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전하께서... 생모이신 희빈마마께서 끼셨던 것이라고요. 엊그제 저에게 주셨습니다.”
"이 것을 주상이 중전께 주셨어요? 그래, 그렇구려! 내가 이것을 본 적이 있소. 선대왕께서
희빈에게 선
사하였던 것이었어요.”
"주상전하를 생산하셨을 적에 선대왕께서 직접 산실을 찾아가시어 희빈에게 끼워주신 것이
라 들었습니
다. 희빈께서도 오직 이 것만을 귀하게 여기어 살아 생전 항시 손에 끼고 놓지 않았던 것이
었구요. 주상
전하께서 생모마마 유물이라 하여 항시 줌치에 넣고 다니며 어루만진다 하시었는데... 그 귀
한 것을 중
전마마께 선사를 하셨다구요?”
곁에 앉은 인선궁 덕빈께서도 놀라워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실상 왕대비전하보다 덕빈께서 더 많이 놀라신 터였다. 전하께서 중전에게 주었다는 문제의
그 옥지환
내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모마마의 유품이니 상감께서 항시 줌치에 지니고 다니
시며 어마마
마 뵈온 듯이 쓰다듬는다 하였지. 그리도 곱다 하며 다 퍼주던 월성궁 계집이 그 옥지환을
탐내어 오래
전부터 요염부리고 앙탈하며 신첩을 주옵사이다 채근하였다. 헌데 전하께서 절대로 그 것만
은 내어주지
않았다 하는 이야기를 오며 가며 풍문으로 들었다. 그런데 전하께서 못났다 항시 구박하고
냉랭하게 소
박주셨던 중전마마께 그 옥지환을 끼워 주었다니...
왕대비마마의 어진 노안에 환한 웃음이 함박 머금어졌다.
"아이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무슨 바람이 불어 우리 주상이 이러하시었을까? 그래, 이 귀
한 것을 중전
께 주시면서 상감께서 무어라 하십디까? 무슨 말을 하시면서 끼워 주시던가요?”
"그냥... 그냥 주셨습니다. 상서롭게 춘우(春雨)가 좋기로 어마마마 생각이 난다 하시면서 끼
워주셨습니
다."
대답을 하는 중전마마 발간 볼이 더 붉어졌다. 왕대비전하께서 하도 기쁘고 대견하시니 중
전마마 그 작
은 손을 잡아 어루만지며 덕담을 하시었다.
"감축하오. 실로 인제 우리 주상께서 중전의 그 어진 부덕을 눈 여기사 인제는 교태전의 이
사람이 곱다
싶으신 것이구려! 도도하시고 고집이 강하시니 뉘가 말을 하여도 한번 정하신 심중의 뜻을
접지 않으시
는 상감이 중전의 한마디로 이 늙은이의 잔치를 정하였고, 인제는 이런 귀한 옥지환까정 선
사를 하시는
것 좀 보아요! 필시 주상의 마음이 차츰차츰 달라져 가는 겝니다. 천하에 고운 심덕(心德)
이길 장사 없
다 하였어요.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우리 중전께서 남몰래 행하시는 어진 부덕을 전하
께서도 인제
는 아신 것입니다. 예, 이리 하셔야지요! 이리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리이니 두
분께서 화합하
시어야 천하의 일도 순조로워지는 것이에요! 예, 인제는 이 할미가 한시름을 놓았습니다. 두
분이 이렇
게 화합하실 것이면 금세 덩실하니 회임까지 하실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 이 할미
는 바랄 게
없을 것이오. 중전. 부대 주상 심사를 잘 헤아려 그이를 잘 보필하오.”
"할마마마 말씀을 명심하여 신첩이 더욱더 부덕을 쌓도록 노력을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
못난 소첩을
그나마 정궁으로 대접하여 주옵시니... 인제 신첩도 여한이 없나이다.”
중전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작으나 또렷한 목청으로 의지하는 왕대비전께 말씀을 올렸다.
너무 못난 터
라 항시 지아비께 소박받는다 하는 뼈아픈 치욕이 이 날 다소간 씻겨진 것이며 항시 두 분
마마의 불화
때문에 근심이신 노인께 그나마 걱정을 덜어드렸다 싶었다. 중전은 오랜만에 기분이 가볍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고변하는 말이 있었다.
"마마. 망극하옵니다. 정업원에서 기별이 왔사온데 불사 준비가 끝이 난 고로 행차를 언제쯤
하여주실
것인지 사람이 왔나이다.”
"정업원에서 사람이 왔다고? 기다렸구나. 들어 오라 하여라.”
