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어깨가 천근만근.앞으로 방자한 제 딸년과 저의 앞에 닥칠 피보라에 다만 정신이 산란하고 눈앞이 어지럽다.
첩첩하여질 앞날이 있을지 몰라 역심 품고 방비하여 묻어둔 사병은 다 잃었다.
그비밀을 혹여 아는자 발설하랴 가슴졸이며 뒤처리에 바쁜와중이다.
제 딸년 성총이나 잃지 않았다면 훗날을 기약하여 보겠지만 너무 허무하게 사라진 봄날의 꿈이여.대대손손 광영이여.
어수선한 일들이 정리되고 난 후 상감께서 이번 사단을 두고 치죄 닦달하시면 그 뒷감당을 어찌할까?
청사에 단 한번도 없던 상감마마 단식 소동이 끝난 그 며칠후.
조하 일을 물리기 무섭게 왕은 다다다 중궁으로 달려들어 왔다.
이 즈음 내내 그런 것처럼 중전마마 상 받는 옆에 철썩 붙어 앉았다.
"어이,거참 보기 좋소이다.모처럼 곤전께서 그릇을 비우는 모습을 보니 짐이 참으로 흥그럽구려."
왕 당신이 마치 기미 보는 상궁이라도 되는 양 요것조것 잡셔보시오 권하였다.
물 같은 미음 대신 그나마 든든한 죽이 올라온 밤.
상을 물리자 냉큼 물대접 건네주며 만족하여 웃었다.연하여 오른 탕제 대접 비우자 입가심하라 꿀을 졸인 대추 한조각까지
젓가락으로 들고 기다리고 있다.중전이 쓴약에 진저리를 치자 안타까운 빛은 왕이 더하였다.
"쓰지?응?암만,많이 쓸것이야.하지만 몸에 좋은 약이 쓰다 하였잖어.이것 자시오.입가심하오."
중전이 자신을 보든 보지않든 일단 이 사람이 무사하다 싶으니 그저 좋다.
살그머니 눈돌려 하얀 이마 훔쳐 보았다.그사이 몇끼를 제대로 듭시었다고 살포시 살쩍 오른 얼굴을 바라보는데 두근두근.
쿵닥쿵닥 그저 좋고 흐뭇하고 행복하였다.
"중전 곤하시다.자리로 뫼시어라."
김 상궁이 중전마마 옥체을 부축하여 다시 금침 자리로 모시었다.
인제 쉬셔야 합니다.나가십시오,눈짓을 하였다.헌데 이분 보시오?끝까지 아니 나가신다.떡 버티고 앉아 중전마마 눈을 감고
금세 주무시는 양을 흘린 듯이 바라보고만 있다.이윽고 왕은 대전 몽상궁을 돌아 보았다.
"짐이 중전 곁에서 침수하리라,예다 금침 배설하여라."
동온돌에서 자리옷 갈고 돌아온 왕은 사람들이 다 나가자 자신을 위하여 마련한 이부자리 놓아두고 슬그머니 중전이 잠든
금침 곁으로 설레설레 한 발을 들이었다.모르는 척 천장만 바라보며 발가락으로 슬쩍 중전 몸을 건드렸다.
"잠이 든 것이니?"
"......."
"무정타!?.고새 깊은 잠이 든 것이야?"
그래도 왕비는 말이 없다.
가냘픈 숨소리만 들렸다.홍준이 올리는 약대접에는 노상 잠이 들게 하는 약초가 들어 있었다.
곤히 주무시고 많이 젓수셔야 옥체가 빨리 회복되심이라.그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왕비가 일부러 저를 외면한 양 섭섭하여
풀이 죽는 왕이다.
"그대도 참 무정타.어찌 그리 모질어서 짐을 한번도 아니 보아 주는 것이니?짐도 할 만치 아였다 무어?"
