감히 네깟 것들이 나를 어쩔 것이냐?이렇게 건방을 떨고 있다.

중전마마 가만히 혀를 차며 중얼 거렸다.

"실로 방자하고 악독하기 말할수가 없는 어린놈이구나.감히 대궐에 사사로이 침입하여 저 가련한 미물을 죽인것도 모자라서

반성하는 태 하나도 없음이라. 뉘 집 어린것이냐?"

"망극하옵니다.중전마마.지금 경덕궁에 거처하고 있는 월성궁 여인 소생인 줄 아옵니다."

"뭐라?월성궁 여인 소생이라?기가  막히는구나.그 어미 성정,방장하고 기승스러워 주상전하 성총 빙자하여 별 고약한 짓거리

다 한다 소문 장하더니 그 소생까지 제 어미 닮아 이리죄없는 미물 함부로 죽이고 대궁 후원 사사로이 침입하는 무도한 놈인

줄은 실로 몰랐도다!도저히 용서할 수 없구나.여봐라!저 어린놈과 수하 모두 잡아 중궁전에 꿇어 앉혀라!이놈 핏줄이니 대청

가서 좌의정 모시고 들라.이 중전이 그 눈앞에서 친히 문책할 것이다.형을 갖추어 등대하라!어서ㅡ!!"

어질고 순후하신 중전마마 목소리에서도 이제는 쇠소리가 났다.참고,참고,또 참은 일이었다.어찌하든 어질게 가납하리라,어린

날 주상의 실책이니 내가 가려 덮어드려야지.성총 떨어졌다 하여 당장에 내치는 분부다 그래도 첫 맹세 책임지자.중전 자신에

게 미안해하면서도 그 여인 살길 찾아주려는 상감마마가 든든하고 믿음직 스러웠다.그래서 중전 역시도 순후하게 그 여인을 

용서하고 어린놈도 품 안에 감싸 안고 살길을 찾아주려 하였더니 무엇이 어째?

사람이 이리도 독하고 방자하며 간악할 수는 없다.중전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저들 모자가 감히 은혜를 원수로 갚느냐?

싶으니 어찌 분노가 치밀지 않을 것이며 어찌 모진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인가?

혁이란 놈,중전의 하명에 더 당당하였다.정승이신 외조부가 오면은 전하께 소박받는 저깐 중전쯤 한 방이라.용용죽겠지.저를

달랑 안고 나가주실 것이다.이리싶으니 작은 가슴이 더 펴진다.아아,악하고 오만불손한 핏줄이여.무도함이 극에 달하였도다.

그 다음날 오후.뜻밖에 기별도 없이 희란마마에게로 아들 혁이놈이 돌아왔다.

돌아오기는 돌아왔지만은 성한 꼴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기에 어미인 희란마마 눈이 홱까닥 뒤집혀졌다.

하도 울어 작은 얼굴이 퉁퉁 붓고 종아리는 피가 터져 눈으로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목에는 죄인의 표식인 묵표요,옷은 거친 

베옷이다.다 죽는 꼴을 하고서 축 늘어져 어헝어헝 소리쳐 울며 나인등에 업히어 돌아왔다.

금이야,옥이야 금쪽보다 더 귀한 아들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노?희란마마 아들 종아리 어루만지고 중궁전 향해 삿대질하고 죽

일 년,살릴 년 하며 온갖 패악을 다 부린다.

"네 이년,소상히 아뢰어라!주상 소생 분명할 사 이 아이도 왕자이거늘,중전 저가 감히 무엇이관대 이 어린것을 이토록 무참히

매질하고 보낸 것이더냐?우리 혁이 동궁 될것 같으니까 샘이나서 이러하였더냐?아니면 병신을 만들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

려고 이러하였더냐?어진 중전이라 하더냐?퉤퉤!남의 귀한 아들을 무참히 매질하여 다 죽게 만든 년이 무슨 어진 중전이라 하

더냐?네 이년,말하여라.우리아들이 무슨 죄를 그리 장하게 지었다고 그 못난년이 이 어린것을 이토록 매질하였는지 들어보자

이년!"

