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200)

내전의 일이라 앞으로는 짐이 그이의 방패가 되지 못함이다. 중전 눈에 나지 않도록 까불지 

말라 하라 

경고하는 말이었다. 이 말인즉슨, 앞으로 희란마마가 감히 상감이나 중전마마를 상대로 같잖

게 까불고 

교만하게 굴다가는 바로 내전의 법도에 따라 중전이 희란마마를 잡아다가 치죄를 할 것이다 

하는 말이 

아닌가. 

아무리 총애 크고 상감마마께서 비호하시더라도  내전의 일이라 하여 중전마마께서  후궁을 

경계하시고 

치죄한다면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이는 바로 상감께서 항시 하찮다 발로 걷어차

고 다니고 

이것저것이라 함부로 부름질하며 대하시던 중전마마를 내전의 안주인이라 여기신다는  뜻이

었다. 진정

한 상감마마의 안곁으로 그 위엄을 받쳐주시겠다는 뜻이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 하는데, 우리 큰마마. 어찌 이리 눈이 어두우실까? 장성한 사내되시어

서, 지존의 

위엄이 딱 기틀 잡힌 주상을 항시 어린애로만 생각하여 함부로 생각하니 어찌 동티가 나지 

않으리? 에

휴 당장에 진갑잔치만 하더라도 그렇다.  아무리 예전에는 그러하였다 하여도  이번 잔치는 

중전마마께서 

주관하는 일이라 하였다. 우리 큰마마가 입궐을 할지 안할지도  모르는데 저리 들떠서는 위

세부릴 생각

만 하시다니. 아이고, 이를 어찌하지?'     

허나 심란한 어미 마음을 모르는지라 가만 안의 희란마마,  입술을 아드득 씹으며 자신만만 

홀로 이를 갈

았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꽉 주먹을 움켜쥐고 다짐하였다.   

'두고 보라지. 월성궁에 들어오시기만 하여봐. 내 아주 정신 못차리게 꽁꽁 주상을 목매달게 

해놓을 터

이니. 흥, 아무리 풋정이 정하다 한들, 고년 아랫도리 재미가 어련하겠어? 키도 반토막에 도

무지 볼 것

이 없어 저절로 고개돌리는 박색인데. 흥. 중전 고년. 아무리 계교를 부려 나를 몰아내려 하

여도 아니 될 

것이다. 주상과 나의 정분이 어디 하루 이틀 풋정인가? 칭칭 얽힌 동아줄보다 더 질긴 정해

라. 조만간 

아버님께서 혁이 일까정 성사시키면 고 년, 내가 반드시 얽어 폐비시키고야 말 것이다. 두고 

보아라."   

       

불일산 일주암. 

정경부인과 교인당을뒤에 새우고 희란마마는 대웅전 부처님 앞에서 백 팔 배를 올리고 있는 

중이다. 

황금 수백 냥을 아끼지 않고 장하게 불사를 벌일 작정이었다.  명목은 주상과 이 나라 사직

의 장구함을 

기원하는 것이지만 속내까정 그러한가? 물론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니지. 

이를 악다문 그녀, 절 한번 할 적마다 주상 성총 예전  마냥 그저 나에게 찰딱 붙어 다시는 

떨어지게 하지 

말아 줍시오. 얄미운 중전 고년 피 토하고 죽어집시오. 혹은 우리 혁이가 한시 바삐  왕자로 

인정받아져 

세자 자리를 꿰차게 하여 줍시오 이런 뻔뻔하고 염치없는 청원인 것이다. 

"내가 돌아가서 다시 백미 수십 가마와 향촉이며 금전을 아끼지 않고 보낼 것이니 스님께서

는 부대 정성

을 다하여 불사를 주관하여 주시오. 오직 내가 대사만 믿소이다." 

   

백 팔 배를 끝낸 희란마마, 섬돌을 내려서서 합장을 한  주지승에게 다시 한번 신신 당부를 

하였다. 제 절

에 드나드는 이 중 가장 든든한 후원자라 할 것이니  주지승은 고개를 조아렸다. 반드시 명

심하여 봉행할 

것입니다 하고 응대하였다. 

   

"가마가 일주문 앞에 대령을  하였습니다. 큰마마. 인제 내려가시지요.  서둘지 않으면 날이 

저물겠습니

다." 

옆에서 교인당이 재촉을 하였다. 정경부인은 절에서 머물며 칠일  기도를 한다 하니 그리하

라 인사를 하

고는 산문을 나섰다. 두 여인에게는 따로 긴요한 볼일이 있었다. 

불사를 드리기 위하여 산에 올랐다 하였지만 실상 희란마마와 교인당 두 여인의 본심은 다

른 것이었다. 