사람 욕심 끝이 없어 중전이 사경을 헤맬 적에는 살아만 주오 하던 마음이 인제는 슬며시 앙앙불락.잘못한 놈이 할말 없음에
랴.짐이 다 참고 저자세이고 하잡는 대로 다 하께 하던 속내가 슬슬 솟구치며 은근히 원망과 야속함이 모락모락 김처럼 피어
오르는 것이다.슬슬 버릇인 양 억지심술이 솟아나기 시작 하는 것이었다.
"쳇,하릴 없도다.여하튼 고집이 여간해야지?한 번만 용서하여 주면 어디 덧나냐?짐이 정말 잘못한 것도 알고 있구먼.음음음.
지금껏 뉘우쳤으면 별의별 일을 다 하였는데.....평생 동안 짐은 그대 등만 바라보며 바깥에서 빙빙 돌란 말이니?"
대답이 있을리 없다.작은 새가 깃을 접고 안식의 잠을 자듯이 동그랗게 돌아누운 좁다란 어깨는 나지막한 숨소리만 토해낼뿐.
왕은 갈망 어린 눈으로 언제나 애달프기만 한 어린 안해를 바라 보았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슬쩍 한 다리를 중전이 잠든 요 위로 올려놓았다.
이윽고 허리를 비틀비틀 움직여 어깨까지 중전이 잠든 이부자리로 쪼작쪼작 파고 들었다.
턱 밑에 잠긴 왕비의 작은 몸.동백기름에 젖어 새파란 윤기가 철철 흐르는 머리타래에서는 그녀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애련한
향기가 가득하였다.왕은 서러운 얼굴을 그 머리결에 조심조심 비볐다.
한편으로는 안심되고 또 한편으로는 염치없고,그러면서도 마냥 좋고...이내 미안하고 괴롭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사람을 잃지
않았다.
이렇듯이 내곁에 계시는데 무얼,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속이 미여졌다.거칠한 돌바닥을 맨발로 걸어가듯 조심스레 속삭였다.
"짐을 너무 미워만 마소.짐도 많이 괴로운걸."
"........."
시냇물이 무심히 바윗돌 곁을 흐르듯이,바람이 마른가지를 흔들고 스쳐 가듯이 야윈 안해의 어깨선만 바라보며 왕은 심연보다
더 깊은 마음의 바닥을 서리서리 펼쳐 보였다.
"짐도 무척 힘이 든다고.생각만 하면 눈앞이 아뜩하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해.다 짐의 죄인걸.짐이 잘못하여 일어난
일인걸.누구에게 입 벌려 말도 못하지.아픈 척도 못하고 슬픈 티는 더더구나 염치없어 내지 못함이라.짐이 잘못하여 그대
심신을 괴롭혀 이렇게 쇠약하게 만들고,그것도 모자라서 우리 아기씨까정 잃고...다 짐의 허물이니 누구에게 하소연을 하
겠소?천번만번 후회하고 도 후회한들 무엇할까?어리석은 이 사람이 벌써 못난 일을 또 저지르고 만걸."
왕은 두 팔로 따뜻하고 여린 몸을 꼭 안았다.
깊은 잠에 빠져 듣지 못하는 귀에다가 마디마디 맺힌 속을 참깨 털듯 풀어냈다.
"하지만 인제 짐도 철이 든 것이야?응?잘하여 볼 것이다 날마다 맹세하오.참말 좋은 임금 참된 지아비 되리라 결심하오.노력
하고 있소이다.허니 중전이 짐을 딱 한번만 더 용서하고 받아주소.응?"
침묵이 대답일까?만지는 것조차 안타까운 여린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얽으며 왕은 더운 입김을 살며시
불어 냈다.오직 하나의 죄는 더없이 사모하는 그마음.그래서 왕비도 왕을 사모하여 주고 받아주기를 바란 욕심.
허나 그동안 지은 죄가 많다 싶은 자격지심으로 괜스레 투정 부린 것.누구든 그사람 미소를 훔쳐 가는것이 밉고 투기나고
심술났다.
고귀하게 태어나 도도하고 오만하여 깊이 그 누구도 들여주지 않았던 냉심에 한 사람을 담아버린 탓.
원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어 버렸다.
