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하니 주상이 저 잘났다 설쳐는 대지만 성질만 급하고 괄괄하되 알게 모르
게 어리숙하지 않더냐? 중전이 영리하며 세심하니 소리나지 않게 일을 처리하
는 것 좀 보아라? 평생 가야 주상은 중전 못 이길 것이다."
"이제 제법 두 분마마께서 정분도 돋는다 하시고, 날이면 날마다 중궁전 잦게
듭신다 합니다. 덩실하니 중전께서 회임만 하시면은 어마마마 근심은 다 지워
질 것입니다."
"그러게 말이다. 내 날이면 날마다 중궁이 회임하기를 천지신명에게 기원하느
니. 꽃이 피듯이 좋은 소식이 언젠가는 오지 않겠더냐?"
이런 말씀을 두 분이 나눈 터였다. 중전이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내전의 일 때문에 근심하지 않도록 이몸이 잘 처신할 것입니다. 할마마마."
"내 중궁만을 믿습니다. 항시 방비하고 잘 살피어 그것이 법도를 어기는 일을
할 것이면 중궁의 위엄을 한번 보이시오. 그래야 정신을 차릴 겝니다."
이러는데 바깥에서 고변이 들어왔다.
"전하. 대전에서 봉명상궁이 나왔기로 잠시 뵈옵자 하십니다."
의아한 터로 방안의 여인들이 모두다 서로 얼굴을 바라본다. 상감마마께서 갑
자기 왕대비전하께 봉명상궁을 보내시다니. 이것이 무슨 이유인가? 항시 변덕
스럽고 격한 손자의 행동이 종잡을 수 없었기로 불안하였다. 혹여 무슨 변란이
생긴 것인가 싶어 왕대비전하의 어진 얼굴에 근심이 드리워졌다.
"무슨 일이 대전에서 생긴 것인가? 들라!"
대전의 봉명상궁인 허상궁이 허리를 굽힌 채 방안에 들어왔다. 먼저 절을 하여
문안인사를 마친 후에 웃음 머금은 얼굴로 공손히 왕대비전하께 아뢰었다.
"마마, 기뻐하시옵서서. 실로 대 경사가 생긴 것입니다. 소인이 방금 대전 마마
께서 형조와 예조에 내리는 교서를 외청에 전하여주고 오는 길이옵니다. 한날,
상감마마께서 휘강전마마의 진갑 잔치를 축하하사 죄인들을 방면하심에 칠 년
전 명일옥사 때 억울하게 죄를 받은 이들도 다시 조사하여 신원하라 하명하시
었나이다. 그리하여 전하의 친가인 덕수 이씨의 어른들이 모다 신원이 되었다
합니다. 특히 마마의 오라버님이시던 옥재 대감의 일이 아주 잘 풀렸습니다.
전하께서 이르시기 짐이 그 어른에 대하여 몹시 사리에 맞지 않았고 가혹하였
다 하시었습니다. 당장 사람을 보내 그 분의 묘역을 다시 단장하고 비를 세울
것이며 종친의 예로써 제사를 들여라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용인 본향에서 안
즉도 기거하시는 일가들에게 수십년 간 세를 면제하시었고 오는 잔치 날에 모
다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라 특별히 하교하시었나이다."
"무, 무엇이라? 상감께서... 상감께서… 우리 집안을 다시 신원하여 주었다고?"
"예, 마마. 그렇사옵니다! 신원한 것도 모자라서 일가들에게 온갖 은전을 다 베
푸셨나이다. 내일 벌어질 대궐 잔치에 덕수 이씨 일가 친척들께서 모다 참석하
실 것이니… 마마, 감축드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쇤네는 이런 날이 반드시
올 줄 알았나이다. 대전 마마께서 명민한 그 눈을 뜨실 날이 반드시 올 줄 알았
나이다."
감격에 겨운 터로 허상궁의 목청에 물기가 끼었다. 휘강전 아랫것들도 모두 서
로 다투어 감축드리옵니다 소리쳤다. 너무 기쁘고 감격하면 말문이 막히는 것
인가? 왕대비전하께서는 옥안을 상기하신 채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 계시기만
하였다. 문득 중전을 바라보았다.
