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200)

다스려야 합니다.아주 요절을 내십시오."

곁에 둘러앉은 박 상궁까지 이구동성 이 기회에 월성궁 계집을 잡아 죽여라 난리를 부렸다.

못하시면 저가 왕대비전께 고하여 일을 할깝쇼?윤 상궁이 소매 둥둥 걷었다.고개 흔들어 부인하며 중전은 애잔하게 웃었다.

"그이를 두고 이곳에서 내가 중전이라 하여,고개 치켜들고 모진 소리  하면 무엇할고?감히 나를 상대로 같잖은계교를 부리고

위세당당하게 수작하던 것은 다 이유가 있음에랴.지금껏 상감께서 총애하신 덕분이 아니던가?상감께서 어여삐 여기는 이를

내가 어찌하랴?이 못된 수작질의 원흉이 그이라 할 것이면 마마께서 가려서 처분하실 일이지.나는 다만....내 처신에 부끄

러움이 진정 없나 그것만을 근심할 뿐이네."

아무리 아니라 한들,남들이 모두 다 그렇다 하면 조만간 마음이 흔들리실 테지.

하물며 스승께서 한번 감히 주상을 상대로 고개 들고 대적한 적이 있음에랴.

항시 스승의 일이라 하면 어쩐지 언짢아하시고 불쾌한 용안에 완완하였어.

그러니 비록 나에게는 말씀을 아니하시지만 그분을 어찌 처분할까 내근심이거니....중전마마,화계에 화려하게 핀 백일홍을

내려보며 그런 슬픈 생각을 하엿다.

밤이 깊어간다.

칼날 같은 초승달이 하늘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이윽도 달은 검은 구름에 가리워져 자취를 감춘다.

윤 상궁이 아무리 침수하시라 간청드려도 중전마마 내쳐 고개만 흔들었다.

아니라 하는데도 바람소리 한 줄기에도 귀를 쫑긋쫑긋.

나뭇잎 떨어지는 기척에도 흠칫 놀라 몸을 바로 하였다.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문 쪽만 바라보다가 실망하여 고개를 떨어뜨렸다.

가녀린 하얀 목덜미가 마냥 애처로웠다.

몇번이고 뒷머리타래 매만지며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눈치였다.

말은 아니하시지만 기대리는 분이 누구더노?조만간 짐이 중전에게로 들어가면 헛된 소문일랑은 잦아질 것이야.하시었다는

허랑한 약조를 참으로 믿으신 게다.윤상궁이 마음 아파 중전마마 베게를 다시 놓아드리었다.

"아니 오신답니다.오실 양이면 이미 오셨지요.곤하십니다.그만 침수하옵소서."

"..........몇 경이오?"

"저어,이미 침수하시고 계시겠지?조하 일이 여간 분주한 게 아니니.힘이 드신 게야.우원전에서 침수하실거야.그렇지?"

"예,마마.성상의 일과가 잠시의 짬도 없는 줄을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오신다 마음 먹어도 쉽사리 오시지 못할 겝니다.

내일은 꼭 다녀가실 것입니다.조만간 중궁으로 뫼시리라 하시었다지 않습니까?"

"팔베개 아니하여 주시면 인제 잠이 오지 않는걸 뭐."

작은 목소리로 어린 중전마마.슬깃 지아비에 대한 수줍은 그리움과 감춘 연심을 드러냈다.

오마 하시었다면서.그건 겉둘러친 헛된 말씀뿐이었나?비단 금침 작은 몸에 둘러쓰고 잠을 청해보나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어둠속에서 말똥말똥 눈을 뜨고 중전은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였다.

돌아누워 보지만 쓸쓸하고 아뜩하기는 마찬가지.

내 팔자는 대체 왜 이럴까?휘유우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왓다.

'굳게 중신들 앞에서 나의 청명을 믿는다 하시었다잖어.금세 오해를 풀어주실 거야.나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는데....

내 마음을 그분이 알아주시었는데.불안해하지 말고 조용히 기대려야지.내 청명을 전하께서만은 알아주심이라.겁나지 않어.

무섭지 않아.'

홀로 잠시 훌쩍이던 중전은 이윽고 지친 졸음에 살며시 빠져들었다.