운명처럼,폭우처럼,전쟁처럼 심장에 박혀 버린 그 사람을 향한 사모지정은 너무 뜨겁고 깊었다.
이글 거리는 불꽃이 붉게 타오르다가 이내 파랗게 변하고 종국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열기가 된다.
은애하는 마음은 뜨거운 잉걸처럼 타고,타고 또 타서 그를 재로 만들어 버렸다.
불길 같은 외사랑.지옥같은 그리움.그래서 상처 주고 모질어지고 궂게 투정하고......
'하지만 그 모든게 그대를 사모한 탓.이런 마음을 그대는 언제쯤 알아줄까?'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더 지나면,깊은 상처도 아물고 새살이 차 오른다.
망가진 심사도 그러하거니.짐이 잘하면 중전도 마음을 풀어줄 것이고,이러저러하여 정분 다시 회복되고 옥체 강건해지시면
아기씨도 다시 잉태할 것이고....그러면 짐과 그대사이도 다시 봄날이 돌아올 터이니.가난한 희망을 품고 왕은 눈을 감았다.
간절한 소원을 드러냈다.
"마음은 오직 하나인걸.짐도 어쩌지 못하는 하나인걸.이마음의 주인은 평생 그대이거니 짐의 간절한 이 마음을 더 이상 짓
밟지 말아주오,중전."
허나 왕은 몰랐다.
깊은 잠에 빠졌다 여긴 중전이 잠시 깨어났던 것을.말짱하게 귀가 열려 푸념인양,하소연인 양 주절대는왕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손을 대면 찢어질 듯한 얇고 아스라한 밤의 정적을 안고 왕비는 지아비 왕의 속내를 들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는 정작 말하지 못하는 수줍은 그 사내의 서투른 사죄를 들었다.
소리없이 눈물 방울이 볼을 다라 흘려내려 귀밑을 적시고 원앙새 수놓은 베개를 어느새 흠뻑 적셨다.
가슴 사이로 걸쳐진 커다란 손이 이제는 조금도 두근거리지 않고 설레지도 않는데 어쩌란 말이냐.
'성상께서 그러하듯이 신첩 또한 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나이다.어찌하리오.'
가만히 중전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내지 못하는항변.서러운 대답이었다.
사모하던 그분,지아비 왕께서 달라지면 무엇해?지극정성,애면글면,동당거리며 서툰 구애에다 비위 맞추고 얼싸안아 주면
무엇해?중전 자신의 마음이 얼어붙어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데.
죽을 결심을 할 정도로 밉고 원망 스러웠다.
허나 간사한 것이 사람 마음이다.깨어난 후 물벼락처럼 쏟아지는 정성.중전 자신에게 ?는 지극한 지아비의 사랑과 배려가
어찌 보이지 않으랴.느껴지지 않으랴.중전 자신이 상심하여 식음전폐한다고 따라 수라상을 내치던 그 마음이 어찌 감격스
럽지 않으랴.
그거나 그것이 전부였다.고맙기는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다.인제는 끝내리라.
독하게 목을 매던 그 순간,어린 소혜 아씨 단하나 맹목의 은애지정이니 지아비 전하께서 무엇을 어찌하셔도 그저 좋고
사모하여 가슴 두근거리던 그 소녀는 이미 죽어버린 터인데.
지금 교태전에 누워 중전마마 소리를 듣는 사람은 그림자요,껍데기에 불과하였다.
해바라기인 양 무정하고 야속한 지아비를 사모하다 지쳐,붉은 단심 부인당하고 그 설움에 사무쳐서 가슴을 베이고 몸이 상하
고 그녀와 태중 아기까지 해친 잔인한 야차에 불과한 것을.
'내가 고약한 계집이다.누가 보아도 날더러 고약하고 무정한 계집이라 할 것이야.'
중전은 살며시 돌아 누웠다.
