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200)

아무리 잠결이나 사람이 곁에 있고 없고는 방 안의 온기가 다르다.무엇인가 허전하고 몹시도 쓸쓸 하였다.

분명 곁에 머물렀던 따스함이 사라졌다. 화들짝 놀라 왕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사방이 적적하고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희미한 침촉 하나 조용히 타고 있는 좁은 침방. 아무리 두리번 거려 보아도 중전의 자취가 없었다.

"게 아무도 없느냐?"

사방이 모다 잠든 적적한 한밤중. 

아연 놀라 쩡쩡 터지는 고함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꾸벅꾸벅 졸던 숙침 나인이 갑작스런 왕의 부름에 자지러 졌다.

설핏 얕은 잠에서 깨며 예,전하,하고 길게 대답을 하였다.

"중전께서는 어디 가셨느냐?어찌 방에 아니 계시느냐?당장 모셔오라!"

느닷없이 적막한 석광당이 갑자기 소란하여졌다.아까 분명 상감마마 곁에서 침수하신 중전마마께서 자취없이 사라지다니.

이런변이 있나! 아랫것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며,황당해하며 중전의 행방을 찾아 이리저리 우왕좌왕 난리가 났다.

시커멓게 질린 안색으로 왕은 방문 앞에 서 있기만 하였다.

안절부절 못하는 그마음을 모여주듯이 꽉 움켜쥔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전하,아모 일이 아닐 것입니다.들어가시옵소서.소인이 당장 중전마마를 찾아 뫼시겠나이다."

장 내관이 살살 달래어 방 안으로 다시 모시었다.펄럭이는 촛불을 바라보며 왕은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설마 이 어리석은 사람이 하여서는 아니 되는 어리석은 결심을 한 것은 아닐까?'

모진 무안과 호통소리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민망해하던 하얀 얼굴,이내 커다란 눈에 서서히 차 오르던 눈물 방울이 새삼 

떠올랐다.

마냥 불길하고 불안하였다.

가눌 길 없이 심란한 내심을 진정하듯 왕은 윗목에 던져진 줌치를 집어 들었다.

가만히 중전의 온기를 더듬듯이 용안을 비볐다.

보란듯이 걷어찼지만 몰래 집어 들고 나온 정표.이런 것 말고 그개 마음이나 주지.천하의 멍충이 같으니라고.

손을 들어 지창(紙窓)을 열었다.새파란 칼날로 잘라낸 듯한 날카로운 그믐달이 싸느다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얼어붙은 그의 마음이 사정없이 후벼 팠다.

어둔 천공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속삭였다.중전 짐이 다 잘못하였으니 아모 일도 말고 그냥 돌아오시오.

제발 돌아 오시오,기원하였다.무작정 밉고 원망하고 투기하던 마음 대신 무사한 얼굴만 보자 하면 그냥 행복할 것 같았다.

'아니 본다.다시는 아니본다.'

아무리 부원군의 병환이 걱정되어도 그렇지. 제멋대로 강두수와 더불어 궐 밖으로 나간 중전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가시덤불 친 석광당에 홀로 버려두고 돌아서며 굳게 결심하였다.

다시는 너를 그리워하지 않을 게다.몰래 사모하여 그리워하고 못내 잊지 못하여 아파하는 일 같은 것은 아니할 게다.

버림받기 전에 먼저 짐이 너를 버리련다. 이를 악물었다.

오기였고,비틀린 자존심이었고,복수심이었다.

그를 보아주지 않는 사람에 대한 원망이었다.

어차피 혼자인 것을.그의 팔자에 무슨 복이 있다고 유일한 마음곁이 있다 행복해하였을까?인제는 꿈에서 깨어날 때인 게다.

혼자만의 마음 접고 그대 내치고 맘대로 살 테다. 마냥 좋다 하는 누이 치마폭에 휩싸여 세월아 네월아 하고 살아가는 

혼몽한 군주나 될 테다.

'나가거라.그래,나가 죽어버리거라.다시는 짐의 눈앞에 띄이지 말고.다시는 짐같이 불측한 사내 눈에 뜨이지 말고....'

내내 따라오던 가녀린 울음소리. 차마 크게 소리내지도 못하여 가는 빗줄기처럼 하염없이 마음을 적시던 어린 안해의

슬픔이 정말 미웠다.

시시각각마다 지워지지 않고 괴롭혔다.

그래서 더 모질어졌다.

그 울음이 듣기 싫어,그의 곁에서는 영 행복하지 않는 사람이 미워서 마냥 짓밟았다.

원망을 받으려,미움을 더 받으려 괴롭히고 윽박지르고 모질게 굴었다.

