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게 진심으로 사모한다 그 정표로 주신 것이라 합디다.”
"아이고 이토록 귀한 것을 신첩에게 주신다고요?"
"허면 짐이 뉘를 줄 것이오? 짐의 안곁에게 주시어요 하신 것인데. 잘 간직하였다가 훗날
원자낳아 빈궁
맞이하면 물려주시구려. 짐이 어마마마 유품으로 귀물이라 못내 아낀 가락지이니 중전도 아
껴주오."
짐이 이것을 그대에게 드리는 뜻은 짐도 그대를 진심으로 사모한다 하는 뜻이오 이런 뜻이
었을까? 그저
침묵하시며 옥지환 낀 중전의 손을 잡아 볼에 그저 가만히 대고만 있으셨다. 축복처럼 고운
비가 내리고
천지간 조용한데 오직 두 분 만이 있는 듯한 호젓함이었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어도 오
가는 마음이
라. 그 시간이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싶었었다.
밤이 깊어가자 살며시 손을 잡아 금침 안으로 이끌었다.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눈처럼
차가운 그녀를
왕은 봄처럼 따스한 비단 금침 안에서 불처럼 뜨겁고 격렬하게 사랑했다. 그랬다. 그것은 탐
욕이 아니라
사랑이라 중전은 생각한다. 말은 없어도, 사모한다 맹세는 아니 하셨지만 그 것은 사랑이었
다.
그대는 너무 여리고 투명하여 짐은 그대를 다치게 할까봐 두려워... 한숨같이 속삭이는 말씀
이 그랬다.
짐의 눈을 보시오. 안타깝게 소리치기도 하셨다. 짐 눈에 그대가 있듯이 그대 눈 속에도 짐
이 있다 함을
알게 하여 주오. 그렇게 속삭이셨다. 그녀와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 하나 얽으며 왕은 차마
입으로 내지
는 않았으나 무엇인가 할말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녀의 눈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 복잡
하면서도 열
정어린 눈빛이 사랑이라 중전은 여겼다.
한 몸이 되신 후에도 그저 다정하셨다. 짐은 그대가 우는 것이 제일 싫어!! 가냘픈 신음이
새어나오는 어
린 지어미의 입을 당신의 입술로 쓸며 그렇게 속삭이신다.
“인제는 제발 우지 마오. 짐에게 웃어 주시오. 오직 짐에게만 웃어 주시오!”
한 올의 공기도 들어갈 틈이 없이 꽉 밀착한 두 몸. 그녀를 끌어안은 채 왕은 그녀의 귀에
대고 그렇게
속삭이셨다. 짐은 그대가 웃는 것이 좋아. 비는 웃음이 드문 사람이라 그대가 웃는 것이 더
보고 싶어...
오직 짐에게만 웃어 주시오. 인제는 그대도 행복하다 말하여 주시오..
-오직 짐에게만 웃어 주시오!
그 것이 당신의 진심일까? 항시 못났다 소박주시고 버려두신 이 내 진심을 인제는 전하께서
도 돌아보아
주시는 것인가? 생모마마께서 남겨주신 귀물 가락지를 끼워주신 뜻은 인제 자신을 진정한
지어미로 정
궁으로 여기신다 그 말이라 여기었다.
"중전마마. 중전마마. 대전마마 듭신다 하옵니다."
넋을 놓고 그날 밤 생각을 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중전은 윤상궁을 돌아보았다. 어린
소녀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왜 낯빛을 붉히며 옥지환을 어루만지는지 다 안다는 눈빛이 웃
음을 물고 있
었다.
"내려가시옵소서, 대전마마께서 듭시었다 하옵니다."
"상감께서 듭시었다고? 기별도 없이 갑자기 왜?"
치마귀 부여잡고 서둘러 서온돌로 드는 중전은 그러니 이제 왕이 두렵지 않다. 괜한 억지
트집 잡으러
왔다 생각하여 무작정 겁에 질리고 달달 떨던 것이 사라지니 얼마나 다행인가?
괜히 생긋 웃는 중전 앞에서 왕 역시도 모르는 척 씩 웃었다. 아닌 척 마주치는 눈빛에 서
로가 그저 좋
다.
"창희궁에 문안인사 아니 가오?"
