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수만 있다면 다가앉아 중전마마 그 괴로운 눈물을 학사 제손으로 지워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품에 안아주며 걱정마옵소서 하고 위로하여 줄수만 있다면은....
그러나 그순간 그는 자신의 그런 마음에 소스라치고 놀라 저도 모르게 털썩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지금 중전마마께서 누구때문에 이런 꼴을 당하고 사시는 것이낙?
흔들리는 저의 올바르지 못한 처신이 결국은 빌미가 된셈이라.내가 이러면 아니되지.
진정 아니되지!매섭게 다잡아보지만은 한번 꺾이어 흘러가는 그마음을 자신도 어찌할수 없음이랴.
두칸방 주렴을 사이에 두고 아랫목의 중전마마,아비 때문에 서럽고,윗목의 강두수,금지된 연정과 몰래 사모하는 분의 슬픔
때문에 아프다.
"죄송합니다.스승들께서는 부대 이 심란한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오직 한분 남은 사친이시니,만약 아버님께서 잘못되시기
라도 한다면은....이 중전은 천하에 외로운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심란하여 도무지 글줄
이 않으니 오늘은 강학을 그만 하렵니다."
"망극하옵니다.중전마마의 심기를 어찌 신등이 읽지 못할것입니까?근심지우소서,신이 나가는 길에 옥동에 반드시 들러 부원
군의 환후를 살펴볼 것입니다."
대제학이 일어서며 어린 중전마마를 위로 하였다.
그와 강두수가 뒷걸음으로 물러나고 밤수라가 올라왔다.허나 중전마마 그 수라상 반도 제대로 비우지 못하였다.
든든한 그분이 혹시 오시면은 사정 말씀드리고 간청을 하여보아야지.
꼭 하거늘 하게 하여 달라고 부탁하여야지.평생소원이니 아버님을 모시게 해달라고 주청할 것이야.허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의지할 단 한분 그분 주상께서는 아니 오시는구나.온밤을 까물하게 앉아서 기다려 보았지만,한가위절 맞이하여 태상대왕
능으로 원행 나가신 그분이 중전마마 애타는 마음을 어찌 알랴.
아침이었다.
중전마마 소세 시중을 들고 난후 박상궁이 나가는데 엇갈려 선이년이 금침을 갈무리하러 방으로 들어왔다.
간교하고 간특한 이년하는짓 좀 보소?금침에 놓인 베게 두개를 처연히 내려보다가 한숨 들이쉬고 치마꼬리에 눈물을 닦는
척하였다.중전마마,그년의 검은 속셈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차이니 신임하는 아랫것이 평상시 하지 않던 짓을 하는것에
예사로 넘겨지지 않았다.
"너 어찌 그러하니?네가 말하지 못하는 근심이 있는게지?"
"아,아니옵니다,마마.쇤네 아무 일도 없사옵니다."
"아니다,내 너의 안색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큰 근심이 있음이야.사가의어미가 아프다 하여 자주 나가더니 병이 더 위중해진
게냐?그리 근심이면 나갔다 오렴.내 윤허할 것이니 전의에게 약첩이나 받아 다녀오도록 하여라."
"마마,마마.망극하옵니다.흑흑흑."
갑자기 선이년이 방바닥에 엎드려 장한 울음소리를 내었따.의아한 중전마마,손을 들어 부드러이 아랫것의 등을 쓸며 위로하
였다.
"암만,어미가 그리 몸이 편안치 않다 들은터이니 어찌 네마음이 편안하겠더냐?눈물을 그치거라.나가서 구환을 하면 될일이
고 눈물을 보이는 것은 예법이 아니니라."
중전 또한 내내 사친에 대한 근심으로 아뜩하였다.동병상련이라.울컥 선이 년이 가엾었던 것이다.
"흑흑흑.마마,우리 가엾으신 중전마마,어찌할 것입니까?어찌할 것입니까?흑흑흑.쇤네 귀가 있어 들은 이야기를 차마 전하지
는 못하옵고,다만 통분하고 억울하고 속만 타옵니다.흑흑흑."