자꾸만 자꾸만 궂게 굴어서 더더 눈에서 마음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하냥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외사랑에서 벗어나려.

고운 그 사람을 먼저 버리려 안감힘을 다하였다. 하지만 맘처럼 되지 않아 더 괴롭고 비뚤어지던 그 맘을 어찌 가누랴.

'돌아오시오,그대 원하는 대로 다 하여줄 터이니.인제는 짐도 알거니.감히 그대를 욕심내면 아니되는 것을.아무리 바라도 

얻을 수 없는 그대의 마음을 소망하여 겉에서만 빙빙 돌며 괴롭히는 짐의 못남을 인제는 그대도 더 이상 참아낼 수 없다는

뜻일 테지.폐비하여 줄 것이니 짐을 떠나.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니.가난하게 바라여 깊은 상처 내는 못난 이사람을 

그대도 버려.'

김 상궁이 나인의 급한 기별을 받고 제 방서 자다가 아연 놀라서 달려왔다.

중전마마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그의 얼굴이 시커멓게 질려갔다.

"아니고,필시 큰 변이 났느니!"

외마디 고함을 지르며 갑자기 김 상궁이 금원 쪽으로 뛰기 시작 하였다.

장 내관도 따라 달렸다.초롱이며 횃불을 든 나인들과 상궁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람처럼 숨을 헐떡이며 두 사람을 쫓아 우르르 한달음질 이었다.인기척에 놀란 듯 불빛따라 복동이가 깡충깡충 뛰쳐나왔다.

이상한 일이다.낑낑 하면서 자꾸 슬픈 울음소리를 내는구나.

이것 보셔요 하듯이 김 상궁 치마깃을 물어 끌었다.저의 말을 도통 못 알아듣는 것이 답답하다는 듯이 복동이가 저만치 달려

갔다 다시 돌아오는데 꽃신 한 짝을 입에 물고 있었다.

"에구머니!중전마마 꽃신이옵니다!"

김 상궁이 덜덜 떨며 한 무릎을 꿇었다.사람에게라도 이르듯이 복동이더러 속삭였다.

"복동아,너가 미물이나 중전마마 은혜를 알 것이다.중전마마는 어디 계시느냐?이 꽃신은 어디서 났느냐?"

복동이가 입에서 꽃신을 떨어뜨리더니 따라오셔요,하듯이 침향정 계단을 깡충깡충 뛰어올라 간다.만에 하나 중전마마께서 

목을 매고 흉한 꼴로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마냥 겁이 나는 김 상궁,속으로 부처님!천지신명님!하고 빌고 있는 참이고.

정자 바닥에 꽃신 한짝이 놓여져 있었다. 

중전마마 머리에 찌르는 용잠이며 노리개며 황금 쌍가락지며 하는 패물들도 다 침향정 난간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허나 중전마마만은 아니 계시다.

"중전마마,중전마마!아이고,아이고!"

김 상궁 이하 상궁,나인들이 철퍼덕 주저 앉았다.난간에 하얀끈이 묶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필시 이 밤에 목을 매러 작정하고 나오신 것이다.허나 중전마마 자취는 묘연하니 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문득 한 나인이 천제연으로 면한 난간에 몸을 걸치고 무심코 수면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고함을 쳤다.

"마,망극하여라!주,중전마마이십니다!"

모다 깜짝 놀라 횃불을 비추고 내려다 보았다.

중전마마께서 정신을 잃고서 천제연 연못에 빠져 있는것이 아니냐.

천제연 가운데에 있는 상명도의 돌기둥에 몸이 반쯤 걸려 있었다.익사는 면하였지만 축 늘어진 옥체를 보자하니 명이 경각

임을 뉘가 보아도  알수가 있었다.

무작정 김 상궁이며 진금이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허리까지 차는 물을 헤치고 같이 달려든 김 상궁과 함께 축 늘어져 있는 중전마마를 안고 나왔다.

그때서 횃불을 든 나인이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아이구,피입니다!중전마마께서 피를 흘리고 걔십니다요!"

혼절을 한 채 정신을  도통 못 차리시는 중전마마 여린 목에 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아마 목을 매려 하다가 연못에 빠진 듯하였다.

오래도록 차가운 물에 잠겨 있던 터라 이미 몸이 식어 파르라니 창백한데 실날같은 숨결이 붙어 있어 그나마 산 것이지.

벌써 혼백은 구천을 떠돌고 있는 듯하였다.

"급히 너는 가서 전의감을 부르고 전하께도 큰변이 났다 알려 드려라!아이고,아이고.내가 언제고 이런 날이 올줄을 알았다!

