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200)

"저,전하!제발........."

"어찌하면 좋을까?폐비되어도 그대.이곳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터인데.이자리에 가시 울타리 치고 문을 봉하라 하명할

참이거든.짐이 새 비를 간택하여 세세년년 즐거이 살아도 그대는 용서치 않을 참이거든.다시 바깥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할것

이거든.짐의 마음을 배신한 여인이 이 정도는 각오할 탓이었으니 허기는 뭐 별로 놀랍지도 않을 것이오."

왕은 탁 소리 나게 문을 닫아버렸다.어둠과 공포 속에 홀로 남겨져 두려움에 떨고 있다.

어찌할 바를 몰라,차마 소리내지도 못하고 가녀리게 이어지는 어린 지어미의 억눌린 오열이 성큼성큼 뒤돌아가는 왕의 귀를

바늘처럼 찔렀다.

그러나 용안에는 끝내 살기 어린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인제 절대로 그대 때문에 마음 아프지 않을 것이다.헛되이 바라고 바라 짐 홀로 상처받는 짓은 두번 다시 아니할 것이야.

짐도 인제 그대를 버릴 것이야!등채를 잡은 어수에 새파란 심줄이 돋아 올랐다.

석광당을 나온 왕은 시립한 아랫것들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분부하였다.

"중전께서 석광당에 근신하시게 되었음을 교시하라.그이가 총명을 잃어 지존의 위엄을 잃고 행적이 경솔하였다.짐이 하명할때

까정 이곳에 가시 울타리 두르고 나인 하나만곁에 두어 시중들게 하라.누든 이곳에는 들며나지 못하리라.오직 짐만이 드나들

것이니,왕대전도 듭시지 못할 것이다.사사로이 이곳으로 오가는 이가 있다 할지면 큰 변을 당하리라!"

날이 차고  밤이 기울었다.

오동잎은 가을밤에 우수수 떨어지고 국화꽃 향기 짙어가누나.

그 향기 쓰다듬으며 곱다하시던 분은 마냥 쓸쓸하다.모진 벌 받으시는 중이다.

밤하늘에 참빗같은 반달 한 조각.그 달은 소복하여 근신중인 석광당 중전마마 곁붙이이다.

우원전에 홀로 앉아 턱 고이고 갈등하는 상감마마 외로운 눈에도 벗이다.자꾸만 울먹울먹 옷고름은 이미 젖었는데 무엇으로

닦으시려 자꾸만 눈물 흘리시나.오직 하나 친구인 수틀 앞에두고 바늘 찔러보지만 손을 자꾸 어긋나고 눈물은 아롱아롱.

곁에 두신 소반의 음식은 손하나 아니 대시었다.

"찬물 좀 주렴."

곁방에서 시중들랴.저도 같이 감옥살이라.지루하여 꼬박꼬박 조는 나인에게 속삭이는 목청이 힘하나 없으시다.

"마마.수라 이리 아니하시면 옥체 상하셔요.강잉하게 드시옵셔요."

걱정되어 나인이 아뢰는 말씀에 중전마마 고개를 흔드신다.

"비릿하고 역하니 꼴도 보기 싫구나.마음이 신산하니 입맛도 따라 변하나 보다."

"아침에도 헛구역질하시고 수라 도통 못하시니 저가 참말 근심이여요.마마,드시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면 말씀하시어요.저가

소주방에 부탁하여 시중들 것이어요."

충실한 나인이 상전의 사정이 안타까워 정성스레 아뢰었다.벌써 사흘째,중전마마께서는 도통 하저(식사를 아니하신다)하지

못하시었다.냉수 대접을 내려놓으며 왕비가 고개를 돌렸다.

".........진금아.허면은 너 내일 김상궁더러 사가 좀 다녀오라 하련?

중전마마,지금 대전마마께 드릴 줌치를 만드시는 중이다.술끈 꿰는 곳에만 감침질이 남았다.

이것 다 만들고 나면,마마께서는 다시는 못난 이몸 때문에 역정 내실일은 없으실 것이어요.남빛비단에 십장생 무늬이다.

