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200)

"전하, 부름하시었나이까?" 

"긴히 하명하자 경을 불렀소이다. 짐이 가만히 생각하니 내달이면 할마마마 진갑이라. 그래, 

그 준비가 

웬만한가?" 

왕이 다짜고짜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상감과 왕대비전은 이미 사이 나쁘고 척이 몹시 진 사

이다 김장집

은 긴장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심술스러운 왕이 혹여 왕대비전의 잔치를 아예 하지 말라 할 

것은 아닌

가. 

"그렁저렁 준비를 하고 있사옵니다. 다만 전하께서  지금껏 구체적인 하명이 없으시사 잔치 

규모를 어느 

정도로 할까 그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나이다."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신 할마마마의 진갑인데 그 일이 어찌 범상하게 준비될  일이리? 어

디 그 행사에 

대하여 가늠한 것을 좀 보오." 

무릎걸음으로 도승지가 김장집에게서 두루마리를  받아다가 상에 받쳐  왕에게 올려드렸다. 

대강 그 것을 

눈으로 훑은 다음 무릎에 내려놓고 왕은 김장집을 바라보았다. 

"할마마마께서는 태상대왕 광종전하의 오직  한 분 정궁이시며  짐의 친조모님이신 터이오. 

그런 왕가의 

한 분 어른께서 장수하시어 진갑을  맞이한 터라. 헌데 그런 잔치를  어찌 심상하게 마련할 

것인가? 예전

이 짐이 생각이 짧아 그대가 고변한 규모가 적당하다 싶어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는데 말이

야. 이제 생각

하니 너무 조촐한 것은 아닌가 싶어. 하여 다시 하명 하건대, 잔치는 경희궁이 아니라  여기 

성덕궁에서 

거행하시오. 또한 별시도 예정대로 치르도록 하오. 이는 오직  자전(慈殿)의 은덕이 이 산천

에 널리 퍼짐

을 알리려함이오." 

"망극하옵니다. 분부 명심봉행하겠이나이다." 

"허고, 이번 행사가 왕가의 일이되 내전마마를 위한 잔치가 아니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일

은 중전께서 

관장하셔야 할 일이 아닌가? 곤전이 알뜰하고 부덕이 높아 법도에 어김이 없다 칭송이 대단

하다고 들었

소. 할마마마께서도 왕가에 사람들이 많되  오직 곤전만을 의지하며 신임하시기  크다 하니 

이 일을 경이 

예조에서 주관하되 모든 것을 비와 의논하고 고변하여 그이  뜻대로 처리하오. 사직의 안주

인이 곤전이

니 그이가 할마마마 잔치를 주관한다함은 사리에 맞는 일이라 할 것이다. 경은 중궁전에 들

어가 이번 잔

치 일을 중전에게 알려주고 그이의 명을 받아 일을 처리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실로 영명하고 사리에 맞는 분부이시니 왕대비전하께서 얼마나 

감격하실 

것입니까? 자전을 위하는 성상의 덕이 이토록 아름다우니 신이 감격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

사옵니다." 

월성궁 계집의 이간질로 멀어질대로 멀어진  조손지간. 심술맞은 상감의 심기가  꼬일 대로 

꼬여서 어쩌

면 잔치를 그만 두라 할지도  모릅니다 하고 걱정을 들은 터이다.  솔직히 김장집은 편전에 

들면서 왕이 

심술을 부려 잔치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다 하고 고함을 지를 지도 모르겠다 생각하였다. 헌

데 너무도 의

외인 왕의 하교에 감격하여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편전을 물러났다. 

김장집은 실로 얼떨떨하기도 하고 또 약간 흥분되기도 한 심정이었다. 

월성궁 계집의 일로 오래도록 척이 져서 서로 왕래가 끊긴 지 오래인 왕대비전과 왕 사이이

다. 또한 그 

요망한 계집이 얼마나 귀밑에서 이간질을 하여 놓았는지 한 분뿐인 할마마마임에도  불구하

고 그 분을 

성덕궁에서도 거처하지 못하게 창희궁으로 내보내 버렸지, 칠 팔년 문안인사도 제대로 들이

지 않았다. 