애꿎이 어진 분을 모질게도 능멸하시고 구박하시더니....가엾으신 우리 중전마마,스스로 자진하실 정도로 속이 문드러지신 

줄을 내가 미리 알았다!흑흑흑."

"전하께서 중전마마더러 정말 죽어라 하여 그리하셨던가?그냥 억하심정으로 괜히 심술을 부리신 것이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걱정이 되면서도 장 내관이 어름어름 대전마마 편을 들려 하였다.

한마디 그래도 제 주인 역성을 드는 장 내관에게 김 상궁이 눈을 하얗게 흘겼다.모지락스럽게 쏘아 붙였다.

"흥,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 하였거늘 실로 전하께서 중전마마에게 못할 일은 도맡아놓고 하신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중전마마께서 만약 돌아가시기라도 하면은 내가 목 베일 각오하고 전하께 단단히 한말씀 아뢸것입니다!"

입은 싸되 발은 빠르다.

김상궁이 중전마마의 축 늘어진 몸을 업고 박 상궁이 들을 받쳐 달려가는데 급한 기별을 받고 횃불을 들고 달려오는 나인

들과 전의감을 보진대 앞서 만났다.

급한 김에 마루방에 금침 깔고 중전마마를 눕히었다.약방 상궁이 전의감의 명을 받아 중전마마 옥수를 감히 잡고 진맥을 

하여 숨을 살피는구나. 그 와중에 다시금 중전마마 아랫도리에 휘감긴 치맛자락 사이로 더운 피가 뭉클뭉클 흘러내리었다.

이내 두툼한 금침을 뻘겋게 물들이는 선혈이 무서웠다.

그를유심히 살피던 전의가 헉!하고 소리를 질렀다.시선을 따라가던 약방 상궁 얼굴도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보,보시오,마마님.혹여 중전마마께서 회임을 하시었던 것은 아닙니까?"

"뭐라구요?중전마마께서 회임을 하시었어요?"

옥체를 보살피는 전의가 모르면 누가 아랴?실로 기함할 말이라 아연 놀라서 장 내관이며 김상궁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옥체를 보살피는 박상궁 얼굴도 이미 죽은 낯이었다.

그때 발소리 어지럽게 나고 주상전하 납시오 하는 장고 소리가 났다.어찌나 급하셨던지 교자도 아니 타시었다.

내달려오신 듯 숨날이 급하였다.계단을 오르다가 너무 놀라서 헉!신음을 삼키며 그만 석상이 되시었다.

중전마마 목에 감긴 끈은 풀어놓았으나 이미 혼절하여 생기라고는 하나 없는 참혹한 모습이다.물에 젖은 의대는 아직 갈아입

히지 못하였다.가엾고도 망극한 모습인데 게다가 하혈은 멈춤지 않으니 금침이 뻘겋게 물들었다.

이것 참마로 큰 변이 났구나.상감마마께서 중전!하고 소리쳐 부르며 달려들어 몸을 흔드나 이미 혼백이 반은 날아간 분이라

대답을 하지 않는다.

"어찌 이러시느냐?어찌하였기에 이리 정신을 못 차리고 피를 흘리시느냐?물에빠진 게로다.많이 다치신 것이냐?옥체가 어떠

하시기에 이런 변란을 보이느냐?"

중전마마 안위를 묻자오시는 대전마마 목청이 격하시었다.작은 손을 부여잡은 어수가 부들부들 떨렸다.

"전하,전하,흑흑흑.망극하옵니다.중전마마께서......."

억장이 무너지고 울음이터진 김상궁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중전마마께서 전하의 구박과 능멸을 못 이겨 목을 매었다.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자진하시리라 하였다는 것을 어찌 입으로

내어 말을 할 것인가?게다가 이리 하혈을 쏟으시는 바,필시 회임하신 아기씨 잃어버린 터이라 그는 더더구나 차마 말을 못할 

것이다 싶었다.

"왜 말을 못하는 것이더냐?필시 어두운 곳에서 발을 헛디딘 것이로다.여하튼 중전이 엉뚱한 것이다?삼경에 홀로 겁도 없이 

후원은 왜 나가서 이리 변을 당한단 말이더냐?쯧쯧.지존이니 그 행동이 진중해야 하는 것이거늘 조심성이 이리도 없는 것이

더냐?"

속이 몹시나 상한 터이니 절로 목청에 짜증기가 완연하였다.

왕의 비틀린 자존심이었다.겉 보이는 왕의 그 퉁명스러움은 너무 놀란 충격을 억지로 감추려는 안감힘과도 같은것이었다.