강겅하시고 장수하심을 기원하는 의미였다.바늘에 새로이 실을 꿰며 속삭였다.

"딱 한 입만 사가의 조모님 솜씨대로 시큼한 김치적 좀 하였으면.밤에도 낮에도 그것만 그립고나.김상궁더러 몰래 사가 가서

유모더러 그것 해달라고 하여라.나 그것이면 입에 넣을 수 있을것 같구나."

"네네,저가 당장 내일 아침에 김상궁마마님께 아뢸 것이어요.받들어 뫼실 것이어요."

"죄인 주제에 무엇 그리 가리느냐 하면 할말 없으되,내가 오직 그 생각만 난다.이것도 병인게야."

다시 또 목이 탄다.중전은 세대접째 냉수를 받아 들었다.

총명한 눈빛은 이미 희미하였고.그사이 해쓱한 볼은 더 야위셨다.바늘 찌르는 팔목에는 푸른 멍이 가득.옷깃 사이 가녀린 

목덜미에도 울긋불긋 흔적이 낭자하였다.왕이 움켜잡아 내려찍은 상처이다.

밤마다 야심하면 왕은 등록 하나 든 상선을 앞세우고 이곳으로 온다.방문을 들어서면 무작정 끌어당겨 안아버린다.

중전마마 사정이야 아랑곳하지 않았다.냅다 자리옷 짝짝 찢어버리고는 여린 옥체을 잡아 눌러 함부러 헤집고 능욕하시었다.

중전의 힘든 옥체며 혼백을 짓밟았다.그렇듯이 몸을 같이하기는 하지만,그녀를 바라보는 왕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덩어리다.

마냥 잔인하고 무서울 뿐이었다.말 한마디 없이 당신 욕심을 채우고 나면 마치 더러운 것에서 벗어나듯이 곧바로 몸을 

일으켜 나가 버리고는 했다.중전은 실로 그때부터 죽기를 결심하였다.

그것이 벌써 여러날째.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었다.

왕은 그녀를 지레 말라 죽이려는 것이 분명하였다.

왕의 발소리만 나도 오금이 저리고 벌벌 떨리었다.심장에 골병이 들었다.수라상을 받아도 입에 넘어가지 않고 잠자리에 누워

도 한숨뿐 깊이 자지 못한다.시들은 꽃인양 꺾여지고 쇠하여지는 몸.중전은 자신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함을 느끼었다.

"신첩이 ....몸이.....몹시 괴롭습니다 마마,제발 한번만 참아주십시오."

어제 마침내 견디다 못하여 거칠게 더듬는 어수를 잡아 만류할수밖에 없었다.희미한 불빛 아래 억지며 심술기 덕지덕지 붙어

있는 시선으로 힐끗 노려보는 그 눈빛이 더없이 차디차고 잔인하신 터였다.

오늘은 너를 어찌 괴롭힐까?오직 그 궁리만 하는듯해 보였다.식겁한 중전마마,

감히 고개를 못들고 못나게 눈물보라.헌데 그 눈물조차 트집거리였다.심술맞게 눈을 부라리며 뻑 고함을 쳤다.

"울지말라.짐이언제 너더러 울라 하였더냐?너가 과연 짐앞에서 울 자격이나 있다더냐?"

하지말라 하면 더 하는 버릇인줄 미리 생각지 못하였다.역시 벌컥 신경질이었다.

난리급증이었다.그러고서 지난밤보다 더하게 되롭혔다.

"목을 자르려 하였거늘 그나마 효심 아름다워 내 보아주는 줄 몰랐더냐?은혜에 감사햐여 방긋방긋 웃어도 시원찮은데,어디서 

감히 재수없이 눈물방울을 보이는 것이냐?"

"오직 소원이옵니다.이리 하냥 살지 못하게 조롱하시고 능멸하심이니 도통 참지를 못할 것이라....제발 내 쫓아 죽여주십시오."

참다 참다 더 이상은 못참으리라.인제는 마지막이라.

