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듣고 보지도 못한 까막득한 후기지수들은 등용하사 슬금슬금 당상을 채웠다.홍문관 교리며 문형 하래 검서관이며 성균
관에서 들어온 이들,서얼이라 과거를보아 올라도 앞길이 막히었던 인제들이 하나둘씩 상의부름을 받아 올라앉았다.
보이게도,보이지 않게도 성근 그물을 조정에 슬슬 드리우는 것이라.날카로운 칼이 달린 그물에 걸릴 자 그 누구인가.
전하께서 갑자기 도승지를 교태전으로 부른 것은 밤 깊어였다.
숙장문 앞으로 황이가 나아가니 장 내관이 등불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동온돌에좌정하신 전하.중치막 차림으로 자리옷을
옆에두고 있었다.침수 듭실 참인 듯하였다.
"부름받자와 신 황이 등대하였나이다."
"경은 지금 은밀히 나가서 지난 봄 알성과급제한 명단을 가져오시오."
"갑자기 알성과 명단을 보자 하시니 어인 하명이시옵니까,전하?"
"나중서 말을 할 것이니 가져오시오.단,뉘든 알지 못하게 하오.짐이 급하오."
윗전이 하명을 하시니 어찌하나.황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대청으로 나갔다.이미 늦은 시각이라 숙직번을 서는 이조관리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서고를 살며시 거닐며 다른 자료를 찾는척하다가 냅다 급제자 명단을 품속에 넣고 시침을 뚝 땄다.
보란듯이 다른 서책 두어 권을 보따리에 싸서 일지에 적고는 부랴부랴 교태전으로 다시 돌아갔다.
받쳐 올리는 명단을 받아 든 왕은 도승지더러 곁방에 나가서 기대려라 하시었다.밤 내내 문 하나 사이두고 왕이 앉은 동온
돌 불이 꺼지지 않는다.새벽 무렵 문이 열리고 황이가 빼온 서첩이 다시 돌아왔다.
"들고 가서 다시 돌려놓으시오.짐과 도승지 그대만 아는 일이오.짐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소."
"망극하옵니다.분부 봉행하옵니다."
황이 다시 그 서첩을 품에 품고 그늘만 밟고 이조 행각으로 돌려놓았다.
그 사흘 후 왕은 다시 도승지를 불렀다.그에게 밀어 놓은 것이 예닐곱 명 이름이 적힌 두루마리였다.
"팔도에 어사를 보낼 것이다.이리저리 하문하여 강직하고 꼿꼿한 이들을 고른다 하였거늘.그대가 다시 보고 불가하다 싶은
이는 제쳐라.아무래도 안즉 조하의 물을 덜 먹은 이가 좋을 것이다 싶어 이번서 급제한 이들을 보자 하였던 것이다.며칠 전에
미행을 잠시 나갔기로 짐이 궁궐에만 앉아 있으니 백성 사정을 너무 모르고 있다 싶어서 이리하다.경만 알고 있어야 할것이다
짐 안전에서 빨리 점을 치라!"
상의 분부가 엄하시니 도승지 황이,장 내관이 펴드리는 서안앞에 앉아 분주하게 글씨를 쓰는데 긴장하여 손이 덜덜 떨렸다.
'이제 조하에 피바람이 몰아칠 참이로다.아아,대체 얼마나 곡성이 높을 것인가?'
좌의정 일파가 권세 잡고 전하를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은 채 정사를 농단한 것이 근 십 년.그동안 백성들의 고혈 짜는 일은
얼마였으며 저들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저지른 고약한 일은 얼마일까?매관매직이 예사이며 권세 이용하여 재물 쌓고 전횡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인데 이제서 낱낱이 그일들이 가려질 참이었다.이 일이 전하께 명명 백백 알려지면은 조하 안팎이
완전히 뒤집혀지고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것이랴.
