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를 풀게. 무명 의대도 내어오고. 근신하는 죄인 처지에 어찌 감히 비단
의대를 걸칠 것인가?"
가마를 타고 신임하는 두 명의 상궁만 딸린 채 연경당으로 들어가시는 중전마
마. 흔들리는 가마 안에서 눈을 꼭 감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너무 경솔하였다
후회해도 이미 늦은 터. 물은 이미 엎질러지고 그릇을 깨어졌다. 중전은 두 손
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가 후려친 볼의 아픔보다는 스스로를 자책하는 마음의
아픔이 더 깊었다.
잠을 자며 꿈속에서조차 어마마마를 부르시는 그분의 외로움을 아파했을 뿐이
다. 웃고 있어도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진 그분. 은애하는 지아비에게 의지하
고 어리광부릴 분을 모셔다 드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스스로 저지른 실책을 이
제 와서 차마 어찌하지 못하는 그분에게 억지로 손을 끌어다가. 철없이 어린
날 내버린 그분 한분 어머님의 손을 잡게 하여드리고 싶었다.
'할마마마의 말씀을 더 깊이 새겨들었어야 하였는데... 나는 다만 어리석고 눈
이 어두웠던 게다. 그분의 도도한 마음에 박힌 깊은 자격지심과 민망함을 헤아
리지 못하였다.'
차라리 나를 페비하여 주신다면.....
중전은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렸다. 무거운 금지환 옆에 그가 직접 끼워준 옥지
환이 빛나고 있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분이 행복하였으면...... 그분이 진정 한번이라도 행복하였으면......
어느 사이 중전마마 큰 눈에 안개 같은 슬픔이 맑은 눈물로 가득 차 오르고 있
었다..
손가락 하나쯤의 틈으로 열렸다가 다시 쾅 하고 닫혀버린 마음의 문.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막막하고 거대한 벽이 여린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아 중전은
문득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자신을 노려보던 왕의 무서운 눈빛을 떠올린다.
광인처럼 소리지르던 그의 눈엔, 노염과 분노만도 아닌, 무안함만도 아닌 슬픔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그랬다. 그것은 분명 슬픔이었다. 그대는 짐의 믿음을
배신하였어! 그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 하든 자신의 편이 되어주리라 생각한 중전이 중인들 앞에서 가장 큰 실책
이라 할 것인 창빈마마 일을 정면으로 들이댔을 때 오만한 왕이 느낀 배신감과
경악은 어떠하였을까? 하물며 뼈속까정 지존이라, 자신의 실책은 절대로 인정
하지 못하고 아니라 부인하는 그의 자존심을 박살을 낸 셈이니 날벼락을 맞지
않은 것이 이상할 터였다.
밤 내내 잠한숨 자지 못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하였다. 그가 중전 자신에게 준
수줍은 믿음과 정분을 먼저 짓뭉갠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
게야 깨달았다. 아아, 어리석었다. 그녀는 어리석었다. 늘 쌀쌀맞고 내치던 그
분이 잠시 주신 봄날의 짧은 햇볕 같은 어지러운 연심을 너무 믿었다. 사내의
뿌리깊은 자존심을 알지 못하여 철없이 저지른 실책은 그리도 어리석었다.
이제 영영 굳게 닫혀버렸을 지아비 그 마음을 생각하니 저절로 투명한 볼에 한
방울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랫동안 상처받고 절망하여 돌덩이처럼 무
감각해진 심장이라 생각하였는데 어찌 이리도 아프고 쓰라릴까? 왕비는 볼을
적시는 눈물에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내가 울면 아니 된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가 지금 이순간
바라는 단하나는 오직 주상 그 분이 행복하였으면… 사무치게 외롭고 고독한
그 분이 제발 행복하기를… 그렇게 된다면 그의 믿음과 수줍게 내민 손을 거부
하여 아프게 한 못난 자신이 스스로 궐을 걸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라 마음다졌
다.
"바깥에서 문을 잠그라. 상의 분부가 내릴 때까정 절대로 이곳을 벗어나지 않
을 것이다. 누구든 만나지 않을 것이다."
중전마마, 연경당 마당에서 가마를 내리며 나직한 음성으로 하명하였다. 하얀
무명옷에 머리타래 풀고 지분지운 초췌한 얼굴로 안방문을 닫았다.