"중전이시구려... 우리 중전께서 이 늙은이의 심중을 주상께 전하였구려."
노인의 눈에 망극하게 옥루가 글썽글썽 하였다. 중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옵니다. 어찌 신첩이 대전마마의 심중을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까? 영명
하신 덕성이 빛이 나는 분이라 사리판단을 분별있게 행하사 이날의 처분을 내
린 줄 아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중전 또한 솔직히 경악을 한 것이었다. 그 전에 왕이 흘
러가는 말처럼 할마마마를 기쁘게 할 선물을 드리고 싶소 하였던 때다. 덕수
이씨 가문의 해원을 바라신다는 왕대비마마의 내밀한 심중을 조심스럽게 전하
기는 하였지만 정말 왕이 그렇게 처분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일을 되돌려 죄인들을 신원을 하여준다 하면 <명일옥사> 당시 왕의 처분이 잘
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한데 곧 죽어도 잘못하였다 모자라다
하지 않는 도도한 자존심을 가진 그가 자신의 잘못을 그렇게 순순히 인정을 할
것이던가? 또한 월성궁 뒷곁을 업은 좌의정을 비롯한 벽파가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는 터였다. 설사 왕이 그런 뜻을 가졌다 하여도 성사되기 어려울 것이
라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그가 이런 처분을 내리다니 중전은 오
히려 긴가 민가 싶었다.
함뿍 물기 머금은 옥안을 빛내시며 왕대비전하께서 고개를 저었다.
"말을 아니하면 내가 짐작하지 못할 줄 알았소? 중전께서 주상의 그 마음을 움
직인 것이야. 천하에서 이 노물의 심중을 읽어낸 이는 오직 중전 한 분이라. 이
늙은 것이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주상께 고언하였구려. 고맙소.
중전. 참말 감사하오. 내가 인제는 하늘을 바라보며 밥술을 들게 되었소이다.
주상과 나라를 보필하다 상급을 받기는커녕 간신들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여
주살된 오라버님이며 조카며.. 모다 떳떳하게 세상으로 돌아왔으니… 내가 여
한이 없소! 참말 내가 여한이 없소. 비석하나 세우지 못하고 붉은 봉분 그대로
방치된 오라버님의 억울함이… 인제는 가시었으니… 내가… 내가 인제는…"
망국하여라. 노인의 옥안에 굵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
의 눈물이었다. 왕대비전하께서는 환하게 웃음을 지으셨다.
"웃어야지! 암, 내가 웃을 것이야. 좋은 일인데 어찌 흉하게 울 것이더냐? 잔치
라, 실로 경사이니 내가 그날 잔치상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출 것이다. 우리 중
전 손을 잡고 내가 춤을 출 것이야. 지하의 원혼으로 구천에 떠돌던 우리 가문
의 어른들을 뫼시고 내가 덩실덩실 춤을 추리라…"
가마를 타고 돌아오는데 자꾸만 생긋 웃음이 머금어졌다. 감사하고 감사하여
라. 중전은 두 손을 아직도 뛰노는 가슴에 가만히 댔다. 사리분별 뚜렷하고 어
진 왕의 처분에 더없이 감격스러웠다. 참으로 이제 상감마마께서 영명한 눈을
바로 뜨시는 것이야. 이 몸이 날마다 기원하기 성군의 길을 걸으심이야.
"아이고, 곱기도 하지! 마마, 저것을 좀 보십시오!"
바깥에서 들려오는 윤상궁의 탄성에 중전은 가마 창을 열었다. 경희궁에서 성
덕궁으로 넘어오는 화안문을 막 넘는데 그 앞의 자그마한 언덕이다. 연분홍 빛
두견화가 보라 빛 금별초와 어울려 가득히 피어있었다. 새로운 초록으로 가득
한 언덕은 활짝 핀 꽃과 더불어 마치 아련한 채색화인 듯 하였다. 처지가 꽃구
름을 쓴 듯 하였다. 작은 짐승들을 사랑하고 들에 핀 이름 모를 화초 하나도 아
끼시는 분이다. 상긋 미소지으며 중전은 가마를 멈춰라 하였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내가 다소 체기가 있었다. 교태전까지는 걸어가련다. 윤상
궁은 가마군을 먼저 보내시오."
