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조 어린 독백,왕이 누구에랄 것도 없이 스스로 답하였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었겠지.어린 나이로 아비를 잃은 사고무친한 불쌍한 고아였을뿐!짐은 또한 후궁의 소생이었으니
서자라.변변한 과거 한 번도 치르지 못하는 불쌍한 신세였을것이며 천성이 격하고 다스려지지 않는 성급한 성품이 못된터라
아마 살기가 팜 힘이 들었을 게야.훗후.그런데 말이야 짐은 불행하게도 왕으로 태어났지.흠.문제는 바로 그것이구먼.짐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천하 그 자체인것.그래서 좌상은 못난 짐을 잘났다 안감힘을 다하여 칭찬하고 떠받들어 겁도 없이
이 천하를,짐 자신을 망치게 하였지.짐의 죄는 바로 그것이야.그렇지 아니한가,도승지?"
"망극하옵니다.전하!망극하옵니다!경솔하고 미천한 신이 감히 성상의 깊은 심기를 헤아리지 못하고 망언하였으니 이죄를
어찌 씻을 것입니까?"
황이가 엎드려 울먹이며 절규하여 대답하였다.스스로를 비웃는 왕의 그말에 황이는 지금껏 주상 당신의 가슴속에 잠긴 내밀
한 뜻을 다 읽은 것이다.너들이 보는 것처럼 짐은 어리석은 허수아비가 아니니라 이런 강력한 반발.왕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세상 자체가 거꾸로 돌아간다 할 것이면 망언이라 하는것이 진실이겟지!핫하하.그대의 말은 맞아. 짐이 이미 약관을 넘은
지 오래라.친정.하여야지!암,하여야지.허지만 경은 알까 몰라?열한 살에 짐이 보위에 올라 지금껏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가진 것이 있음이라.처음부터 지금까지 병권은 짐의 것이었어.안그런가?"
왕은 빙긋이 웃으며 옥새를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희미한 미소가 은밀하면서도 잔인하였고.겸손하면서도 자신만만한 것이었다.
"말 등에 달라붙듯 억지로 올라타고 재성의 신위영을 처음 돌아보던 때가 생각나는군.짐은 어째서 한인이 해마다 짐을 굳이
돌아가며 각처의 병영으로 친림을 하게 하였는지 몰랐어.게다가 다른데는 두어두고 재성의 신위영에는 해마다 나가서 무과도
치러주어야했고 또한 항시 그렇게 뽑은 무장들만을 중용하고 곁에 두어야 했는지 몰랐어. 그런데 어느순간 알 것 같더군.
그렇게 함으로써 짐은 어느새 짐의 말 한마디이면 죽고 사는 강병들을 길렀던 게야.벌써 십이 년인가? 지금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병영인 재성 신위영 무사들이 모다 칠판만. 일당백인 궐 안의 무장들이 사오천.기껏해야 사오백 오합지졸 사병들
쯤이야 언제고 짐의 말 한마디이면...핫하하,재미있군.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짐더러 허수아비라 말을 한다?"
왕이 성안을 탁 쳤다.당당하게 내뱉었다.
"좋아 ,좋아!그렇게 생각하라지!그럴수록 오히려 짐은 편안하니 말이야.옥석을 가리는 데는 어리석은 바보 흉내만큼 좋은 것
이 없으며 속내의 말을 듣는 데는 귀머거리 흉내만큼 더이상 가는 법이 없지. 타초경사.섣불리 건드리면 뱀은 놀라 도망
가는 법.핫하하,짐은 단번에 천년 묵은 늙은 이무기까정 잡을 참이오. 짐이 아무리 멍청 하여도 그래도 용은 용.핫하하.
경은 알 것이오!"
황이는 조복의 등이 진땀으로 축축함을 느낀다.
천하에서 이분을 진정 알고 있는이가 몇 사람이나 될까?방탕하고 격하며 마구잡이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 상감마마
당신이 실상은 너무도 치밀하고 잔인하며 심기가 깊으시니 모다 헤아리며 짚어가며 그저 때를 기다리시는 중이라니.
