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 일파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하나같이 시커멓게 죽었다. 큰마마를 대궐 잔치에 얼씬하
지 못하게
한 것도 뒤집어 질 일인데, 인제는 중전마마를 편전까정 부르시어? 다정하니 같이 밤강하자
나서시어?
워낙에 전하께서 중전마마를 하찮게 여기시고 사람으로도 여기지 않을 만큼 보잘 것 없게
취급하시었
다. 하여 중전은 감히 전하께서 계시는 대전 쪽은 고개도 돌리지 못하는 곳인 줄 알고 사시
던 터였다. 게
다가 전하께서 내외인척 발호함을 경계하시고 아녀자가 감히 조하 일에 관심 가져 보았자
무엇을 할 것
이더냐? 하고 평상시 중전을 하도 날치게 잡는 참이다. 그러니 중전은 대전 쪽으로 발길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고 사는 터였다. 헌데 변덕이시지. 석수라 끝내시고 차 한
잔 다오 하고
들어오시었다. 갑자기 짐이랑 편전 같이 나갈려오 하고 물으시었다.
"아이고 아녀자가 편전에 함께 나가 무엇을 할 것입니까?"
"새로이 법전을 편찬하는 의논이라, 중전도 들어보면 재미가 있을 것이오. 한번 나가 들어보
시구려."
강권하시었다. 함께 가자 먼저 나서시어 권하시는데 끝내 싫다 하는 것도 좀 그러하였다. 게
다가 지아비
전하께서 집무를 보시는 편전이 어찌 생겼나 궁금도 하였다. 중전은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난생 처음 들
어간 편전을 눈치채이지 않게 휘둘러보았다.
주상께서 상시 시무를 보시는 편전인 선정전은 오십여 칸의 장중한 마루방이다. 전하께서
좌정하시는
낮은 용상에는 비단 방석이 깔려 있었고 높은 팔걸이가 걸쳐져 있었다. 왕의 앞에는 커다란
서안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옆으로는 문방사우(文房四友)와 각종 두루마리들. 서책들이 놓인 작은 서
탁이 또 놓
여있다. 용상 뒤로는 커다란 그림이 걸렸는데 어전 회의를 하는 곳이니 만큼 두 마리의 용
이 구름을 물
고 서로 여의주를 두고 희롱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용상 앞 마루방에는 줄줄이 늘어선 붉은 기둥을 좌우로 두고 중신들이 좌정하는 방석이 수
십 놓여져 있
었다. 용상 왼편으로 좌우승지가 서안을 놓고 귀를 세운 채 주상전하의 옆에 앉아 열심히
기록을 하고
있구나. 그 분위기가 엄숙하고 당당하니 아녀자인 중전은 저절로 오금이 떨리고 긴장이 되
었다. 허나 발
뒤에서 중신들의 갑론을박을 듣자하니 어느새 열심이라. 삐죽 호기심을 물고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
다.
이러저러하여 나라의 국법이 만들어지는구나. 지아비이신 상감마마께서 나라일을 하는 것도
처음 보았다. 중신들이 아뢰는 말씀을 곰곰이 듣고 계시다가 하문하고 되받아치기를 하시는
데 논리정연하고 날카롭기 바늘 끝이었다. 영명하시다 하시더니 참으로 당당하시지!
새삼 지아비 왕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된 중전이었다. 왕 역시 중전이 자신을 보고 있다 생각
하니 기운이 절로 돋았다. 나도 열심히 일을 한다 이 말이야. 성군 되려고 노력한다 이 말이
야 은근히 뽐내는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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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치는 않사옵니까?"
"늘상 하던 일인걸 뭐. 자리끼나 주오. 목이 마르구먼."
왕이 동온돌에서 의대 갈아입고 건너왔다. 이미 시각은 늦어 자정이다.. 만기
라 하는 주상의 일이 끝난 시각이었다. 귀밑머리 풀고 침수 차비 한 중전은 두
손을 물대접을 내밀었다.
"새 법전을 마련하는 일은 보통은 아닌데 큰일을 하시옵니다."
"그것이 벌써 오년 전부터 시작한 일이어서 말이오. 대강대강 끝나가고 있소이
다."
"아, 예....."
"그 일이 끝이 나면 당국의 본을 받아 사전을 편찬하려 하오. 몇십년이 걸리더
라도 할만한 일이다 싶어."
먼저 금침으로 파고들며 왕이 하품을 하였다. 신경을 쓰고 밤 늦다이 일을 한
터라 곤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만 주무시면 좋으련만 중전이 불을 끄고 다가
눕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커다란 사내의 손이 얇은 자리옷 고름 쪽으로 다가
왔다.
"곤하십니다. 이밤은 그냥 주무시어요. 신첩도 몸이 깨끗하지 않습니다."
"아 누가 그일 하자 그런가? 그냥..."