"중전마마께서 연경당으로 나가셨나이다."
"누가 궁금하다 하였더냐? 그 이의 일은 다시는 내 앞에서 말하지 말라."
봉명상궁이 교태전에 짐의 말을 전하였느냐 시시각각 날치게 잡을 때는 언제
냐? 정작 장내관이 아뢰었을 때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싸늘한 안색으
로 왕은 마치 말을 아뢴 장내관이 죄인이라도 되는 듯이 노려보았다.
"다시는 말도 꺼내지 말라. 짐 마음과 그이 마음이야 이미 천리만리 멀어진 사
이가 아니더냐? 저를 당장 폐비할 것이되 명색이 국모라. 어찌하든 체면치레
는 하여주어야할 것이 아니냐. 두고보라지. 짐이 기필코 폐비하지 않나. 그 건
방진 것을 짐이 그동안 어찌 참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흥!"
괜히 애꿎은 장내관에게 화풀이였다. 역정난 목청으로 되받아치는데 목소리가
쩡쩡 울렸다. 할말이 없는 터로 장내관이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곁에 시립한
제조상궁이 아뢰었다.
"전하, 차(茶)를 올리리까?"
"그만 두어라. 한가하게 짐이 차를 즐길 시간이나 있더냐? 윤대관을 만날 것이
다. 편전으로 들라 하라."
기오헌을 나서며 흘깃 교태전을 바라보는 왕의 시선은 여전히 사나왔다. 시퍼
런 빛이 튀고 있었다. 건방진 것, 감히 짐을 능멸하러 들어? 선명한 입술꼬리
가 심술맞게 비틀렸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순진한 척 짐을 기만하였지. 그는 이를 갈았다.
저절로 주먹이 꼭 쥐어졌다. 차마 잊지 못할 무안함과 민망함이 다시 되살아나
미칠 것만 같았다. 반드시 그 사람에게만은 꼭 감추고 싶었던 치부를 들켜버린
순간, 이성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그가 심술부리고 불측한 짓을 하여도 언제
나 감싸주고 안아줄 것만 같았던 그 사람. 그래서 믿었다. 의지하였다. 더없이
사모하고 마음에 심었다. 헌데 그런 사람이 그에게 비수를 박을 줄이야.
'어디 두고 보자. 너가 짐을 능멸하고 기만한 것처럼 똑같이 해주마. 어차피 짐
은 너가 알다시피 어미마저도 쫓아낸 천하의 폭군이 아니더냐? 오냐. 그에 맞
게 행동하여 주마. 방탕하고 사리분별 못하고 제 멋대로 향락하며 잉첩의 치마
폭에 감겨 어진 선비 다 쫓아내던 것으로도 모자라서 길러주신 어미까정 모두
머리털 잘라 내쫓은 천하의 폭군이니라. 그렇게 하여 주마. 어질고 염직하고
고결한 너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일이니, 짐은 평생 그리도 더럽고 무정하고
궂은 인간이니라. 허니 짐 곁에 오지 말라. 너는 짐 곁에 오지 말라. 짐도 너를
잊으리라. 너 같은 건, 너 같은 건... 짐은 필요없다. 너 같은 건......'
시큰 가슴이 시렸다. 왕은 흥! 하고 오히려 더 도도하고 심술맞게 웃음을 날렸
다.
'짐이 인제 너 같은 건방지고 독한 계집을 상대할 줄 알고? 흥이다, 같잖은 것!
폐비하여 내쫓을 게다. 보란듯이 새 중전 맞이하여 짐 마음대로 하고 살련다.
왜? 너처럼 깐깐하고 짐의 잘못, 허물 들추어 망신시키고 뻣뻣한 계집을 왜 상
대해야 하느냐? 아주 너의 약을 바짝바짝 올려서 말려 죽일 것이야! 짐의 심기
가 상한 한 만치 너도 아파야 그 것이 공평한 일이지. 실컷 울음보나 터뜨려 보
아라! 짐이 까딱이나 하나. 짐은 인제 너 같은 차갑고 못난 것에게는 아무 기대
할 것도 바랄 것도 이 말이다!'