황은 무엇이 그리 유쾌한지 한참 동안 빙긋이 웃으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
생각하자니 짐이 만하오.그렇지 아니하여도 짐이 이 근래.농번기가 끝이 나면 저 북도로 하여 송도며 재성.아산의 중수영으로
하여 한번 주욱 군사들의 일이 되어 가는 모양을 보고 싶었던 참이라.효성 숙부도 유난히 궁금해하시는고로 불랑기포를
자랑하여야겠소.게다가 미수의 공이 실로 크니 상급도 내려야지.지은 그이를 공조참판으로 올릴까 하오.중인이며 게다가 서
자라.미수가 공조참판으로 올라갈 것이면 아마 또 소인배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불가하다 난리를 치겠지?하지만 일을 잘하여야
벼슬도 올라가는 것이지.핫하하.뱀 떼들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줍시다 그려!시각이 늦었소.경도 퇴청하시오.짐도 내전으로
돌아가리다."
일어난 왕이 몇 걸음 걸어나가다 슬쩍 몸을 돌려 부복한 황이를 바라보았다.
젊은 왕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경은 참말 충신이거든.고언하여 주기에 충신이아니라.짐 속내를 재빨리 읽어주지 않느냔 말이야.짐 역시 이 며칠 새로
비를뫼시러 송양 행궁으로 거동 나갈 핑계만 만들고 있었거늘.도승지 그대가 역시 영리하거든.척척 알아서 핑곗거리를 만들
어주니 어이,참말 그대가 충신이로고!"
==제5장 재회(再會)====
그 날 중전은 사친께 여름치레로 보내 드릴 모시옷 마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랜 바느질에 눈앞이 침침하여 잠시 쉬고지고 하며 바늘을 놓는데 고변이 들어왔다.
"중전마마,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대궐서 전령이 내려왔다 하옵니다."
"아니,나흘 전에 내려왔다가 간 터로 갑자기 다시 전령이 오시다니 무슨 일이냐?대궐에 무슨 사단이 생긴 것이냐?당장 뫼시
어라."
김 상궁이 바깥으로 난 창을 열었다. 몇 번 오간 터로 낯이 익은 전령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문안 인사를 들인다.
비단 보자기에 싼 함을 중전 마마께 바쳤다.
"상감마마께서 중전마마께 올려라 하신 봉물이옵니다.허고 성상께서 이르시기를,내달 초에 중수영에 친림을 하는 고로 그 기
회를 이용하여 할마마마를 뫼시고 행궁으로 행보할 참이라.부디 그때에 아름다운 옥안이 회복되신 것을 뵈옵기 바라노라
하셨습니다."
즉 전하께서 왕대비전과 더불어 유월 초 닷새 날 즈음에 송양행궁으로 오신다 그말이다.
뜻밖이나 참으로 반가운 기별이니 중전마마 동그란 눈이 반짝 빛났다.
"존허께서 중수영에 친림하사 이리로 내려오실 것이라고?그것이 참이냐?"
"예,마마.중수영에서 불랑기포를 만들어 성공을 한지라 모든조하 중신들을 이끌고 친림하사 그의 위력을 보옵시고 상급을 내
리리라 들었습니다.장한 행차이니 온 대궐이 난리법석입니다."
전령이 절하고 물러났다.중전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상감께서 보내신 비단 보자기를 펼쳤다.작은 자개함이 들어 있었다.
밤이 새도록 씨름하였거니 아무래도 이 이상은 어렵소이다.허니 중전의 어진 마음으로 가납하오.
함에서 나온것은 깨어졌던 희빈마마 옥지환이었다. 중전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필시 서투른 손으로 직접 하신 것이렷다?
아무리 하여도 옥지환이 붙을 리가 있나.덕지덕지 칠을 한 아교풀 때문에 간신히 붙었다.그위에 명주실로 친친 감아 놓았으
니 옥지환이 아니라 색실지환이 되어버렸다.그렇게라도 하여서 깨어진 가락지를 이어주고 싶다는 뜻이라. 이렇게 우리도
다시 연분을 맺읍시다 그런 뜻이 아니더냐?