정업원은 왕실의 원찰인 용계사의 말사(末寺)로 뫼시던 왕이 흥하면 남게되는 후궁들이 말
년을 모내기
위해 만들어진 암자였다. 소생이라도 있다 할 것이면 그 소생과 더불어 말년을 지낼 수 있
지만 소생이
없거나 일찍 죽거나 혹은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후궁들이 유폐를 당하듯이 나가는 곳이 바로
정업원이었
다
그 좋은 예로 선대왕 장조와 보위 다툼을 벌인 덕현군의 생모 효빈 김씨가 장조 대왕에 의
해 억지로 정
업원으로 들어가 머리를 자르고 비구니가 되었다가 홧병으로 석달 만에 죽은 예를 들 수 있
을 것이다.
왕대비께서 불교에 심취하여 내불당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은 알고 있지만은 정업원까지 나
가시어 불사
를 들이시는 것은 몰랐던 지라 중전은 좀 놀랐다.
문이 살며시 열리고 회색 가사 장삼을 걸친 여승이 들어섰다.
한 마흔 줄. 애띠고 맑은 얼굴이 젊은 시절에 굉장한 미인이었을 것 같다. 기품이 도저하고
궁중 법도에
밝으니 특이한 여승이다 중전은 그리 생각하였다. 사람의 눈을 피하려는 듯 여승은 깊이 고
깔 모자에 얼
굴을 감추고 있었다. 윗방에 들어서서 깊이 허리를 굽히고는 왕대비전하께 큰절을 올리었다.
"전하를 뵈옵니다. 창빈마마께서 전하께 기별을 하여라 하시니 이렇게 저가 들어왔나이다.
그 동안 강녕
하시었나이까?”
"항시 창빈 이하 그대들이 걱정하여 주니 이 늙은이는 그만하오. 숙원께서도 강녕하오? 중
전은 처음 뵈
는 것일지라? 중전, 이이는 정업원에 들어간 터로 선대왕을 모시었던 숙원 민씨라오. 숙원께
서도 우리
중전의 옥안을 처음 뵈올 것이오?”
선대왕을 모시던 후궁이라 할 것이면 중전이며 전하께서는 서모마마가 아닌가?
중전은 다소간 당황스럽고 놀라서 가볍게 맞절을 하면서도 얼떨떨하였다. 그녀는 지금껏 경
덕궁이 빈
이유가 정궁께서는 요절하시었고 중궁전을 정하기 전에 선대왕께서는 흥하신 터라 주상의
생모인 희빈
께서 돌아가시자 주인이 없어졌다 이리만 알고 있었다. 중전은 선대왕께서 희빈마마 이외에
는 후궁을
두시지 않았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나타난 이 여승이 선대왕을 모시었던 주상의
서모마마라
니...
여승은 어진 미소를 머금으며 중전마마 옥안을 향하여 더 깊이 고두하였다.
"실로 처음 뵈옵지만은 어질고 고운 기품이시니 우리 중전마마께서 부덕이 높다 전하께서
칭송하신 이
유를 알겠나이다. 마마, 사람들 눈이 무서워 오래있지 못할 것이니 말씀만 전하고 가렵니다.
허면은 이
미 정하신 대로 모레에 나오실 것입니까?”
"그리 하십시다. 이날서 덕빈을 부른 것도 그 일 때문이라오. 우리 의완과 선대왕을 위한 불
사이니 고가
당연히 참석을 하여야지. 숙원이 고생이 많소.”
"창빈마마께서 모다 주관을 하시는 일입니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요.”
"의완이 그렇게 어이없이 죽은 지가 벌써 열 여섯 해라?... 휴우-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
는다 하였소이
다. 창빈이 말은 아니 하였어도 그 가슴에 피멍이 들었을 것이다.”
"그 망극함을 견디었느니 오직 전하의 덕분이었나이다. 마마, 신첩은 인제 물러가렵니다. 불
가의 사람인
지라 중전마마께서 계옵시니 훗날 선비들로부터 구설이 될까 두려워 오래 있지를 못하겠나
이다. 모레
납시기만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 하오. 그때 뵈올 것이다. 나가 보시오.”
왕대비전하께서 얼떨떨한 표정을 한 중전을 건너다보며 쯧쯧 혀를 찼다. 씁쓸하고 죄지은
듯 어두운 표
정을 짓고 있었다.
"중전께서 놀라셨구려. 중전은 지금껏 경덕궁이 빈 이유를 까마득히 모르셨을 것이라?”