'전하께서 장성하시며 차츰차츰 영명하고 어진 눈을 뜨심이니.인제오롯이 밝아지심이 아니냐.한 번 하신다 하면 돌아봄 없이
냅다 앞으로만 나아가는 결단이 엄하신 분이다.아무리 가린다 하여도 좌위정 일파의 몰락이 불에 본 듯뻔하다.어찌 사직의
흥복이 아닐까.'
어사를 팔도에 내려보내는 그날이 전하께 조하에 뿌리박은 간신배들을 뿌리 뽑겠다 결심하신일의 시작이라.바로<을사의화>가
시작된 날이라 할 것이다.
한더위가 풀 죽어 물러가고 서늘한 이슬이 맑은 달빛처럼 맺혔다.천공의 달이 나날이 둥글게 여물어가고있었다. 참으로좋을시고!
풍년이로다.넓은 들판에 오곡이 무르익어 황금빛 바람으로 흔들이고 온갖 과일이 제 빛으로 익어가며 풍성한 향기를 흩날렸다.
한가위 날이다.한은<크다>의 뜻이오,가위란<가배>로서 <가운데>란 의미이니,가장 큰 가운데 날이란 뜻이다.명절을 앞에두고
온 도성이 번잡하고 즐겁게 웅성거리었다. 조하도역시 휴무이다.며칠 전 명절치레라 하여백미에다 육고기,어물,실과들까지
중신들 입으로 몇 점씩이나마 궐에서 내려간 참이구나.명절이라 하여 능에 거동하고 돌아오신 상감마마 시립하여 도성 돌아온
정안로,오후 나절에 번동 자택으로 교자를 타고 들어서는 한 인물이 있었다.
염소수염에 안색이 다소간 강팍해 보이는 오십 중년인데 이조판서 이훈이다.곧바로 외사랑으로 안내를 받아 주인과 독대하여
소곤소곤 밀담을 나눈다.갑자기 정안로의 음성이 한음 높아졌다.경악이 서려 있었다.
"참이렷다?암행어사가 파견된것이 분명한 것이야?"
"허면 도승지가 밤에 모래 왜 알성과 급제자 명단을 가져갔을까요?김 내관이 오늘 소곤거리기를 전하께서 그 명단을 밤 내내
보셨다 합니다.그리고 이내 도승지만 불러 앉히시고 한참동안 독대를 한 것인데 아무래도 제 예감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정안로는 이훈의 말에 입맛을 쩟쩟 다셨다.
"이판께서 그러하다면 그러한 것이겠지.보기 좋게 주상께서 뒤통수를 치시는구먼,허나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것이니 이제
와서 어쩔 것이던가?암행어사가 떴다고 팔도에 기별을 할수도 없는 것이고 ,기별을 한다 하여도 뉘가 어디로 나갔는지 어찌
알것인가?도승지를 움직여 보려 해도 금세 전하의 흉중을 살피는 역모로 낙인이 찍힐 것이니 이리도 못하고 저리도 못할
일일세."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다가 만약 어사들이 환도하여 지방 관속 비리를 낱낱이 까발리어 우리들 일에 파토를 놓는다 할
것이면 어찌할 것입니까?"
이조 판서 이훈이 초조하게 되물음하였다.얼굴에 가득히 먹구름이 가시지 않았다.이판 자리에 앉아 벼슬자리 팔아먹고 재물
이라 불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눈앞이 아뜩하고 살이 떨리어 마음이 도통 진정되지가 않으니 명절 인사 핑계 대고
좌상댁문을 넘은 것이다.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은 정안로 그도 마찬가지이다.저의 딸년이 강팍하고 심성 교만하여 성총 떨어지고 난 후 도무지 비빌
언덕이 없어진 터다.하물며 근 십 년 정사농단하여 권세 부리며 온갖 전횡을 부린것은 그가 더하니 전하께서 조하 뒤집자
마음먹은 것이 사실이라면 제일 먼저 ?겨날 이가 바로 저라.