울음 터뜨리지 않으려 애를 쓰며 마침내 어린 왕비는 마지막 용기를 끌어 내어 애원하였다.

내쫓아달라 주청을 할때는 옥루가 하염없이 흘렀다.되받아치는 말에 괘씸함을 참지 못하는 듯 왕은 이를 아드득 갈며 주먹으

로 방바닥을 내려쳤다.

"닥쳐!터진 입이라고 마구 하여라!꼴에 감히 저 잘났다 오히려 짐에게 허물을 씌워?그리 죽기가 소원이면 내어 쫓기전에 

먼저 네가 죽어지면 될것이다.짐더러 기어코 중궁을 내쫓았다하는 허물을 덮어쓰지 하게 함도 네 잘난 부덕일 터.영명하다

하면서 그 분별도 못하더냐?이리도 방자하게 고개 솟구쳐 짐에게 말대꾸하는 용기라 있다 할지면 제 손으로 목도 못 매달까?

죽든 말든 네 맘대로 하여라!"

"어명이시니 어찌 순명치 아니하리요?그리하옵시오.밝은날서 다시는 이 못난 중전 꼴을 아니 보실 것입니다."

주상께서 죽어라 하신 터이니 인제 내가 죽을 일만 남았구나.

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용히 대답하였다.어질고 여린 얼굴에 스미어가는 것이 눈물이 아니라 처절한 미소였다.

내가 죽어야 하는구나.중전은 그때 섬광처럼 깨달은 것이다.이렇게 밤마다 나를 괴롭히시는 것은 스스로 죽어져라 벼랑으로

몰아내는 것이다,왜 그것을 미처 몰랐을까?

나인이 물러가고 이부자리 안으로 막 누우려던 중전마마,흠칫 여린 귀가 꼿꼿이 섰다.바람 소리겠지.

물든 낙엽 떨어지는소리일 게야.행여나 오늘도 왕이 그녀를 괴롭히려 걸어오는 소리인지?겁먹은 가슴이 바들바들 비틀렸다.

흠흠.상선의 민망해하는 헛기침 소리가 분명하였다.온다간다 말도 없이 왕이 벌컥 문을 들고 들어왔다.

공포에 질려 까맣게 타는 중전의 눈빛과 마주쳤다.잠시 무슨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던 왕이 툭 하니 뚝뚝하게 내뱉었다.

"낯만 보러 왔거니.차 주어."

상선이 다구 일습을 들이었다.곱돌화로,잉걸불 위 걸쳐 놓은 백자주전자의 물이 이내 끓기 시작하였다.

그윽한 차 향기가 좁은 방안에 가득 퍼지기 시작하였다.

찻잔을 바쳐 드리는 중전의 팔목에 푸릇푸릇 가엾은 멍 자국이 선연하다.왕의 시선이 그곳을 스치며 가볍게 흔들렸다.

슬깃 한타까운 빛이 용안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고서 다시 침묵.중전은 돌아앉아 며칠동안 만들던 줌치를 내내 만지작거리고,왕은 그런 왕비의옆얼굴만 바라다보며 입을

달싹달싸.애꿎은 찻잔만 들었다 놓았다.한동안 말없이 고개 숙인채 바느질만 골몰하던 중전이 이를 실로 끊었다.

"줌치..."

무뚝뚝한 얼굴로 차를 마시던 왕이 고개를 돌렸다.중전이 차곡차곡 바느질 바구니를 정리하고 있었다.

치마폭에는 남색 비단으로 만든 줌치가 놓여 있었다.금실로 정교하게 십장생이 수놓아져 있었다.

"신첩이 보아하니,그새 낡은 터로 새로이 만들었는데,밉다하시 마시고 간직하여 주시어요."

오색 수실로 꼬아 만든 끈을 잡아 끼우고는 주름 잡아 죄며 중전은 왕이 듣거나 말거나 속삭였다.

"십장생 문양이어요,이를 차고 다니시면 항시 강건하실 거에요."