"마마, 저는... 그저 경덕궁이 빈 이유가... 선대왕께서 희빈 마마 이하 아무도 후궁을 두시지
않아 그런
줄로만 알았나이다. 대비전에 오르실 정궁마마 요절하시고 중궁전 정하기 전에 선대왕께서
흥하시어 그
렇게 대비전이 비게 되었다 그렇게 말씀하셨지 않사옵니까?”
"내가 그때는... 중전. 그대에게 거짓을 말하였소. 중전, 이 자리서 들은 말은 문을 나가시면
서 잊어버리
시오! 지금도 내가 정업원의 사람들과 기별을 하며 산다 하는 사실이 주상에게 알려질 것이
면 이 할미도
머리털 자르고 정업원에 들어가야 할 것이오.”
왕대비전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진 노안이 먹구름이 낀 듯이 어두우시다.
"하도 망극하고 기막힌 일이라 차마 입에 담지 못한 참이오. 중전... 이 가슴에 든 이야기가
많고 또 많소
이다. 그 원한 또한 만리이니 지난 세월 주상이 월성궁 고 요망한 것에 미혹하여 저지른 실
책들은 또 어
찌 말로 하리? 그 망극한 꼴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이 할미 가슴에 피멍이 맺혀 있
소이다. 휴우-
그 참담하고 통탄할 일 또한 어찌 다 말로 할 것인가? 중전, 아까 본 그 여승은 선대왕을
모시었던 숙원
민씨라오. 주상의 서모라 할 것이오. 또 정업원에는 그이말고도 주상을 기르다시피 한 창빈
윤씨 이하
숙원 허씨. 소용 강씨까지 선대왕의 후궁이 세 분 더 살아 계시오이다."
"네에? 상감마마의 서모마마께서 네 분이나 계시다고요?"
"그러 하오. 숙원이 예에 들어온 것은, 실상 모레가 창빈이 낳았고 주상의 형제였던 의완옹
주가 죽은 날
이오. 그래서 불사를 들이려는 것이라 내가 나간다 하였소이다. 중전은... 상감이... 저를 길러
준 어미라
할 터인 그이들을 머리털을 자르게 하여 내쫓다시피 정업원에 보낸 것을 까맣게 모르실 것
이오.”
중전의 작은 얼굴이 하얗게 변하였다. 너무 놀라 움켜쥔 손이 달달 떨렸다.
"마... 망극하옵니다! 마마. 길러주신 서모 마마 전부를 전하께서 내치셨다고요? 어떻게 그런
일이...”
"휴우- 그 일이 저의 가장 큰 실덕이요 있어서는 아니 되는 일이라 함을 상감도 알아요. 허
니 주상이 절
대로 그 일에 대하여는 입을 다물라 엄명을 하지 않았겠소? 뉘든 그 일에 대하여 입질을 하
는 이가 있달
지면 당장 그 자리에서 주살을 하니 뉘가 감히 그 일에 대하여 입을 벌릴 것인가? 그이들
직첩을 모다
폐하고 이름마저 지워 버린 터이니 인제 그들은 살아도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 늙은
것이.. 그런
꼴을 보고도... 밥술을 뜨고 살았소! 천하에 몹쓸 일이라... 제 길러준 어미들을 그리 내팽개
친 사람이라,
상감이오. 그 천한 월성궁 계집 하나 얻자고... 그 어리석은 이가 제 어미들을 다 버린 것이
라오...”
중전마마, 도무지 있을 수 없는 망극한 말을 들으며 마음이 몹시 착찹하였다. 저절로 한숨
이 새어나왔
다. 어이 그리 하시었습니까? 어찌 그리 하시었나이까? 마마....
"그러니까, 월성궁 계집하고 정분이 나서 죽는다 산다 할 적이었소이다. 실로 길러준 어미이
나 제 낳아
준 생모보다 다한 정성을 쏟은 터라, 창빈이 주상의 그 망측하고 흉칙한 꼴은 절대로 못 보
리라 시퍼런
가위를 안고 대전에 나섰답니다.”
왕대비전하 정작 말씀을 시작하다 보니 눈물부터 앞을 가리는 것이었다.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는데
찍어내어도 찍어내어도 감출 수 없는 원한과 원통함의 눈물이 진하였다.
하찮은 계집에 미쳐버려 이성도 법도도 잃어버린 광증이라,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음
이랴. 길러주
신 어미더러 가위 던져주고 나가 죽어라 극언을 하시었다니...
중전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리석은 분. 참으로 어리석은 분.... 한번 미치면 도통 다른 곳은
돌아보지 편
협하고 격한 분의 성정이라, 하여서는 아니 되는 일을 저질러놓고 말도 못하고 후회만 씹으
면 살아가는
가. 왕이라는 이름 아래 그는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살았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