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있다. 용상 뒤로는 커다란 그림이 걸렸는데 어전 회의를 하는 곳이니 만큼 두 마리의 용
이 구름을 물
고 서로 여의주를 두고 희롱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용상 앞 마루방에는 줄줄이 늘어선 붉은 기둥을 좌우로 두고 중신들이 좌정하는 방석이 수
십 놓여져 있
었다. 용상 왼편으로 좌우승지가 서안을 놓고 귀를 세운 채 주상전하의 옆에 앉아 열심히
기록을 하고
있구나. 그 분위기가 엄숙하고 당당하니 아녀자인 중전은 저절로 오금이 떨리고 긴장이 되
었다. 허나 발
뒤에서 중신들의 갑론을박을 듣자하니 어느새 열심이라. 삐죽 호기심을 물고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
다.
이러저러하여 나라의 국법이 만들어지는구나. 지아비이신 상감마마께서 나라일을 하는 것도
처음 보았
다. 중신들이 아뢰는 말씀을 곰곰이 듣고 계시다가 하문하고 되받아치기를 하시는데 논리정
연하고 날카
롭기 바늘 끝이었다. 영명하시다 하시더니 참으로 당당하시지!
새삼 지아비 왕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된 중전이었다. 왕 역시 중전이 자신을 보고 있다 생각
하니 기운이
절로 돋았다. 나도 열심히 일을 한다 이 말이야. 성군 되려고 노력한다 이 말이야 은근히 뽐
내는 참이었
다.
**********
다음 날 오후, 시침을 똑 뗀 얼굴로 희란마마는 월성궁에 돌아갔다.
안방에 앉자마자 교인당은 경조라 하는 그 계집아이와 침선 나인이라 하는 아이까지 분단장
을 시켜 새
옷을 입혀 데리고 들어왔다. 시답잖다는 듯이 앞에 앉은 두 계집을 힐끗 바라보다가 희란마
마는 갑자기
헛기침을 하였다. 옆에 선 경조도 화용월태, 곱디 곱다 하였지만 그 옆에 선 침선하는 계집
아이의 미색
이 희란마마 저도 처음 볼만큼 빼어난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기 때문이다.
노랑 치마에 꽃 다홍 저고리, 붉은 댕기 매고 살포시 서있는 계집아이의 용모와 자태는 참
으로 빼어났
다. 천하에서 짝을 찾아보기 힘들 만치 요염하고 고왔다. 어제만 하더라도 곱다 싶었던 경조
도 그 아이
옆에 서니 태양 빛 옆의 촛불이라 할 것이니 이미 빛이 바랠 정도였다.
눈에 다소 빛이 없고 맹한 인상이 약간 흠이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것이 오히려 기이한
백치미까지
풍기었다. 사내가 보기에는 날로 잡아먹어도 비린내 하나 나지 않을 것처럼 요염하였고 심
지어 혼백이
라도 빼어주마 하고 달려들 만치 빼어난 자색이었다.
단국의 천하에서 내 미색을 따를 계집이 어디 있을까 자신만만하였던 희란마마, 이토록 제
가까운 주변
에 저를 수십배 능가하고도 남는 야들하고 탱탱한 계집아이가 있었다 함을 처음 안 것이었
다. 순간적으
로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게다가 요것이 나이 또한 꽃다운 열 아홉이라! 이제 서른인 저하고는 아예 견줄 수조차 없
는 싱싱한 계
집이 아닌가? 꽃으로 치자면 막 봉오리를 벌릴 즈음의 바로 그 때. 마치 꿀과 향기로 만들
어진 듯한 그
런 미색이었다.
희란마마, 저 잘났다 하는 오만한 자존심이 약간 훼손된 터로 푸르르 강새암이 돋았다. 약오
른 목청으로
톡하니 물었다.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언, 언년이라 이리 합니다, 큰마마."
"언년이? 흥, 그 이름이 너무 천격이고 촌태가 졸졸 흘러서 아니 되겠다. 이제부텀은 네 이
름을 옥선이
라 하여라. 생김이 제법 고우니 사내 깨나 후릴 팔자라? 그 낯짝이야 제법 한가락하는 바이
나 벗겨놓으
면 어떠할지...... 네 이년, 의대를 벗어 보아라."