"흥,짐이 빨리 죽어야 그대가 편안할 터인데?위선도 이런 위선은 없음이라.눈 내리깔고 어진척 말라.아주 가증스러우니."

야속하셔라,무정하셔라.중전이 내어놓는 줌치를 왕이 발끝으로 툭 걷어차 버렸다.

아뜩한 시선이 구석으로 처박히는 줌치를 따라갔다.빛이 꺼진 눈동자가 쓸쓸하게 흔들렸다.설움을 씹듯 자그맣게 속삭였다.

",,,,귀찮으시면 아무나 주어버리셔요."

제 정성 하찮다 여기시니,아무나 주어버리신다 해도 좋아요.

전하 마음속에 이몸일랑 그저 오다가다 교태전에 앉은 못난 계집.월성궁에 애틋한 정인 두신 참에 누가 앉든 상관 없었지요

그럼요.잊으셔야지요.어차피 신첩 같은 계집일랑은 빨리 입어버리시는 것이 좋으시지요.제가 해드릴수 있는것은 단하나.

조강지처 내버리는 폭군이라는 오명을 쓰는 대신 먼저 죽어드림뿐이라.저가 죽고나면 어질고 영명한 계비 얻으시어 행복

하시어야 해요.등을 휙 돌린 왕이금침을 걷고 먼저 누웠다.찻상 내가라 하명하고는 중전은 불을 껐다.

이리 곁으로 오소,하듯이 고개를 돌린 채 팔만 내밀고 있다.마지못해 중전은 그팔 안으로 조심조심 머리를 고였다.

한 금침 좁은 요안에서 마음은 천리만리.한참 동아 ㄴ불편한 침묵이 흐르기만 하였다.

포스스 무겁게 내려앉는 한숨소리.얼마후 기진한 잠에 침몰한 어린 왕비를 바라보는 왕의 눈빛에 새삼스런 갈등이 치열하다.

가만히 몸을 일으켜 살쩍이 쏙 내린 팔을 잡았다.

서럽게 애틋하게 입술을 비볐다.그리고는 훌쩍 일어났다.돌아나가던 왕은 발끝으로 걷어차 버린 줌치를 어둠의 구석에서 

찾아 집어 들었다.나지막한 목청이 우울하게 머리맡을 울렸다.

"이런것 바라지않아 이런것 따윈!"

다음날 오후 무렵.

김상궁이 일근문을 지나 궐 안으로 들어왔다.

붉은 보를 씌운 고리짝을 이고 있었다.살금살금 눈치 보아 석당당 주변에서 얼쩡거렸다.

아무도 들고 나지 못하리라 상감마마께서 엄명하신지라.영 눈치가 보이었다.하지만 몇날 동안이나 수라를 못하신다는 

중전마마께서 굳이 찾으신 먹거리라 함이니 어찌하든 내입하여야 하는데.......

삐걱 석광당 문이 열렸다.주칠 원반을 이고 나온 진금이가 기다리던 소주방 나인에게 상을 내밀었다.

"금일은 좀 듭시었니?"

"역시나 두러 저분에 그만이시다.에그,잘 좀 차려보아."

"요것아,중전마마 꾀까다롭다는 말은 왜 아니하니?살찐 가리구이에 햇송이로 전골하고 화양적에 박나물에,이런 진미 죄다

싫다시니 어쩌란 말이냐?"

"소주방 솜씨 못하다는 말은 끝까정 하지 않네.소반과 할적에는 중전마마 즐기시는 것만 좀 올려보아라.저토록 못 드시니 영

근심이란다."

"우리는근심 아니하는줄 아니?"

고리짝을 이고 김상궁이 슬그머니 다가갔다.진금이 반색하였다.

"마마님,벌써 들어오시었네여?"

"마음이 급하여서 어디 게으름을 피우겠든?내입하여 드려라.옥동찬모가 정성껏 만든 것이다."

이것은 좀 드시려나.드셔야 하는데.진금이가 막 고리짝을 들고 들어가려는데,이것 큰일 났다.