선이 년 등을 쓸어주던 중전마마 손이 허공에서 딱 멎었다.툭하고 치마귀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하얗게 바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선이 너 그것이 대체 무슨 소리냐?들음직하니 고약한 일이라.내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도 중궁전 너희들이 나의 심기를
걱정하여 전하지 못한 것이 있음이야.고하여라.대체 무슨 일이더냐?"
"마마,마마,쇤네는 차마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흑흑흑."
"말을 하래두!대체 너희가 나에게 감추고 있는것이 무엇이냐?"
"마마,흑흑흑.대전마마께서 이 근래 내내 월성궁으로 납시었다 합니다."
"뭐라?대전께서 월성궁에 나가시었다고?"
차마 믿을수 없어 중전은 힘없이 되물었다.
왕비에게 지극충심인 나인 아이는 상전이 당한 능멸과 기만이 아파 마치 제일인양 흐느끼고 있었다.
"흑흑흑.그만만 하면 쇤네,전해 올리지도 않나이다.지난번 상감마마께서 중전마마 사슴을 잡아다 준다 사냥터 가셨을 적에
도 월성궁 계집에게서 시침을 받으셨다 하옵니다.어제 원행을 나가심이라,월성궁에서 곧장 원행 나가시고 그계집을 가마에
태우고 갔다고 궐내에 소문이 자자하옵니다.흑흑흑.마마."
오직 한분의 마음을 믿었다.
울컥 격한 성질에 할말 아니할말 마구 하시고 난중에 후회하시어 은근슬쩍 풀어지시지.
개구쟁이처럼 뱅뱅 돌며 툭툭 걷어차는 그분이시지.
서경당에 들어오시마 하였던 말씀은 우리 인제 화해합시다 그리 들었다.
사친의 병환으로 그렇지 않아도 아프고 힘든 가슴이 지아비 왕의 배신을 들은 연후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짓밟힌 단심,믿음의 허무함.공허한 눈동자로 중전을 흐느끼는 나인을 바라보았다.
"월성궁 계집을...가마를 태우고...원행 가시었다.복동이를 잡아다 주신날도 그 계집하고 노시었다?아아,그래 그러하셨구나."
이성은 믿어라 하는데 섬약한 감정은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창빈마마 일로 중전 자신에게 노엽게 변한 그가 한번에 번뜩 그마음을 돌린 모양이다.
한번 주면 홈빡이되 그만큼 빨리 자르시기도 하시지.날더러 독부라 일갈하시었다 하더니 결국은 그계집에게로 다시 돌아
가시었구나.
'이몸의 청명을 비호하시었다 하여 내 그분을 믿었거늘!인제보니 그것은 나를 믿어서가 아니라 주상 당신의 자존심 때문이었
음에랴.더러운 구설을 믿는다 하면 상감의 여인인나를 다른 사내에게 빼앗긴 셈이라.오만한 분이 어찌 그것을 인정하랴?
그래서 나를 믿는다 하신 것이지 절대로 나를 용서하고 정궁으로 대접하심이 아니었구나.'
이상한 일이다.눈물대신 헛웃음이 나왔다.
배신감보다 오히려 허무하고 우스웠다.마냥 그만 바라보며 가슴 졸이고 콩닥이던 스스로의 순정이 더없이 초라하고 비웃음
이 났다.허공을 응시하는 눈에는 이미 빛이 꺼져 있었다.
의대 시중 들러 박상궁이 들어왔다.왕비는 가만히 면경 안 자신의 못난 얼굴을 바라보다 속삭였다.
"자네는 알고 있었지?"
"네에?마마.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전께서...월성궁 나가신 것 말야.복동이 잡으러 산막 나가셨을때도 그 계집 시침을 받으셨다는데,사실인 게지?"
"마,마마.망극하옵니다.오데서 그런 망측한 헛소문을 들으시어서 심기를 괴롭히십니까?헛된 소문일랑은 절대로 믿지마사이다."
박상궁이 깜짝 놀라 부인하였다.하지만 명민한 눈치로 중전은 신임하는 그녀가 아연 당황해하는 기색을 고스란히 읽어냈다.
