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200)

"무엇이든 짐더러 하여 달라는 말 한마디 아니하더니 학사더러는 하여서는  안되는 부탁까정 하는군"

어째서 그대는 짐이 아니라 다른 사내놈에게 의지하고 의논하느냐고 억지를 부리던 그마음은 얼마나 쓸쓸하고 좌절감이

 넘쳤을까?

"짐을 보아주오, 오직 그대를 바라보며 겉에서 빙빙 돌고 있는 짐을 바라보아주어.이렇게 그대를 사모하고 그저 기다리고 

있는 짐의 이마음을 제발 읽어주오."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차마 말 못하고 버럭버럭 억지노화를 내는 것으로 표현하던 그분. 자존심 강한 사내의 삐뚤어진 

 그 표현을 어린 그녀는 내내 몰랐다.

'짐은 항시 그대 앞에서는 마음을  가리지 못해. 언제나 있는 그대로 드러내게 돼.하시던 그 한마디를 내가 찬찬히 생각

하였더라면 우리가 이렇게나 멀어질 일도 없었을 텐데, 지금까지의 모든 불화는 주상께서 만든 일이거니와 실상 어리석은

이 몸 또한 자초한 것이라 할 것이다. 모다 어리석은 나의 잘못이야.'

중전이 송양 행궁으로 내려오기 바로 전날 밤이다. 

두분이 나란히 서온돌에서 같이 누우셨는데 한밤 내내 왕도 중전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 새벽이었다. 갑자기 왕이

벌떡 일어나더니 더듬더듬 말하였다.

 " 음, 음. 짐이 ,짐이 다 줄것이야 ! 꽃도 주고, 새도 주고, 가락지도 다시 줄것이야! 금원에 아름다운 별궁도 지어줄

것이며 고운 비단이랑, 보패 떨잠이랑 다 줄것이야. 금세 옥체 회복되시고 우서 달라 하는대로 다 줄것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가지마오, 짐을 떠나지 마오 하는 그 말은 끝내 하지  못하였다.다만 무엇이든 다 주겠다 그리하셨다. 

지금껏 어떤 여인네든지 당신이 무엇을 주면 방긋 웃던 터인지라 도도하나 사랑에는 서투른 그가 차마 떼놓을 수 없다 

여긴 사모하는 어린 지어미에게 마지막 수단으로 뇌물을 주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그녀가 고개를 젓자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 제발 떠나지 마오. 짐이랑 같이 있읍시다. 짐 곁에 있으시오. 그대를 정말 보내기 싫소!"

그저 원망 서린 눈빛으로, 안타까운 시선만 가득하였다. 

그런왕에게 자신은 무엇이란 말했던가? 돌아올 것이라고, 회복된 다음에 웃음을 지으며 전하 곁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 

말하였던가? 왕은 다짐하듯이 내내 중얼거렸다.

" 오래도록 아니 오시면, 짐이 갈것이야. 짐이 찾아갈 것이야! 설사 그대가 새가 되어날아간다 하여도 짐 또한 새가 

되어 천리만 리라도 날아가서 모셔올 것이야."

"이 강토가 마마의 것이니 신첩이 어디를 간들 마마의 품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약조하오, 응? 돌아올 적에는 옥체 회복 하사 어여쁜 옛적 모습 다시 찾아오실 것이라 약조하오.

절대로 어리석은 짓은 아니할 것이라 약조하오!"

차마 그 손을 놓을 수가 없다는 듯, 다시 만날 때까지 그 얼굴을 자신의 기억 속에 각인시키기라도 하듯이 왕은 어린 지어미

의 그 야윈 손을, 얼굴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는다.

" 허기는 옥체 회복하시러 나가시는 길이니 짐이 기쁘다 하여야지 무어."

스스로를 위로하듯이 중얼거리는 그 말이 쓸쓸하였다. 인제는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다 느낀 것일까? 왕은 날이

 밝도록 중전의 

작은 몸을 당신의 그 품에 꼭 안은 채 싫어, 싫어! 그렇게만 중얼 거리셨다.

"짐의 곁에서 그대를 떠나보내는 것은 싫어. 이렇게 야위고 힘든 그대를 멀리 떼 놓는 것이 싫고 무서워. 그대가 가시면

다시는 아니 돌아오실까 봐 두려워하며 그저 기대리는 것은 정말 싫어."