섬약한 몸을 휘감아 숨을 막히게 하는 무거운 팔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몸을 일으켜 어둠속에 잠긴 사모했던 그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볼아래로 투명한 눈물은 그치지 않고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전하께서 한결같은 지극정성인 것은 이미 알고 있도다.한데 왜 마음은 이리 차갑게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을까?하냥 바라보
며 사모하여 그분의 어떤 행동이든지 그저 가납하고 참으며 삭히던 어리석은 사람은 이미 죽어 없어졌거늘.나의 태중에서
아기씨 얻어질 것이다 하시었지.내가 귀한 아기를 가졌다가 잃어버린참이니 그것이 미안하고 놀라워서 이리 정성 쏟아주시는
모양이되,그를 감사하고 그저 황읍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 것이겠지만.....허나 나는 아니야!'
중전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꼭 깨물며 흔들리는 가슴을 두손으로 부여잡고 도리질을 쳤다.
그런 허수아비는 이제 싫다.그리는 살고 싶지 않아.소리없는 절규가 터졌다.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마음대로 사시는 그분 바라보며 이 목숨 사모지정 모다 내어드리지는 않을 것이야.지금
무작정 잘하시는데 속아서 마음 다시 주었다가 변덕 심한 분이 다시 나를 버리시면은 어찌하나.나는 못살것이다.싫어!
인제는 사모하지 않아!내 마음 다 주었다가 피 흘리지는 않을 것이야.'
마음 닫은 왕비를 바라보며 바깥에서만 빙빙 도는 처지가 괴롭다 왕은 토론하였다.
하지만 입 열어 말하지 않았다 뿐이지 중전 역시 가슴 아프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중전 마음속에 아무런 즐거움도.희망도 없어진 때문이었다.
오히려 천배만배 더 시고 썼다.
자신도 모르게 중전의 두손이 아랫배를 살며시 감싸고 있었다.
이미 잃어버린 태중의 아기를 그리워 하고 아파하고 미안하여 흐르는 눈물이다.
후회하고 그리워해도,안타까이 슬퍼해도 소용이 없음을 어찌 모르랴.홀홀 털어버리고 왕의 말대로 새로이 잉태하여 책무를
다해야 함을 알고 있다.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으면 무엇 해?마음이 도통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아무리 하여도 잊혀지지 않고 사무쳐서 견딜 도리가 없었다.
'미안하구나,아가.그저 미안하구나.어미로서 몸조심을 하지 못하고 너를 죽인 터라 나는 어미로도,지어미로서도 도통 자격이
없는 계집이다.아가,이런 내가 어찌 국모로서의 위엄을 다하고 사직의 어미 노릇을 할것이냐.나는 이미 살 자격이 없는게다.
다만 너를 따라 죽고 싶을뿐....아가.'
평생 동안 잊혀지지 않고 수시로 아프게 할일이다.
내 몸이 은근히 이상하도다 혼자 생각하였다.허나 너무 괴로워 스스로 목줄 끊어버릴 것이다 작정을 한 그때,내가 살아서
아기씨 낳아져도 그 아기씨 나와 더불어 하냥 조롱거리.구박과 악독한 계집 호가호위하는 중신들 틈에서 마음고생하며 살면은
무엇을 할 것이더냐?우리같이 죽어지자꾸나 하는 독한 마음으로 목을 맨 터다. 그 충격으로 낙태를 한 참이니,아기를 죽인
이가 바로 중전 자신이 아니냐.
별일없이 태어나서 만약 왕자였다면 원자라.이나라 사직 감당할 귀한 분을 어리석은 결심으로 그렇게 잃어버린 참이다.
중전은 실로 자신이 왕의 말대로 도통 국모로서도,사직의 안주인으로서도, 왕의지어미로서도 자격이 없다 스스로 깊이 반성
하였다.그만큼 죄책감도 크고 갈기갈기 찢어진 속도 말할 나위 없는 것이고.
중전은 살며시 일어나 창을 열었다.
우르르 우르르 먼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치는 소리가 은은하게 난다.
비가 오려나.아니나 다를까,투다다닥 달려온 밤 빗줄기가 후드륵 후드득 바닥에 내리꽂히기 시작하였다.