잠이 들어 더할 나위 없는 상감마마.

우원전에서 역시 잠 못이루고 하릴없이 앉아만 있다가 못내 어린 지어미 그리는 정이라.

벌떡 일어났다.

장 내관에게 등불만 들리고  금원으로 나가신다.

자존심 상 차마 박차들지는 못하고 조용한 서경당 주변만 빙빙 돌고 있다.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다가 짐이 들면 그이 잠을 깨울 것이야 싶어 그냥 돌아서시는구나.

'내일 들어가서 얼굴 보아야지.짐이 저를 믿고 있음을 말하여 주어야지.'

격한 노여움에 째그락거리며 따귀 후려치고 당장 폐비하네 마네,하시던 것은 다 잊어버렸다.이런 날벼락 같은 모해에 그이가

얼마나 속상할까 그 걱정만 하였다.

쓸쓸하게 돌아서는 왕의 어깨 위로 가는 빗줄기가 슬깃슬깃 내려앉았다.

옷이 젖는 것보다 허전한 마음이 더아프게 젖어드는데...그리워하고 그리워하는 두마음이 어찌 이리 닿지 않고 다른길로만

스쳐 지나가는 것인가.

일이 터졌다.

이튿날,중전마마와 얽혀 대죄인이 된 강두수가 망극하고 분개한 터로 그 일이 사실일진대 신의 목을 치시오,머리풀고 베옷

입고 시퍼런 도끼를 품에 안고 대전 앞에 무릎을 끓었다.

"감히 사직의 안주인 옥체에 허물을 끼얹고 흉악한 혀를 놀린 역당을 찾아내 치죄하여 주십시오.하늘에 우르러 한점 부끄

러움이 없거늘,어찌 이런 망극한 일이 벌어진 것인가?신도 죽이시고 그놈들도 죽이시고 우리 중전마마 청명을 명명백백

밝혀주시오!"

일필휘지 혈서라.

이마를 돌바닥에 찧으며 울부짖었다.

학사 강씨가 석고대죄하여 옆드렸다 하는 말에 왕은 몹시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당장 끌어내라 냉정하게 분부하였다.

"참으로 고약하다.저의 처신이 선비답지 않다."

"전하,어찌 처분할까요?"

"처분할 것도 말 것도 없다.짐이 이미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다 알고 있노라.단 한번도 중전의 청명을 믿지 못한바 없음

에랴.학사가 아는일이 도무지 주제넘은 것이 아니더냐?이러하니 쓸데 없는 구설이 나는게야!저가 떳떳하고 신실하다 할것

이면 나서지 않아도 진실은 가려질 것이다.허니 물러가라 하라.저가 지금 할일은 다른것.마음을 굳건히 가지고 심신이

어지러운 중전을 잘 위로하며 강학이나 제대로 하는일이야.비더러 글 가르쳐라 보내었더니 말야.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구먼.

짐의 안해 일이니 짐이 알아서 처분할일,저가 대체 무어관대 감히 나서는가?"

바깥을 노려보는 용안에 실긋 살기가 어렸다.

용포 소맷자락안에 감추어진 주먹이 꾹 움켜쥐어졌다.

'그래 안다.어질고 강직하다는 학사 네놈이 중전과 설마 무엇을 어찌하였겠느냐?하지만 짐작하느니.네놈 눈이 어디를 보는지

모를 것이냐?비에게는 오직 그이만이 가진 기막힌 매혹이 있음이야.짐은 알거니,눈은 다 똑같은지라,네놈이 중전의곁에서

배행하기를 오래라,아름다운 그 사람에게서 풍기는 향기를 맡은게지.그는 사실인게다.그러니 이런 구설이 나는게지.'

중전에 대한 더러운 구설이 들끓던 순간,왕은 이 짓거리를 누가 시작하였는지 번쩍 짐작하였다.

앙앙불락,새큰거리는 희란마마의 세모꼴 눈이 보였다.

시커먼 투기심에 사로잡혀 어찌하든 중전과 짐 사이를 떼놓으려고 벌인 짓거리일 것이다만,짐이 어디 천하 멍청이더냐?