" 아니 나갈 것이야! 그대가 가든 말든 짐은 아니 내다볼 것이야!"

동창이 밝아오를 즈음에 왕은 겨우 그 말만 했다. 원망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정말 왕비가 탄 수레가 교태전을 나설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한참 후에 전령으로 내려온 장 내관이 전하기를 왕은 수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후원 언덕

에 올라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있었다고 했다. 그 밤 내내 한잠도 주무시지 않고 매화 가리개를 어루만지며 아아, 비가

갔다 몇번이고 혼잣말을 하셨단다.

중전은 항시 곁에 두는 부채를 들어 잠시간 어루만졌다. 그 분의 손길인 양 서늘한 바람 사이로 그리운 향기가 밀려오는 

듯 하였다. '안녕은 하신지, 곤치는 않으신지.....주상께서 하실 일이 만기라 하는데, 얼마나 분주하고 힘들까? 내전에 이

몸이 없으니 아무리 아랫것들이 있다 하여도 모자르고 힘들 것도 있을 것인데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구나.'

무연하게 아뜩한 허공을 응시하는 중전마마 눈시울에 연연한 그리움이 안개로 여렸다.

장마 틈새 잠시잠깐 맑은 날. 모처럼 해사한 햇살이 대궐 뜨락에도 가득하다. 시퍼런 신록을 자랑하는 고목에서 맴맴 매암

매암 매미 소리가 요란하였다.

눅고 습한 날이라 편전의 사방 문은 시원하게 걸쇠로 떠걸러져 허공에 붙어 있다. 내관 두엇이 곁에 붙어 연신 부채질.

그래도 마주 앉은 두 사내 이마에는 땀이 변져 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년부터는 삼남지방 모두에서 그렇게 모내기를 하여서 농사를 짓는다 하는 것입니다, 전하. 전하?"

도승지 황이는 조심스럽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아까부터 왕은 그가 고변하는 말을 듣지도 않고 우두커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그리 용안에 심회가 그득하시옵니까? 심중에 무슨 심란한 일이라도 있으시옵니까?"

한참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어 대답이 없으시다. 왕은 어느 순간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아아, 하는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그가 아뢰는 말을 하나도 듣지 않았던 듯 용안은 다소 당황하고 미안스러운 것이었다.

"짐이 그대 말을 놓쳤군. 미안하오. 잠시 딴생각을 하였어."

"망극하옵니다. 곤하시면 그만 하올 것입니까? 이미 시각이 늦어질 사 신도 퇴청을 하기는 해야 하옵니다만은. "

"계속하오, 이미 이야기는 다 끝나가근 터인데. 그러니까 이앙법을 써서 추수를 한 터로 이는 그냥 논에 볍씨를 뿌린 것보다

는 적어도 한 마지기에 예닐곱 말가웃은 더 늘어났다. 이 말이 아니오? 이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오. 반드시 확대를 해야 

할 농법이라 생각하오."

눈은 딴 데 가 있었지만은 귀는 열어놓고 계시었나보다. 시원시원 교지를 내리신다. 글을 쓰리라 하시더니 굳이 당신이 먹을

간다 하시었다. 연적의 물 몇 방울 떨어뜨려 묵묵히 먹을 가시던 분이 문득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핫하. 도승지 그대가 제일 사사로워 말을 하는데, 아까 짐이 헛된 생각을 잠시 한참이라오. 벌써 단오라 하니 세월이 참 

여류하지무어야. 문득 떠오르기 부용지 물가에 백련이 피었을까, 중전께서 궐에 계셨으면 짐더러 보라 하여 은가위로

가득 잘라 수반에 담아 보내주셨을 것인데 그이가 아니 계시니 짐의 서재에 도통 꽃이 없어. 핫하하. 그런 일 저런 일을 생

각하다 보니 짐이 잠시 울적하였어."