"큰마마님,이번 일이 실로 크옵니다.도련님께서 대궐 금원에 사사로이 침입하여 중전마마 아끼시는 사슴을 활로 쏘아 죽이었

단 말입니다!흑흑흑.도련님 수종한 아랫것들은 모다 내금부 잡혀갔고 후원 지키던 군졸 수십 명도 궐 안팎 경비 소홀하였다

하여 온 궐이 발칵 뒤집혀져 난리가 났나이다!이런 사정인데 어찌 큰마마께서는 중전마마께서 가혹하다 하시고 애먼 저만 핍

박하십니까요?흑흑흑."

희란마마,순간적으로가슴이 철렁 떨어졌다.아들 종아리 쳤다 길길이 날뛰었지만,나인의 말을 가만히 듣자하니 이놈이 참으로

큰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냐?유모품에 안겨 엉엉 울고 있는 혁을 돌아보았다.

"아가,참으로 이년 말이 맞느냐?네가 중전 사슴 쏘아 죽였더냐?"

"응,어미니!내가 그러하였소!엉엉엉.내말을 안 듣고 도망가지않소?내가 분하여 기필코 죽이고자 하였소.어어엉.엉엉엉.어머니

중전 고년이 얼마나 아프게 나를 때렸는지 좀 보시어.회초리가 열개는 부러졌답니다.엉엉엉,어머니 중전 고것,어머니가 혼을 

내주소서.전하더러 그년 쫓아내고 목을 베라 하시옵소서,어머니.!"

혁이 놈 서러워 서러워,울며불며 무조건 제 편 들어주는 어미더러 하소연을 하였다.어린놈은 중궁전에서 제 외조부가 저가 그

리 회초리 맞는데도 꼼작도 못하고 제편 들어주지 않은것이 서러움에 사무친 터였다.이놈 목숨 살린다고 늙은 좌의정이 지금

껏 꼬박 밤을 새며 중궁전 바닥에 엎드리어 석고대죄를 하는줄도 모르고 모자지간.죽이 척척 맞았다.

그깟 사슴 한마리?흥.보잘것없는 미물 한마리 때려죽였다하여 금지옥엽 내 아들을 고년이 감히 이리 매질을 하여?분함에 이미

이성을 잃은 희란마마 독기 가득한 눈을 들었다.당돌하게 입을 열어 낱낱이 말대꾸를 하는 나인을 독 오른눈으로 다시 흘겨

보며 패악을 쳤다.

"닥쳐라,이년!방자하게 어디서 눈 치켜뜨고 말대꾸를 한단 말이냐?억지쓰지 말아라!이 어린것이 그 큰 사슴을 어찌 활로 쏘아

죽일 것이며 그를 뉘가 보았다더냐?괜스레 중전 고년이 우리 혁이를 죽이려 얽어매는 것이겠지!"

바로 그때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뜻밖에도 주상전하 납시오!하는 장고성이 문밖에서 들려오지 않는가?그동안 애 터지게 전하를 부른 터로,

기기묘묘한 비방 다하고 푸닥거리 장하게 한 보람임에랴.상감께서 예고도 없이 갑자기 월성궁에 들어오시었구나.

이것이 희란마마에게 화인가,복인가

한가위 지나 조용한 날,왕은 한적하니 이흥으로 경행하시었다.동절기 앞에 두고 능 주위의 수목도 돌아보시고,또한능에 진

입히는 길을 새로 내서 다진 참이니 그 공사도 보시고 싶었다.그러나 한가위 때 중전까지 모시고 성묘를 오신 터인데 굳이

홀로 또 나온것은 이유가 있었다.선대왕 능 근처인 희빈 어마마마의 묘소인 제헌원에 들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서 환궁하시는 길에 제일 목적이었던 제헌원에 들렀다.향촉 사르고 술잔 뿌렸다.그자리에서 굳게 다짐하신 일이

라 희란누이를 정리할 것입니다,말씀드렸다.

