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200)

마치 혼잣말을 하듯이 전하께서는 다시 한번 중얼 거리신다.

너무 기막히고 억장이 무너진 참이니ㅣ 차라리 믿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사였다.

무서운 자책,부끄러움이다.

중전!하고 부르며 축 늘어진 차가운 손을 부여잡아 가슴에 끌어안는데,손등으로 용루가 뚝뚝 떨어졌다.

홍준의 입에서 자꾸만 한숨이 새어 나온다.상감마마 자책도 딱하였으나 그의 눈에 중전마마 환후가 보통일이 아닌것이다.

어찌할거나,마음을 굳게 먹고 그저 망부석처럼 앉아 중전마마 손 부여잡은 채 울먹이고 계신 전하께 찬찬히 말씀을 올리었다

"어찌하든 일단 정신을 차리시고 피가 그쳐야 할것인데.여하튼 지혈을 하는 약재부터 써보겠습니다만은 효과가 있을 것인지

신도 자신을 못하겠나이다."

망연자실 넋을 놓고 중전 손만 부여안고 왕은 홍준의 말을 듣고 있다.어느새 또다시 후드득 용안 아래로 망극한 눈물이 

흘러내리는구나.

"전하,신의 불충이옵니다.중전마마 옥체를 잘 보살피어 옥체 보존하시게 하여 드려야 할 것인데 그를 못한 용서 받지 못할

실책이라.부대 신을 참하여 주십시오."

"나가라!듣기 싫다.모다 나가라!짐은 중전하고만 같이 있을것이다.듣기 싫다,아무 말도 다시 말라!듣기 싫다!나가라!어서!"

격하게 소리치는 왕의 목청에 시퍼런 살기가 묻어 있었다.

눈에서 피눈물이 뚝뚝 떨어져 용포를 적셨다.

아무도 두려워 감히 바로 보지 못하였다.아랫것들이 쭈뼛쭈뼛 눈치를 보다가 하나둘씩 물러 나갔다.

대전이고 중궁전 아랫것들 상관없이 전부 다 불안한 마음으로 문 하나 바깥에 옹기종기 모여 방안 기척에 귀를 쫑긋 곤두세

웠다.이내 새어 나오느니,상처 입은 맹수의으르렁거림 같은 거친 울음소리였다.

토막토막 갈라져 흘러나오는 말은 중전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렇게 고운 지어미를 아프게 한 자신에 대한 무서운 원망이었다.

왕은 앙탈하는 어린애마냥,어미에게 떼쓰는 소년마냥 중전의 여린 몸을 마구 흔들어댄다.

"이러지 말라.제발 짐에게 이러지 말라!그대는 어찌 이리 항시 짐에게 무정하고 잔인한가?이렇게 짐을 버리고,평생 회한 속에 

잠기게 하고 혼자 가면 그대는 편안할 줄 아는가?아니 보낼 것이다!이리 그대가 짐 곁에서 마음대로 도망치게  내버려 둘줄 

아는가?그대는 어차피 짐의 계집이니라 말하였다.절대로 아니보낼 것이다!절대로 아니 보낸다 이말이니라!"

왕은 스스로를 향한 너무 큰 분노와 좌절감으로 미칠 것 같았다.

그만큼 두렵고 무서웠다.마음에 담아버린 단 한사람을 어이없이 잃어버리고 살아가야 할 긴긴 시간이,적막이,회한과 외로움이

두려웠다.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잃어버린 아기씨의 일로 평생 가슴 아파하며 살아가야 할것이 참담하고 끔찍하였다.

알지도 못하는 새 촉촉하게 스며든 봄비에 몸이 젖어 드는 것처럼 어느 때인지도 알수없게 살며시 깊은 심장에 다가와서 

둥지를 튼 소중한 사람을 이렇게 ?어버릴 수는 없다 싶었다.하물며 왕의 모진 능멸과 잔인한 구박에 중전이 살 뜻을 잃고 

목을 맨 참이니 이 어진 지어미와 태중 아기씨 두목숨을 빼앗게 된 참이라,젊은 왕은 그저 딱 죽고만 싶었다.

"깨어나지 않으면 짐이 그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못난 것이 이리도 짐을 끝끝내 우세를 시키다더냐?일어나라!일어나란 말

이다!당장 일어나란 말이다!"