이내 열쩍은 웃음으로 얼버무리시되 상감마마의 용안에 순간 스치던 것은 그리움이다. 고통같은, 혹은 상처 같은. 말씀으로

야 꽃 생각이다 하였지만 실상 송양 행궁으로 떠나보내신 중전마마 생각을 하시었구나. 황이는 직감하였다. 말없이 미소 지

으며 읍을 하였다.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 무안하였나 보다. 왕은 훌쩍 일어나 반쯤 열린 지창 앞으로 다가갔다. 뒷짐을 쥔채 아무 말도 

없이 잠시간 뒷모습을 보인 채 서 있기만 했다. 

'지금 중전마마 생각을 하신 게야. 그립다 싶어도 지존이시니 말씀도 못하시고 저리 홀로 서 계시기만 하는구나. 쯧쯧쯧.'

황이가 올려다보는 왕의 그 실팍한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중전마마를 송양 행궁으로 출궁시킨 지 벌써 두 달, 그때부터

지금까지 왕의 용안에는 웃음기 한 번 머금어진 적이 없다. 늘 외로운 빛이었다. 마치 십여 년 전 그때, 선대왕 마마를 

졸지에 잃고 또한 그 이태 후에 생모마마까지 잃어 버린 후에 그랬던 것처럼. 

가장 가까이서 매일같이 뫼시는 입장인지라 황이만은 상감마마 애타는 그 속을 읽었다. 이날처럼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되

상감 마마께서는 무심코 왕비에 대한 당신의 마음을 종종 드러냈다. 아주 사소한 것에도 문득문득 떠올려지는 그 사람의

흔적, 기억들.

중전이 떠난 후 왕은 절대로 녹차를 드시지 않으신다는 것에서 부터 그러하였다. 언젠가 장 내관이 어찌 그리하십니까? 되물

음하였더니 왕은 다소 쑥스럽게 웃으며 차는 비가 끓어야 제 맛이 난다 그러하셨다 하였다. 언제도 한 번은 취운정을 황이 

저와 지나가는데 그곳에 걸린 현판과 주련을 흘깃 바라보시더니 발길을 멈추었다.

"저 글씨가 참 좋지 않소?"

"힘차고 웅혼하옵니다."

"그렇지? 그래서 중전이 저이 원사의 글을 좋다 하여 글씨 연습을 할 적에 늘 여기 와서 하였소이다."

교서 내려 돌아오라 하시면 그날로 다시 환궁을 하실 분이었다. 그런데 중전마마께서 도통 궐 안에 계시는 것이 편안하지 못

하다 느끼심이라, 멀리 소원대로 피접을 보내주시고는 정작 당신은 홀로 그리워 속을 끓이시는 것이 분명하시다.

다시 돌아온 왕이 서안 앞에 좌정하였다. 삼남지방의 상소문 두루마리를 주르르 넘기며 그에게 손짓을 하였다. 

"역시 만서(만제용의 호)의 학문은 실용적이거든? 명국 가서 죽은 글만 배운것이 아니라 이렇게 백성 필요한 것을 익혀오니 

얼마나 좋소? 내년에는 규장각 서관들 너덧이 더 명국으로 보내겠소이다. 이앙법. 하, 거 얼마나 좋아? 일없이 말 많은 노

인네들 다 싸그리 굴비 두름 하여서 실학 공부 좀 하라 성균관으로 보낼까보다."

명국에서 새로운 농법을 배워온 학자들의 주장으로 영상도 땅에서 처음 시작하였다. 이태째 큰 성과를 거둔 터로 내년부터는

삼남지방 전부에 이앙법을 확대하여 실시하여라 하는 졀론이 날지도 모르니 시험적인 결과와 구체적인 농사법을 알기 쉽게

그림까지 곁들여 언해본으로 편찬하여라 하는 명민한 하교말씀까지 덧붙이셨다. 일이 끝난 터로 잠시 후 찻상이 올려졌다.

얼음을 동동 띄운 앵두 과편까지 곁들어진 고운 상은 궐 안이 아니면 구경하기도 힘든 치레라 할 것이다.

왕은 먼저 수단 그릇을 입에 가져가 맛을 보더니 황이에게 손짓을 하였다.

"음, 시원하군.경도 자셔보시오. 사직에 천신을 할 적에 앵두를 보고 이날이 처음이요. 열매가 잘고 씨앗 뱉기가 귀찮아서

짐은 앵두를 좋아하지 않는데 비가 이를 좋아하오.핫하, 실상 궐 안이 앵두나무는 궁중전 화계에 제일 많이 심어져 있소

이다. 그러니 짐이 앵두를 싫어한다 함은 저를 싫어한다는 뜻을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야. 그사람도 참!"