"너무 그렇게 지레짐작하여 호들갑피우지 말고 일단 진정하게.만약 어사가 정말로 파견되었다면은 그들이 환도하기까정은
서너 달은 족히 걸릴 것이라.아직 시일이 있으니 천천히 같이 의논하여 방비할 수가 있어.우리쪽이 아직도 조하의 대세
이며 뿌리가 넓고 깊으니 전하께서 홀로 일을 함부로 처리하지는 못하실 것이야.나를 믿고 진정하여서 일을 가리시게나."
"대세라 함도 꼭 유리한 것은 아니옵니다.애먼 허물 잡자하면은 너희들이 무리를 모아 딴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도다 얽
어매기 딱 좋은 것 아닙니까?"
"....그렇기도 하구먼."
"하물며 영상으로 순암 대감이 입시하신 이후에 조하에 엉뚱한 인물들을 자꾸 올리지 않습니까?대세라 하여 꼭 안심할 것만
도 아니지요.휴우~요즈막 그저 눈앞이 캄캄합니다.그나마 혁이 도련님을 궐로 불러들이신 것만을 두고 보면 왕자로 인정하려
하시는 것은 아닌지?그리만 되면 큰 희망이라 보옵니다만은."
"데려간 지 벌써 보름이되 말씀이 없으시지를 않은가.처분을 하시려면 벌써 하시었겠지.중전마마께서 일단 아이를 아니
보신다 하니....그도 희망이 없네그려."
정안로는 한숨을 쉬었다.갑자기 내관이 나와 아이를 궐로 데려간다 하였을때 얼마나 난리가 났던지.언제나 김칫국부터 마시는
희란마마,드디어 왕자로 인정하여 주시나 보다 싶어 난리를 쳤다.당장에 세자라도 된양 의기양양하였다.
어른들이 난리라.철 모르는 어린놈 천지분간 하지 못하고 마치 제가 당장 임금이라도 된 양 가슴 내밀고 나불나불 까불었다.
헤어지는 마당에 그래도 천륜이라 눈물짓는 어미더러 호언장담.고사리 손으로눈물 닦아준다.
"어머님,울지 마셔요.어머님 우시면 저도 슬퍼 눈물이 납니다그려.저가 잘하여서 동궁 올라갈 것이여요.소자를 찾으시면 상감
마마더러 어머니를 다시 어여뻐해 주시어요,소청할 것입니다."
이놈이 왕자로만 인정 받았다면 내 팔자가 이리 몰락하지 않았다.희란마마 무도한 성질머리에 결국 나오느니 악설인데 결국은
왕대비전과 중전에 대한 원망과 증오였다.어미의 말을 듣고 있던 어린 혁이 놈.울며 맹세하기 독하고 모질었다.
"어머니.제발 울지 마셔요!저가 나중서 어머니 수모 준 그인간들에게 다 원수를 갚아 줄 것입니다.아무 걱정도 마세요.저가
잘합니다.금세 어머님을 보러 전하께서 월성궁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전하께서 예전에 내린 동개 짊어지고 제 어머니 찾는 주상 발길 가로막은 중전을 쏘아 죽일 것이라 대놓고 맹세하였다.
그 간악한 말도 위로라.희란마마 어린 아들 머리통 쓰다듬으며 어이구,내새끼,오직 너뿐이로다 치하하였다.
"천지간 이어미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오직 우리 혁이로구나.그래.아가 그고약한 중전 년,너가 반드시 죽여 버리거라!이 어미
수모 준 계집이니 실로 생살을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것이다!잘하고 주상전하 비위 잘 맞추어서 아바마마 한번 불러봐야지.
응?아니 그러하니?"
희란마마 청승맞은 눈물에 한탄조 사설이 한없이 장하였는데 그날,제 어미 무도한 악설 들으며 어린놈이 제활과 동개를 어루
만지다가 업혀갔다.어린놈 입가에 맺힌 웃음이 실로 야릇하고 잔인하였으니 무심코 한 한마디가 조만간 어떤 사단으로 변할
지 아무도 모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각설하고!여하튼 혁은 그렇게 그 밤에 궐로 들어갔다.
헌데 일 되어가는 양이 희란마마나 정안로 그의 셈속하고는 영 달랐다.