두 여인네는 세암정에 있는 희란마마 별저에 감춰둔 궁녀 아이들을 보러 나선 길이었다. 

항시 뒷일을 대비하라 하였다. 전하께서 정말 칠팔년 끼고  놀던 무르녹은 희란마마 저에게 

재미를 잃고 

색다른 놀음이라, 어린 중전 고년과 풋정이 들었다 할 것이면 어찌할까? 

흥. 무엇을 어찌하긴 어찌해? 희란마마 슬며시 간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중전 고년을 능가할 

어리고 고

운 계집아이 하나 천거하여 그  정해의 물길을 돌려버리면 되는 것이지.  뭇 사내더러 놓고 

물어보아라. 

열 계집 마다할 사내 있는지. 

하물며 젊은 상감마마, 오죽 기력이 충만하시고 밤  재미 고것을 즐겨하시었더냐? 모란꽃처

럼 활짝 핀 

품안에서 온갖 기기묘묘한 방중술 다 익혀 녹진하게 용체 녹여드리는 희란마마 상대로 장하

게 즐거이 

노신 분이다. 그런 분이 밋밋하고 허리 요분질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게 생긴 중전 고년을 

상대로 얼마

나 그 재미를 만족하실 수 있을 것인가? 맘만 내키면 하룻밤에 궁녀 서넛을 끼고 누워 죽이

니 살리니 희

롱하시었다. 천하 일색이라는 고운 계집들 품안을 맘대로 날아다니며  실컷 즐기던 분이 천

하박색 고년

과의 잠자리에서만 그저 만족하신다고? 

'웃기는 소리!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킁하고 비웃음을 날렸다. 새 계집이 좋다하니 호기심이라 당장은  모르되 하얀 쌀밥같이 밋

밋하고 덤덤

한 중전 고년과의 잠자리에서 싫증 느끼고 제 품에 돌아오실  것이 뻔하였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색다른 

즐거움을 누리려 월성궁에 납실 것을 자신하였다. 그때 화용월태  고운 계집을 천거하여 후

궁 앉혀두고 

중전과의 사이를 파작내리라. 허고 일일이 상감마마 동태를 살피리라. 간교한 결심이 야무졌

다.     

붙박이 성총을 자신하여 말 한마디 잘못한 죄라. 무정하시기도 하지. 아니 계집이  투기하여 

말 한마디 

심하게 하였다고 그토록 깊고깊던 정분 다 잊으시고 저를 근신하라 무안을 주시어? 두어달

포를 발길 끊

으시어? 

희란마마 억울하고 분하여 저절로 눈물이 핑 돌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날이 저물기도 전에 월성궁 달려 들어오시었지.  늠름한 품에 안고서 저를 

사랑하시기 

고운 우리 누이, 어여쁜 우리 누이하며 얼싸안아 어쩔 줄 모르던 지난날은 잊으신 것인가? 

그만큼 철부지시라, 체통이 있으시지, 노염을 그리 팩 내시고  억지 골을 부리시다니. 곧 죽

어도 제 잘못

은 인정않는 희란마마, 그저 주상이 원망스럽다. 너무나 무정하고 야속하다 원망질이었다. 

헌데 상감마마의 노염이 당장 희란마마 저의 살길과 맞닿아 있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

다. 한순간 

희란마마 저의 실수로 상감께서 팩하니 격한  노염과 분기 탱천하시어 골을 피우신  것이었

다. 항시 그러

하였듯이 잠시 후면 다시 맺어질 정해였다. 헌데 이것 보아? 두어달포가 넘어가도록 주상께

서 월성궁에 

발길을 뚝 끊으니 고약하고 무엄한 참새들이 슬슬 주상께서 월성궁 마마의 미혹에서 벗어나

시는 듯 하

다는 입방아를 찧어댈 만 한 것이다. 

희란마마에게는 뼈아픈 그 구설은 전하께서 중궁전을 연해 찾았다는  말로 더 깊어졌다. 아

랫것들이 보

나마나 태연히 고년의 옷고름을 풀고 동침하셨단다, 심지어 저도 발길조차 못해본 연경당에

까정 그년을 

불러 침수하시었단 대목에서 희란마마 눈앞이 캄캄하였다. 

야아야 이것 큰일났고나!. 

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의 맹세만 하시던 입에서,  그저 누이가 곱소! 하고 칭찬만을 하시

던 정인의 입

에서 이런 식으로 누이가 방자하게 까불면 목을 베겠노라  극언까지 나왔다. 조심하여 근신

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에 소름이 끼쳤다. 