그녀도 듣고 있고,알고 있는 이야기란 뜻이었다.결국 나인이 통분하여 마침내 아뢰었던 소문이 사실이란 말이었다.
다만 귀 어둡고 눈 어두운 중전 자신만 몰랐을뿐.
이 몸은 오진 단심이었거늘.....치맛자락 아래 떨어진 손.창백한 옥가락지를 내려다보는 왕비의 눈에 설풋 붉은 물이 솟아
났다.끝내 흘리지 못하는 눈물.마음 다른데 둔 사내에게는 다만 그 단심이 희롱하는 한순간의 변덕스런 즐거움이었던가?
고개 돌린 중전의 눈은 마냥 허무했다.그날밤이다.중전은 윤상궁을 불러들였다.장옷을 앞에 놓고 있었다.
"자네가 앞장서게."
"예에?"
"내가 못살겠네.아버님 얼굴을 한번 뵈어야 이 답답한 속이 풀리겠네.내 폐비되어 쫓겨나더라도 아버님을 보아야겠네."
고집스런 입매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법도 지엄하시고 한번도 예법에 어긋난 일을 아니하시는 분이 이정도면 얼마나 간장이
졸아들었는디 알만하였다.차마 윤상궁조차도 끝내 반대하지 못하였다.
침착하고 총명하다는 것은 옛말.
중전마마 눈이 뒤집혀져 있었다.믿었던 상감마마의 배신에 금이간 마음.사친의 병세는 더 장하여졌다는 기별이었다.
사리분별은 사라지고 오직 다급한 마음에 이성을 잃은 것이다.
그렇게 하여 삼년만에 중전은 처음으로 윤상궁만 딸리고 장옷으로 얼굴 감추어 일근문을 넘었다.
살그머니 궐을 나가 어둠을 안고 타박타박 걸어 심란한 근심안고 옥동 부원군 댁으로 스며들었다.
"아버님!"
까맣게 입술이 타고 금세 기운이 까물거려 꺼질듯한 기운이 쇠락한 사친의 얼굴을 보는 순간 중전마마,눈앞이 아뜩하였다.
다다다 달려들어 야윈 손목 부여잡았다.애통한 울음을 쏟아내니 혼몽항 중에서도 김익현,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간신히 눈을 뜨니 자나깨나 걱정근심인 그 따님의 얼굴이 분명 틀림없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마마,어,어떻게?어떻게?"
"마음이 바삭 졸아 도무지 견딜수 없기로 이리 잠시 나왔습니다.하루종일 아무것도 손이 잡히지 않았나이다.아버님,제발
강잉하니 견뎌 주시어요."
사친의 야윈 손을 부여잡고 그저 눈물 보따리,아버님이 잘못되시면은 이 소혜도 따라갈 것이어요.말로는 차마 못하되 눈물로
오가는 뜻이라.김익현의 주름진 얼굴에 주르르 눈물이 흘렸다.
그뒤로 따님의 눈물방울도 뚝뚝 떨어져 덧보태졌다.
"어서 가십시오...이곳에 오신것이 밝혀지면 다시 큰일이 날것입니다.....아비가...또 기별을 드릴 것이니..아름다운 옥안을
뵈었으니 되었나이다.아비가 마마 생각하여 기운을 차릴 것입니다.ㅣ어서 가십시오.마마님은 중전마마를 뫼시게나 어서!"
아아,야속하시다.한식경도 머무르지 못하였는데,탕제 한번 올려드리지 못하였는데 가라 재촉하신다.
"중전마마께서 잘못되시면 이 아비도 못사옵니다.어서 가십시오.다음에는 왕대비전의 윤허를 받고 나오십시오."
예법에 맞지 않는 경망한 짓은 하여서는 아니된다 꾸지람까지 들었다.
사친의 꿋꿋한 재촉에 쫓겨 중전마마 다시 몰래 궐로 돌아오신다.울며 울며 뒤돌아보며 마지못하여 돌아 오신다.
몸은 궐안이되 넋은 사핀과 함께라.중병중인 아버님의 초췌하고 야윈얼굴을 보았는데 어찌 그마음이 가다듬어지랴.