보스스 사랑스럽기도 하고 수줍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싸한 미소가 중전의 입가에 걸렸다.
벌써 넉 달여. 심중의 상처는 많이 아물고 새살이 돋아난 터로 그위를 채운 것은 아련한 사모지정과 그리움이라. 곧 뵙게
되겠거니.중전의 고운 눈빛이 후원의 백일홍 꽃잎 사이를 맴돈다.
한편 복내당에서 물러난 전령은 송양ㅇ부에서 임시로 거처라고 있는 정안로에게 들어갔다,
명색이 정승이되 귀양 오듯이 행궁으로 내려와 중전마마 번이나 서는 처지가 된 셈.참으로 답답하고 괴로운 그였다.
그런 그에게 전령이 왕의 전교를 내밀었다. 내일 당장 환도를 하라 하는 분부였다.
이제야 노염이 풀리어 나를 용서하시고 다시 부르시나 보다 희희낙락.그러나 상감마마께서 내달 초에 행궁으로 거동을 한다
는 말에 얼굴빛까지 변하며 깜짝 놀랐다.
"여하튼 격하신 분이로고.쯧쯧쯧.아리수에 가교 놓자 하는일이며 사람들 징발하는 일이 어찌 그리 쉽게 될 것이라고 보름
남짓하여 당장 행차를 하신다 하는가?"
"그렇지 않아도 그런 문제가 있다 하여 오시는 길에는 수병되어지는 것까정 보신다 하시면서 바닷길을 이용한다 하셧나이다.
하여 지금 도성서는 배들을 수리하고 난리가 아니랍니다.돌아오시는 길에만 가교를 이용하실지니 별다른 문제는 없다 합나다"
"황대비전하를 동행 하시는것이 사실인?"
"당연하옵지요.하교하시기 휘강전 전하께서는 지난날 여군주로서 정사를 담당하셨고 짐의 뒤곁으로 사직을 한동안 감당하신
공적이 있으신 분이라.당연히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 참석 하실 자격이 있다고 천명하셨다 하옵니다.두 분께서는 중수영의
군사 행사에 참석하신 다음에 행궁에 오시어 잠시 휴식하시고 중전마마를 모시고 가실 참이라 하셨나이다.재성에 가시어서는
별시를 거행하고 무과 시험도 치른다 하셨나이다."
정안로는 쯧쯧 쓰디쓴 입맛을 다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거리끼고 선뜻한 이야기뿐이었다.
조금 나아지리라 기대하였는데 오히려 더 얽혀가고 수렁에 빠져 가는 듯한 느낌.솔직히 한참 척지 않던 왕대비를 왕이 먼저
나서서 여군주라 칭하면서 모시고 행차를 한다는 것에 간이 덜컥 떨어진다.
"그런데 그런 대행차를 하실양이면 여기서도 준비를 할 것이 많은데 어찌 나더러 다시 환도를 하라 하시는 것일까?중책 맡을
사람이 예에도 있어야 하는 것이거늘...."
"듣잡기로 내일이면 우의정 대감께서 도착하신다 합니다. 대감과 직무를 교체한다 하십니다."
정안로는 또다시 텁텁한 침을 삼켰다.
정작 왕이 행궁으로 오신다 하는데 저를 도성으로 올려 보내고 우의정을 내려 보낸다? 인제 자신을 조하의 모든 일에서 배제
시키려는 것일까?절대 권력을 가진 왕의 측근에서 밀려난다 함은 곧바로 조하에서의 몰락이라 캄캄한 나락만이 있는듯하여
저절로 손이 떨렸다.
욕심이 과하면 반드시 화를 부른다 하였다.자신과 제 가당찮은 욕심보가 결국은 이렇게 죽는 꼴을 부르고 화를 심었도다.
몰락만이 기다리고 있는 앞날이 두려워 정안로 삼복더위 안에서 몸이 오싹하다.
하여튼 날은 흐른다.