헌데 갑자기 규모를 크게 하고 법도에 걸맞게 화려한 잔치를 베풀라 하니 그는 왕의 변덕스

런 심중을 도

무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내관이 귀뜸하기를, 어제 중전마마께서 왕대비전 잔치에  대하여 말씀 올렸다 하더니 그래

서 이리 달라

지신 것인가? 그것이 사실일진대, 그러고 보면 전하께서  말씀으로는 중전마마를 모질게 대

하시되 심중

으로는 그 분의 말씀을 몹시도 중히 여기시는 것이야. 고집이 세고 도도하시니 절대로 당신

의 뜻을 다른 

사람의 말로는 꺾지 않으시는 분이 전하가 아니더냐. 헌데 그런 상감마마께서 중전마마께서 

한 마디 하

셨다고 당장에 나를 불러 잔치를 대대적으로 하라 하명하심이라… 게다가 이 잔치를 중전마

마더라 주관

하라 하명하심이니 이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그 분을 당신께서도 인제는 어엿한 정궁마마

로 인정하심

이 아닐 것인가? 남들 앞에서는 무심하시되 전하께서 중전마마께 은근히 속정이 깊으신 모

양이다. 허기

는 어진 심덕 이길 장사가 없다 하였으니 우리 중전마마의 하시는 어진 일들을 당신께서도 

눈과 귀가 있

는데 모르실 것이더냐? 입으로는 못났다 하시되 이 근래 중궁전 듭시는 발길도 은근히 예전

보다는 잦다 

하였는데… 이제는 상감마마께서 알게 모르게 중전마마와 정분이 들어가나 보다' 

그러나 김장집은 자신의 짐작을 그저 자신의 심중에만 담아두기로 한다. 알지 못할 왕의 심

중은 아직도 

그에게는 너무나 변덕스럽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봄이 온 것은 아

니라고 했다. 

왕이 중전을 한 번 배려하였다고 해서 그의 심중에 중전이 월성궁 계집을 버릴 만큼 소중하

다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월성궁의 그 간교한 계집이 대체 어떤 계집이냐? 그저 주상의 일거수  일수족을 지

켜보며 행여

나 자신에게서 정분이 떨어져 나갈까 눈을 부라리고 있음이라.  사내는 절대로 계집의 수단

을 이기지 못

한다 하였으니 상감의 달라지는 마음을 알게 되면 대난리가 날  것이다. 별별 수를 다 써서 

두 분 사이를 

이간질하고는 기어코 갈라놓고 말 것이니 이 일은 그저 입을 봉하고 있어야지. 허기는 왕대

비전 잔치 규

모를 키웠다는 소문만 나도 이미 그 간교한 계집은 분하고 투기하여 거품을 물고 넘어갈 것

이다. 저 말

고는 도통 상감께서 다른 이를 돌아보는 꼴을 보지도 못함이라.  사람이 어찌 그리 속이 좁

고 저만 알며 

간악한 것이더냐? 영명하심이 넘치던 상감이셨으니 금새 밝은  눈을 뜨실 것이야. 그때이면 

그 계집의 

인생도 종말이다. 내가 반드시 그 방자한 계집과 좌상의 끝을 보고 죽을 것이다!' 

그렇게 김장집을 불러 왕대비전 잔치의 일을 가려놓고 왕은 이 밤에 짐이 연경당에 들리라 

하셨다. 빙긋

이 웃으며 한마디 하시었다. 

"비(雨)가 좋으니 짐이 옛 생각이 난다. 중전을 연경당으로  모시어라. 밤에 짐이 게서 기대

린다 전하여

라." 

"예, 전하." 

하명을 전하기 위하여 돌아서는 김내관 놈 얼굴이 묘하였다. 연경당은 상감께서 동궁  시절, 

사가의 풍습

을 알아라 하면서 선대왕께서 금원 안에 지어주신 99칸 조촐한 기와집이었다. 선대왕전하와 

생모이신 

희빈마마께서 가끔 사가의 여염집 부부지간 인 양 하여 그 곳에 들면 세자이신 전하께서도 

용포 벗고 여

염집 도령마냥 두분 마마 앞에서 무릎베고 어린양을 하던 곳이었다.  하여 왕은 그 곳을 마

음의 안식처요 

고향으로 삼아 외인이 근접하는 것을 몹시도 꺼려하였다. 그리도 다정하고 정분좋아 대전까

지 차고 드

는 희란마마도 연경당에는 감히 들어서지  못하였다. 온갖 애교 부리면서  신첩이 그곳에서 

용체를 모실 

것이어요 하여도 묵묵부답. 그런데 왕이 지금 중전마마를 그곳으로  모시라 먼저 말씀을 하

시다니. 