그 딴거에 속아넘어가게?하지만 허공을 떠돌며 홀로 생각에 잠긴채 치켜뜬 눈빛이 무서웠다.

겉으로는 무심하고 웃어넘기지만 솔직히 왕의 속내는 희란마마가 바란대로 투기심에 펄펄 끓는 화산이었다.

자존심이 있으니 차마 기색을 보이지 못하였으되 왕이 중전과 강두수와의 날벼락 같은 구설 이후 잠못드는 이유가 있었다.

'중전은 오직 짐의 여인임에랴!'

요 근래 중전과 학사 간 터무니 없는 사단이 났을적부터 부글부글 치솟아오르는 분노와 홧증의 이유가 오직 그것이었다.

그이는 짐의 지어미이며 사직의 정궁인데 감히 강가학사 그놈이 짐의 여인을 겁도없이 넘보았다더냐?

중전의 어질고 순후한 심성을 한없이 곱다여기고 있었다.

그녀가 갖춘 반듯하 ㄴ지혜로움이며 반짝이는 총명함을 더없이 귀하게 아끼는 형편이었다.

담담한 미소 짓는 아름다운 웃음을 사모하여 그저 주변에서 빙빙 돌며 짐을 좀 사모하여 주어.마냥 바라며 곁에선 짐을 

그대도 좀 어여삐 여겨주어 칭얼대고 있는 터였다.

그리하여 어마마마 것이던 옥지환을 선사하고 원자 낳아주어 졸라대고 있는 형편이 아니냐.

중전은 짐에게 오직 귀하고 하나뿐인 여인이오 고백하신 것이었다.

'이토록 그대를 사모함에도 짐더러는 사모한다 말 한마디도 안해주고,건방지게 하지 말라는 일이나 하고 말야.눈치 채이게

너무 학사만을 귀하게 아끼니 이런 쓸데 없는 구실도 나는게지.흥.'

창빈마마 일로 울컥 노하여 난리급증을 부렸지만 돌이켜 생각하여 보면 그의 치명적인 과오와과실을 가려주려 한 선한 의도

임에랴.인제 시각도 어느 정도 지나고 분심이 가라앉았다.

홀로 우원전에서 침수하며 골수에까지 느낀것은 그리움.

아무리 하여도 짐은 그이 떼놓고는 못살 것이다,하는 자각이었다.

'짐이 이내 서경당 들어가 미안하오,사과하고 교태전에 모시어 나오려고 하였더니 말야.항시 학사만 어여삐하더니 이런 일을

자초한단 말이지,흥.'

강학을 한답시고 마주 앉아 있을적에 강씨 학사를 향하여 담담히 미소 짓던 중전의 어여뿐 얼굴이 생각나니,애먼 투기심은

하늘을 치솟고 말못하는 부러움은 첩첩산중이었다.

마주앉아 있떤 두사람에게서 느꼈던 그 묘한 동질감을 되새기는 순간,실로 견딜수 없을 만치 뼈아픈 부러움을 느끼던것이었다.

이런 기색이 설풋 드러난 터라 당장에 그틈을 치고 들어왔구먼.

상감마마,훌쩍 일어나시어 편전 들었다.

승지더러 행각의 모든 중신들을 모아라 하명하시었다.

강두수를 월대 아래 꿇어앉혀 두고 백관에게 강하게 호령하시었다.

저놈을 당장 끌어내라 고함지르고 노염을 타신 것과는 달리 학사를 믿는다 강하게 비호하시었다.

실상은 강두수를 믿어서도 아니고 곱다여겨서도 아니다.

오직 상감 당신의 자존심을 건지기 위한 안감힘이었다.

저 미천한 학사가 짐의 연적이라?중전을 사이에 두고 대적하여 선 사내라고?웃기는 소리!만방에 과시하듯이 강두수더러 

보란듯이 중궁 들어가 강학 계속하거라 분부하시었다.

심지어 중궁 보살피느라 고생하였다 하며 귀한 벼루까정 하사하시었다.

그리고는 내관더러 스승을  뫼시고 나가라 분부하시었다.중전과 강두수를 음해한 백관더러 보란듯이 시위한 셈이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짐이 안다.이번 구설은 참말 터무니 없는 모해이다.짐은 이 망측한 구설뒤에 누구혀가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왕의 냉엄한 시선은 돌려지지 않고 곧바로 장안로에게 갔다.