손꼽아 기다리는사람에게 시간이란 더 없이 지루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쏜살처럼 달려가기도 하는것이다.
바닷길로 내려오시는 상감마마 거동이 송양 근처 아포나루에 도착하였다는 기별이 저물녘에 행궁으로 달려왔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시면은 아마도 정오 무렵에 도착되리라 하셨나이다."
두근두근하는 심장의 고동 소리를 진정할 수가 없다.
중전은 두 볼에 익은 복삿빛 홍조를 감추려 두 손으로 화끈화끈한 얼굴을 살며시 가렸다.
멀리 떨어져 있거니,하였을때는 차라리 괜찮았다.
허나 지척간에 그분이 와 계시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이다.
두근두근 파동치는 설렘이 여간해서는 가라앉지 않았다.
더 깊은 그리움으로 함초롬이 젖어 들었다.
그밤이다.
어쩐지 늦다이 잠이 도통 오지 않았다.
근심이거나 걱정거리 하나도 없는데 묵직한 돌이 작은 가슴에 얹힌 듯,명치 끝이 쓰라린듯 안절부절 .참으로 이상한 심사였다.
결국 왕비는 자리에 일어나 문을 열고 뜨락으로 나서고야 말았다.
핑계라.손톱에 물들일 봉숭아 꽃잎이 피었나 본다는 것이지만, 그런 일일랑은 밝은 날 하시지 뜬금없이 깊은 야밤에 왜 갑자
기 그러시노?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게지? 참으로 방정 맞은 심사로다.상감마마께서 지척에 와 계시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진정치 못함
이라. 체통도,위엄도 다 잊어버린 터로 마냥 용안이 그립고 보고 잡고 그러는 것이....휴우.다정도 병이라 하였는데.아이고.
민망스러워라.내가 이밤에 고약한 상사병에 걸렸구나.'
흔들리는 마음이 마음먹은 대로만 움직여 주면 무엇을 걱정해?
머리로는 내가 이러면 아니 되지 하였지만.저절로 꽃신 신은발이 자꾸만 문밖으로 향한다.
복내당 중문을 기어코 넘고 말았다.
꽃잎이 벌어진 안뜰을 오락 가락.괜히 서성이다가 누루에 오르시는구나.저쪽에서 말 타고 오실 것이거니....먼 데 보일리도
없건만 저 멀리 어둠에 잠긴 길 모통이쯤을 바라보다가 돌아서는 중전의 좁다란 어깨에 너울거리는 달빛이 바라에 쓸려
흐른다.
"인제 그만 침수합시오.야심하옵니다."
"이것만 끝을 내려하지.나가서 침수하오."
눈시울에 졸음기가 반이었다.허기는 벌써 삼경이다.중전은 윗목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윤 상궁을 내보내고 다시 바느질
바구니를 끌어당겼다.
그때였다.중전의 귀가 쫑긋 섰다.님의 발길 기다리는 여인만이 가지는 본능적인 에감.분명 말발굽 소리였다!
왈칵 반가워서 울음이 터질 것만 같다.수줍지만 그만큼 차 오르는 기쁨.중전은 화급히 문을 열었다.
서로 다투어 향기를 벌리는 꽃잎들이 가득 핀 뜨락 . 푸른달빛을 등지고 선 그림자가 틀림없이 거기 있었다.
훌쩍하니 키가크고 훤칠하였고 늠름하였다.설레고 기쁨 그득한 눈빛이 마주 합쳐졌다.
황이 활짝 웃으며 두 팔을 가득 벌렸다.
중전은 정신없이 버선발로 뛰어내려 가 그 품에 폭 잠겨 버렸다.왕은 그만 향기퍼럼 스며든 작은 몸을 와락 끌어 안아버렸다.
"그냥왔어,말을 달렸는데,아무 생각도 없었는데....이리로 와버리더군.지척에 계신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어,오지
않으려 하였는데,그만 예더군.중전 얼굴이 보이더군."
뜨거운 입김이 감격에 젖어 귓불에서 떨리고 있었다.