졸지에 옥선이가 된 언년이. 의대를 벗으란 희란마마 하명에 엉거주춤 어찌할까요 하듯이
교인당을 바
라본다. 새파랗게 치켜 뜬 큰마마 눈빛에 지레 질려 달달 떨였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모르느냐? 너는 지금 지엄하신 주상 전하의 후궁에 들 후
보로 큰마마께
선을 보이는 것이다! 만에 하나 네 몸에 무슨 병이라도 있어 주상 전하를 모시었다 전하게
혹여 탈이라
도 난다 할 것이면 너 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큰마마조차도 요참의 형을 면치 못하게 되느
니라. 다른 뜻
이 있는 것이 아니고 네 몸이 건강한지, 병은 없는지 그를 보시려는 것이다. 그러니 하명을
받들어라! 옆
의 경조도 이미 다 그런 시험을 거쳤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란다."
찬찬한 교인당의 말에 비로소 옥선은 마지못하여 옷고름을 풀어 알몸이 되었다.
이 대문 안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머시속에 새긴 한마디. 큰마마 하명을 어기면 저의 목숨
뿐 아니라 제
집 식솔들까지 다 죽는다는 협박에 맹하고 섬약한 넋은 이미 다 나간 상태였다. 그러나 이
시험을 잘 넘
기면 다른 분도 아니고 주상 전하의 후궁이 될지도 모른다 하는데 옥선은 은근히 가슴이 설
레는 참이다.
"흐음? 살갖이 촉촉하고 매끄러우니 상급이로구나. 게다가 티 한 점도 없으니 그야말로 빙
기옥골이라.
어디 보자. 머리타래가 검고 윤이 흐르며 입술을 선명한 붉은 빛이라. 이야말로 미인의 조건
을 다 갖추
었구나. 젖통은 풍만하되 미련스럽지 않고 어여쁘며 젖꼭지가 거무스레하지 않고 고운 다홍
빛이니 주상
께서 곱다 하며 한번은 깨물 만하구먼."
듣고만 있어도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희란마마, 마치 우시장에서 소를 고르며 품평하듯
이 옥선의 육
신 하나 하나를 뜯어보았다.
"목선은 다소간 짧되 어깨가 조붓하니 의대를 입혀 놓으면 그 자태가 고울 것이고 엉덩이가
딱 올라붙었
으니 이런 계집은 속집 맛이 기이하다 하였다. 게다가 방초도 가지런하고 윤기가 있으며 가
늘기 비단실
이라, 요런 것은 사내의 양기를 받아들이기 적당한 계집이란 증거이지. 허벅지가 딱 달라붙
은 것은 타고
나기 요분질을 잘 할 수 있다하는 것이니, 요런 계집 안에 들어가게 되면 당장 사내가 하얀
피를 토하며
혼백을 빼앗기는 법이다. 내가 너를 보자 하니 시정서 보기 드문 육신을 가진 바 분명한 계
집인데... 교
인당, 옥선이 요년이 처녀가 분명하겠지?"
심지어 옥선의 입까지 벌리게 하고서 가지런한 치아까지 확인한 다음이었다. 희란마마는 미
덥지 못하다
는 듯이 교인당을 돌아보았다.
"당연하옵지요 마마. 쇤네가 이미 검사를 하였나이다. 확실한 처녀이옵니다."
"요년 겉볼 자태는 빠질 것 없이 곱되... 그래, 자네가 보기에 경조 저것과 요년을 비교하여
속집은 둘 중
에 누가 낫던가?"
"쇤네가 보아하니 두 아이 다 엇비슷하게 달금한 속집을 가진 듯 하였나이다. 경조는 다소
간 좁고 빡빡
하니 그런 대로 맛이 각별할 것이며 옥선이는 야들야들 보드라운 맛이 주인만 잘 만나면은
극미라 할 것
입니다. 주상께서는 어떤 맛매를 더 즐기시는지..."
"예전에 성은을 받은 년들과 저 둘을 비교하면 누와 더 닮은 터인가?"
"글쎄요... 아무래도 경조와 비슷하다 그리 싶사옵니다만은.."
"내가 보자 하니 이 두 아이 모다 주상께서 점고하실 만한 매혹을 나름대로 지니고 있음이
야. 내가 며칠,
밤일 공부를 단단히 시킬 것이니 이 아이들을 별궁에 데려다 놓게! 내가 특별히 가르쳐서
그 중 나은 아
이를 궐에 들여보낼 참이다."
희란마마 궁녀들을 내보냈다. 창문을 반만 열고, 아기작아기작 걸어가는 두 계집의 자태를
바라보았다.