이를 으드득 사려물었다. 중전이 듣고 있기라도 한 듯이 수없이 마음속으로 욕
을 되풀이 하였다. 못난 것, 같잖은 것. 천하 박색 갈가마귀. 목석보다 더 독한
것, 어질다 잘난척이나 하며 짐을 망신시키고 기만하는 고약한 것…
욱신 다시 가슴이 아렸다. 분에 못이긴 그가 노염에 펄펄 뛰다가 격앙하여 얼
굴을 후려치자 빨갛게 손자국이 난 볼을 감싸쥐고 자신을 바라보던 어린 왕비
의 모습을 떠올렸다.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히 담고서 창백하게 질려 올려다
보던 중전. 그 눈에 담겨있던 텅 빈 공허, 혹은 지독한 절망…
아프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언저리를 지그시 손으로 눌렀다. 생각을 하
지 않으려 하여도 자꾸만 수면을 차고 오르는 슬픔. 그 사람만 생각하며 생기
는 마음의 통증이 사무치게 괴롭다.
'어찌하여 짐은 그 무심하고 독한 사람이 잘라지지 않을까? 여전히 보고 싶을
까? 그 같잖은 것에 무슨 희망이 있다고 짐은 그이가 직접 찾아와 잘못하였다
말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잘못은 그것이 하였는데! 짐을 먼저 배신한 이
는 그이인데…'
아무리 자문하여 보아도 알 수 없는 미궁이다. 그녀에 대하여 가지는 왕 당신
의 복잡한 애증은. 왕은 중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것이면 그저 캄캄
한 암흑 속에 헤매고 있는 것 같은 막막함을 느끼는 것이다. 막막한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슬픔과 절망. 혹은 사무친 외로움 같은 것...
그러나 도도한 자존심과 기만당했다는 배신감이 그 아련한 슬픔을 억눌렀다.
왕은 억지로 가슴에 돋는 연민과 애잔함을 씻어버렸다. 왕 자신이 당한 만큼
꼭 그대로 왕비에게 되돌려 갚아주겠다는 비뚤어진 복수심과 부끄러움이 비틀
어져 생긴 잔인함이 입술에 물렸다.
왕대비전하의 진갑날. 상감께서 폐서인시켜 쫓아낸 창빈마마를 중전이 미리
윤허도 받지 않고 궐로 들였다한다. 진노하신 상감께서 왕비를 폐서인하겠노
라 고래고래 고함지른 것도 모자라서 얼굴까정 후려치고 뛰쳐나갔다는 소문은
이미 궐내 곳곳에 퍼져버렸다. 그 일은 당장 그 이튿날부터 아주 큰 소용돌이
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정안로 이하 희란마마 끈줄로 들어온 조하 중신들이 이
때다 하고 들고 일어날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경자년의 일은 절대로 입 밖으로 발설하지 말라 하는 상감마마의 뜻이 아닙니
까? 감히 중궁전이 그를 어겼으니 폐서인당하여도 싸지요."
"폐서인만 당하여야 합니까? 경자년의 처분을 입에 담는 자는 전부다 목이 베
어졌어요. 허니 그 벌을 면하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상감마마의 하명에 위
엄이 서야 함이야. 중전마마라 할지라도 상감마마의 엄명을 어긴 것이니 예전
의 처분과 똑같이 해야 합니다. 중벌을 받아야 하구 말구요."
"기회는 이때입니다. 중궁전을 폐하고 새로 세워야 하는 것이에요. 월성궁 마
마의 뜻도 그러하거니, 힘을 모아보시오."
"이대로 중전을 폐하지 못한다면 앞날이 없음이오. 지금 월성궁마마 혁이 도령
일도 처리하지 못한 터로 만약 중궁전이 원자라도 잉태하여 보시오. 우리 월성
궁마마께서 발을 디딜 데가 없어집니다. 이런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음이예요.
반드시 일을 성사사켜야 합니다. 새 중궁전을 간택할 시에는 반드시 혁이 도령
을 왕자로 인정케 할 수 있는 처자를 낙점하여 밀어야 함도 잊지 마시구요."