왕비의 한마디가 마치 자신을 밀어내기라도 한 것인 양 부르퉁하였다. 살며시
손길을 피하건 말건, 이 밤은 그냥 침수하시어요 사정하듯 소곤거려도 소용없
었다. 짐의 여인이니 짐 마음대로지. 되받아치며 지분거리는 손길에는 강압적
이기는 하지만 은근한 정이 함뿍 묻었다. 마지못해, 반쯤 질려 중전은 젖가슴
쪽으로 파고드는 왕의 손길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그러했다. 왕은 어
미의 젖을 탐하는 어린애처럼 항시 같이 침수할 적이면 중전의 고운 젖무덤 위
에 손을 대고 잠이 들었다. 버릇인 듯 했다.
그의 손이 슬슬 가슴을 거쳐 납작한 아랫배로 다가왔다.
"이번에도 달걸이를 하는 것이니 회임은 아니한 것이겠다?"
어제부터 중전은 달걸이 중이었다. 잉태하지 못함이었다. 왕도 실망하고 중전
도 실망하였다. 몸을 돌이켜 왕이 중전의 작은 몸을 담쑥 끌어안으며 아쉬운
듯 섭섭한 듯 말을 이었다.
"그만 딱 이참에 그대가 잉태를 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중전이 덩실하니 원
자를 회임하는 것만큼 할마마마께서 좋아하실 일도 없을 것이야."
"......신첩도 근심이옵니다."
이미 혼인한 지 세해. 지금껏 대통을 잇지 못함이라. 새삼스레 중전은 죄스럽
고 안타까웠다. 나직하게 속삭이는 말에 왕이 강하게 부인하였다. 그것은 그대
의 탓이 아니라 단언하며 위로하였다.
"천지신명이 점지하는 일이오.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 그것을 누가 그대
탓이라 할까? 하지만 소원이오. 짐은 참으로 그대 태에서 아기를 얻고싶어. 사
직은 반석이 되고 우리에게는 피와 살을 나눈 아기가 생기는 것이니 얼마나 의
지가 되고 든든할 것인가? 중전. 우리가 원자를 얻으면 말이야. 아지를 두지
말고 중전이 직접 젖을 먹여 키우소?"
"법도가 그러한데 어찌 그리할까요?"
"사람있고 법도가 있는 것이지. 법도가 사람을 억누르고 혈육지정을 가로막으
면 그것은 법도가 아니라 창살인 게요. 아지 두지 말고 우리는 원자를 우리 손
으로 키웁시다. 짐은 말이오. 한번도 생모마마 젖을 얻어먹지 못한 고로 그것
이 늘 쓸쓸하였어."
"......궐 안의 모든 어른이 마마만을 위하고 얼렀다 하였습니다."
"그래도 천륜(天倫)이라 하지 않소? 낳자마자 정궁마마에게 이 아들을 생으로
빼앗긴 희빈 어마마마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세자라 하
여 존대하고 멀리 둔 그 마음을 생각하면 늘 짠하기만 합니다. 돌아가셨어도
후궁이시니 묘소에도 이 불민한 자식은 맘대로 가지 못하오. 아바마마와 정궁
마마 두 분의 능묘는 철마다 때마다 참배하고 돌아오되 생모마마 묘소는 지나
가다 흘깃 보고 마는 심사라니...... 짐이 한번 게로 들어갈라 하였더니, 지존께
서 어찌 생모이시나 후궁인 분의 묘를 참배할 것인가 신료들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소이다. 짐은...... 불효자라오."
강하고 담대하며 도도한 사내의 심중에 묻힌 그늘 하나. 나직한 목소리에 묻은
깊은 자책과 슬쓸함. 영영 지우지 못하고 가라앉은 그의 외로움이 중전의 여린
가슴을 가득 적시었다.
"마마, 많이 쓸쓸하십니까?"
중전은 자신도 모르게 왕의 굵은 팔에 얼굴을 기대었다. 한순간이나마 자신의
작은 온기로 그의 외로움을 위로라도 하듯이. 조용히 묻는 말에 왕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지금은 외롭지 않소이다."
가만히 여린 얼굴에 왕은 볼을 대어왔다. 까칠한 수염이 부드러운 피부를 찔렀
지만 중전은 싫다 피하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 안겼다.
"그저 마음이 그득하오. 편안하오. 생각해보면 짐도 그렇거니와 중전도 천하에
서 가장 외로운 사람인 것을...... 이렇게 천지간 의지하는 우리가 하나 인양 동
품하여 누워있는데 무엇이 외로울 것이오? 짐은 다만...... 중전이 짐에게 더 다
정하여 주었으면 좋겠구려."
"신첩이 쌀쌀맞다 여기시는지요?"
"......그대는 말이 너무 없어, 짐은 늘 그대의 마음이 궁금해. 그대의 마음이 짐
의 것과 같은지..... 짐이 중전을 은근히 의지하고 믿듯이 중전도 그러한지. 짐
은...... 실책도 많고 모자란 점도 많은 사람이라, 어진 그대에게 늘 모자란가
싶어."
"신첩은 마마의 비(妃)올시다. 할마마마께서 맺어주시고 사직에 고변하여 부
부지연을 맺은 터인데 어찌 천첩의 마음을 의심하시는지요?"