딱 이때에 상감마마께서 거동하실 것은 무어람?따라오는 대전의 아랫것 둘이 붉은 보 씌운 가자를 메고 있었다.

중전마마께 드릴 것들인 듯했다.내내 젓수시지 못하고 날로 옥체 쇠약하여 간다하니 아무리 무정하다 하시어도 신경이 쓰이

신 게지.작정하고 중전마마 옥체 보전하시라 음식을 내입케 하려 오신것이 분명하였다.

전하,이맛살을 찌푸리며 김상궁과 나인을 노려보았다.

성상의 시선이 힐끗 진금이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품에 안고 있는 고리짝에 가서 멈추었다.

"뉘든 들며 나지 말라 하였거늘!근신하는 자리 앞에서 어찌 이리 소란한 게냐?이는 무엇이냐?"

"아,예..........주,중전마마께서."

"중전이 무엇?"

"이 근래,영 수라 못하시더니.......사가 조모님의 손맛이라,시큼한 기름붙이 딱 한입만 하였으면,하시었나이다.하여서 마마

님께서 사가로 나가시어 내입하신 것입니다."

"핫!꼴같잖다!갖은 진미 다 바치는 궐 안 수라상도 다 내치는 사람이 보잘것 없는 사가 음식이나 그리워하고 말야.누가 촌것

박색이라 아니하였더노?보기 싫다.내다 버려라."

"저,전하!중전마마께서 간절히 원하신 것입니다.한번만 내입케 하여 주십시오.입맛이 나지 않고 허전하면 옛날 드시던 것이 

그립고 그리합니다.내입케 하여 주십시오."

"근신하는 죄인 주제에 입매 맞게 이것저것 골라 젓수신다더냐?흥.안즉도 정신을 못 차린게다.당장 치워라.꼴사납다!"

무섭게 호령하시니 어찌하랴.진금이가 안고 있던 고리짝을 빼앗기고 말았다.

방안에서 간담 졸이며 듣고 있던 중전마마,맥이 탁 풀렸다.

방을 차고 들어와 무섭게 눈을 흘기는 상감마마더러 떨며 변명하였다.그립고 마냥 먹고 싶은터로,단 한가지 그맛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잘난척하는 게 아니라 도통 입맛이 없어서 그러합니다.마마,제발 그것을 내입케 하여 주시어요."

"흥.궐 안 진미 다 놓아두고 찾기를 그딴것이나 찾고,요러니 얄궂게 까다롭다는 소문이 도는게다."

무정하셔라.단 한번만이라도 상감께서 생각을 깊이 하셨더라면,도통 그런것에 관심없는 중전이 어찌 저리 간절하게 색다른

먹새를 바랄까 한번만 생각하시었으면 .그랬다면 이밤의 참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실상은 이것이 입덧이라.아무도 모르고,심지어 중전마마 자신도 모르지만 옥체에 이미 아기씨 담고 있는 중이시다.

모든것이 예민하고 예전과는 달라진 터로,그만큼 더 사무친 설움이 새겨졌다.

그러나 작정하고 중전을 위하여 귀한 음식치레 준비하여 오신 상감마마 정성이 또 빗나간 터다.

허니 말씀이 고울리가 없었다.

청하지도 않은 각색진미,가득 차린 상 밀어놓고 다 드시오 윽박지르니 입에 넘어갈리가 있나.

깨작거리다가 말고 찬물만 들이키니 그것이 밉고 섭섭하다.

상감마마.중전마마 두고 또 눈만 흘긴다.

상감마마께서 중전마마 찾아 듭시었대.

제발 부드러이 화해하시면 얼마나 좋아.게다하고 바라는 아랫것들 바람과는 아랑곳없이 방안의 두분마마,상을 사이두고 한마

디 말도 없다.

밤이 깊어갔다.

대전 돌아가실줄 알았는데.왕이 금침 내려라 하시었다.

좁은 방에 금침 하나.

등 돌리고 누운 두 사람 다 내내 말이 없다.이윽고 먼저 눈이 감긴 이는 왕이다.

