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예판은
들으시오. 내일 상감마마를 알현하여 잔치 일을 고변하실 적에 한마디만 여쭈시오."
"무엇을 말이옵니까?"
"잔치를 <법도>대로 치를 것입니까? 하십시오."
"허면은요?"
"십 중 십. 그리 하라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일은 다 성사이니 명단에서 월설궁 계집을 빼
십시오. 나중
에 그 일에 대하여 하문하시면 전하께서 <법도>에 맞게 일을 처리하라 하신 고로 신은 그
리하였나이다
하시면 됩니다. 첩지도 없는 천한 잉첩이 성총을 빙자하여 대궐잔치에 참여함은 전에도 없
고 후에도 없
는 일. 경은 다만 법도에 맞게만 하시면 됩니다."
김장집이 혀를 내둘렀다. 말 한마디로 월설궁 계집을 앉아서 물을 먹이는 저 영리함이라니.
중전마마께
서 영명하다 하시더니 과연 허언(虛言)이 아니로고.
법도에 따르자면 첩지도 없는 서인이 대궐 잔치에 참여함은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
다. 허나 그동
안은 주상전하의 강력한 비호로 월성궁 계집이 그 위세에 호가호위하여 대궐 잔치의 첫 자
리에 앉았던
것이다. 헌데 이제 전하께서 법도대로 일을 처리하라 한마디 하시면은 그 계집이 대궐 잔치
에 발을 붙일
데가 없는 것이다. 그것도 중전의 뜻이 아니라 상감마마 당신의 입으로 그리 만드신 것이라.
'손 하나 대지 않고 저리도 민활하게 일을 처리하심을 보라지? 참으로 우리 중전마마 영명
하심이라. 얼
성궁 계집의 위세도 이제는 사그라 드는 달빛이거니. 태양의 광휘같은 우리 중전마마께서
교태전에 앉
아계시는데 무엇을 걱정하리? 아무리 그 계집이 발악한다 하여도 인제는 대세가 기울었다.'
김장집을 내보내고 중전은 대전의 내관 기별대로 가마를 타고 중궁을 벗어났다. 왕이 기다
린다는 연경
당으로 향하였다. 왕은 용포를 벗고 편안한 도포 차림이었다. 비가 내리는 것을 보신다 하더
니 마루에
홀로 앉아있었다. 중전이 가마에서 내리자 웃음지으며 망극하게도 우산을 직접 받쳐주었다.
"비 구경이나 합시다. 철에 맞추어 비가 곱게 오시니 올해 농사가 그만 하겠소이다."
자신의 옆에 앉아라 하듯이 마루 바닥을 툭 쳤다. 장내관이 중문을 닫아드리고 물러났다. 이
제는 아무도
바라보는 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왕이 미적미적 중전의 작은 손을 더듬어 잡았다. 마
당 앞 괴석
(塊石)을 바라만보는 왕의 귀뿌리가 은근히 붉었다. 손을 잡혀드리는 중전의 작은 얼굴에도
복사빛 물
이 더 짙어졌다.
"짐은 말이야. 음. 음. 중전의 손을 잡으면 말이지. 음, 음. 항시 게의 손이 너무 작다 싶더
라."
짐은 항시 그대가 너무 애틋하고 소중하오 하는 고백이다. 그 작은 손에 꽃반지 하나 끼어
주고 싶다는
것이 오랜 동안 간직한 소망이었다. 손수 허리를 굽혀 딴 작은 꽃을 가녀리고 투명한 손가
락에 끼워주면
왕비는 어제처럼 웃음을 지어줄까? 사모하오 하는 짐의 마음을 읽어줄까?
"신첩은 전하의 어수가 너무 큰 듯 하옵니다."
정겨운 대답이 돌아왔다. 왕은 싱긋 웃었다. 중전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괜히 좋아 실죽실죽
웃기만 했
다.
"짐은 사내이니까 그러하지. 하지만 게의 손은 참 기특한 손이야. 침선도 잘하고, 차도 잘
끓이고... 글씨
도 잘 쓰잖어?"
"전하의 어수는 만리강토를 움켜쥔 손이라.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손이옵니다"
"......짐의 손을 홈빡 움켜쥔 손이 비(妃)의 손이니, 허면은 비의 손이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손이구
먼."
"제가 홈빡 움켜쥐다니요? 잡히어 드린 걸요?"
"잡히어 준 척하면서 잡았단다? 짐을 치마폭 안에 잡아놓고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니? 이리
더 가까이
오소. 짐이 좀 안아볼 참이다. 쌀쌀하지 않냔 말이야."