속으로는 벌벌 떨리어 정신이 하나도 없으신 터,속으로 빌고 또 비는것이었다.별일이 아니어야 할 터인데.....제발 별일이

아니어야 할터인데.......

"전하,어찌 이리 무정하신지요.흑흑흑."

사무치고 극한에 다다른 원망이 눈물로 뚝뚝 떨어지고 목이 메었다.왕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김 상궁이 축 늘어진 중전마마 손발을 정신없이 주무르면서 흐느끼었다.무엄한 것도 다 잊고 원통하여 소리쳤다.

"중전마마 이런 꼴 보시고 아직도 모르시는가?중전마마께서 물에 빠지신 것은 발을 헛디뎌 그런 것이 아니옵고 침향정서 

목을 매시고 스스로 뛰어드신 것이옵니다!"

"뭐,뭐라?"

왕이 너무 당황하고 기가 막히어 목청을 높였다.용안이 한층 더 하얗게 질려갔다.

왕비에게 뺨을 한대 세차게 후려맞은 기분이었다.설마?설마 하였거늘.왕 당신이 울컥하여 내뱉은말,스스로 죽어져라 하였

기에 정말로 목을 맬 줄이야!

생기라곤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중전은 눈을 뜰 줄을 모른다. 완벽한 거부이다.철저한 단절이었다.

왕은 중전의 그 얼굴에서 지아비 왕에 대한 차디찬 부인과 미움을 오롯이 읽었다.

지난 세월동안 그저 참고 인내하며 지냈던 마음속에 담긴 참담한 굴욕과 괴로움이 그리도 지독하였다고,이제 모든것을 

훨훨 벗고 떠납니다!하는 도도한 자존심을 보았다.

"살아서는 마마 곁을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참이니 이리 죽어서 도망을 갈 것입니다.따라와 보시오!다시 돌아오지도 잡혀

오지도 않을 것이오.명부까지는 전하로서도 따라올 수없을 것이니 이제 그만 저를 놓아주십시오.감옥같이 막막하고 답답한 

궐에서 저를 그저 미워하고 능멸하신 전하 곁에서 저는 달아날 것입니다."

미동없이 넋을 놓고 누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중전의 굳게 다물린 입술에는 잔잔한 미소 같은 것이 머금어져 있었다.

이제 마침내 평안과 안식을 찾았다는 듯이,인제 더 이상 마음 고생도 하지 않을 것이니 비로소 행복하다는 듯이.지아비에게

당하던 그 냉정하고 잔인한 모욕에서 드디어 벗어나서 참으로 기쁘다는 듯이.

'이토록 중전 그대는 짐을 싫어 하고 미워하였소?'

중전의 가엾은 모습에 가슴이 아프고 근심으로 미칠 지경이나 또한 왕의 마음 한구석에는 커다란 상처가 벌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그리도 몰라주는 왕비가 너무 섭섭하고 원망스러웠다.도도한 왕의 심장에 쓰라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야속한 사람이로고,중전은 차말 짐에게 무정하고 고약한 사람이야.'

새어 나오니 어찌할 수 없는 원망이었다.평생 짐은 이 사람  뒷모습만 바라며 외사랑만 하여야 할 팔자인가.

먼저 밀어내고,살아갈 수도 없게시리 모질게 괴롭힌 것은 자신이면소도,왕은 중전에게 외면당하고 거절당하는 것이 너무 

아프다.마냥 슬프다.

궐 밖의 전의태감 홍준이 급히 부름을 받고 입궐하였다.

동창이 아련히 밝을 무렵이었다.

혼절하여 도통 깨어나지 못하시는 중전마마 아래에서 흐르는 하혈은 여전히 장하였다.

전의태감 홍준은 아무 말 들은 것 없는데도 첫눈에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급한 김에 법도가 어디 있는가?상감마마 윤허를 받아 황급히 백설처럼 창백한 중전마마 옥수를 감히 잡고서 맥을 짚었다.

역시나 태맥이었다.허나 맥동은 약하였고 하혈은 장하였다.

이미 아기집은 떨어져 나간 터이고 회복시킬 방법이 전무하였다. 늙은 어의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절로 배어 나왔다.

홍준은 돌아앉아 나직한 음성으로 환후의 전말에 대하여 아뢰었다.

"참말 망극하옵니다,전하.중전마마께서 혼절하시어 하혈이장하신 이유가 있음이니 회임을 하시여 이미 두어 달이 넘어셨나

이다.모질게 넘어지신 터로 옥체 상하시니 아마 아기씨를 낙태하신 듯하옵니다.."