얼음이 얼 듯이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 년들이 심중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안다. 주상 성은 받아져서 호사 누리겠다
단단한 결심
을 하고 있을 것이다만, 그래보았자 네년들은 어차피 내 허수아비인 게야. 감히 어디서 네
년들이 주상
성총을 탐낼 것이더냐? 네 년들이 내 눈을 피하여 딴 짓을 하는 그 순간이 바로 네 년들이
죽는 날이다.
흠.'
사흘 후 오정이었다. 희란마마, 거한 아침상 받고 나서 분단장 곱게 하고 있는데 정안로가
들어왔다. 근
신 풀리고 조만간 주상전하를 다시 제 치마폭에 쌀 수 있겠거니 하는 터라 모처럼 명랑하게
아비를 맞이
하였다.
"그나저나 아버님. 저가 궁금하니 어째서 왕대비전 잔치가 낼모레인데 저더러 잔치에 참석
하라 하는 봉
첩이 아니 내려오는 것인지요? 예조에서 일을 어찌 이리 늦장을 부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미인 정경부인은 이틀 전에 궐에서 내려온 봉첩을 받았다 하였다. 저에게는 언제 오나 이
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는데 영 종무소식이다. 다소간 신경질이 났다.
주상 전하 성총을 한 몸에 받고있는 제일첩(第一妾)이 바로 희란마마 저가 아니더냐? 중전
마마나 입으
시는 봉황문 그려진 스란치마 감히 무엄하게 마련하여 두고 기다리는 잔치였다. 항시 그러
하던 대로 대
궐 잔치 할 적마다 전하께서 부르시니, 상감마마 곁에 딱 하니 붙어앉아 잘난 체 성총을 시
위하리라 싶
었다. 예전부터 잔치 때마다 짐 곁에서 누이 고운 얼굴로 기쁘게 하여 주시오? 하고 미리부
터 다정하게
약조를 하였다.
그 날은 반드시 왕비인양 전하 곁에 붙어 앉아 만인 앞에서 내 위세 뽐내어 볼 참이야. 중
전 고년을 단단
히 눌러두고 기를 팍 꺾어버려야지! 이를 아드득 물고 작정을 하고 또 하였다. 아무리 중전
고년이 잘난
체 하여도 소용없다. 오직 나만이 전하의 안곁이요 실제 교태전 주인이라 하였던 맹세를 남
들 앞서 보여
줄 것이다.
"음. 그것이 큰마마.... 일이 다소간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정안로가 쯧쯧 입맛을 다셨다. 패악질 장한 딸의 신경질을 어찌 감당할까 잠시 말을 골랐다.
이날 정안
로가 일찌감치 월성궁으로 들어온 것은 실상 희란 마마를 달래려 온 것이었다.
왕대비전 진갑잔치가 낼모레인데 그 잔치에 희란 마마는 참석을 할 수가 없는 것으로 결정
이 났다. 도무
지 방법이 없었다. 다른 이가 반대한 것도 아니고 상감마마께서 희란 마마를 궐 잔치에 참
석치 말라 분
부를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명부 잔치에 참석할 이들 첩지 올립니다 예조에서 말하길래 펼쳐보았다. 헌데 다른 내명
부 이름은 다
들어가 있는데 오직 희란 마마만 없었다. 왜 월성궁 큰마마 이름은 없느냐? 버럭 따졌다. 그
랬더니 통나
무 같이 뻣뻣한 예조판서 김장집이 헛 하고 감히 비웃었다.
"상감마마께서 분부하신 일을 저가 어찌합니까? 하명대로 하는 것이지. 따지시려거든 전하
께 따지시
오!"
"뭐 뭐라고요? 전하께서 큰마마를 잔치 참석케 말라 하였다고요?"
"그렇나이다. 내 말이 거짓일까 싶거든 직접 아뢰어 보소서. 나는 다만 그 말만 하오."
단걸음에 달려들어가 감히 전하께 따져물었다. 항시 참석케 하시던 월성궁 큰마마를 어찌
하여 이번 진
연에는 빠트리신 것입니까? 여쭈었다. 상감마마, 생각지도 못한 듯이 그래요? 하고 되물었
다. 긴가 민가
의아한 눈빛으로 예판을 불러라 하였다.
"짐이 진연 참석 명단을 보았거니와 건성으로 보았던 듯 싶다. 어찌 월성궁 누이가 진연에
빠진 것인가?
중전께서 그리 하라 시켰더냐?"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그리 분부하시었나이다."
"뭐라? 짐이 그리 하명하였다고?"
"예, 전하. 그전에 진연의 준비를 아뢰면서 여쭙기로 모든 행사를 '법도대로' 할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