말하지 못한 것마저 다 들은 얼굴로 그저 세차게 고개만 끄덕이는 고운이 사람.
왕은 중전의 머리타래에 기이 얼굴을 묻었다.그득하고 기꺼운 터로 세상이 다 환하였다.
늘외롭고 공허하던 가슴에 따사롭고 온유한 해가 그득히 담기었다.
'아아.,이제는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테다. 소중한 이 사람을 곁에 떨어뜨리지않을 것이다.'
오래도록 말을 달려온 왕의 몸에서는 땀냄새가 진하게 났다.허나 싫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고 밤 내내 달려온 그분의 진심을 알았기에.그 간절 하고 사무친 마음을 읽었기에.중전은 두 팔을 내밀어 그분을
함뿍 다시 안아드렸다.촉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일이면 뵈올 수있는것을...."
일각이 여삼추.짧으되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커다란 손으로 보드라운 볼릉 어루만지며왕이 격하이,성급하게 채근하였다.
"오래토록 뵙지 못한 터로 보고픔이 골수에 사무친 게지.인제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테야.그리워서,보고 잡아서 견딜 수가
없었어,그대가 아니오시기에 이리 짐이 왔어. 그대를 모시러 왔어."
침방의 문이 탁혔다.새어 나온 불빛 아래 검은 그림자.
하나로 엉킨 두개의 몸이 스르르 바닥으로 쓰러졌다.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소리가 더없이 장하였다.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 허공에는 바람이 선들. 곡절 많고 구구절절 사연깊어, 그래도 내쳐 사모하고 은애하는 마음을 자르지
못한 두사람이 마침내 다시 연분 이어 재회한 밤이다.톡 하고 향기로운 꽃잎이 바람에 날려 떨어진다. 꽃이 진 그 자리에
어리고 귀여운 열매 하나가 맺혔다.
오랜만에 만난 윤 상궁과 장 내관. 미소 지으며 돌아서서는 중문을 닫았다.
왕대비전과 상감마마의 거동이 송양 행궁에 도착하신 것은 낮수라 즈음이었다.
"중전을 보시면은 그저 말태 고이 하시고 부드러이 대하여주시오,섬약한 사람이 아니오?인제는 잘하여 주시구려."
도중에 어가를 잠시 세우고 악차안에서 소반과 받으시었다.괜한 근심이라,왕대비전하께서 당부하였다,왕이 싱긋 웃었다.
당부하는 그 말에는 대답치 아니하고 할마마마 상의 주발 뚜껑을 손수 열고 음식을 권하였다.
"더운 날에 찬품이 변하지 않았는지 소손이 근심하나이다.짐이 직접 기미하겠습니다.원로에 힘이 드실터라 행궁 도탁하시
면은 푹 쉬십시오."
황공하여라.상감께서 직접 왕대비 전하의 찬품을 기미하고는 인사를 마치고 장막을 나섰다.노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시립한
주변을 바라보았다.
"기이한 일이야.어제보고 오늘 보되,주상 기운이 하루 상관으로 몹시도 다르구나.내내 오뉴월 장마 전 천공처럼 용인이
궂더니.,어찌 그리 말짱하게 개였을꼬?"
이러는데 장막이 젖혀졌다.
뜻밖에도 중궁의 김 상궁이 나인을 딸리고 벙싯 웃으며 악차로 들어왔다.
고두하여 절하였다.
얼음 둥둥 뜬 수단.오미자 물 고운 책면에다 부탯살 모양의 차수과.파란 오이가 말간 피안으로 비치는 규아상 재반.정성껏
장만한 음식을 붉은 상에 올려 바치었다,
"천세,천세,천세!휘강전 전하의 어진 옥인을 알현하옵니다.원로에 곤치 않으신지요?"
"그만 하느니,김 상궁이 오랜만이로다.헌데 예는 어지알고 온것이냐?"
"지난밤에 상감마맘께서 냉차 준비 하시어 마마께 상쾌한 기분 전하여라 하신고로 쇤네가 나왔나이다."