'누이와 소자가연분을 계속 잇는 것은 어마마마를 참으로 욕되게 하는일이라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하물며 창빈어

마마마까정 누이 때문에 버린 소자이니 저가 실로 어마마마께 낯이 없나이다.허나 이제는 소자가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잡

을 것입니다.두고 보십시오.후에 소자가 중전이랑 창빈어마마마 다 뫼시고 다시 올 것입니다.어마마마께 부끄러운 일은 다시

는 하지 않겠나이다.'

이미 결심한 것을 망설이거나 시간 끌 필요가 없다 싶으셨다.게다가 하루라도 빨리 정리를 하는것이 헛된꿈에 젖어 아직도

천지분간 못하는 희란마마 정신을 차리게 하는일이라 싶었다.그리하여 궐에 들어오시기 전에 월성궁부터 들르리라 하셨다.

별당의 월동문 앞에서 말을 내리시어 문을 들어서시었다.어쩐지월성궁 돌아가는 느낌이 소란하고 어수선하다 느끼었다.

"어찌 이리 궐 안팎이 어수선한 것인가?누이 얼굴도 말이 아니고...무슨 심기 불편한 일이 있었소?"

"하도 오랜만에 전하께서 납시시니 두서가 없사옵니다.어서 오르시옵소서,아름다우신 용안을 오랜만에 뵙자하니 이 누이가

그저 반갑고 행복하여 눈물만 납니다."

아연 날벼락이라,나인을 주리돌림하던 마당의 형구를 급히 감추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시침을 뚝 잡아뗐다.그러나 방금

전까지 죽이네 살리네 그런 소동을 피웠으니 어찌 분위기가 진정될 것이더냐?마루로 올라서며 희란마마를 돌아보는 왕의

의아해하는 눈길 앞에서 낯을 피며 억지로 미소를 짓는척하였다.

안방 보료에 좌정하신 상감 앞에 희란마마,치마귀 부여잡고 나비처럼 나부죽이 절을 하였다.자태며 행동거지가 조신하기 이

를데 없고 그저 공손하고 순후하며 요염이 뚝뚝 떨어졌다.예전에 날리게 기승 부리고 전하 용안에 손톱으로 상채기까지 내

던 방자함은 씻은듯이 사라진 터다.저가 이렇게 달라졌나이다 전하께 내보이는 참이다 .정성을 다할 터이니 다시 그 성총을

주시옵소서 간청하는 유혹이다.고개숙인 희란마마,속으로 간살스런 염두를 굴렸다.

'내 세치 혀가 어디 보통이더냐?예전부터 전하께서는 이 희란이 살살 달래고 이러저러 하였다 하면은 대부분 고개를 뜨덕이

셨다.궐에 들어가기 전에 주상께서 이리부터 오신것은 천지신명도 나를 도우심이니 내가 작정하고 전하께 하소연하여 혁이 

일을 잘 가려 없던 일로 할 것이다.'

애전한 미소를 억지로 길어올리며 전하 앞에 한 무릎 다가앉았다.혁이 놈이 벌인 일을 가려 속살거리고자 하였다.

"저어,전하,이 누이 말을 좀 들어보소서.금일......"

문 바깥에서 어린놈이 앙앙거리는 소리가 요란히 스며들었다.씻기고 약을바르라 하였더니 혁이 몹시 쓰라려 우는 것이다.

문득 상감마마 눈꼬리가 힐끗 치켜 올라갔다.이 집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어서는 아니 되는 것 아닌가?이상타 하는 용안

안에는 노염도 서려 있었다.

"아니,이것이 무슨 소리인가?혁이놈이 우는 것 아닌가?정강헌에 있어야 할 아이가 예는 어찌 나온 것인가?짐의 하명도 없

었는데 뉘가 맘대로 아이를 데리고 나온 것인가?"

"아,예.마마,중전마마께서......"

"중전이?흠,기이하군?비는 짐의 하명 없이 함부로 일을 처리할 사람이 아닌데?어진 사람이 명절 끝이라 어미 낯을 보라 내

보낸 것인가?"