어느새 숨결이 고르게 새어 나왔다.깊이 잠드신 것이다.

자리옷을 벗고 미리 차비한 정결한 의대를 갈아입고서 물래 문을 나섰다.

삼경이 넘은 시각이다.

문앞에 있던 숙침 나인 진금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일이 공교로워 요것이 또 소피 본다 하여 잠시 뒷간에 가고 말았구나.그틈을 타서 왕비는 몰래 석광당을 빠져나왔다.

깜빡이는 등불 하나에 의지하여 비틀거리며 침향정까지 홀로이 죽음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다.

용잠이며 노리개며 활금 쌍가락지이며 와에게서 받은 모든 패물들 다 몸에서 떼어놓았다.

속치마 짝짝 찢어 끈을 만든 것이니 침향전 대들보에 단단히 묶었다.

매듭지어 고리 묶고 미련없이 목을 들이미는 참이다.깡충깡충 침향정 계단을 뛰어 올라 온 놈이 바로 중전마마 스슴 복동이

었다.

미물이니 제 주인 냄새는 희한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하물며 중전마마께서 하냥 안고 우유 먹여주시고 여물가져다 주시며 껴안고 코 비비며 귀여워 하시니 이놈에게 바로 어미는

중전마마가 아닐 것이냐?

이밤도 잠자다가 중전마마 냄새가 나니 찾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놈이 중전마마 목 매달아 죽으려고 하는것도 모르고 치맛자락을 물어 끌었다.

마치 이밤서 제게 맛난것 가져 오셨어요?물어나 보듯이.

중전마마 흑흑 비통하게 오열을 터뜨렸다.

몸을 돌이켜 복동이 놈을 끌어안아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

"복동아.내가 너를 생각지 못했도다.미처 내가 너를 생각하지 못하였어.이날서 내가 죽어지면은 우리 복동이를 뉘가 보살펴

줄까?허나 어찌하랴?복동아,이몸의 지아비이신 전하께서 이몸을 항시 싫다.밉다 하시어 구박하시니 이날서는 날더러 정조

더럽히고 딴 사내 보았다 노화를 내시는구나.인제는 계집으로도 중전으로도 사직의 안주인으로도 쓸모가 없으니 죽어져라

하시었단다.이밤서 내가 죽을 작정이니 이일로 전하께 한번 신세를 가을참이란다.내가 죽어지면은 사직의 안주인에 어울리

는 명민하고 고운 처자 새로이 궐에 들어오실 것이니 전하께서도 좋으실 것이라.하물며 그 처자 승은 받아 금세 회임하시면

사직의 대통이 이러진단다.지금껏 생산 한번 못한 이 못난것이 없어져야 그일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야.허니 복동아,나를 

신의없는 사람으로 원망하지 말아라."

중전마마,마지막으로 복동이 털을 한번 쓸어준 이후에 꼭 안아주었다.

일어나시어 전하께서 주무시는 석광당 쪽을 향하여 곱게 절을 하였다.

"전하,이 못난 신첩은 이제 가오니 부대 어진 처자 맞으시어 줄거움 누리시고 성군이 되시옵소서.아버님 ,불효여식 소혜가

먼저 가옵니다.부대 후생서 뵈오렵니다."

중전마마 끈에 목을 밀어 넣으려는 순간이다.

이 못된놈 좀 보았나?

복동이가 뛰어와 머리로 중전의 몸을 미어버렸다.

얼떨결에 목을 매려던 중전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천제연에 떨어지고 말았다.

풍덩 소리가 나고 물보라가 튀었다.

그리고서 이윽고 잠잠하였다.

사방은 그저 캄캄한 정적이다.다만 복동이 놈이 낑낑 슬픈듯이 연못가를 맴돌며 울음을 울고 있을 뿐이다.

비수같이 새파란 하현달이 바람에 쓸리며 창공에 떠 있다.

석광당 금침 안에서 얕은 잠이 들었던 왕이 문득 눈을 뜬 것은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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