아나.쑥떡!염치없는 제 어미 소원대로 냉큼 동궁에 오르기는 커녕,성덕궁에도 들어가지 못하였다.말만 궐 안이지혁은 경덕궁
의 정강헌에 거처하게 되었다.그곳은 어린 왕자들이 잘못을 저지르거나 학업에 정진하지 않을때 근신하는 곳으로 말만 궐 안
인지 협소하고 답답하여 생감옥이라 해도 모자랄 곳이었다.
인제 겨우 일곱 살인 아이를 놓고 중궁과 대전에서 보낸 아지둘.글 스승 셋이 번갈아가며 차고 앉아 대쪽같이 무섭고 엄하게
다스린다 하였다.정강헌 주변으로는 무장들이 열두엇,날밤을 바꾸어가며 호위라.명목은 지킨다는 것이지만 실상은 아무도
들며나며 하지 못하게 막은 셈이라.혁은 졸지에 금고를 당한 셈이다.
상감마마 명 한마디에 죽고 살게 된 목숨이라,월성궁 쪽의 움직임이 조금만 이상하여도 아이 목을 눌러 버리노라 이런뜻이
아닐것인가?돌이켜 찬찬히 생각하니 혁이 궐로 들어간 것은 저들에게 가장 귀한 사람 하나를 인질로 고스란히 내어준
셈이었다.아이를 그리 만들어놓고 주상께서는 대체 어떤 염두를 하고 계시는지. 주상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중전
마마께서 그나마 어지시니,혁이 도련님 처지가 다소 편안합니다.김내관이 전하였다.직접 알현은 아니하시어도 정강헌으로
별찬도 보내시고 장난감도 보내주시고 의대도 지어주시었다 하였다.학강시간이 끝나면 아지를 시켜 궐 구경도 시켜주어라
하시었단다.그것으로 아이 목숨은 안전하게 된 것인가?
허나 불안한 처지는 어차피 마찬가지인 것.조만간 중전마마께서 원자라도 회임하시어 출산하시면은 정강헌의 혁은 대체
어떤 운명이 될까?
"도련님이 아니 계신 터로 큰마마께서 더욱더 심란하시겠습니다."
"말 아니하면 모를 것인가?지난번 주상 환후 편찮으실때 궐문 닫혀 입궐치 못한고로,병중 간호를 하지 못한것이 죄지 무에야?
하여 무정하고 고약하다 헛된 구설은 다 받았지.섭섭하신 터로 상감께서는 내쳐 외면하시지.이미 성총이야 중전마마께서
채어가신터로....휴우,앞날이 아니 보이실 게야.내가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다 보면 잠이 오지를 않네."
사랑채에서 제 아비 정안로,입맛을 다시 쩟쩟 다시지만 그 앞길 열어줄 방도가 보이지 않으니 어찌하리요?그저 막막한 근심
인데 희란마님 도사리고 앉은 별당도 그 사정이 별다르지 않다.
그저 적막한 별당.눈물젖은 희란마마이다.
화원을 멍하니 바라보는 희란마마,달덩이 같고 모란꽃같던 얼굴이 어느새 초췌하고 말라비틀어진 수세미라 반쪽이었다.가꾸
지 않아 잡풀만 가득하고 시들어가는 꽃밭을 바라보는데 어찌 이리내 신세와 똑같으냐.희란마님 눈에 눈물만이 주르르
글렀다.처량맞기 이를 데 없는 노래 한가락이 애끓이 희란마마 입술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팔월 보로만,아으 가배나리마란.니믈 뫼셔 녀곤,오날날 가배샷다.아으 동동다리....구절한번 절묘하도다,누가 일러 이
희란의 심사라 하지 않겠나?암만,그렇지.님을 뫼신 날이 진정 가뱃날이지."