간특한 네 딸년 모략질을 조심시켜라 이런 뜻이었다.조목조목 당신이 들은 소문에 대하여 스스로 하답하시며 해명하시었다.

"가락지라 하면 중전에게 짐이 선사한 옥가락지가 깨어져 학사에게 수리하라 내어준 일일 것이며,비가 학사에게 의대를 

내주었다 하는 일도 아들 돌이라 하여 짐이 윤허한 일임에랴.무엇이 문제인가?중전이 강학할적에 항시 중궁 아랫것들이

배행하였으니,그는 이미 밝혀진 바다.한번도 단둘이 어찌하였다는 일이 없는데 어찌하여 날벼락같이 이날서 중전을 모해

하는 더러운 말들이 떠다니는가?짐이 짐작하거니,경솔하게 곤전과 불화하여 비를 폐하였으면 하는 헛소리를 한 다음이다.

아마도 멍청한 인간들이 참말로 그 일을 사실로 만들랴 이번 일을 만들어낸 듯싶다.아닌가?"

중신들이 웅성거렸다.

대놓고 지아비이신 상감마마께서 중전을 옹호하시며 딱부러지게 소문을 짚어내어 해명하시니 무엇을 어쩌란 말인가?

무서운 눈을 부릅뜨고 내려다보시는 눈빛이 일러 가로되,한번만 더 애먼 중전을 가지고 장난질 하였다간 너들이 다 죽으리

라 경고하심이 아닌가?

"짐은 단 한번도 중전을 의심한 적없고 그의 부덕과 청명함을 밉다 한적 없음에랴.다른것은 모르되 참말 정결하고 고운

심덕의 중전이시다.이번 구설은 작정하고 중전을 해치려는 작당들인것.절대로 믿지 못함이며 또 믿지 않을 것이다.인제

와서 생각하니 학사가 중전더러 글을 가르치는 일조차 기막힌 허물이라,허니 내일부터는 대제학이 비의 강학에 배행하면

될일,더 이상 이런일로 심기를 어지럽히지 말라.다시 한번 중전에 대한 헛된 구설을 빌미 삼아 압박하는 이가 있다 하면

그는 바로 짐과 중전 사이를 이간질하여 역모를 꾸미는 이로 간주할게다.그대들 방정 맞은 혀를 조심하라!앞으로 한번만

더 이런 더러운 짓이 벌어질 때에는 대전이 피바다가 될것이다!"

상감의 냉혹한 시선이 정안로의 옆에 앉은 영의정 홍이성에게로 건너갔다.

"영상 너는 대체 무엇하는 인간이냐?대전에서 백관들이 중론하는 일들은 당연히 사직의 발전을 위한 것이어야지 말야.국모를

음해하는 헛소문이라.정승인 너가 경계하여 눌렀어야지!진위도 밝혀지지 않은 구설을 너가 먼저 들고 들어와 짐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중전을 망신시켰다.네 죄를 덮지 못하리라!도승지 있느냐?"

"등대하였나이다.전하."

"이날로 영의정 홍이성을 봉고파직하고 향리로 위리안치하라.죄목은 정승이라는 제 자리의 본분을 잊은 것이다.좌상 너도 

아니 되겠다.석달동안 입시하지 말고 집에서 근신하라.허고 중전의 구설을 사실로 들어 짐에게 상소질한 예조의 건방진 놈들

전부다 파직시키고 곤장 두들겨 쫓아내라.그 딴것들이 짐 곁에 있으니 곤전과 짐이 더 불화하는 것이다.어지는 이와 같으니

경들은 헤아려 다시는 짐의 분기를 건들지 말라."

그날로 영의정을 파직하고 좌의정을 근신 처분하시었다.

그리고 홍이성을 대신하여 영의정으로 발탁된 사람은 예전에 벽파에 의하여 쫓겨난 서림파의 거두 순암 한영회였다.

그가 입시하여 들어와 비워진 자리를 채우는데,꼿꼿한 신진후기지수거나 향리에 밀려들어간 서림파 선비들이었다.