중전은 멍한 눈으로 어둠을,찬비를,끝이 보이지 않는 슬픔과 죄책감만이 진창처럼 뭉개진 자신의 심사를 본다.
'차라리 아가,그때 너와 더불어 나는 죽어버렸어야 했다.'
중전은 흐느낌이 터져 나오는 입을 두손으로 막았다.
어둠이 이 눈물을 감추어줄 수 있다면,이 빗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오열을 감추어줄 수 있다면,천둥벼락이 내 몸을
후려쳐서 부끄럽고 참담한 내 몸을 부서뜨려 버렸으면......
지워질 수 없는 자책감,상처는 크고 깊어 아무도 아물게 해줄수가 없다.
말 못하는 괴로움,보일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여린 속을 헤집어 깊은 속병이 들었음에랴.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무섭고 끔찍한 중병이었다.
이럭저럭 두어 달포가 훌쩍 지났다.
더디나 꾸준히 회복된다 하였다.홍준이 입시하여 중전마마 맥을 잡고는,옥체가 많이 조섭되었나이다 아뢴 날이다.
태상대왕 광종마마의 기일이라,왕은 영천 땅까지 거동하여 능에 참배하고 며칠 만에 돌아왔다.그날밤이다.
왕과 왕비는 동온돌 침전에서 나란히 누워 잠이 들었다.
깊이 잠들었던 왕은 돌아누우며 본능적으로 손을 휘저었다.한번 잃어버릴 뻔한 이후로,잠시잠깐 의식이 드는 순간마저도
근심되어 옆에 누운 안해를 더듬어야 안심되는 버릇이었다.엉?왕의 눈이 번쩍 뜨였다.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등골에 소름이 쫙 끼치었다.왕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중전!중....."
두려워 소리쳐 부르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곁방문을 열었다가 닫고,또 다른 문을 열어보고 닫고...자리옷 차림의 왕비가 넋이빠진 얼굴로 사방으로 난 사이문을
열고닫고...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찌 이러하오?무엇이오?"
왕은 가냘픈 두 팔을 잡고 재우쳐 물었다.빛이 꺼진 쓸쓸한 눈빛이 그를 향하였다.들을락 말락 작은 목소리가 우물거렸다.
"......들려서.....자꾸 울어서...."
왕은 잠시 귀를 기울였다.허나 삼경 넘어 조용한 밤.
지존이 침수하시는 방 앞에서 소란이 일어날 리는 만무하다.적막한 침묵뿐이었다.
"누가 운다는 말이오?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오?"
"......아기가 ........우는 소리가 들려서,자꾸 신첩을 자꾸 불러서........."
탁 소리를 내며 심장이 떨어졌다.
잡혀 있는 작은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중전의 커다란 눈이 왕을 올려다보았다.
흐르지 못한 눈물이 검게 굳어 젖어 있었다.
"마마께서도 들리시지요?참 이상하여요,우리 아기씨가 우는 데,찾아도 찾아도 아니 보이니......"
"안들려,짐의 귀에는 들리지 않소."
왕은세차게 고개를 저었다.잡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도리질을 치는 중전의 얼굴을 잡아 무섭게 윽박질렀다.
"정신 차리오,그개가 꿈을 꾼게요.마음에 사무쳐서 헛된 꿈을 꾼 것이야.마음을 강잉히 가지시오!"
"아니어요!신첩을 부르고 있습니다.보내주시어요!신첩이 가야합니다.가서 안아줄 것입니다."
작은 몸이 품안에서 요동을 쳤다.
왕은 바둥이는 왕비를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차마 소리 내어 울지는 못하고 짙은 눈물만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안아 가슴에
깊이 파묻었다.위로하여 중얼거리는 말은 중전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져 버린 자신의 마음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니오,아니야,그대가 꿈을꾼게야.가슴에 사무쳐서 몹쓸귓병이 난 게지.누가 운다고?예는 우리 둘뿐이오.누가 그대를 찾는
다고...이미 잃어버린 아기씨가 어디 있다고 그대를 찾아 운다는 말인가."