하루종일 중전마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동동 가슴만 치고 앉았다.
그날밤,또 중전은 윤상궁을 불렀다.장옷 자락을 배배 꼬며 단호하게 말하였다.
"나 옥동 나가야겠소."
"중전마마 고정하십시오.꼬리가 길면 밝힌다 하였습니다.근신중에 몰래 윤허도 받지 않고 출궁하신 터로 참말 발각되면 큰일
날 것입니다.저가 내일 왕대비전하께 아뢸것입니다.정식으로 피접을 가시면 될것입니다.제발 금일은 참으십시오."
윤상궁이 반대하였다.어젯밤 지존께서 밤길 걸어오시다가 까딱하면 술취한 무뢰배에게 회롱당할 뻔한 위험까지 무릅썼다.
일근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입을 봉하라 다그쳤지만,언제 또 중전마마께서 범에 암행을 나가셨다는 소문이 퍼질지 모른다.
어찌하든 중전마마를 모해하려는 월성궁 것들에게 흉악한 빌미를 줄수도 있는일이다.
다시 한번 상감마마께 오해사고 대노염을 사면 참말 폐비되실지 누가 아는가.
"할마마마께서 언제 돌아오신다고?대엿새는 지나야 한다 하지 않았는가!"
속타는 마음을 몰라주는 윤상궁에게 소리치는 중전마마 목청은 원망반 울음기 반이었다.
"나 목이 잘려도 좋소!갈라오.자네도 사친께서 얼마나 위중하신지를 보았잖냔 말야.이러다가 아버님 임종도 못하고 돌아가시
면 천하의 불효녀라.내가 죽소.못살 것이오.중전 자리 하나도 탐나지않소.아버님하고 같이 있을 것이오."
중전마마,막무가내 고집을 피웠다.오늘내일할 정도로 위급한 사친의 병환을 본터라 맘만 급하였다.
법도며 체통에 가려져서 한분뿐인 아버님의 임종도 못한다면 그녀는 인제 살 이유가 없었다.
중전마마 볼에 줄줄 흐르는 눈물을 보고 윤상궁이 방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말없이 등불을 들고 앞장섰다.두 여인의 그림자가 다시 한번 가만히 궐문을 나갔다.
중전의 암행은 나흘이나 계속 되었다.
마지막 날에는 밤길의 위험을 두려워한 윤상궁의 부탁으로 오직 믿을 만한 사내인 강두수가 배행하였다.
만에 하나 중전마마께서 미행하시다 첫날처럼 옥체에 위해라도 당하시면 큰일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
"인제는 오지 마십시오.이 아비가 기운이 났습니다.회복되어 마마를 보러 궐로 갈것입니다.허니 이렇게는 오지 마십시오.상께
알려지면 참으로 부덕없다 허물이 장할것입니다."
중전마마 효심 덕분인가.대궐서 내려간 좋은 약재 덕분인가.
다소간 환후가 나아졌다.제법 기력을 차린 김익현이 따님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중전은 고개를 끄떡였다.정성스레 약제 대접을 바쳐 드리고 면건으로 입가를 꼭꼭 닦아 주었다.
다시 누우신 이불귀를 꼭꼭 여며 드리고 주름진손을 꼭 잡아 볼에 대었다.눈에는 눈물이지만,다행히 기운이 다소 나아지심
이라.생긋 웃었다.
"아버님이 강건하셔야 저도 삽니다.아시지요?기운 내어주셔요.이몸에게 의지는 오직 아버님 한분뿐이랴.이딸의 명줄도 아버
님의 환후에 달려 있습니다."
섬돌 아래서 윤상궁이 애가 달아 빨리 환궁하시자 재촉하였다.
몇번이고 돌아보며 중전마마께서 마루에 나오자 신을 신겨 드렸다.타박타박 야심한 도성 거리를 걸어가는 그림자가 셋.
강두수가 등을 들고 앞장서고,윤상궁이 부액하여 금세 쓰러질듯 힘들어하시는 중전마마를 모시었다.
나흘밤 내내 잠도 주무시지 못하고 걸어 옥동까지 왔다 갔다,중전마마 기진하여 옥안이 창백하였다.