"낮것 끝낸 다음에 가리라 하옵니다. 비가 오시니 오지 말라 기별이 왔사옵니다만은 저가
잔치 이야기를
아뢰고 싶어서요."
"그리 하오. 실상 짐도 비와 함께 문안인사 나가리라 하였는데, 마침 저 함평 땅에서 희한한
범죄사건이
생긴 터라 잠시 후 편전에 중신들이 들 것이오. 허니 오늘은 홀로 다녀오시구려."
"그리 할 것입니다."
"할마마마께서 잔치 준비를 궁금해하시는 듯 하니 잘 알려드리시오. 그래, 잔치 준비는 잘
되어 가는 것
인가? 짐도 신경을 쓰지만 내전의 잔치라 중전께서 고심하여 일을 처리한다 하는 이야기는
들었소이
다."
서둘러 차를 준비하라 분부하고 돌아앉으며 왕비는 맑은 목청으로 응대를 하였다. 왕이 싱
긋 웃었다
"아, 예. 성상의 뜻이 아름다워 준비가 잘 되고 있다고 오늘 오전에 예판께서 들어오셔서 알
려주었나이
다. 할마마마께서도 주상께서 이 할미의 잔치를 깊이 생각하사 큰 잔치를 베풀어준다 하니
그저 여한이
없소 하시며 기뻐하시는 참입니다."
"잘 하였군. 할마마마께서 기뻐하신다니... 음, 음.. 헌데 말이야. 중전. 할마마마 진연날에 '우
리'가 어떤
선물을 하여야 할까? 할마마마께서 무엇을 좋아하실 것 같소? 비(妃)는 할마마마 심중에 신
임을 받는
분이니 당신께서 무엇을 원하는지 아실 것 아니오? 대체 무엇을 가지고 싶어하시는가? 딴
날도 아니
고.."
중전이 권하는 찻잔을 집어들며 왕이 은근슬쩍 물었다. 중전이랑 짐이랑 같이 선물을 하면
은 좋아하실
것이야 이런 뜻이다. 중전 역시 왕이 처음으로 '우리'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두근거렸
다.
"....신첩은 감히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몰라서 말씀을 못하신다는 말이오, 아니면 할마마마의 뜻을 알고는 있으되 짐에게 말을 아
니 하시겠다
는 뜻이오?"
왕비는 잠잠히 입을 봉하고 고개만 숙였다. 왕은 고개를 돌려 열려진 창으로 흘러내리는 꽃
비를 바라보
았다. 비에 젖은 화계의 목련화를 바라보며 내뱉는 목청이 섭섭하였다.
"알고는 있으되 말씀을 못하시겠다 그런 뜻이구려. 짐은 지금껏 할마마마께 매사 박하였던
사람인지라,
경사스러운 날을 맞이하여 가능하면 할마마마의 심중에 기쁜 일을 하여 드리고 싶소. 알고
계신 것이 있
으면 말씀하여 보시오. 짐은 절대로 가당찮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오. 오히려 그 소원을 들어
드리고 싶
소이다."
"휘강전 전하께서는.... 오직 가문의 해원을 하여주시기를 소원하옵니다."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간신히 입을 여는 왕비의 말에 문득 왕의 얼굴이 붉었다. 중전은 맑은
눈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러나 진심을 다하여 간청하였다.
"이틀 전에, 평생 그런 말씀을 아니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판께서 진연에 참석할 내빈
의 명단을 들
고 들어오시어 가납하시겠느냐 하시니 그 이름들을 바라보시고는 한마디 탄식이라. 진갑잔
치를 맞이하
사 오직 친정인 덕수 이씨 가문의 사람들만이 모다 빈자리일 것이니 어찌 이 몸의 마음이
편할 것인가
그리 눈물을 지으신 지라... 망극하옵니다. 그 일에 대하여서는 절대로 입 밖으로 내지 말라
엄명하신 지
라 신첩은 더 이상 말씀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짐은... 천하의 폭군이야. 그렇지 않소?"