"아,예.그,그것이.........."

난처해진 터로 희란마마는 말꼬리를 얼버무렸다.앙앙거리는 소리가 이내 가라앉았으면 좋으련만.더 시끄러워진다.무작정 제편

들어주고 어리광 부릴 수있는 사람 천지라,혁이 놈 모처럼 의기양양 더 아우성을 피는 것이다.신경이 아니 쓰일수가 없는 노

릇이다."헌데 어찌 저리 요란하게 울고 있는고?어려서부터 몸가짐이 진중해야 하거늘!가서 데려오시오.왜 그런지 짐이 알아

볼 것이다."

데려오라하니 어쩌랴?입단속이라도 좀 하였을까?부름받자와 혁이 유모와 함께 들어왔다.아직도 징징거리며 제대로 걷지 못해

쩔뚝쩔뚝하며 들어온 아이의 종아리가 시뻘겋게 피가 터져 있으니 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이게 무슨 일이냐?누가 너를 이렇게 하였더냐?이리와 보아라!거참!누이,심하오.때릴 데가 어디있다고 이리도 피나게

매질을 한것인가?"

"엉엉엉,어머니 빨리 전하께 말씀하시오!전하,중전마마가 나를 이리 매질하였소.엉엉엉,아파 죽을 것이다.회초리가 열개나

부러졌소이다!어머니,빨리 중전 고년 목베라 하시오!내가 반드시 그년,채찍으로 매우쳐서 경을 칠 참이다!"

어린것이 당한 꼴이 그래도 안쓰러웠다.인정상 혁이 놈을 한팔로 안고서 그 피멍 든 종아리 안쓰럽게 어루만져 주던 왕이 

갑자기 아이를 홱 밀어냈다.어린놈 언사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말뽄새가 독하고 방자하기 이를데 없음이라.

절로 노엽고 몸이 부르르 떨리었다.왕은 혁을 향해 벽력같이 고함을 쳤다.

"네 이놈!지금 무슨 무도한 막말을 하는 것이냐?다시 말하여 보아라!"

"히힝,전하.중전고년 내쫓아서 목 베시오!나를 이리 매질한 것이 바로 중전이요"

"닥쳐라,이놈!"

바로그 순간,전하의 어수가 바람소리를 내며 혁의 볼따귀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얼마나 노화가 나셨는지 온 힘을 다하여 

내려친 손찌검이라.아이가 그 한 주먹에 날아가 방구석에 처박혔다.

"전하ㅡㅡㅡ!"

이러다가 이놈을 죽이고 말겠다.희란마마 정신이 번쩍 나서 달려들었다.심지어 발을 들어 나동그라진 아이를 발길질하려

하시는 전하를 온몸으로 막았다.

"잘못하였습니다!전하,전하!아이가 철없이 한말입니다.제발 용서하여 주십시오!전하!"

"닥쳐라,고약한계집!어미라 하는것이 허구한날 아이끼고 무도한 막말을 하냥 하고 있었던 참이었으니 이따위 말을 어린것

이 겁도 없이 함부로 하는 것이겠지.네 이놈!바른대로 말하여라!중전이 네 종아리를 왜 때렸더냐?어질고 사리분별 잘하는

그이가 네놈을 이리 매질한 것은 필시 네놈이 용서받지 못할 커단 죄를 지은것이렷다.썩 일어나 무릎을꿇고 바른대로 말

하지 못할까!"

혁이 놈이 너무 놀라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왕을 올려다본다.어린 기억에 단 한번도 전하께서 저를 때린 적도 없고

무서운 얼굴을 한적도 없는데 이것이 무슨 날벼락인가?어리바리.꿈이냐,생시냐 얼떨떨한 얼굴이다.

으아앙!혁이 또 울음을 터뜨렸다.도와주시오,어머니!하는 말이다.허나 희란마마가 게서 어쩔 것이더냐?

"네 이놈!울음 딱 그치고 꿇어안지 못하겠느냐?"