"뭐라?주상이어젯밤에 행궁에 갔더란 말이냐?"
"삼경 넘어 조촐아히 호의밀과 상선 영감만 딸리시고 잠시 달려오셨나이다.중전마마를 뵈옵고 두어 식경 머무르시다가 이내
돌아가신 줄 아옵니다."
왕대비전하 어이없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였다.헛러 웃으시었다.
"내가 중전더러 잘하여주시오 부탁하였는데 그냥 웃기만 아더구나,엇질이 성정이라. 또 고약허니 말을 아니 듣는다 하였기로,
무에야?지난밤에 벌써 중전을 보고 온것이야? 기가 막혀서....용안이 유난히 상쾌하고 늠름하시기로 어찌ㅣ그러나 하였기로
흠.중전과 만나 정분을 이었나보다.허니 기운이 넘치는게지.."
"감축드리옵니다,한 점의 저어함이거나 섭섭함없이 마냥 첩첩하고 진진한 정해라.그저 이 아침에 중전마마 옥안도 온화하시
고 즐거운 기운 그득하셨나이다."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 하였다.말 못하고 마음만 깊어 곁에서만 빙빙 돌던 그 이를 먼 데 두고 상감이 속앓
이 깨나 하였단다.인제 다시 뵙고 그마음이었으니 허기는... 아이고.날도 좋거니!어젯밤 하여서 내쳐 중전께서 잉태나 하였
으면 좋으련만."
"아이고.어마마마 급하시옵니다.겨우 두어시진.몰래 낯만 보고 돌아온 분더러 벌써 아기씨 타령입니까?"
명온 공주마마 한마디에 왁다르르,영인네들이 모인 악차에서는 웃음꽃이 송알 송알 한껏 맺혔다.
오정 지나 신시 무렵,번잡하고 화려한 상감마마의 거동이 송양 행궁에 도착하였다,
온천이 유명한 터이니 행궁이 생긴 이래로 상감마마나 왕족의 왕래가가끔 있어왔다,허나 이토록 장렬하고 위엄 넘치는 큰
거동은 동네가 생긴 이래로 처음이었다.
송양뿐 아니라 인근 고을 부중이 다 난리가 났다,구령하려 몰려든 사람들이 수풀같이 서서 목을배고 침을 삼켜가며 지존의
용안을 한 번이라도 멀리서나마 친견하려고 아우성이다. 지존의 행보에 방해가 될세라 병정들이 길 쪽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창대로 밀어내며 안감힘을 다하는데 여간만 힘든 것이 아니다.땡볕아래 땀이 뚝뚝 떨어지는 구나.
거동하시는 옷차림도 장하셔라.옥봉황립이 달린 흑립 쓰고 청남빛 융복에 광사대 매고 병부주머니에 환도를 찬 상감마마.
늠름하고 아름다우시다,칠 척의 훤칠한 키.넓은 어깨가 씩씩하다.
검미 아래 빛나는 눈동자,매섭고도 맑은 신광이 가득하시니 어찌 지존의 위엄이 아닐까.
사나운 검은 말등에 올라타시어 행렬을 선도하시는 구나,십 리를 잇는 긴 행렬의 말미가 부중에 들 적에 이미 주상 전하께
서는 행궁에 진입하시었다.
군사들은 무장을 풀고 오 리 밖 강변에 막사 차일을 쳤다.
따라온 중신들은 송양 부중의 행각과 행궁의 외행각에 서열대로 짐을 풀고 상감께서는 대전인 유여택에 죄정하시었다.
왕대비전하께서는 장락당에 내빈들과 듭시어 편안한 의대하시고 노곤한 몸을 온천물에누이셨다.
복내당의 중전마마.
그때쯤 하여 장락당으로 나오시어 왕대비전하를 알현하였다.
출궁할 당시.초췌하고 야위어 흡사 귀신의 형용이라고 하였던 중전마마 욕안이 너무 많이 변하였다.
거미줄같이 곱게 짜인 모시의대로 성장하고 옥잠 찌르신 그 모습이 더없이 우아하고 정결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