왕은 마치 광인처럼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하였다.발을 쾅쾅 굴러가며 버럭버럭 난리를 부렸다.

"당장 눈을 뜨란 말이다!일어나지 않으면은  네 아비며 중궁전 관숙들을 다 참해 버릴 것이다.이토록 불충하는 계집이니 

무엇이 고울 것이냐?일어나라.일어나란 말이다!이리는 못보내느니 누가 제 마음대로 이런 짓을 하라 하였는가?누가?누가!"

인제 와서 고래고래 고함지르면 무어 해?왕은 너무도 막막하고 안타깝고 아뜩하여 중전의 몸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체통도,위엄이란 것도 다 잊었다.이번에는 두손 모아 애원하기 시작하였다.

"중전,눈을 떠보시오.응?그대를 이렇게 잃어버리면은 짐은 살수가 없어요.그대가 짐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제발 깨어나

시오!짐이 간청하오.이렇게는 보낼수 없어요.짐이 그대를 깊이 사모하고 은애하였다는 것은 그대도 알아야 하지를 않소?

짐이 미워만 하였다 알게 하고 보낼수는 없습니다.깊이깊이 사모하였다고 말을 하게 해주어.응?그 한마디라도 하게 해주오.

제발."

마지막에는 기어코 뚝뚝 떨어지는 물기가 소낙비가 되어 떨어졌다.작은 몸을 끌어안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바스라져 가루가

되어버린 왕 자신의 희망이었다.난생처음 깊숙이 심장에 박아버린 사모지정이었다.

"짐이 어찌 살라고,외로워 이 평생을 어찌 살라고.....야속하게 그대마저 짐을 버린단 말이오?짐더러 어찌 살라고.응?

곁에 있어준다 하였지 않아?약조하였지 않아?밀어내고 끊어내도 그대만은 오래오래 있어준다 하였잖아?말해보소,그때의

맹세는 거짓이었소?짐 곁에서 마음붙이로 평생 있어준다 먼저 약조한 사람이 그대이거늘!응?중전!일어나서 말해 보오!"

증거라도 대련다.

왕은 더듬더듬 줌치에서 비단 손수건을 꺼냈다.툭 떨어져 움직이지 않는 파리한 중전의 손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왕 당신의 욱제라는 자(字)옆에 다소곳이 의지하고 선<혜>라는 글자 한자.

신첩은 평생 마마 곁에 있을 것입니다.눈에는 눈물을 가득 담고 환하게 미소 짓던 그 얼굴이 생생하였다.

달처럼 창백한 얼굴 위로 어리석은 사내의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리 우리둘이 오순도순  살아가자 약조해 놓고 이러지 마소.짐이 천번 잘못하여도 그대는 만번 용서해 준다 약조했잖어.

그래놓고 인제와서 이러면은 짐더러 어쩌라고?응?짐더러 어찌 살라고 이런 짓을 하였소,야속한 사람아!"

이른 새벽 무렵.

왕대비마마께서 듭신다 고변이 들었다.

중전마마께서 밤에 후원 거니시다가 발을 헛디뎌 사고당하시었는데 실로 변이 크다하는 기함할 말을 듣고서 날이 밝기가 

무섭게 달려오신 것이다.왕대비마마,우두커니 한손으로 이마를 괴고 넋을 잃은채 앉아 있는 왕을 향해 참담한 고함을 치셨다.

"주상,이것이 대체 무슨 날벼락 같은 변이랍니까?어찌 이렇게 되었소이까?"

"......소손이 잘못하였습니다.그저 소손이 잘못하였지요,할마마마.이 사람이 저이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넋을 잃은 듯이 전하,힘없이 중얼거리신다.

왕대비마마 하도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지니 무어라고요?하고 외마디 비명이시다.

"그랬습니다.제가 그랬어요!제가 이사람더러 죽어라 말하였기로,지난밤서 목을 매었답니다."

"주상!대체 어찌 이러시오?지금 제정신이오?중전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이 어진 사람이 대체 무슨 잘못을 그리 많이 하였다고

이리하십니까?허구한날 날벼락 같은 노염만 장하시어 항시 오들오들 떨며 성한 사람 꼴도 못하게 날치게 잡으신 것도 모자라

죽어라 하였다고요?하,기가 막혀서! 기가 막혀서....!인제 이 할미가 말이 아니  나옵니다!"