다시 한 번 왕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서리서리 노염이 담긴 왕의 호령이 무서워,어린놈이 오들오들 떨며 꿇어앉았다.

"바른대로 말하라!네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더냐?있는 그대로 말을 하여라!어서!"

"저,저가 훌쩍,중전마마 사,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습니다."

"무,무에야?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느냐?설마 복동이를 죽인 것은 아니겠지?"

사색이 된 얼굴을 보면 그 대답을 모르랴.하도 기가 막힌 터로 상감마마,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입을쩍 벌리고 그저 혁

을 내려다 보기만 하였다.이런 무도하고 방자한 일은 전하 생전 처음 듣는 일이었다.예전부터 월성궁 권속들이 성총 빙자

한 희란마마 그늘 아래서 별별 무도한 일이며 같잖은 권세라 부린다 하더니 그 버릇이 이토록 낱낱이 드러난 것이다.

화급하고 격하신 성품에 당장에 불벼락이 떨어져야 맞는 이상타!상감마마 석상처럼 서서 물끄러미 아이와 그 옆에  꿇어

앉아 달달 떨며 두 손 모아 빌고 있는 희란마마를 내려다 보고만 있다.

눈치는 뻔하다.푸른빛이 튀고 있는 왕의 눈빛 한번 흘깃 보는 것으로 희란마마,이제 저희 모자는 딱 죽은 목숨임을 알아

챘다.예서 죽을 수는 없다,사생 결단하고 쓰러져 전하 발을 붙잡고 늘어졌다.

"모다 이년 잘못입니다.전하!죽을죄를 지었으되 한번만 용서 합시오!옛정 생각하시고 제발 어린놈 철없이 저지른 일을 용서

하여 주십시오!전하,제발,전하!"

"닥쳐라!해도 해도 너무하고,보자 보자 하니 실로 상종 못할 인간들이라.무에야?사사로이 금원을 침입한 대죄로도 모자라서

짐이 중전에게 선사한 미물을 감히 활로 쏘아 죽이여?어린놈이 무에 이리 무도하고 악한것이냐?참말 기가 막히니 차마 말도

나오지 않는다."

격하던 목청이 갈수록 낮아졌다.왕은 푸르르 거칠게 내쉬던 숨을 천천히 내려앉히며 허탈하게 웃었다.자조가 반인 혼잣말을

내뱉었다."허긴 뉘를 탓할 것인가?이 모든 짓거리를 허락한 것이 바로 짐이거늘!가당찮고 성정무도한 이 계집 하나 사춘기

풋정으로 잘못 건드리어,이날서 이런 꼴을 보아야 하는구나.가엾은 미물을 죽이고서도 반성할 줄 모르며 사직의 안주인을 

감히 채찍으로 매우 쳐서 내쫓아 목을 벤다 헛소리를 하여?핫,기가 막혀서!불측한 정해에 휘말리어 천지분간 못하고 왕 된

위엄을 깎인 탓이며 우세를 당할 짓을 한 탓을 오늘에서야 단단히 당하는구나."

왕의 푸른빛이 튀는 눈을 돌렸다.행여 변을 당할세라 제 아들을 품에 꼭 안아 끼고 울고 있는 희란마마를 경멸의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웅크리어 바들바들 떨고만 있는 모자를 내려다보며 엷게 웃는데 실로 잔인하고 차가운 웃음이었다.

"이 모든 악행의 씨앗을 짐이 뿌린 것이니 짐이 거두어야겠지.어리석은 짐이 또 한번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들 무에 어떠랴?

이미 훼손된 위엄을 이 두 목숨을 베고 씻을 참이다!"

왕은 망설이지 않고 벽에 걸린 당신의 장검을 내려 빼어 들었다.천둥벼락같이 소리쳤다.

"네 이놈!잘난 네 어미 치맛자락 안에 숨지 말고 당장 나오렷다.대궐에 함부로 침입하여 중전께서 키우던 미물을 제 맘대로

죽인 것도 실로 잔인하고 무도한 일이거늘,하나 반성할줄  모르고 감히 사직의 안주인을 일러 가로되 이년 저년이 예사이고

내쫓아 목을 베어?무에 이런 악한 놈이 다 있는것이더냐?당장 목을 내밀지 못할까?"