또다시 왕은 저도 모르게 중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왕은 우수에 찬 용안으로 망연히 앵두 과편을 내려다본다.

"중궁전 화계에 앵두나무가 많은 뜻은 아마 곤전과 짐 사이에자손이 많이 맺어져라 하는 모양인듯한데...

과인이 덕이 없어 그곳의 사람과 마음으로 맺어지지 못하고 정이 없었음인지라.여적 그곳에서 아기 울음소리 한 번 들리지

않은 터이니 어찌 앵두 나무를 바라보기 편안할 것인가? 하물며 짐이 몹시도 어리석은 터로 고약하고 쌀쌀맞아 어진 사람의

태중 아기를 잃어 버리게 까지 한지라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잊혀지지도 않고 그저 날이 갈수록 더 괴롭기만 하고... 하물며

그사람이 그일로 충격이 크신지라 이렇게 궐을 두고 멀리 행궁에 나가 계시기까지 하니 짐이 요즈음 도통 마음이 편안치

 않소."

왕은 은저분으로 앵두 과편을 집어 마치 쓰디쓴 약처럼 삼킨다.

이렇게 울적해하고 심란함이 용안에 그득한 분 앞에서 무엇을 더 응대할 수 있을것인가?

황이 또한 입을 봉하고 그저 달고 시큼한 신 앵두 수단을 마실 뿐이다.

"전하, 헌데 신이 아뢰옵기 언젠가 중수영에서 불랑기포를 비밀리에 제작케 하고 있다 하시지를 않으셨나이까?그일이 

시작된지 벌써 한 해이온데, 신은 몹시도 궁금합니다.그일이 성공하셨습니까?"

묵묵히 더운 바람이 부는 창밖을 내다보며 오미자 물을 마시던 왕은 갑작스런 도승지의 물음에 의아하여 고개를 돌렸다.

"미수가 그 기술이 정교하고 배어나 고치지 못할것이 없고 만들지는 못하는것이 없다 하거니, 아마 대강은 성공한 듯하오.

헌데 갑자기 경은 어째서 불랑기포 일이 궁금한 것이오?그 일은 특히 함구하라 명을 하지 않았소?"

명국의 북도 어림군에게 황금 수백 근을 주고 불랑기포를 빼내었다하는 일은 군사기밀이라, 그 일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도승지야 항시 전하 곁에서 배행을 하는 이인지라 자연스레 그일을 알게 되었지만 실로 그일에 대하여서 절대로 입밖에 

내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묵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승지가 먼저 나서서 그 일을 묻자 왕은 대답은 하면서도 의아하기도 하고 좀 놀라기도 하였다.

"어제 신이 병판 개감을 잠시 뵈었습니다. 이불랑기포라 하는 물건이 우리강병의 손에 들어온 것은 성상의 탁월한 지략에

의해 성공한 천우신조의 일이며 또한 그로 그친것이 아니라 미수가 각골분투하여 그를 그대로 제작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경사중의 경사라 할 것입니다,전하.불랑기포 그 일이 성공 하였다 하시니 드리는 말씀이온데, 이근래로 하여서 

친히 중수영에 친림하사 그포의 위력도 보옵시고 지금껏 고생을 한 미수 대감의 노고도 위로하여 주심이 어떠한지요?"

"흠, 짐더러 중수영에 친림을 하여 불랑기포의 위용을 안팎으로 드러내라고?"

왕은 도승지의 말에 잠시 침묵을 하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명민하신 분이라,도승지 한마디 말에 자신의 그행보가 어떤득실이 있을까 따지는 것이 분명하였다.

턱을 어루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기었다. 

비밀스럽게 진행하던 일이 성공 하였으니 이제 명국 눈치를 보지 말고 당당히 드러냅시다 하는 주장에 젊은 호기이며 강골

하시니 미리 생각지는 못하였되 구미에 당긴것이 분명한 표정이다.

왕이 새삼스레 정좌하였다. 황이를 바라보며 빙그레웃었다.