중전을 내쫓아 죽여라 흉계를 꾸미었던 희란마마 이하 벽파들의 꿍속은 다 무위로 돌아간터.

인제는 저들이 궁지로 몰려 죽게 생겼고나.상감마마의 성총이 어디로 가있는지.그 뜻이 어떠한지 이번일로 보여주신 바나

다름없으니,서슬 푸르게 기세등등하던 간악한 인간들이 자라목이 되었다.

그 일을 끝내고 상감마마 월성궁 나가시었다.큰소리로 삿대질하며 희란마마더러 같잖게 굴지 말라 일갈하시었다.

"자꾸만 이렇게 짐을 멍충이로 만들다 못하여 인제는 오쟁이진 사내로 천하 망신을 시켜?진정 목이 베어지고 싶은 모양이구

려!짐의 마지막 경고요,누이.조심하오!"

그러거나 말거나 희란마마,말타고 떠나시는 상감마마 뒤태보며 힐쭉 웃는다.돌아서며 교인당을 바라보았다.

"선이 년더러 기별하여 주상께서 월성궁 듭시었다고 고하라 하소.알콩달콩 우리가 정분 다시 이었따고 거짓부렁하면 더 

좋고!홋호호.아이,재미난다.이간질하는 일이 이렇게 재미난 일일줄이야!"

대전서 그런 커단 변화가 일어난 줄도 모르는 서경당.

오라 하는 님의 반가운 기별은 아니 오시고 추위를 재촉하는 궂은비만 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리었다.

중전마마 아침에 기침하시어 머리를 빗으시다 그만 들고 있던 면경이 쨍그랑 떨어져 깨어지는 일이 생기고 말았구나.

시중드는 박상궁을 향하여 하얀 얼굴을 돌리시고 힘없이 웃으셨다.

"내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이 불안하구먼.무슨일이 생길것만 같아.대체 왜이리 심장애 뛰고 아픈지

모르겠네."

공교로운 일이었다.마치 그 불길한 치레를 하는 듯하였다.

한번도 그런적이 없거늘 부원군 사저에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부원군께서 앓아누우신 지 오래라 그 환후가 심상치 않다 하는 날벼락같은 전갈이었다.

온화한침착함을 항시 간직하시고 여하한 일에도 체통을 잃는법이 없던 중전마마이시다.

그런 분이 바들바들 떨면서,서간을 들고 온 사가의 심부름꾼이 엎드린 아랫방까지 내려오시었다.

"대감마님께서 보름전에 몹시도 마음이 심란하다 하시며 청도에 계신 학우를 보러 가신 것입니다.돌아오시던 길로 자립보전

하고 앓아누우신 것인데 아마 긴 행도에 곤하셨던지 급체를 하신뒤끝이 심하여졌나이다.도무지 잡수시지를 못하고 기력을

잃으시더니 그만 원래 있으신 지병까지 악화일로라.일이 이 지경이 되신것입니다."

"보름 전에,심란하시어 청도에 다녀오셨다고?"

다른 날이 아니다.학사 강씨와 정분이 났네 아니네.더러운 구설을 뒤집어쓴채로 온 조정이 물끓듯이 난리가 나기 시작한 

바로  그날이다.

몇 년이나 장하게 월성궁 계집 때문에 소박받으신 따님이 인제 겨우 천신만고로 주상 성총 회복하였다 즐거워 하시었지.

인제 고생끝이요,즐거움의 시작이라.마음고생 그만 하시고 행복하옵소서 기원하기가 무섭게 무고하고 더러운 누명을 뒤집어

쓴 따님의 망극한 꼴을 보시고 억장이 무너지신 게다.너의 팔자는 어찌 그리 아프더냐.너처럼 여리고 어진 아이를 복마전

같은 궐로 들여 보낸 이 아비의잘못이라.스스로를 자책하는 절망이며 민망하심이셨으리라.

중전마마 고운 볼에 저도 모르게 주르르 구슬 같은 눈물이 굴러 내렸다.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으며 왕비는 윗목의 윤상궁에게 손짓을 하엿다.