한창 전하의 성총 장할 적에는 참말 명절다운 명절이었다.문턱 닿게 바리바리 귀한 봉물 짐 싸서 이고 지고 드나들던 아첨꾼
들이며 뒤곁 보아주던 벼슬아치들이라 모두 어디로 간 것이더냐?사람 발길 딱 끊어지고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듯이 을씨년
스러운 풍경이다.떠오르기란 옛 생각이오,그립기는 한량없음이다.희란마마 볼에 다시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고운 꽃 장하게 피어난 후원꽃밭 앞에서 주안상 차려라 하시었지.달빛 무르녹는 저 꽃밭에 앉아 손수 한 가지 고운 훨계화
꺾어 귀 뒤에 꽂아주시며 이꽃보다 누이가 더 곱소 하시었지.'
그리고서는 파격이라,한번 같이 질탕하게 놀아봅시다.껄껄 웃으시며 맑은 연못에 제 손 잡아끌어 텀벙 들어가시더니 아이고,
진진하였지.다정한 한 쌍의 금린어인 양 저를 안고 온갖 희롱을 하시며 그저 짐에게는 누이뿐이오!하시던 맹세는 아직도 귓
가에 쟁쟁한데 다정하신 그님이 오늘날 어찌 이리 차갑게도 나를 외면 하시느냐?혹여 마음 풀리시어 한번 불러주시려나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구나.명절이라 유난히 그리운 님의 얼굴.같은 하늘 아래 있어도 보지 못하는 아들 생각에,떨어진 성총에
대한 분함에,중전에 대한 악한 미움이 첩첩하니 희란마님,눈물대신 이번에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탄식에 원망이라,저 밉살맞
은 달은 어찌 저리 하얀하고 동두렷하여 심란한 이내 마음을 할퀴고 뒤집어 놓은가.
'참말 야속하시오,주상.고년이 어떤 수단 부리어도 전하와 나 사이 정분은 끊어질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전하께서 내게 평생
책임지마 약조하심을 잊으신 것입니까?흑흑흑.'
허나 월성궁의 희빈마마,궐 안의 전하께서 지금 공조와 호조관리를 불러 월성궁을 뜯어 경덕궁 서문당을 개축하는 데 쓰고
재성에 알맞은 기와집을 한 채 알아보아라 하명하고 계신것을 어찌 알랴?책임지마 한 약조 지키기는 하되,재물 넉넉이 주고
아들딸려 살게 해줄 터이니 게서 조용히 엎드려 살아라 대처분을 결심하심이라.
한하늘 아래 서로 다른 두마음.희란마마,이날도 황금 수백냥 들여서 중전 뒈져라 악살 쓰고,상감 성총이여 돌아오라 비방
붙여도 소용없다.여하간에 이렇게 저렇게 조용히 숨죽이고 살면 누가 무어라나.
일생을 안락하게 살게 해주마 나름대로 고심하시었다.중전의 마음을 다소상하게 한다 하여도 그이 평생을 짐이 책임져야하오.
모자를 재성으로 내려보내 살게 하여줍시다 의논하는 상감마마. 그얼마나 어질고 훌륭하시냔 말야.
지아비 뜻이랴,좋이 순응하옵고 직접 바늘 들어 혁이 놈 의대도 지어주시는 우리 중전마마.또 얼마나 심덕 고우시냔 말이다.
복은 제가 스스로 짓는것이며,차지할 자격이 있는 인간만 누리는 것이라.그렇게 희란마마와 혁이 놈,평생 풍족하게 안온하게
살 팔자가 기대리는데....크흠!강팍지고 교만하며 악독한 꼴만 보아온 혁이 놈이 큰 사고를 치고 말았구나!대복을 걷어차고
제 손으로 무덤을 파고 말았구나.
급하오.님네들아.재게재게 다음장으로 넘어가시오.
====제8장 자업자득(自業自得)====
교태전.경훈각.
중전마마.월성궁에서 아침나절 들어온 서간 읽기를 마치고는 곱게 접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김 상궁에게 내밀었다.
"사위스럽다.갖고 나가 태우시오.아이들 시켜 재는 갈무리하여 궐밖으로 내다 버리고."