왕대비마마 하도 어이없고 기막히니 말문이 딱 막히었다.

핑 도는 어지럼증이 엄습하였다.한손으로 이마를 짚고 늙은 노인이 풀썩 한 옆으로 기우뚱하였다.

마마!하고 아랫것들이 놀라 외마디 비명 지르며 노인을 부축하는데 왕은 그저 방바닥 내려다보며 넋을 놓은듯 중얼 거린다.

"다 소손 탓입니다.예,소손의 잘못입니다.차라리 어린 날처럼 할마마마께 회초리라도 맞았으면 좋겠나이다.왜 그런 모진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할마마마,짐도 제 마음을 모르겠나이다.중전 앞에서 마음을 못 가눈적이 너무 많으니.....왜 이

사람앞에서 짐이 이토록 무정하고 밉살스런 짓만 하였는지 모르겠나이다.그저 이 사람만 바라보았다고,항시 짐만 바라보며

웃어주기 바라였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왜 그말 한마디 못하였는지...할마마마,소손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제야 고개를 든 왕이 왕대비전하의 앞에 어수를 내밀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구원을 바라듯이 간절한 눈빛이었다.

"할마마마,너무 두렵나이다!이 사람이 이렇게 어이없이 곁에서 떠나가면 짐은 살지를 못할 것 같습니다.할마마마,중전을 

살려주십시오.제발 중전을 살려주십시오.이 사람,저가 이리는 못보내옵니다!어찌 이렇게 쓸쓸하게 가게 할것입니까?

우리 아기씨 잃고,중전까지 잘못되면 짐은 살수가 없습니다.할마마마,제발 중전더러 돌아오라 하여주십시오!천지신명에게 

맹세할 것입니다.짐이 좋은 왕이 될것이니,중전을 다시 데려와주십시오!으흑흑흑."

왕대비마마 무릎 앞에 마침내 무너져 왕은 어깨 들먹이며 오열하였다.

왕대비께서는 왕의 그 참담하게 흐느끼는 꼴에 억장이 무너지시었다.

다시 헌번 기함할 일이 아기씨 일이라.옆에 앉아 같이 우는 김 상궁을 돌아보았다.

"상감의 말씀이 대체 무엇이더냐?아기씨라니?이것이 무슨 기함할 말이더냐?자세히 말을 하여라!"

"망극하옵니다,마마.중전마마께서,흑흑.아기씨 회임하사 두어달이었는데 이리 낙상하시어 충격이 크신지라......엉엉엉.

아기씨를 그만 낙태하셨다 합니다.흑흑흑,흑흑....그래서 이토록 하혈이 장한 것인데....쇤네를 죽여주십시오.중전마마

옥체를 미리 보살피지 못하여 이런 망극한 일을 당하게 하였으니 오늘 중궁전 아랫것들이 다 죽을 참입니다.흑흑흑."

왕대비마마 눈앞이 캄캄하였다.

상감마마 연치 높아지시나 후사하나 없어 모다 걱정이 아니었나?정궁이신 중전이 회임을 하였다는데 알지를 못하고 낙상하여

아기씨를 잃게해?하물며 왕이 중전더러 스스로 죽어라 극언하여 상심한 중전이 목을 매어서 이렇다 하니 노인의 가슴에 딱

못이 박히었다.더이상 할 말을 못 찾으신는 것이다.

"거참 잘하였소이다!예,주상.참 잘하셨어요!"

간신히 한마디 하시는데 이 사이로 분함과 노여움이 모래알처럼 갈리었다.

"주상께서 참말 명군이시오!악독한 계집 치맛자락에 휘둘리어 정궁은 발길에 구르는 돌멩이마냥 차고 다니시며 그저 구박하고

홀대하여 회임하신 아기씨까정 잃게 하시고......예,아주 잘하셨소이다!실로 주상은 지아비도,아비 되실 자격도 없으십니

다.그려!"

그러나 다 큰 어른인 왕이 무릎에 엎드려 어깨 들먹이며 오열을 터뜨리고 있는 참에 어찌 끝까지 모질어지랴?

왕대비전 마지막 말씀에 기어코 물기가 터지고 말았다. 