가마에서 내린 중전은 동심으로 돌아가 환하게 웃으며 꽃 속에 얼굴을 파묻었
다. 마음은 지바이 어진 처분에 더없이 감격하고 흥그럽지, 천지 사방은 아름
다운 꽃구름이지. 근심하나 없이 밝은 미소가 비로소 중전의 작은 옥안에 가득
히 피어올랐다. 열 여덟 발그레한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이 눈부셨다.
감추어진 내미지상 아름다움이 슬쩍 한자락 드러난 것이었다. 주변의 상궁 나
인들이 눈을 비볐다. 삽시간에 눈앞이 황홀한 중전마마 미태에 그만 반 넋이
나간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중전마마는 손수 저고리 소매를 걷고 고운 꽃
가지만 골라 꺾어들었다.
"곱기도 하지… 아무도 보는 이 없는데 이렇게 아름답게 피고 지는구나. 어쩜
이렇게 색도 고울까? 윤상궁, 사가에서는 말이오. 이 금별초를 꺾어다가 찧어
서 옷감에 물도 들인다오. 보라색이 얼마나 곱게 드는지 몰라. 그 것으로 저고
리를 만들면 참 어여쁘지. 아, 그렇구나. 너희들은 고운 꽃으로 골라 좀 꺾어
보거라. 꽃을 아끼시는 분이니 전하의 서재에 놓아드릴 것이다. 소박하지만 향
기가 좋으니 곱다 하실 것이야."
박상궁과 윤상궁은 서로 눈짓을 하였다.
-"딱 붙은 정분이여!"
-"대체 모를 일입니다 그려. 나 같으면 주상께서 중전마마를 대하여 온 그 퉁
명스런 태도에 오만 정이 딱 떨어져서 다시는 꼴도 보기 싫다 할 것 같은데…
어찌 저리도 일편단심 순정이신지… 전하께서 중전마마 저 마음을 만 분지 일
이나 알아주신다면 좋겠나이다."
-"전하께서 말씀만 없으시지 그를 모르실 줄 아는가? 당신께서 지금껏 중전마
마께 하셨던 일이 너무 박하고 심하다 싶으니 괜히 면구하여 심술을 부리시는
것일 뿐이지. 중전마마 저 마음을 다 알고 계시네. 은근슬쩍 짜증을 부리시는
척하며, 억지 심술 부리시는 척 하면서도 허구헌 날 중궁전에 자주 듭시지. 싫
다 하여도 서온돌에 붙박이라. 두 분만 계시면 알게 모르게 얼마나 다정하신지
모른다네. 남 들 보는데서만 무정하고 타박하시지, 속으로 보면 아주 중전마마
앞에서 살살 하시는 양이 무척 귀엽기까정 하다네."
두 상궁의 한숨 반 기대 반인 눈길도 모르고서 중전은 얼굴을 상기한 채 한아
름 금별초를 꺾어 품에 담았다. 활짝 웃으며 재촉하였다. 이 꽃을 지아비께 선
사할 생각으로 마음도 걸음도 하냥 급하였다.
"돌아가자구나. 스승께서 강학을 하러 듭실 시각이니 서둘러 가면 딱 맞춤이겠
다. 지난번도 내가 강학 시간에 늦어 스승을 기다리게 하였는데 이 날도 그런
실례를 저지르면 아니 되지."
중전마마께서 직접 안고온 고운 들꽃을 향기로운 차 한잔과 더불어 선물 받으
신 대전 마마. 그럼 어떠하신가? 괜히 기분이 좋으시다. 서책을 읽으시며 홀로
싱긋싱긋. 중신들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괜히 웃는 양이 어찌 그리 유쾌하신가.
사가의 개구쟁이 마냥 콧노래라도 부를 것 같은 용안이었다.
대체 어찌 저리 기분이 좋으신고?