보료 끝을 바라보며 툭툭 내뱉는 말이 쓰디썼다. 왕은 고개를 들어 치마귀만 비틀고 있는
중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민망하오. 할마마마 가문을, 그랬지. 짐이 망쳤소이다. 철이 들고나서 생각하니 심하였다 싶
은 면도 없
다 말못하지만, 할마마마께서 수렴청정을 하실 적에 그 뒷곁이 모다 그 가문 사람들이라. 외
척이 발호하
여 제대로 된 일이 어디 있던가? 결국 그 것은 짐의 보위를 위협하는 적수가 됨이니 그를
경계함이었소.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니 다소는 후회하오. 너무 모질고 심하였다 싶어서... 실상 할마마마
께서 그이
들을 신임함이 남달라 그런 것이지 그이들이 짐에게 무엇을 진정 잘못하였던 것은 없었거
늘, 짐이 어리
석고 아직 세상 물정 모르던 차라 귀가 얇았어. 그는 실책이었소이다. 인정하오. 왕이 되면
다 그렇게 되
는 것이야. 짐의 마음과는 달리 억지로 해야할 일도 있을 것이며, 인정과는 달리 모질게 베
어 버려야하
는 일도 많아. 눈물을 머금고도 참하도록 명을 내려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도 중용
하여야 하는
사람도 있지. 그 것이 왕 된 짐의 업보인 것 같아. 때로 그런 생각을 해보곤 해. 짐은 왕이
아니었다면 좋
았을 것이라고... 이렇게 어리석고 불측하며 성정 격한 이 몸이 어찌하여 만인의 귀감이 되
어야하는 왕
이 되어 이렇게 모든 이를 괴롭게 하는 것일까?.."
"망극하옵니다. 신첩이 모질고 어리석어 감히 하여서는 아니 되는 말씀을 올렸나이다. 심기
를 불편케 하
여 드림이라, 신첩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 그저 듣기만 하던 왕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불툭한 그
의 성질머리
를 건드렸다 싶어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왕은 고개를 저었다.
"중전께서 무엇을 잘못하시었소? 다 짐의 허물인걸. 알았소이다. 할마마마의 뜻을 짐이 알았
으니, 되었
소. 창희궁으로 다녀오시구려. 짐은 대전에 다시 나가보아야만 하오."
어떻게 처분을 하실까? 나의 말을 듣고 한번 더 할마마의 아픈마음을 생각하여 주실까? 아
니면 절대로
불가하다는 말씀이실까? 가마타고 창희궁으로 나가며 중전은 그런 생각을 하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할마마마와 전하께서 빨리 마음을 푸시어야 할 것인데...... 다른 것은 소
원없되 그것
이 나의 가장 큰 소망이다. 노인께서 병약하시고 마음 고생이 심하시니 이를 어찌하랴. 제발
전하께서
항시 노심초사 성상만을 생각하시는 할마마마 마음을 알아주시면 여한이 없을 것이다."
문안을 드리러 창희궁으로 입궐하신 인선궁 덕빈마마와 더불어 왕대비전하께서 중전을 맞이
하였다. 궁
금해하시는 내전 어른들에게 중전은 잔치에 대하여 이러저러하였다 아뢰었다. 어진 분이 고
개를 끄덕끄
덕하였다.
"우리 중전 덕분에 이 늙은이가 호사하오. 쯧쯧. 주상께서도 이리 의젓하고 고운 중전의 심
덕을 빨리 아
시어 귀하게 여기신다 할 것이면 이 할미가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허기는 은근히 상감도
중전에 대하여
마음이 달라져가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니, 예전마냥 애먼 억지며 심술은 인제 아니 부린다
면서요? 헛
허허. 그만하여도 다행이라... 헌데, 중전. 이 옥지환이 무엇이오? 못 보던 것입니다?”
다담상이 들어왔다. 은저분을 들어 음식을 집는 중전의 가녀린 손가락에 파르스름한 옥지환
이 끼여져
있는 것이었다. 동절기에는 여인들 치장으로 옥붙이를 하지 않는 것인데 중전께서 철이 아
닌 옥지환을
끼고 있으니 왕대비마마께서 눈 여기신 것이다.
성품이 소박하여 패물 치장을 즐겨하지 않는 성품을 잘 아시는 왕대비마마이시다. 그런데
손에 낀 그 가
락지가 여간 귀물이 아니었다. 첫눈에 탁 뜨였다. 금판으로 봉황을 투각한 청옥지환이 곱고
도 아름답다.
투명한 중전마마 가녀린 손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싶었다. 궁금해 하는 어른의 하문에 중전
마마 작은 얼
굴이 발갛게 물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