읽기는 읽으셨되 마음에 몹시 차지 않음이라,정결한 그 성품에 같잖은 계집이 보낸 글줄 하나도 교태전 안에 놓아두기가 꺼려
진다 그 말씀이다. 윤 상궁이 찻잔 받쳐 올리며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옥안에 노화가 어리셨나이다.여전히 그계집이 천지분간 하지 못하고 같잖게 자불거리옵니까?"
"말로는 간청이되,앙앙불락하는 뜻이 글줄에 스며 있음이라. 무도한 그 성정 하나 달라짐이 없음이야."
중전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소반에 놓았다.눈살을 찌푸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푸른 비단처럼 깨끗한 하늘에 하얀 구름이
둥둥.그 아래로 검은 바늘땀인 양 규칙적으로 줄을 벌려 기러기 떼가 날아가고 있었다.
"제 사정이 나락이라,어찌하든 빌붙어서 살길 찾아보자는 게지.대궐 한번 들게 윤허하시어 회복하신 상감마마 용안을 한번
뵙기를 청하옵니다.여인네 마음이라 다 독같은 것임에랴.정이느이 안위를 걱정하옵니다 이렇게 써놓았네.저도 주상의 계집
이다 이말인 게지.알현하고 말고는 주상 마음이지.왜 발톱 때같이 여기던 나더러 새삼스레 간청하는 것이야?'
"킁,염치없도다.그 계집!전하께서 밉살맞다 대로하시어 정 딱 떨치고 나신 후,발등에 불이 떨어졌나 보옵니다.그런 계집을
왜 두고만 보고 계시는고?아주 작살을 내시지요?"
"주상의 성체를 모시던 계집이니 아무리 내가 괘씸타 하여도 극형은 못할 것이야.두어 달포 안으로 그 계집을 재성에 내려
보내는 처분을 하신다 하니 두고 볼일이지."
"소인은 그계집이 하는 양을 볼작시면 독사같이 악랄하고 간특하여서요.곁에 두기 영 꺼려지는 인간이라 가능하면아예 명줄
을 끊어버리는 것이 화근을 제거하는 것일 겝니다."
윤 상궁의 말에 중전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 겨우 한마디를 하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도 안될 일이지만,또 궁지에 몰린 사람을 바락바락 밀어버리는것도 못할일이오.선한끝은 없어도 악한
끝은 있다하니 꼭 그리할 것만 아니지."
중전마마 일어나시어 방문을 나서시었다.꽃신 신겨라 월대 앞의 나인에게 발을 내밀었다.
"금원 나가련다.금린어들이랑 복동이 여물 줄 시각이야.상감께서 궐을 비우신 터이니 한결 한가하구먼,나 금일은 서경당에서
침수할 것이니 차비하시오."
금원 짐승들에게 줄 여물을 든 동구리 맨 나인들을 앞장세워 중전은 후원으로 나갔다.고개 넘어 부용정이라.이맘이면 다다다
달려올 복동이가 아니 보인다.오늘은 이놈이 어찌 아니 보이노?잠이 들었나.고개를 갸웃하며 중전마마 발길을 옮기시다가 갑
자기 화들짝 놀라시었다. 따라오던 중궁전 상궁,나인들도 전부 다 깜작 놀라 얼어붙었다.분명 땅바닥의 붉은것이 핏자국이
아니냐?갑자기 중전마마께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셨다.
"아이고머니나,복동아!"
중전마마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어젯밤에만 하여도 멀쩡하던 복동이가,상감마마 지어주신 제집 앞에서
혀로 소금 핥으며 재롱 떨던 그놈이 화살을 맞고 몽둥이로 때려 맞아 저만치에 퍼들퍼들 경련하며 죽어 나빠져 있었다.
"아니 된다,아니된다!복동아,죽으면 아니되어!복동아ㅡㅡ!"
고함치시며 중전은 달려갔다.볼에 눈물이 줄줄,꽃신이 벗겨져 맨발로 달려가는것이 흡사 반 미친 모습이었다.항시 단아하고
법도 어긋남 없던 중전마마께서 이리 아랫것들 앞에서 이성을 잃을 정도로 망극하게 슬퍼하심이라.얼마나 이 미물을 아끼고
사랑하신 터인지.