"아국이 비록 불랑기포 수십 문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이되 또한 명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음도 사실이오. 경이나 

병판이 주장하기로 게로 짐이 반드시 친림을 할 것이면 어떤 득실이 있을지를 경의 생각을 좀 들어봅시다."

"하문하시니 감히 말씀드리옵니다.우선 아국이 불랑기포를 제작할 기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명국이 알게 될 것이면 

분명 곱지는 않아 보일 것이되 또한 그만큼 아국을  무시하는 일도 줄어 들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또한 주상 전하께서

언젯적부터 무구를 개량하고 군마를 조련하옵시며 강병을 키우시니 항시 그 기색이 비굴하고 쪼잔하여 그저 대국에

붙어서는 아국의 사정을 무시하고 저들 영달만을 위하여 스스로 아국을 제후국이라 자칭하며 주상의 부국강병론을

헛된일이다 지금껏 반대를 한 궐 안팎의 일부중신들에게 전하의 꿋꿋한 의기를 보여줄 수있는 절호의 기회라 보여집니다.

그렇게 한 번 전하께서 강력한 위엄을 보이실 것이면 맹랑하게 성상의 위엄에 빌붙어 조정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에게

상당한 경계가 되지 않겠는지요?"

왕이 문득 눈을 치뜨며 정색하여 노려보았다.역시나 명민하신분이니 황이의 말에 첩첩히 감싸인 속뜻을 재빨리도 읽어내신것

이다.입가에 씩 걸리는 웃음이서늘하였다.

"경의 말이 실로 묘하군. 지금 경은 짐더러 군사들을 앞에세우고 이렇듯이짐의 힘이 강력하니 까불지 말라하고 위협을 한번

하라 하는 것 같소?그말을 다시 생각하여 보면 짐이 그렇게하여서라도 위엄을 세워야 한다 그런뜻이며 그것을 다시 뒤집어

보면 심히모욕이라! 경은 짐이 지금껏 중신들 앞에서 위엄이없었다 그렇게 말을 하고 싶은것이오?어쩐지 짐더러 진정한 지존

으로서의 위엄을 보이시오 하는뜻으로 느껴지오."

"신의 말을 잘 헤아려 들이시니 할 말이 더 없나이다.마마. 밍제는 진정 친정을 하셔야 할때이옵지요!"

와은 당돌하고 노골적인 도승지의 말에 그다지 노여운 빛을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싱긋 웃기까지 하였다.

"짐이 이미 팔 년 전에 <명일옥사>를 일으켜 짐의 눈과 귀를 막고 가리던 이를 모다 몰아내었지. 수렴청정을 하시던 할마마

마를 내전으로 물러 앉힌 후에 친정을 시작한 것인데 어찌 경은 짐더러 다시 친정을 하라 하는가?지금껏 짐이 대전에 앉아

하였던 일은 분명 정사를 보던 일이었을 것인데 어째서 다시 친정을 하라 하느냐이말이야?재미가 있소.더 말하여 보시오."

왕은 팔걸이에 어깨를 기대고 비스듬히앉았다. 

편안하게 그의 고언을 듣겠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장 내관을 소리쳐 불렀다.

"짐이 도승지를 독대하리라!재관이더러 어떤 인간이든지 이방에서 오십 보 이상을 접근하는 자는 목을 베어도 좋다일러라!

너도 나가라!"

독대를 하신다는 것은 심히 비밀스런 말씀을 나눔이니절대로 외인을 근접케 말라 하는뜻이다.

이것은  황이더러 어떤말을 하여도 짐은 들이 것이니 말을 하라 그뜻이다.

마침내 황이는 용기를 얻었다

배에다 힘을 주고 마침내 자신의 명줄을 깎을지도 모르는 엄청난 말을 입 밖으로 내고야 말았다.