"예끼,이 못난 사람아!어찌 이리하였소이까?이리 후회할 일을 어찌하였소?할미가 무어라 합디까?제발 중전 좀 보살피고 따뜻

하게 하라 그리 부탁하였지 않소?이 모든 일,주상께서 다 자초한 일이오!나는 못합니다.나는 이 사람 너무 불쌍해서 다시

오라 말을 못합니다!"

으으음.........중전의 감긴 눈시울이 가냘프게 떨렸다.

간신히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는 모양이다.잠시 눈을 뜨기는 하였지만 초점이 없이 흐릿한 눈동자였다.

왕대비마마,반갑고도 걱정이 되어 중전!하고 홈빡 작은 손을 잡아쥐고 소리치셨다.

왕도 정신 차리오!하고 애타게 간청하였다.

"짐이 보이오?짐이 예 있소이다!제발 정신 좀 차려보오!중전,짐이 다 잘못하였소!"

중전은 하얗기만 한 시선을 힘겨이 끌어올렸다.

한동안 무정하고 차기만 하던 왕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거멓게 질려 마냥 애타하는 얼굴이었다.차가운 눈물방울이 얼굴 위로 비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 왕이 울고 있는가? 왜?무엇 때문에?이것저것 갈피를 잡지 못한 의식 안에서 다만 한 가지,아주 뚜렷한 것은 중전의

본능이자 마지막 남은 그에 대한 부드러운 마음씀이었다.

'우지 마시어요,전하.제발 신첩 때문일랑이면 우지 마시어요.신첩은 마마께 아무것도 아닌걸요.신첩 때문이면 슬퍼하지 

마세요. 신첩이 떠나야 마마께서 편안하실 것이니 이렇게는 우지 마시어요.제발.'

중전은 힘없는 손을 들어 초췌한 왕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사모함이 진정일진대,무의식 중이나 왕이 근심하고 있다 함을 느낀 것이다.

자신의 상태는 아랑곳 않고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지아비 왕을 위로하는 듯한 다정한 손길,힘없는 미소가 더없이 아렸다.

"우지..............마시어요,제발........우지 마시어요..............네에?"

"중전!"

"성왕께서는.................우시면 아니 되어요.우는 것은.....신첩 몫이니....마마께서는 의연하시어........."

이런 순간에도 짐을 걱정하오?짐을 위로하고 마음 써주는 것이오?짐을 미워하여 이런짓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소?그대 마음

깊이에는 짐을 향한 정이 안즉도 있는 것이지요?응?감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울컥하여 다시금 뜨거운 용루가 넘쳐 중전의

볼에 후드득 떨어졌다.

살며시 하얀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어리는 것도 같더니 중전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잠시도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아버님.......희미한 신음처럼 중얼 거린다.사친인 부원군이 보고 싶다 하는말이다.

"중전께서 정신이 다소 드셨느니라!탕제 대령하여라!정신이 드신 참이니 인제 약물이 넘어갈 것이다!허고 당장에 전령 

보내어 부원군 입시케 하라!아니,아니,그러지 말고 재관아!네가 직접 가거라!당장에 네 말 등에 모셔오너라!"

전하,바깥을 향하여 버럭 소리 질렀다.

홍준의 명을 받아 약방 상궁이 급히 탕약 대접 받쳐 올렸다.중전마마 입 안으로 몇 방울 흘려  넣는다.

깨어나시어야 일단 약재 처방이라도 할 참이니 정신드는 약물 부터 먹이는 것이다.

윤재관이 전하 분부받잡고 날랜 말 타고 질풍 같이 부원군 사저에 내달려갔다.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은 김익현,정신이 혼미하였다.

허둥지둥 의대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섬돌 아래 맨발로 내달리는구나.

그 점잖은 양반이 다리에 힘이 풀리니 흙바닥에 넘어져 뒹굴면서도 창피한 줄도,아픈 줄도 모르는 것이다.

황급히 나서는데 궐에 도착한 시간이 이미 오후 무렵이다.

그러나 잠시 정신을 추스르는가 했던 중전마마,그 밤서 다시 정신을 잃으셨다.