저 멀리 일근문이 보이기 시작하였다.강두수가 등롱을 윤상궁에게 건네고 읍하였다.
"저가 날마다 마마의 눈과 귀를 대신하여 찾아가 보렵니다.인제 기력을 되찾으셨으니 부원군께서도 금세 일어나실 겝니다.
너무 근심 마옵소서."
"오직 스승만 믿습니다.아버님 찾아뵙고 기별을 자주하여주세요.네에?"
"암만요.들어가십시오.옥체가 마냥 곤하여 쓰러지실 것입니다."
강두수가 재촉하였다.돌아선 중전은 윤상궁의 어깨에 기대어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이상하다.
군졸이 지키고 있어야 하며 닫혀 있어야 할 문이 어쩐지 활짝 열려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무엇인가 불길하고 이상한 기미라,중전과 윤상궁의 발길이 문앞에서 딱 멎었다.
"무엇을 망설이오?들어오시구려."
몰래 나간 발길을 들킨 참이다.헉,간이 떨어질 정도로 자지러지게 놀란 중전은 그만 다리가 휘청하였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윤상궁이나 문밖의 강두수도 마찬가지였다.
망극하고 망극하여라!일근문 안,기둥 벽에 융복 차림의 왕이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원행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이곳으로 오신듯하였다.치뜬눈에 불을 담은 채,팔짱을 끼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등뒤로 어찌할바를 모르며 시립한 대전 장내관과 일근문을 지키던 군졸이 손을 비비고 있었다.
중전을 노려보고 있던 왕의 눈빛은 맹수처럼 퍼렇게 타고 있었다.하지 말라 한짓을 하고 돌아온길이니,중전의 눈에 와이
마치 귀신처럼 보였다.
"저,전하!망극하옵니다.사친께서 위중...........하,한번만 용서...........아얏!!"
횡설수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변명을 하려 하던 중전이 뽀족하게 비명을 질렀다.왕이 세차게 팔을 확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지존께서 밤마다 미행이라.망측하구려.하물며 그대는 근신하라 하명받은 사람이 아닌가?이리 밤이슬을 맞고 어디로 싸돌아
다니시는게요?"
"마마,사친께서.....한번만 용서하..........신첩이 잘못하였,,,,,,,,,,제발,마마.."
"망신이오,긴이야기는 딴데서 합시다그려."
중전의 말을 딱 자르고 난후 왕이 아연 놀라 부복한 강두수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들고 있던 등채로 그의 얼굴을 세차게 후려갈겼다.휙하고 서슬 푸르게 울리는 가죽 채찍에 강두수의 얼굴이 찢어져
피가 주르르 흘렀다.냉혹한 목청으로 분부하엿다.
"이 방자한 놈을 당장 끌고 가라.감히 지존의 스승으로 옳은길을 가르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곁에서 속살거리기를 위엄을
흐리게 하였다.하물며 지금 근신중인 비를 미혹하여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하였으니 스승 자격이 없다 할것이야.절대로
용서치 못하리라.내일밤 밝으면 이자를 저 현산 땅으로 위리안치 하라."
"존명."
주상전하의 뒤에 서 있던 호휘밀들이 강두수의 팔을 끌고 등을 함부로 밀며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왕이 노염에 젖은 눈빛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윤상궁에게로 돌렸다.
"아지 너도 도통 못쓰겠다.짐이 너를 신임하여 비를 옹위하여 보좌하라 맡기었거늘..중전의 경솔한 처신을 막지 못하고 이리
밤이슬을 맞게해?당장 출궁시켜 죄를 물을 것이다.나가서 짐의 하명을 기대려라!"
"마,마마!잘못하였습니다!다 소인이 잘못하였습니다.이몸의 목을 베시어 경계하시고 우리 중전마마는 용서하여 주십시오.쇤
네가 먼저 속살거렸나이다.이 늙은 것이 총명 흐려져 사가로 다녀오시라 먼저 마마께 아뢰었습니다.중전마마께서는 아무 잘
못도 없으십니다!"