"통촉하시옵소서, 신의 목을 베어도 할 말씀은 드릴지니 그때의 일은 전하의 친정을 위함이 아니라 좌상 대감 천하를 만드는

일이 아니었는지요? 세월이 십여 년을 헤아릴 참이니 보십시오! 조정의 태반이 저들이라, 오만방자하여 주상의 위엄을 

가로막고 눈과 귀를 가리여 그저 주상께 향락만을 권하며 무작정 저들이 하고 싶은 대로 나아가는 것이 실로 정도에서 벗어

나도 한참 벗어났습니다. 작년의 그 가뭄때의 일을 떠올려 보옵소서. 그때도 드러하지만 이번의 얼토당토않은 중전마마의 

일은 또 어떠하였나이까? 말도 되지 않는 망신스런 거짓을 조하의 구설로 버젓이 올리어 기어코 어진 중전마마께 죽어도 잊

지 못할 수모와 능멸을 주었나이다. 감히 저들이 무어관데 지존을 음해하여 그런 고약한 계고를 부린다는 것입니까? 

이는 주상께옵서 그들 앞에서는 위엄스럽지못하다 함이요, 저들이 떼로 몰아붙이면은 지존까지 기만할수 있다 그런 자신감

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이면 어찌 전하께서 지금껏 친정을 하셨다 할 수 있으리요?"

"갈!허면은, 지금껏 이 나라가 짐의 천하가 아니라 정씨 놈의 천하였다 말하는 것인가?"

" 아니다 말씀을 하여 보옵소서!신의 목을 치소서!" 

황이가 치받는 말에 왕은 소리 높여 핫하 웃었다. 어찌 들으면 어이없다 웃는 웃음이기도 하였고 또 어찌 들으면 그의 말을 

대견해 하는 웃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등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황이는 왕의 그 높은 웃음소리가 노염을 참지 못한 것으로

들렸다. 격한 성정을 터트리려는 시초로 느껴졌다. 이윽고 왕은 웃음을 그쳤다. 웃음기가 가신 차고 무표정한 표정.

왕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자신을 건너다보았을 때, 문득 황이는 자신보다 한참 아래인 연치의 그가 이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심기 깊으며 노회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의 지금 표정. 이것이 바로 <왕>의 <용안>이었다.

어떤것으로도 훼손할 수 없고 어떤 사람도 거역할 수 없는 지 고무상하며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존재만이 가진 얼굴. 한손

으로 세상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힘을 나는 지녔다 하고 드러내는 여유 만만함과 냉혹함이 동시에 드러난 그런

표정.왕은 약간 입귀를 비틀며 엷게 미소를 지었다.

"도승지 그대가 어질고 유하며 속이 깊어서 신임할 만하다 믿었기로 이렇게 의기까지 충전하고 무모할 정도로 간담이 큰사람

인 줄은 짐이 처음 알았군. 핫하핫, 이런 말을 그대가 겁도 없이 짐의 귀에 대고 속살거린다는 것을 좌상이 알면 과연 어떤

얼굴을 할까? 아마 도승지 그대는 어나 날 쥐도 새도 모르개 목줄이 눌러질 게야. 핫하하. 그대의 말을 헤아리자 하면 짐이

지금껏 그러니까, 좌상의 허수아비였다 이런말인데,,,,,,,,음, 짐도 그리 생각하오."

이번에는 도승지 황이의 말문이 막혔다. 도도한 자존심으로 소문이 난 왕이 이토록 쉽게 허수아비라 맹비난한 말에 승복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왕은 장난처럼 서안 위에 놓인 옥새를 허공으로 던졌다. 손쉽게 한 손으로 받아들었다. 장난감처럼 

뱅글뱅글 돌리며 내뱉었다. "좌상이 찍어라 하면 무작정 이 옥새를 눌러주던 때가 생각나는군. 짐이 상소문을 읽는데 모르는

글씨가 나왔기에 이 글씨가 무엇이오 하고 물었더니,그리 말하더군.신이 이뜻을 다압니다. 허니 전하께서는  옳다 하시면

됩니다하고 말이야.핫하하.맞소이다.그게 짐이었어,왜 저 이가 정승이 되어야 하지?물었더니 훌륭하고 염직합니다하기에

종용하였어.훗날 알고보니 보따리(뇌물)더군.열한 살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올라 용상에 앉은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짐은 잘났다.잘한다 소리만 들었더니 그만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진 게야.그러니 어찌 짐이 곳간보다 성동 곳간이 더 장하다

하는데 사실이겠지?"

왕은 황이의 대답을 굳이 바라지 않는 듯했다.

그는 씩 웃으며 옥새를 다시 허공으로 던져 받았다.

"이 옥새만 없었다면 짐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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