혁이놈, 너무 무섭고 두려워 바들바들 떨다가 입에 거품을 물고 그만 혼절을 하였다.정신 잃은 제자식 건사할 생각도 못하고

회란마마는 그저 엎드려 울며 애원하였다.

"그저 철없는 어린것이 저지른 일이옵니다!마마,한번만 용서하여주십시오.옛적 정을 생각하시어 제발 한번만 용서하여 주십

시오.이 누이가 잘못 가르쳤습니다.이 죄를 다 받을것이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닥치지 못할까?여봐라,당장에 고약한 두 인간을 끌어내라!두 개의 목을 쳐서 짐의 수치를 씻을 것이다!"

버럭 고함지르는 지존의 노하 앞에서 사방이 숨을 죽였다.그때 방안에 죽기를 각오하고 뛰어든 이가 바로 정경부인이었다.

이러다간 딸년이며 손자 목숨이 간당간당하다 함을 직감하고는 체면이고 염치고 다 잊고 달려들어 온것이다.

안노인은 왕이 칼까지 빼어 든 것을 보고는 하얗게 질리어서 벌벌 기며 고두하였다.격한 왕의 성품으로 미루어 당장 그 칼날

이 제 딸년이며 손자 목을 날릴것 같다는 두려움에 제정신이 아니다.왕의 격하고 극심한 노염이 끝까지 다다르기 전에 진정

시키고자 노인은 그저 왕의 발목을 잡고 엎드려 통곡하며 하소연을 하기 시작하였다.

"전하!한 번만 용서하여 주십시오.늙은 이모의 낯을 보시어 딱 한번만 더 용서하여 주십시오!전하!"

"무엇을 하느냐?이것들을 당장에 끌어내라 하였다!"

들은척 만척 왕은 지밀위사에게 호령하신다.반백의 머리 조아리며 정경부인은 두손 모아 왕에게 빌고 또 빌었다.

"마마,마마!통촉하여 주십시오!으흑흑흐흑.제발 어진 처분하여 주시옵소서."

노인이 이마를 바닥에 쾅쾅 찧으니 터져 피가 흘렀다.그것에도 아량곳하지 않고 자비를 애원하며 상감마마께 애처로이 매달

렸다.죽기를 각오하고 두 목숨 살려달라 빌고 또 빌었다.

"흑흑흑.마마,마마.돌아가신 희빈마마 낯을 보시어,이 이모를 두고 오직 전하의어미 대신이라 하신 그 말씀을 되새기시어

한번만 용서하여 주십시오.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아무리 시퍼런 노염이 끝까지 치밀었다 하여도 한분뿐인 이모님이시다.말 그대로,생모마마 돌아가신 다음 어마마마 대신으로

황에게 살뜰하시고 다정하신 분이었다.그 깊은 정을 어찌 끝까지 외면할수 있다더냐?노인이 반백의 머리 조아리며 무릎을

꿇고 파리처럼 두손 모아 자비를 요청하며 애원하는 모습이 어디 왕에겐들 흔쾌하고 보기 좋을 것이더냐?

폭풍우 치는 하늘마냥 시시각각으로 용안이 변하였다.흐느끼며 빌고 있는 정경부인과 겁에 질려 정신을 잃은 혁이놈과 바들

바들 떨며 반 넋이나가 흐느끼고만 있는 희란마마를 번갈아 내려다보는 용안에 복잡하고 깊은 갈등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억겁 같은 찰나였다.마침내 왕은 격하게 들이쉬던 숨을 천천히 진정하였다.들고 있던 장검을 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쨍그랑 하며 칼이 방바닥에 떨어졌다.왕은 싸늘한 시선을 정경부인에게 고정하였다.