"주인의 허물을 가리려 함은 아름답되,잘못짚었다.주인이 허락지 않으면은 어찌 이런일이 벌어질 것이냐?끌고 가라."
상감마마 뒤에 있는 병정들이 윤상궁을 끌고 사라졌다.
왕은 한쪽 팔이 잡혀 바들바들 떨고만 있는 중전을 지그시 돌아보았다.
더 이상은 아무말도 없다 다짜고짜로 중전의 머리에 꽂힌용잠을 빼내 저만큼 휙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여린 팔을 움켜쥐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감히 뉘가 있어 노염장한 성상의 팔에서 중전을 구해줄것인가?일근문에서 서경당까정은 근 한 식경이다.
그곳까지 중전을 끌고 가면서 왕은 끝내 한마디도 없다.중전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왕의 걸음걸이를 따라 잡으려고 거의
뛰다시피 해야 했다.기진한 터로 걷기보다는 거의 질질 끌려가는 형국인데,가면서 그저 잘못했나이다!망극하옵니다!한번만
고업하십시오!울음섞인목청으로 아무리 사죄하고 애원해도 왕은 묵묵부답,입술을 한일자로 그은채 아모 말이 없으시다.
중전을 끌고 왕은 서경당을 그냥 넘었다.불일문을 지났다.그옆 내전의 여인네들이 벌을 받아 근신할 적에 거처하는 초라한
석광당의 문을 열었다.그제야 사색이 된채 가쁜 숨을 내쉬는 중전을 돌아보았다.급한 걸음에 꽃신까정 벗겨져 잃어버리는
버선발이다.눈물투성이가 된 가련한 꼴이 들어오지도 않은 듯이 왕의 눈은 그저 사나운 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그가 실쭉 미소 지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자,말해 보시오."
"아,아비가....병중이라....환후가 몹시 깊다 하여서,그래서....성상께서는 도통 아니 오시고,할마마마께서는자운궁에 나가
계시니....흑흑흑.못내 답답하여서....임종하시랴 하니.....신첩이 정신이 잠시 돌아서....잘못하였습니다.신첩이 잘못하였
나이다.벌을 주십시오."
눈물이 반이다.달달 떨며 떠듬떠듬 대답하는 왕비를 바라보는 눈빛은 끝내 얼음이요.칼날이었다.
"그렇군,그래서 밤길 몰래 가자하니 학사를 부른게군.결국 그대가 의지하는 이는 오직 그 강씨 학사로군.짐이 그대의 지아비
거늘.무엇이든 짐더러 하여달라는 말한마디 아니하더니 그의 더러는 하여서는 안되는 부탁까정 하는군."
혼잣말퍼럼 조용하고 나직하였다.왕은 중전의 눈물 젖은 볼을 살며시 건들렸다.
쓸쓸한 듯,자조하듯이 미소 지으며 확인하였다.낮고 조용한 목청,미소가 더 큰 노염이고 더 큰 분심이라.
그의 신의를 짓밟아버린 왕비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는 그토록 뼈아팠다.
"결국 짐은 그대에게 아무것도 아닌게야?그렇지?짐은 그대 바라여 겉에서 빙빙 돌지만,어찌 이리 차가울까?그대 마음은 짐과
아주 다를지니,어쩔수 없지.마음을 어찌 마음대로 만들수 있으랴?"
왕이 사납게 중전의 몸을 석광당 안으로 밀어넣었다.
중전의 작은 몸이 넝마처럼 불기하나 없는 음산한 방안으로 내팽개쳐졌다.옹크리고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왕비를 바라보며
사뭇 유쾌하고 밝은 목소리로 단언하엿다.
"근신하오.조만간 그대 소원대로 하여주리라.도통 짐 곁에서는 못살고 오직 사가만 그리워하시는 분이라,마음 멀어 남남이니
허기는 법도대로 같이 살며 미워하며 사는것보다는 폐비됨이 낫겠지."
돌아서던 왕이 다시 몸을 돌이켰다.
"그러고 보면 일면 구설이 사실이군,마음이 오가면 그것이 연분이라.글 스승 그이가 참말 그대 정인인 게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