왕대비전하의 일로 심기가 배배 꼬인 정안로. 상감마마 그 속을 알 수 없음이
라. 한마디 비틀어 찬물을 끼얹고도 싶지만은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다시 한번
불벼락을 맞을까봐 말도 못하고 속만 시커멓게 타고 있었다. 며칠 전 왕대비전
의 일가를 신원하라는 분부에 이미 일어난 일을 되짚어 하명을 내리심이니 그
는 국법의 위엄이 세워지지 않음이라, 부당합니다, 대들었다. 격분한 왕이 정
통으로 내던진 두루마리로 얼굴을 얻어맞을 뻔한 수모까정 겪은 터였다.
"네가 왕이냐? 감히 어디서 짐을 두고 경계하기를 세 살 먹은 어린애 마냥 다
루려 하느냐?"
용상에 앉아 발을 굴러가며 버럭버럭 고함질이었다. 치켜뜬 검미 아래 부리부
리한 호목에 시퍼런 빛이 줄기줄기 흘렀다. 그 전에는 저가 팥으로 메주를 쑨
다 하여도 외숙이 옳다, 좌상의 말이 타당하오 하고 무작정 고개 끄덕이고 듣
잡던 그 분이 더 이상은 아니었다.
"짐이 어리석어 지난날을 실수하였다 하면 헤아려 실책을 바로잡고 바른 길을
걷는 것을 아름답다 하여야지. 네가 감히 무어관대 짐이 하는 양을 두어두고
배 놓아라 감 놓아라 간섭하는 것이냐? 네가 언제까정 네가 시키는 대로 옥새
만 찍었던 허수아비인 줄 아느냐? 친정(親政)하리라 하며 짐이 작살내었던 이
들이다. 이제 와서 무덤에 들어간 이들, 살아나서 짐의 앞길을 막음도 없을 것
이니 경사 맞이하여 할마마마 낯을 보아 신원하는 것이 무엇 그리 잘못하였느
냐? 그야말로 친정함이라. 그것은 바로 짐의 뜻이 곧바로 세워지는 일이다. 어
디 한번 다시 하여 보지? 눈 똑바로 치켜뜨고 짐을 어린애 잡듯이 하여보란 말
이다!"
버럭버럭 고함소리가 편전의 용마루를 날릴 정도였다. 왕이 대놓고 정안로 그
더러 짐을 바로 멍충이, 허수아비로 만드느냐 일갈한 터였다. 그 앞에서 감히
누가 고개를 들 것인가?
"어디 다시 짐을 두고 사리분별 하지 않고 무작정 시키는 대로 말 잘 듣는 멍청
이군주 노릇 만들어보아라. 그 자리에서 박살을 낼 것이니. 기껏 대국서 보낸
난제 하나도 풀지 못하는 주제에 어디서 감히 짐더러 이래라 저래라 간섭을 하
느냐? 같잖은!......"
끽 소리도 내지 못하게 받아치는 목청은 더없이 매몰찼다. 진득하게 살기가 진
득하게 묻어있었다. 대놓고 중신들 앞에서 더 이상 까불지 말라 경고를 들었
다. 제 든든한 뒷곁이던 딸년 희란마마는 대궐 잔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되
었다. 그것도 그녀의 화수분이던 상감마마의 분부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러저러한 일들이 겹치니 누가 보아도 이제는 희란마마와 정안로 그들의 세
상이 종말에 다다른 것이다 싶은 터였다.
상감마마께서 하루아침에 왜 저리 변하셨노? 어찌하여 저리 하시노. 원망과
앙앙불락. 불안감이 겹치니 그 모든 미움과 증오는 상감을 휘두른다 싶은 교태
전의 중전마마에게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궁지에 다다른 쥐가 고양이를 문다
하였다. 월성궁으로 돌아간 정안로, 밤마다 하는 짓이니, 제 딸년과 머리 맞대
고 숙덕숙덕, 간특하고 악독한 계교를 짜기 여념이 없다. 어찌하든 곱다이 돋
는 두분 지존마마 사이를 헝클어버리고 제 년 성총을 되찾아 살길 마련하겠다
이를 악무는구나.
이런 터에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착한 중전마마. 그저 좋은 생각으로 상
감마마 몰래 작은 일 하나를 시작하였는데....
"반드시 허락하실 때까정 기둘려서 나의 소청을 가납하시라 전하여라. 엎드려
일어나지 말고 반드시 모시고 들어와야 하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