"여기는.....이곳에서는 .....못살 것이오.신첩을 보내주십시오!우리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곳으로 멀리 보내주세요.
마마,가슴이......답답해서....눈앞이 아뜩해서....마마.마마,신첩을 이곳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울음이반, 토막토막 뱉어내는 말의 부스러기들,피 배인 슬픔과 절망이 점점이 스며 있다.
차마 토해내지 못한 소원.하여 지금껏 가슴속에 담아만 두어 마침내 병이 되어버린 간청.원하는 바가 있다면 엉뚱한 사람말
고 지아비인 그에게 하여달라 고함질렀다.그런데 혼인한 지 꼬박 세해.
왕비가 마침내 한 소청이라는 것은 결국 그의 곁을 떠나게 해달라는 말이었다.높은 궐 담을 넘어가게 해달라는 것이다.
"눈을 감아도 헛것이 보이고,입에 넣어도 달지 않사옵니다.눈물이 나지 않아요,마마.차라리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데 마마,
여기가,여기가....."
중전이 왕의 손을 가져다 자신의 가슴골 사이로 대었다.
슬픈 심장이 퍼득이고 있는 바로 거기.
울지 못해 병이 된 터,흐느끼며 속삭였다.나지막한 간청이 뼈아프고 애절하였다.
"아프옵니다.찢어진 듯 아프옵니다.눈앞이 먹먹하여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눈물이 나지 않습니다.이대로 살다가는.....
신첩이 죽을 것 같습니다.사무쳐서,가슴이 아파서....죽을 것 같습니다."
왕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죽창인 양 왕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말없이 아랫것들이 시키는 대로 먹고,입고,약대접 들이킨다.
비단 당의 아래 다소곳이 스란치마 여미고 앉아 대용잠 찌른 어진 얼굴로 교태전에 머무르신다.
비단 보료에 앉아만 희미한 미소 지으며 조용히 먼 산만 바라보았지.왕이 손을 잡으면 가만히 잡히고 있다.
우스개를 하면 말가니 미소 짓는다.팔을 내밀어 안아보면 폭신하니 안겨드는 몸에 온기가 따뜻하신다.회복되어 가시는구나.
아물어 가시는구나.너무 쉬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속으로 곪아가고 있었던 것.드러나지 않고 표현할수 없었던 고통과 아픔이 썩어서는 이렇듯이 피고름 철철 흐르고
있었떤 것.
바들바들 떨다가 기어코 바닥에 무너져서는 왕비는 서럽디서럽게 울었다.소리 내어 울면 아니 된다는 중전마마 체통에 대한
강박관념이 골수에 맺혀,끅끅 두손으로 입을 막고 흐느꼈다.어쩔줄 몰라 하며 왕은 하염없이 울고 있는 왕비 옆에 쪼그려
앉았다.
"울지 마소.응?"
서툴게 애원하는 목청이 떨렸다.
도무지 어쩌지 못하는 무력한 물기가 이윽고 왕의 눈 아래에도 맺혔다.
울고 싶어도 차마 울지 못한다는 지어미를 앞에두고 위로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못난 스스로에 대한 곤혹스러움.그 슬픔.
아무리 하여도 이사람 곁에 나는 고통과 눈물만 주는 사람인가 싶어 울컥 두려웠다.
연신 축축하게 젖은 볼을,떨리는 어깨를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면서 왕은 슬프게 속삭였다.
"응,응.하여주께.중전이 하잡는 대로 다 하여주께.허니 우지마소.응?제발 울지 말란 말이오.그대가 이러면 짐더러 어찌하라
고?가엾고 미안해서 짐이 어찌하라고?중전,진정하오.짐도 울고 싶소이다.응?우지마소."
"집에,마마,집에 보내주시어요.네?네?신첩은 집에 가고 싶어요."
중전이 원하는 대로,하여달라는 대로 다 하여주마.집으로 보내주마.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왕은 속상하였다.풀 죽어 홀로 입 안에서만 웅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