봄기운이라지만 비가 오고 늦추위가 아직도 한풀 남은 날이다. 저물어가는 터라 냉기가 오
스스 돋았다.
왕이 가까이 놓인 솔포를 집어들었다. 자신과 중전의 어깨에 홈빡 한겹 덮었다. 솔포 하나에
어깨 감싸
맞대고 손잡고 앉아있으니 이야말로 좋을시고! 없던 정도 생길 참인데, 한참 돋는 수줍은
새 정분이 모
락모락 솟구치는고나.
언제는 소 닭 보듯이 하던 요 양반들이, 언제는 못 잡아먹어 눈만 흘겨뜨고 싸움질만 하던
요 두 분이, 인제는 콤콤하게 정분이 돋았다 이 말이다. 주고받는 말들이 첩첩하였다. 남들
눈 없다 싶으니 달큼한 희롱질이었다. 남 모르게 누가 볼세라 솔포 안에 숨어 주고받는 입
맞춤이 비소리에 묻혀 곱게 젖어들었다.
***********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왕과 중전이 아니다. 체면과 법도와 위엄에 둘러싸인 지존이 아니라
말 그대로 풋
사랑에 젖어든 여염집 떠꺼머리 총각과 댕기머리 처자이다.
살며시 부딪친 서투른 입맞춤이 어느새 깊고 깊은 연정으로 피어나고, 둘의 어깨를 하나로
감싼 솔포 안
에서 단단한 팔이 가냘픈 몸을 담쑥 감았다. 한번 더, 다시 한 더. 서로를 갈구하는 진한 입
맞춤이 끝난
후 아주 가까이 마주친 눈빛. 정다운 미소가 함뿍 담겨졌다.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는 듯, 이글거리는 지아비의 눈빛이 중전의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왕비
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먼저 팔을 내밀었다. 그의 목을 살며시 감
았다. 가만히
볼을 그의 얼굴에 대고 눈을 꼭 감았다. 또 한번의 다정하고 격렬한 입맞춤을 기다렸다. 다
른 일은 모르
지만, 이렇듯이 서로 온기를 얽고 입술을 마주치는 순간의 즐거움과 행복을 그녀도 이제 알
게 되었다.
이제는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비의 냉기 속에서 다가온 입술. 젖어있고 따뜻하고 격렬한 마
음. 뚜렷한
그의 존재.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사람. 늘 그녀에게 냉혹하고 차디차고 아뜩하게 깊기만
하던 사람.
그런데 지금 이순간 중전의 눈을 응시하는 왕의 눈은 봄바람처럼 온유하게 흔들리고 있었
다.
"처음이야. 실로 처음이야. 알고 있소?"
"무슨?......"
"그대가 먼저 안아 주었어. 그대가 먼저 짐을 안아준 것은 이번에 처음이야. 그대가 먼저 짐
을 바래고 안
아주었어. 짐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귓가에 다가온 목소리는 낮았고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든든한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중전
은 살짝 물기
마저 어린 듯한 지아비의 서투른 고백을 들었다. 짐은 기뻐. 행복해. 그대가 짐을 먼저 안아
주고 그리워
해 주어 실로 행복해. 바랄 것이 없어. 이제는 천하를 얻은 듯 해.
비 소리가 꿈속인 양 막막하게 들렸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쓸고 지나는 소리가 우스스 스산
하였다. 그러
나 연경당의 내실, 매끄러운 비단 금침 안에서 서로를 갈구하며 가쁜 호흡으로 묶여 한 몸
으로 꿈틀거리
는 두 사람에게로는 감히 차마 스며들지 못했다. 공기 한 알 스며들 틈도 없이 완벽하게 하
나인 두 몸.
비로소 감춰둔 수줍은 마음이 실개천으로 흘러 온기와 입맞춤, 서투른 애무의 모양을 하고
서로에게 스
며드는 이 순간. 왕도 그러하거니와 어린 왕비도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이 아득한 춘몽 같
고 환상 같을
뿐이다.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을 주고 싶었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꼭꼭 감추어두었던
수줍은 사모지
정과 더불어 선물하고 싶었다.
지아비의 탐욕스러운 입술이 탐스럽게 부푼 젖가슴 한쪽을 덥석 베어물자 작은 입술 사이로
꽃망울이
터지는 고혹적인 신음소리가 저절로 새어나왔다. 사내의 타액에 젖은 작은 젖꼭지가 진분홍
빛으로 달아
올라 꼿꼿이 섰다. 구석에 선 대황촉불 반토막. 희미한 그 빛이 닺지 못하는 언저리 헝클어
진 금침 안.