"듣자하니,못난 중전 근심으로 인하여 아버님 마음에 병이 드신 게야.윤상궁,자네가 나 대신 좀 사친을 보고 오시오.짐작

하기 병세가 심상치 않으니,당장에 내의원에 가서...그중 용하다 하는 어의 한 사람을 수소문하여서...약재 잘 챙기게....

하고 당장 성동에 나갔다 오시오.아버님 환후가 얼마나 심한지 직접 눈으로 보고 오시오."

하명하는 목청에 울음기가 반이었다.

몇번이고 잘 살피고 돌아오라 당부하는 옥음이 바람결에 떨리는 나뭇가지처럼 흔들렸다.

그렇게 윤상궁을 내보내 놓고도 하루종일 중전은 불안하여 제멋대로 날뛰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였다.

심란하고 울적하여 어쩔줄 몰라 하는 섬약한 마음.결국 어린 중전마마.

바느질 바구니를 내버려 두고 신을 신겨라 하시었다.축축하게 비를 맞으며 서경당 후원을  돌아 궐과 도성이 잇닿은 문루

근처,담벼락과 가장 가까ㅏ운 승재정에 올랐다.

아무리 까치발 하여 바라본다 하여도 방향이 다른 친정집이 보일리 만무하며 사친의 소식을 어찌 알수가 있을 것인가?

바작바작 타는 중전의 마음과는 달리 무정한 담은 그저 높고,굳게 닫힌 궐문은 열리지가 않는다.

명색은 사직의 안주인이오,왕비라 하되 실상은 조롱안의 새라.같은 도성안에 살아도 사친이 병중이라 한들 나가볼 수조차

없는 자신의 처지가 그렇게 비관될수 없었다.

'할마마마께 부탁을 하여볼까?단 며칠이라도 사가에 회거를 하게 하여달라고 말이야.사친께서 병세가 심하시니 할마마마께

서도 그 사정을 아시면은 윤허를 하여주실 것이야.간절하게 주청을 하면 들어주실 것이야.'

어려운 결심을 하였다.불끈 용기를 냈다.근신하라 하명받은 것은 알지만은 사친의 일로 총명이 흐려진 왕비는 조촐하게 박

상궁만 거느리고 외가마를 타고 창희궁으로 몰래 나갔다.간절한 부탁을 드리러 갔지만 헛된 발길이었다.왕대비전하께서 

공교롭게도 그 아침에 진성대군 사저로 나들이를 가실게 무어람?

중전은 풀이 죽어 다시 서경당으로 돌아왔다.그저 별일이 아닐게야.금세 털고 일어나실게야. 그소식만을 기다리며 하루종일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앉았다 섰다.불안해할 뿐이다.허나 마음만 급하고 도통 뾰족한 수가 없으니 어찌하리요.그저 윤상궁

만을 기다리는데 그녀가 돌아온것은 오후가 한참 지나서였다.

그때 중전마마,대제학과 강두수를 앉혀두고 강학 중이였다.윤상궁이 들었다 하는 고변에 중전은 법도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강학을 중단하라 하였다.

"신열이 높으시고 용체가 많이 상하였더이다.약물을 넘기기는 하시되,도통 기력이 없으시니 소인이 보기에도 많이 힘들어

보이셨나이다.전의가 진맥하기를 환후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이러하였나이다."

하루종일 간신히 참아내던 눈물이 중전마마 볼에 주르르 흘렀다.

윗목의 대제학과 강두수,중전마마께서 도대체 글줄에는 관심이 없고 강학내내 간간히 한숨이며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시던

이유를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해연히 놀라 부르짖었다.

"이 무슨 날벼락입니까?중전마마,부원군께서 병환중이십니까?"

"사친께서 원래 지병이 있으신 터입니다.청도로 학우를 보로 나들이를 하신 모양인데요,노인께서 먼 행보에 다소간 지치신 

터이라 병세가 다소 괴로우시답니다."

깊은 한숨 끝에 다시 한번 주르르 흐르는 눈물 방울.중전의 괴로움과 심중의고통은 겉으로 드러낼수 없는 처연한 속의 울음

이었다.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처절하고 가슴이아프게 하는 것이다.

강두수,감히 고개들어 중전마마 그눈물을 바라보는구나.강직하고 어진 얼굴에 스치는 것은 치열한 괴로움이요,갈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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