피를 잃으면 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운을 차릴 수가 없음인데 하물며 유약한 병인이랴.자꾸만 쏟아지는 하혈이 그치지 

않으면은 중전마마 명을 장담할 수 없다 홍준이 비장한 얼굴을 하고 전하께 아뢴 것은 그 밤 삼경 무렵이었다.

중전마마 깨어난 참에 잠시 맑아진 듯도 한 하늘이 다시 어두워졌다.

삽시간에 검은 먹장구름이 궐 안팎으로 가득히 깔렸다.

중전마마께서 낙상하시어 명이 경각이라 하는 소문은 그날 이내로 도성 안팎으로 전부 퍼져 나갔다.

하혈이 장하니 큰일이다하는 소식에 모두 다 삼삼오오 모여 수군수군 걱정이다.

어진 중전마마 환후 회복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은 하나였다.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하나둘씩 광희문 앞에 모여드는 인파가

물결을 이루었다.수백수천여 명이 소복하고 궐문 앞에 엎드리어 하나같이 중전마마 회복하시길 정성으로 기원하니 위로는 

사대부 선비부터 아래로는 서소문 다리 밑의 각설이패까지 한뜻이로다.

부대 중전마마 무사합시오!하는 간절한 기원이 하늘을 닿았구나.

"무슨 비방이 없고?피 그치는 특효약이 되는 것이 무에가 있소이까?"

"백탐이 그저 특효이나 그를 구할 방도가 없으니 걱정입니다."

백탐은 하얀 족제비의 쓸개이다.족제비 쓸개야 구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하얀 족제비는 만에 하나일까 귀한 것이라.

웅담 호골 산삼보다 귀하다 여겨졌다.없는 것 없는 이 궐에서도 진짜 백탐은 없는 참이라!하얀 족제비가 어디 있으며 

있다 해도 금세 어찌 잡을 것이더냐?

"방을 붙이세요!도성 곳곳에 금전 아끼지 않고 백탐을 구한다 하세요!한시가 급하니 천금이 아까울 것이던가?"

왕대비께서 송곳처럼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신다.

진성대군과 효성군께서도 날벼락 같은 소식 듣잡고 입궐하신 참인데 급히 편전 나서시어 도성 곳곳에 백탐을 구하라 하는

방문 붙이시기 바쁘시다.

쯧쯧쯧.어찌 이리 날씨까지 궂으냐?추적추적 비가 연해 오는구나.

전하,홀로이 중전마마 머리맡 지키고 앉아 계신다.뭉클뭉클 쏟아지어 두툼한 금침을 적시는 하혈은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 피를 흘리고 사람이 어찌 살 것이더냐?싶을 정도였다.

왕은 벌겋게 젖은 눈을 들어 물끄러미 중전을 바라보았다.

'그대 목숨 하나 되살리지 못하는 왕 따윈,이렇게 손 놓고 그대 스러지는 것을 보기만 해야 되는 보위 따윈 아깝지 않아요.

외롭고 쓸쓸한 그대,홀로는 아니 보낼 것이야.죽어서라도 짐이 같이 있을 것이야.이렇게 그대 가면 평생 짐은 그대와 잃어

버린 우리 아기씨 울음소리 듣고 살아야 할 것이니 견딜수가 없어!'

왕은 작고 가녀린 손을 잡아 자신의 단단한 볼에 대이었다.

눈물이 볼을 지나 둑뚝 떨어져 작은 손을 적시었다.짐만 두고 가지마오.중전,제발 짐만 두고 가지마오.

차마 소리 낼수 없는 애원이 입술 사이로 물려 흐느낌으로 새어 나왔다.

'어린 새같이 가엾고 여린 그래,저승서 홀로 울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짐은 억장이 무너져서 견딜 수가 없어.짐은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 진력이 나오!아바마마도,어마마마도,또 중전도 왜 짐만 놓고 가시오?왜 짐 팔자는 항시 외로운 것이어야

하오?싫소,이제 싫소이다.!만날 혼자 감당해야 하는 왕 노릇,사람 노릇이 싫고 지긋지긋하오!중전이라도 짐 곁에 있어 주시

오!제발 짐을 버리고 가지 마오!'

아아,야속한 세상 이치여.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음에랴.

중전마마의 위급한 사정으로 탄식과 근심걱정으로 흐려진 도성의 하늘 아래 오직 즐거운 한사람이 있었으니........