외롭게 자라 언제나 사랑에 보채한다 하였던가?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느껴지
는 쓸쓸함과 고독이 만져지는 것 같아 더없이 마음이 짠하였다. 중전은 수줍음
을 무릅쓰고 살며시 먼저 지아비의 아름다운 입술에 입 맞추어 주었다. 빛나는
시선 안에 가득 번지는 만족스런 웃음기. 두 분만 누워있는 이불 안 이야기. 누
가 본다고 그러하실까? 수줍은 두 분 마마. 금침을 둘러쓰고 달콤하게 주고받
는 입맞춤이 다정하고 향기로웠다. 생모마마 옥가락지가 끼어진 중전의 손가
락을 살며시 어루만지는 손길이 따스하였다. 중전은 아름다운 지아비에게 맹
세하듯이 조용히 속삭였다.
"신첩이 어리석고 못나서 그동안 감히 마마께 다가가지 못함입니다. 이제부텀
은 신첩이 마마의 뜻을 잘 살펴 안해의 도리를 더 잘할 것입니다."
"고운 사람이 고운 말도 잘 하시는구먼. 침수하십시다. 곤하오."
정답게 볼을 맞대고 잠이 든다. 가냘프고 따스한 몸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아
스라이 까물한 잠에 빠졌다. 왕은 꿈인 듯 마음인 듯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짐은 비의 곁에 누워있으면 어떤 외로움도 근심도 다 잊어. 비로소 집에 돌아
온 듯 행복하오.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있지요. 중전...
왕대비전하의 진갑잔치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중전은 아침 일찍 상궁들을 불러 잔치가 되어가는 일을 고변받고는 이것저것
미진한 것들을 하명한 다음 덩을 타고 창희궁으로 나갔다. 궁금해하시는 노인
들에게 일이 되어가는 사정을 말씀해 드리기 위해서였다.
모후의 잔치 때문에 며칠 전부터 창희궁에 입궐을 하였던 명온공주께서 슬며
시 웃었다.
"중전마마 덕분에 이번 잔치가 아주 볼 만 하다 합니다."
"할마마마께서 장수하시어 진갑입니다. 기쁜 마음에 정성껏 준비하였으되 모
자란 것 투성이입니다. 사고께서는 과분한 칭찬이셔요."
잔치에 나올 악곡과 춤이 어떠하고 광대패가 어떠하고 또한 대령 숙수들이 수
십명 입궐하여 잔치 음식장만을 이러하고 저러하고... 이런 말씀을 드리던 차
였다. 중전은 잔치준비가 성대함만을 이른다 생각하여 대답하였다 그러나 공
주께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 그 얘기인가요? 그 같잖은 월성궁 것의 이야기이지요."
속이 후련하다 하는 얼굴이었다. 사내처럼 활달하고 괄괄한 성정이시니 명온
공주께서는 도통 속에 담은 말씀을 참지 못하였다. 탁 까놓고 속 시원하고 기
분 좋다 하시었다.
"첩지도 없는 천한 것이 꼴에 성총 입었다 하며 대궐에 잔치만 벌어지면 주상
옆에 찰싹 달라붙어 별 요망을 다 떨었지요. 겁도 없이 감히 큰 머리에 떨잠 꽂
고 앉아 마치 제가 지존이나 된 듯이 꼴같잖게 거만떨고 유세하던 것에 내 참
으로 기가 차서!.... 상머리 앞에 앉아 그 꼴 볼작시면 저절로 열분이 돋아서요.
확 상이라도 엎어버리지 하였던 것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 잔치에
는 그 계집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니 얼마나 후련한지 모른다오.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갔습니다."
"......이번 잔치는 다만 법도에 맞게 치르질 것입니다. 할마마마 좋은 잔치에
불편하고 심기 거슬릴 일이 없도록 이 몸이 어지간히 방비하였습니다."
얌전하고 나지막한 목소리이되 침착하고 결기곧은 중전의 대답이었다.
왕대비전하와 명온공주간에 흐뭇한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영리하거든?
방책이 기가 막히거든? 깊은 물은 절대로 요란하지 않다 하는데, 우리 중전마
마 지혜가 그러하도다. 간택 때부터 영명하고 슬기롭다 하였는데 이것 보아?
단지 말 한마디로 누가 감히 대적할 엄두도 내지 못한 기세등등하고 간특한 그
계집을 돌려 쥐어박는 것 좀 보아라.
발 없는 말이 삽시간에 퍼지는 것이 이 궐 안 일이다. 중전이 예조판서를 시켜
<법도대로> 잔치 준비를 시키었다. 왕으로 하여금 <법도대로> 궐 안 잔치에
서 월성궁 큰 마마를 내치게 하였다는 소문은 수군수군 두런두런, 기둥 그늘
밑 참새떼들 입을 타고 퍼져나갔다. 상궁이 전하는 말을 듣고 두 분 윗전마마
얼마나 속이 시원하든지.
간악한 그 계집이 비단치마 아래 방자한 엉덩이를 흔들며 입궐하여 저가 중전
인 양 왕의 턱 아래 앉아 살살 요염떨고 위세 부리는 꼴을 아니 본다 싶으니 어
찌 그리 통쾌하고 흐뭇하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