하늘을 찌르는 주상의 노염 앞에서 저가 아무리 앙탈을 하면 무엇해? 깽 소리 한번 제대로 

못하고 엎드

려야 하는 잉첩의 팔자. 희란마마 분하고 억울하고 기가  막히어 자리보전하고 며칠이나 끙

끙 앓았던 터

였다. 그러나 열불이 치밀고 분한 기분도 잠시. 정작 그 이후로 전하께서 저에게 딱  발길을 

끊고 월성궁 

쪽을 아예 외면하신다 하니 문득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내가 그저 옛적 일편단심이던 주상의 성총만 과신하여 방자하게 굴다가 정말 홀라당 그 총

애를 잃어버

리는 것이 아니냐?' 

지금껏 천하에서 제일가는 권세야 부렸지만 솔직히 그녀는 첩지도 없는 한갓 잉첩 신세. 왕

실의 모든 인

간들이 그저 주상 눈을 가린 원흉이라  모함하려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고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직 하나 바람막이는 주상의 깊은 사랑이었다. 그것을 빼앗길  것이면 그 길로 죽은목숨이

로다. 뼛골까

지 파고드는 냉기로 인하여 육신이 덜덜 떨리는 무서운 자각이 들었다. 

"잠시만 기다려 보옵사이다. 큰마마께서는 무어라 하여도  주상 전하께서 처음 마음 주시고 

인연을 맺은 

첫 여인이옵니다. 사내는 절대로 자신의 첫 계집을 버리지  못하는 터이니 언제고 전하께서 

반드시 월성

궁에 다시 발길을 하실 것입니다. 저가 날마다 치성을 올려  주상과 큰마마 사이에 얽힌 살

(殺)을 풀고 

있는 줄 잘 알고 있지 않사옵니까? 마음을 진정하시고 기다리소서." 

하도 답답하여 희란마마는 결국 괘씸타 내쳤던 교인당을 다시 불러들였다. 주상께서 나날이 

장성한 사

내가 되신 터로 예전과는 많이도 달라져감이 보입니다. 큰마마께서도 조신하게 성품 가다듬

어 그 분의 

성정을 건드리지 마옵소서 충고하였던 그녀. 제 성미 건드렸다고  아첨 아니 하였다고 희란

마마 저가 쫓

아낸 교인당이다. 

하지만 당장에 제 앞길이 막히니 그이가 그래도 선견지명이야, 눈이 밝고 신기(神氣)가 뛰어

난 사람이

니 이 날서 무엇인가 내  살길을 풀어줄 사람인 게야. 교만한  희란마마 성정으로는 다시는 

못할 일이지만 

황금 덩어리를 바리바리 싸 가지고 찾아갔다. 그대가 제발 나를 좀 도와주시게 사정하여 다

시 제 곁에 

둔 것이다.   

"이미 떨어진 사내의 정분을 찰떡같이 다시 붙이는  부적입니다. 큰마마, 두고 보십시오. 조

만간 전하께

서 반드시 월성궁에 다시 발걸음을 하실 것입니다." 

목욕재계하고 음기가 강한 밤을 이용하여 별별 요상한 비방을 다 들이더니 부적 하나를 그

렸다. 그리고 

그 것을 희란마마에게 건네었다. 김내관을  시켜 전하께서 베고 주무시는  베개에다 숨겨라 

하였다. 자신

만만한 교인당의 장담은 있었지만, 희란마마는 정말로 황금 수십 냥이나 들인 그 부적이 효

험이 있을까 

전전긍긍하였다. 

그런데 역시 교인당의 신기며 수완은  대단하였다. 계속 방자하게 굴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불호

령을 내리신 후 월성궁 쪽으로는 고개도 아니 돌리신다 하던 전하께서 누그러진 티가 역력

하였다. 입궐

하신 정경부인이 부탁을 하자마자 당장 제 근신 풀어주시는 것 좀 보아? 

'하지만 교인당의 말처럼 이제 나도 조심하여야겠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이제 주상도 천지

분간 못하던 

열 다섯 철없는 소년이 아닌 게야. 고집세고 매사 제 멋대로 하시는 장성한 사내가 되신 것

을 내가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이야.' 

   

희란마마는 첩첩한 심란함에서 벗어나고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주상 전하의 보령은 이미 스물 둘. 보위에 오른 지도 벌써 십여  년이 넘은 차이니 그 당당

한 호기(豪氣)

며 기를 잡힌 위엄이며 정사를 관장하며 깊어진 요량은 이미 희란마마 제 손아귀를 벗어난 

지 한참 전인 

듯 싶었다. 화기(火氣)가 충천한 보령이시니 그저 막무가내로 제 치마폭에서 몇 년을 헤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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