희붐한 고요 안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고운 수밀도를 두 손으로 가득 움켜잡으며 질탕한 희
롱이라, 그들
은 지금 물 속을 헤엄치는 자유로운 물짐승이다.
"중전은 천하에서 가장 현숙한 여인이라 하였는데 이제 보니 천하에서도 일등가는 요녀(妖
女)구먼. 감
히 짐을 보채어 사랑하여 달라 조르는 것이니?"
당황하고 민망하여 가녀린 팔이 든든한 가슴을 밀어냈다. 무안하여 새초롬한 얼굴에 화끈
열이 올랐다.
억센 팔이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왜 새삼스레 부끄러워하는 것이야? 이 것이 사모하는 부부지간 어울리는 일인데. 그대가
밀어낸다면
짐을 싫어하는 것이라 여길 것이야. 다른 사내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오해를 한다 하였어!"
짓궂고 부드러운 협박이다. 그러나 심약한 팔을 툭 떨어뜨리게 만드는 한마디. 뜨거운 입술
이 보드라운
볼을 가볍게 쓸어갔다. 봉숭아 꽃잎 마냥 작고 붉은 귓불을 간질이는 목청이 나직하고 다정
스러웠다.
"부부지간 몸을 섞는 그 일이 얼마나 다정한 일인지 짐이 이야기하여 주었던가? 이 밤은 우
리가 진정으
로 마음과 함께 몸을 나누는 날이니 초야(初夜)라. 짐은 이 밤에 그대를 울리고야 말 것이
야. 두려움 때
문이 아니라 즐거움 때문에 여인이 울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줄 것이야."
"...신... 첩은 두, 두렵나이다.."
시작도 하지 않은 일인데, 벌써 울 듯 떨리고 젖은 목청. 속삭이는 목청은 아주 낮고 작았
다. 왕은 어린
소녀인 왕비가 비로소 새롭게 눈을 뜬 낯선 그 감정으로 당황해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
달았다. 이미
한 해전에 난폭하게 몸을 꿰뚫리고 그와 더불어 밤을 같이한 것도 벌써 여러 번. 그러나 여
전히 무지한
어린아이가 바로 자신의 왕비였다. 밤잠자리에서 벌어지는 질탕한 그 운우지락을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
으로 여기고 지아비가 달려드는 그 뜻을 자신을 해치는 일이라 생각하는 순진한 어린애.
'짐이 잘못하였어. 실로 짐이 부끄럽고 미안한 일이야.'
부드럽고 자잘한 속내의 말들이 오간 이 밤이 실상 자신들의 초야여야 했음을 다시 한 번
아프게 자각한
다. 그 밤에 이렇듯이 짐이 사모한다 말 한마디라도 하였다면. 조금만 더 참고 따뜻하게 배
려하고 더불
어 따뜻하였다면 중전은 이미 짐의 완전한 여인이었을 것이야. 짐에 의하여 행복해하고 짐
이 내려주는
비로 인하여 촉촉하게 젖어들어 기쁨에 흐느끼는 여인이 되었을 것인데...... 지울 수 없는 회
한과 부끄
러움으로, 미안함으로 왕은 손을 들어 향기롭고 부드러운 머리타래를 쓰다듬어 내렸다. 자신
의 마음을
전해 주듯이 옥으로 빚은 듯이 투명하고 향기로운 그녀의 나신위로 농밀하고 지분거리는 애
무를 계속하
였다. 뜨거운 입술로 손길로 속삭였다.
-'짐이 그대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말로 차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대를 사모하는 이 마
음을 그대도
읽혀지오? 그대에게 속하여 움직이지 못하는 짐의 마음이 보여지오?'
커다란 그의 손으로 움켜쥔 아름다운 젖가슴. 삼켜도 삼켜도 다함이 없는 달디단 쾌락의 화
원 위에 사내
의 땀이 한방울 뚝 떨어졌다. 달콤한 그늘이 드리워진 골짜기에서, 혹은 당실 솟은 연분홍빛
유두 위에
서 왕의 갈증어린 입술과 혀는 오래도록 헤엄을 친다.
새하얀 금침에 구름 같은 수발을 펼치고 누워 사내의 입술과 시선아래 자신을 전부 드러낸
왕비는 아직
도 반만 남은 대황촉불이 너무나 밝다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