정말 상감마마께서 소문대로 중전마마와 새 정분이 깊어지는 것인가? 

지금 월성궁에서 근신처분 받고 처첩한  팔자된 큰마마는 이대로 몰락하고야 마는  것인가? 

김내관 놈, 

교활한 눈을 번쩍이며 중궁전 가는 척 하며 그늘에 스며들었다.  나인 년 하나 불러 속닥거

렸다. 

"월성궁 가서 빨리 전하여라 일이 되어 가는 양이 심상치 않느니라." 

       

뽀드득 이를 갈며 비를 헤치고 궐을 나서는 나인년. 분명 월성궁으로 스며들었것다? 폭우가 

더 거세어

지고 있었다. 

   

막 밤수라를 올리리까 하는데 중궁전 문이 열렸다. 김상궁에게  사친께 드릴 봉서를 내리던 

중전마마, 바

깥의 고변에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냐?" 

"아뢰옵니다. 지금 예판 대감께서 듭시었나이다. 왕대비전하의 진갑잔치를  중전마마와 함께 

의논하라 

주상 전하께서 분부하시어 듭셨다 하니이다. 뫼시리이까?" 

"모시어라." 

김장집이 예조관리 둘을 따르게 하고 고두하여 방안으로 들었다. 허리 굽혀 절한 다음에 조

근조근 아뢰

었다.   

"중전마마. 황공하옵게도 주상 전하께옵서 왕대비 전하의 진갑 잔치를 신에게  일임하신 바, 

그 진척 상

황을 마마께서 궁금해하신다 이리 하면서 중궁전에 들어 비(妃)와 의논하여 잔치 준비를 빈

틈없이 하라 

하명하셨나이다. 중전마마께서 궐의 안주인이니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신에게 

한마디 칭

찬까지 하셨나이다. 이 것이 그 준비를 적은 두루마리이니 보옵시고 달리 하명을 하실 것이 

있다 할 것

이면 신에게 말씀을 하여 주십시오."   

중전마마, 예조관리들이 잔치에 관한 준비를 아뢰는 말씀을 찬찬히 들으시었다. 윤상궁이 전

하여 드리

는 두루마리를 꼼꼼이 읽으신 연후에 고개를 들었다. 

"내가 예판대감께 한가지 하문할 것이 있습니다." 

"하문하옵소서 중전마마." 

"여기 지금 그날 잔치에 참석할 내외명부 명단을 보았거니와, 궁금하여서요.  여기에 월성궁 

이름도 있는

데 어찌된 연유인가?" 

"망극하옵니다. 전례에 의하여 명단을 만들었사온데, 무슨 하명이시라도..." 

중전의 작은 얼굴이 서리발처럼 차가왔다. 오래도록 모신 윤상궁마저도 처음 보는 옥안이라. 

그 어진 분

이 탁하고 서안까지 내려치셨다. 

"참으로 고약하오. 경들도 생각이 있달지면 이리는  못하리라. 왕대비전하의 경사입니다. 헌

데 어째서 할

마마마께서 가장 꺼려하시고 경계를 하는 이가 상을 받는 첫째자리에 와 있을 수가 있단 말

이오?" 

"망극하옵니다. 마마. 허나 월성궁 여인은 성총을 받는  자라, 항시 궁중의 잔치에 앉았나이

다. 하여...... 

이는 관례였으니 상감마마께서도 보시고 별말씀이 없으시어 그대로......" 

"법도에 없는 일이오! 첩지도 없는 천한 여인이 궐 잔치에 참석함도 민망하되, 하물며  무어

라? 말석도 

아니고 앞자리를 차지하여요? 내 참으로 기가 막히구려.  전하께서 보옵시고 이것을 윤허하

셨다 하는데 

매사 분주하시고 바쁜 분이십니다. 전하께서 일일이 이것을 다  보시었다 나는 믿지 못하겠

소." 

"허면은..... 신이 어찌 하오리까?" 

김장집은 중전마마 입만 바라보았다. 중전마마, 새카만 눈을  들어 그를 응시하였다. 영리한 

눈매안에 처

음보리만큼 파란 빛이 흘렀다. 

"어차피 전하께서 이 몸더러 잔치를 주관하라 하시었다니 내가 생각한 대로 하시면 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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