빈청에서 이러구 저러구 악하고 못된 의논들을 하고 들어온 참이었다. 하필이
면 상감마마까지 그 위에다 불을 질렀다. 그날의 윤대관이 육조(六朝) 중에 예
조 차례였다. 예조판서 김장집 이하 관리들을 앞에 두고 이런 저런 고변을 받
고 있던 왕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뜬금없이 한마디 날벼락 같은 말을 흘리
었다.
"경에게 묻노니, 짐이 비(妃)를 폐하려면 어찌하여야 하는가?"
"예에? 전하! 대체 그것이 무슨 망극한 말씀이신지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
시옵니다! 신은 듣지 못하였나이다. 참람하고 망극한 말씀이라 신은 차마 듣지
못하였나이다."
아연 놀란 김장집이 허연 수염을 떨며 강하게 부인하였다. 절대로 있을 수 없
는 일이라 강하게 반대한 셈이었다. 말을 꺼낸 왕도 금세 말을 집어넣었다.
"......허기는, 열성조에 고변하여 얻은 정궁이며 국모라. 짐이 못마땅한 점이
있다 하여도 폐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겠지. 게다가 그이가 어질고 부덕 높다
헛된 소문은 장하니 허물이 많다 트집잡기도 참 무엇하구먼. 잊어버리오. 짐이
심중에 잠시 지나가는 말을 경솔하게 하였소이다."
마침 그때에 왕을 시립하여 앉아있던 정안로의 눈이 순간 번쩍 음험하게 빛났다.
이제 되었다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며 월성궁마마는 교소를 터뜨렸다.
"참입니까?진정 주상께서 중전 고년을 폐비할 수 없느냐 하시었나이까?"
"예,마마.제가 이 귀로 똑똑히 들었나이다."
퇴궐하자마자 제 아비가 별당으로 달려왔다.
보고 들은 소문을 전하여 주자 오랜만에 월성궁 담벼락 안에서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첩지도 없는 잉첩이라 하여 당하였던 모욕감이 사무쳤다.
못난 갈까마귀 중전 고년 때문에 이 내가,이 희란이 상감께 찬밥신세 이더냐.
언제고 얽어매어 폐비시키고 내쫓을테다.첩첩하게 쌓인 악한 분심이 장하였다.
헌데 궐 안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이렇게도 반가울 수가.
봄날 물어다 주는 제비의 날갯짓보다 더 화창하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
필시 고 간악한 년을 내쫓아 목을 베어 버리고,말랑말랑한 새 중전 다시 들여 혁의 문제도 해결해야지.
이 내 신세 앞날도 찾아야 겠다 작정하고 소매 걷고서 달려든 것이다.
"심지어 중전 편이다 소문 자자한 예판에게 그런말을 하시었다는 것은 반드시 중전 그년을 내쫓겠다 하는 어지이다.
기필코 아버님은 사람들을 잘 다루어서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우리모자가 살고 아버님이 사는 일입니다!"
"알겠나이다,마마.허고 다시 한번 곁두리치는 일도 방비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만약 이번 폐비 일이 성사되지 못한
다 하더라도 중전과 주상의 연분을 잘라내야 함이니,성총의 물길을 돌릴 후궁 일까정도 마련해 두어야 할것입니다."
"염려마십시오.이 희란이 누구입니까?만약 폐비하지는 못하리라 하면은 경자년 일을 발설치 말라하신 상의 명령을
어긴 죄인이라.중전을 근신시키시거나 별궁으로 내치시고 중전 노릇을 할 후궁을 반드시 들여야 합니다.청원하십시오."
"암만요,암만요."
정안로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문을 나갔다.
희란마마,치마귀를 잡고 떨치고 일어나 후원 연못 앞에 마련된 별당으로 걸어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하필이면 중전 고년을 서경당으로 보내었다는 것이 조금 걸리는구먼,도통 외인은 근접케 하지도 못하게 하신
곳이 게인데 말이야.죄인이라 하여서 중인환시리에 고년 볼따귀까정 후려치고 난리급증을 부린후에 당장 내쫓아라 할것
이되,서경당으로 중전을 보내었다?이게 대체 무슨뜻인고?"
정안로,제 권세 뒷곁인 큰마마의 하명이니 다음날부터 중전마마를 폐서인하고 고약한 일을 공론으로 만들기 서두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