월성궁 대문 안,

희란마마 붉은 입술 사이로 오랜만에 흐드러진 웃음소리가 피어났다. 늘상 찌푸려져서는 치켜 올라 있던 아미가 브드럽게 

내려 앉았다. 표독하던 그 얼굴이 화사하고 윤기가 돈다.

"홋호호,내가 십 년 묵은 체증이 가시는 것 같구나.중전 고년이 이날에서 천벌을 받은 것이로다."

밤서 후원을 돌다가 낙상하여 명이 경각이라 하니 어찌 아니 즐거울 것이더냐?제가 나서서 일부러라도 해칠 참이었는데

그렇게 중전 고년이 재수가 나빠 그리 심하게 다쳤다 하니 실로 손도 아니 대고 코를 푸는 격이었다.

"흥,당연한 일이지!감히 지엄한 중궁전 차고 앉아 이 희란을 능멸하고 꼴값을 떨더니 오늘날 드디어 그 벌을 받은 것이야.

고년, 고 얄미운 년.이날서 피 토하고 콱 뒈져 버려라!"

무도하고 악독한 기원하고 있는 계집이다.홋호호 웃음소리가 자지러진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즐거운 빛을 감추지 못하는구나.

중궁에 심어둔 끄나풀로 인하여 누구보다 사건의 전말에 대하여 소상하게 꿰고 있었다.

이왕지사 중전 고년은 낙태를 하였고 전하께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어라!하고 극언을 할 정도이면 중전 고년에게 아무 정도 

없으시다 이 말이다.그러면 그렇지!전하께서 이 희란 술책에 아니 넘어가실 분이더냐?내가 슬슬슬 이간질하고 은근히 심기에

낸 독즙이 이날 비로소 효과가 난 것이야?

마냥 기분이 좋아진 희란마마는 무거운 엽전 꿰미를 서너 꿰미 탁하고 교인당 앞에 내던졌다.

"자네는 당장에 나가서 신당에 제물 차려놓고 푸닥거리 장하게 한번 하게. 내가 말 아니하여도 잘 알겠지?아주 독한 살을

쏘아야 할 참이다!중전 고년 이참에 콱 뒈져 버리게 정성 들여 잘하소"

이렇게 고약하고 악독한 짓거리가 월성궁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줄을 아무도 모르는데 오호,통재로다!인과응보.사필귀정.

반드시 이 간악한 무리들이 철퇴를 맞지 않을 것이더냐?그럼 다시 눈을 돌려 교태전 형편은 어떠한지 알아볼 일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중전의 상태는 악화되었다.

누가 보아도 꺼지는 촛불처럼 생기가 서서히 가물거리고 스러지는 것이 보였다.여전히 하혈은 끊이지 않고 미약한 맥이

간신히 뛰고 있는 그 즈음,아무래도 참담한 일을 각오하여야 하지 않나 중신들이 수군대는 그 즈음,새벽을 넘어 비 그치고

막 아침해가 구름사이로 드러난 그 무렵이었다.

다다다 장 내관이 달려와 아뢰었다.

"대궐문 앞에 웬 각설이 한 놈이 달려왔는데 백탐을 가져왔다 합니다!"

홍준이 내달려가 각설이 놈 가져온 약재를 보니 실로 백탐이라!

아이고,천행이로다.인제 되었다!약탕관에 넣고 다리어 대접에 받쳐 들고 들어가는구나.

그러나 중전께 탕약을 들어 입에 넣어 드려도 정신을 잃고 계신 차에 힘이 없어 삼키지 못하시니 주르르 흘러내릴 뿐 도통

먹일 방도가 없다.전의감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였다.

"비켜라!짐이 할것이다!전의라 하는 것들이 약 하나도 먹이지도 못하는 것이냐?쯧쯧.도통 쓸모도 없는 것들!"

왈칵 화를 내시는 옥음이 거칠었다.답답하고 열불이  치밀어 올라 도무지 진정을 할수가 없었다.

아랫것들을 밀치고 다가가 당신이 직접 목이 타듯이 쓰디쓴 탕약을 머금어 중전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 약물 입에 머금어 넣어주시는 뜻은 간절한 기원이었다.

'돌아오시오,제발 짐에게 다시 돌아오시오.짐이 그대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니 제발 돌아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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