"휴우,짐이 실로 광증이었소이다.실덕,실덕.짐의 마음은 참말 순정이었거니,누이 여생 챙기어 내내 편안하게 살게 하여줄것

이다 했던 요량이 참으로 부끄럽소.이런 고약한 인간들에게는 어진 덕이 필요없음이라."

전하,차분하게 말씀하시는데 이미 노여움 모두 가라앉은 목청인 듯 나직하고 침착하였다.그러나 그것이 더 무서운 말씀인지

뉘가 모르랴?간신히 정신 차린 혁이 제 어미 품안에서 살며시 고개 내밀었다.울컥 대노염이라,왕은 발을 구르며 다시 추상

같이 호령하였다

"네 이놈!목 늘이고 기대리고 있으렷다.당장에 목을 벨것이되 짐이 어린놈 피를 손에 묻히기 싫어 당장은 참는줄로 알아라"

혁이 놈 오들오들 떨며 다시 반정신을 잃었다.방을 나선 왕은 마루끝에 서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무엇 하는냐?월성궁 편액을 당장에 끌어내려라!"

윤재관 이하 지밀위사들이 사다리 타고 올라 낑낑대며 월성궁 편액을 내렸다.질질끌고 마당으로 들어왔다.섬돌 아래 내려서

신 전하,다짜고자 흙발로 그 편액을 모질게 밟아버리셨다.

"방자하고 무도한 인간이 궁명 차고 앉아 있으니 별별 기막하고 악독한 일을 다 벌이는 게야!이날서 월성궁을 없애 버릴것

이다!네 이놈!도끼 들고 편액 내려치지 못할까?당장에 짐 눈앞에서 산산조각 내어라!짐이 이것을 중궁전 불쏘시개로 쓸참이

니라!"

서릿발처럼 차가운 전하의 분부에 윤재관이 도끼 들어 월성궁 편액을 모질게 내려쳤다.

팔년 전,전하께서 친필로 쓰신 편액이 산산조각나는 순간이다.어린주상.제 몸뚱어리로 유혹하여 광영이며 재물이며 조하권세

며가 단번에 빠져진 순간이었다. 이것은 동시에 그토록 질겼던 상감마마의 어린 시절 철없고 불측한 정분이 단번에 끊겨

나간 소리이기도 했다.방바닥에 쓰러져 흐느끼고 있던 희란마마,바로 게서 그만 스르르 정신을 놓아버렸다.

"허고,이 집의 계집과 어린놈. 당장에 도성서 쫓아낼 것이니 이 밤서 우마차 태워 처분하여라!재성 거처로 옮기되,짐이 살아 

있는 한은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다.그 집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올수 없다.사사로이 드나드는 놈이 있으면 그 집 산목숨은 

다 죽을 것이다!"

실로 가혹하시다.희란마마와 혁은 목이 잘리지 않았다 뿐이지 평생 죄인 신세로 집 바깥으로는 나오지도 못하게 된셈이다.

전하 그러고서 훌쩍 말에 올라타시었다.마지막으로 월성궁에 대한 처분을 내리신다.

"이미 궁명 없어졌으니 이집에 들어간 궐의  권속들 모다 물러라!내탕금이며 전답 역시 모다 몰수 할것이다.허고,예에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대문에 못질하렸다.실로 고약하고 무도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전하,바람소리 내며 월성궁을 나서시는구나.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으신다.철들기 전서부터 왕을 친친 감았던 희란마마에

대한 연정이며 지난날 천지분간 못하고 얽매어 있던 첩첩한 애욕에 대한 미련 따위는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리라

희란마님,넋을 잃은 듯이 그저 멍하니 앉아만 있다가 전하!하고 목놓아 몇 번 부르는데 대답이 있을리가 없다.당장에 죄인

되어  재성으로 쫓겨나갈 참이라,퍼들퍼들 사지를 떨다가 혼절을 하여버리었다.

그녀가 그토록 붙잡고 싶어했던 화려한 욕망,권세,광영이 단번에 사라졌으니 어찌 참담하지 않으랴.

사필귀정.이리하여 상감마마,요녀의 덫에서 완전히 벗어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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