피투성이가 된 사슴의 머리를 가슴에 안고 상처를 손으로 어루만져 주며 아무리 이름을 부르고 슬퍼하여도 소용없다.기운없
이 끄륵끄륵하다가 마침내 숨이 넘어갔다.실성한 사람모양 중전이 애타게 죽은 복동이 이름을 부르고 낯을 비비며 살아나라
애원하여 보지만은 이미 죽은 미물이 어찌 대답을 할 것이며 어찌 뛰어 놀 것이던가?
"전하께서 너를 내게 데려다 주셨느니라.이 몸더러 사모한다 하신 정표였거니 너는 실로 내게 자식이었다.복동아,흑흑흑,이
몸이 천제연서 죽기를 각오할 적에 너가 치맛자락 물어당겨 살리었으니 너는 이 중전 생명의 은인이다.흑흑흑,복동아,복동아
일어나거라.죽으면 아니된다.제발 일어나 뛰어보거라,복동아!"
지엄하신 중전마마의 망극한 모습을 차마 마주 바라보지 못함이라.아랫것들 전부 다 눈물 흘리며 고개 돌린 채 옷소매로 눈
물을 씻었다.아연 노하여 윤 상궁이 시위 군졸들에게 바락바락 호령하였다.당장 복동이 죽인 불한당 놈을 잡아 대령하라!고
함을 질렀다.
"이 사슴이 어떤 사슴인지 댁네들도 잘 알 거이 아니오?전하께서 중전마마께 직접 잡아다 주시어 중전마마께서 애지중지 기
르시던 미물이오.흉적을 잡지 못하면은 이날 대궐에서 피바람 장할것이다!당장 잡아오시오!"
기막힌 기별을 받은 내금위 무장들이 우다다다닥 달려왔다.너무 기막힌 광경에 그만 바닥에 꿇어 엎드리어 죽어지옵니다!
하고 목을 내밀었다.내,외금부가 발칵 뒤집혀질 참이었다.대궐의 경비를 어찌하였기에 대궐서도 가장 깊은 금원까정 사사로
이 침입한자를 막지 못했단 말인가?
작은 일로는 복동이가 죽은 일이되 큰일로는 전하의 안위에구멍이 뚫린 참이다.혼백이 반이나 나간 금부 군졸들이 아연 긴
장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려갔다.
"도령님이 막무가내 침입하시어 저지른 일입니다요!저희들이 막았는데 그만 고집 부리어 들어가신 것이오!우리는 모르는 일
입니다!살려주시오."
두어 식경 후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둘 병정이 오랏줄에 묶여 끌려왔다.그뒤로 화살통 메고 피 묻은 몽둥이를 아직도 움켜쥐
고 있는 아이가 대롱대롱 끌려왔다.혁이 놈이다.
어른들의 눈을 피하여 경덕궁으로 통해 있는 금원으로 무엄하게 침입하엿는데 이놈 눈에 쪼르르 뛰노는 귀여운 사슴이 보인
다.제가 끌고 가서 탈 것으로 쓰려하였는데 이놈이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왈칵 불쾌하고 분노하여 활로 쏘고 몽둥이로 뚜
드려 마음껏 분을 푼 것이다. 제 어미 닮아 똑같이 무도하고 잔혹하였다.
비로소 진정 하시는 기미가 보인 중전마마께 윤 상궁이 가만히 아뢰었다.
"저 어린놈이 활을쏘고 몽둥이로 복동이를 때려 죽였다 하옵니다.꿇어 엎드린 두 놈은 저 어린것의 수하라 하옵고요."
중전마마,오랏줄 묶여 흙바닥에 꿇어앉혀진 수하 두놈과 도령복을 맵시있게 차려입고 피묻은 흉악한 것을 움켜쥐고 있는어린
것을 보려보았다.허공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은 혁이 놈과 중전마마 시선이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