헉! 하고 비명도 아닌 신음도 아닌 충격의 일성이 왕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천지가 무너졌다하여도 이렇게는 놀라지 못할 것이로다.단한번도 생각하여 본적 없는 뜻밖의 이야기에 정신은 혼미하고 혼백

이 떠나갔다.젊은 왕은 멍하니 홍준을 노려보았다.그렇지 않아도 창백하던 용안이 회를 칠한 듯이 핏기가 싸악 가셨다.

더듬더듬 욍은 떨리는 목청으로 재우쳐 확인을 하였다. 차마 믿을 수가 없다는 그런 목소리이다.

제발 거짓부렁이라 말하라!하는 애원과 채근마저 스며 있는 그런 목소리였다.

"다,다시 말하라!중전께서 이미 회임을 하여 두어 달이나 되었다고?"

기함하여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된 왕 앞에서홍준이 침통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만 조아렸다. 그러서도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이미 일이 이 지경이 된 상태에서 그가 무엇을 더하고 빼어서 말을 할 것이냐?

"참담하옵니다.아마 두어 달 전서에 승은 받으시어 회임하신 터이기 그동아 ㄴ분명 옥체 달라지신 징조가 있었을 것입니다.

헌데 어찌 그기미를 알아차리지 못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신도 도통 모르겠나이다.회임을 하시면은 달거리 거르시고

구역질하시고 평소 아니 찾던 음식도 땡기시고 이러하시니 그를 보고 회임하신줄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가장 가까이 하

시는 분이라 지아비 전하께서는 한번도 눈치 채지 못하셨는지요?"

"석광당에 홀로 앉아 근신하시는 분의 징조를 짐이 어찌 알겠더냐?도통 조용한 사람이니 말을 아니하는데 짐이 어찌 안다고

그러하....가만,가만!혹시....어제 그일이....그렇다면은?"

흐흐음.한마디 탄식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전하,침중하고아뜩한 표정으로 어수를 들어 이마를 괴었다.막막하니 입을 열지 못하였다.

짐작 가시는 일이라도 있으시니까?홍준이 되우쳐 물었다.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훤칠한 용안이 검불처럼 한껏 일그러지고 있었다.맞아,그것이었다!넋이 빠진 듯 주섬주섬 되새기는 옥음이 어느덧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어제....김상궁이 비의 사가에서 이고 들어온 고리짝이 바로 그것이었구나.조모님의 손맛이라,시큼한 기름붙이 딱 한입만

하였으면,하였다.도통 말없는 그 사람이 그이를 내입케 하여 주십시오 하고 몇 번이고 애원하였지.짐이 무안하여 궐 안의 

진미를 다 놓아두고 왜 그 딴 것을 찾느냐 일갈하였거늘....아아,그래서 그런 것이었구나."

억장이 무너지고 간장이 뒤집혀 진다 함은 바로 이런때 쓰는말이리라.

뉘가 촌것 출신 아니라 하였던고?하며 야박하게 무안 주었지.

차마 더 이상은 말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만 숙이던 중전의 모습이 생각났다.

눈 깊이 물기가 촉촉하게 배어 나오면서도 신첩이 도통 입맛이 없어서......하고 말꼬리를 흐리었지.

가련한 그 사람의 초췌한 옆얼굴이 새삼 선연하였다.

그것 딱 한입만 하였으면......돌아앉아 몰래 찬물을 마시며 몇번이고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었다. 

비로서 돌이켜 생각하니 그것이 입덧이었구나.

아아,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런 말을 하였을까.

지아비이신 전하께서 군입도 아니 떼던 얌전한 사라이 어찌 저런 말을 하였을까 하고 찬찬히 생각하시어 중전 옥체를 좀 

살피라 하였으면은 되었을 것을.......

그때 중전의 설움이 얼마나 장하였을 것이던가?가슴이 칼로 에이듯이 아프다.마치 붉은 피가 둑뚝 떨어지는 듯하니 전하,

사무치도록 가슴 아프고 미안하다.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천지간 아득하고 그저 어지럽다.온통 눈앞이 암흑이다.몸이 천천히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그저 망연자실  얼굴을 싸쥐고 넋 놓고 앉아만 있던 왕은 전하?전하! 하고 근심되어 용체를 가볍게 흔드는 장 내관

의 재촉에 어수를 내렸다.그용안이 참담하고 마냥 슬펐다.

중전의 창백한 얼굴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만 있는 왕의 눈에는 어느새 더운 눈물이 고이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는것이다.

"중전께서 회임을 하였다?짐의 아기씨를 이 여린 옥체에 담고 계셨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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