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천하에서 부인만이 내편이라. 정작 부인께 말을 하고 나니 내 마음이 편안합니다. 명
색이 가장이
고 아비이라, 글줄 읽는다고 허구헌 날 부인만 고생을 시킴도 민망하였소이다. 하여 쌀말이
나 들여놓는
다 하면서 성균관 입시를 한 것부터가 잘못된 듯 하오. 과분한 성총입어 중궁전 강학까정도
하게 되었지
만, 내 팔자 복은 아닌 듯 합니다. 부인께서 고생이 되시겠지만, 그저 낙척서사의 안해로 만
족하여 주시
구려."
"나물밥에 무명옷도 어진 지아비 따라 사는 복에 비하면 저에게는 과분하옵니다. 고생이라
말씀하지 마
십시오."
서로 의지하고 마음 통하는 부부지간, 미소를 나누었다. 다정하게 한 이부자리에 들었다. 어
디선가 밤새
가 쑥국쑥국 우는 소리가 들린다.
다음날 강두수는 중궁전 강학을 마친 다음 솔직하게 중전마마께 강학을 그만두겠다 청원하
였다. 날벼락
같은 소리에 중전마마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스승께서는 어찌 그리 날벼락 같은 말씀을 하십니까? 이 몸이 무슨 실수라도 하였습
니까? 강학을
그만두시다니요. 이 몸이 스승님과 더불어 글을 읽을 때만 눈이 트이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데 어찌 그리
무정한 말씀을 하십니까?"
영문을 몰라 중전은 제일먼저 자신이 모자라고 덕이 없는가 탓을 하였다. 한번만 더 달리
생각하라 하였
다. 강두수는 솔직하게 어제 편전에서 이러저러하였다 고백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상감마마
께서 중전
마마를 꼬아 보심이라, 민망하고 죄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아뢰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상감마마께서는 나에게 한 말씀도 타박 아니 하였소이다. 그런 일로
나를 무안주
실 만큼 주상께서 편협하신 분이 아닙니다."
"감히 상감마마께 직언을 고한 죄라, 신이 불충한 죄가 있는데 어찌 천금지존의 글 스승 노
릇을 할 것입
니까?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마마."
"스승께서 이 몸에게 얼마나 의지가 되시는 지 알고 계실 것 아닙니까? 구중심처, 조롱 속
의 새 신세라,
눈 어둡고 답답한 이 내 몸에 스승은 한줄기 바람이오 마음의 의지처입니다. 게다가 주상전
하께서 이 몸
에게 보내주신 분이 바로 스승이십니다. 중신들께서 중전인 이 몸에게 천거하여 주신 분이
바로 스승이
시거늘, 그런 말씀 아예 마십시오."
딱 잘라 말을 끊어버린 터로 중전은, 왕이 이 밤에 들어오면 한번 따지리라 생각하였다. 아
니 강학하라
스승을 보내주실 적은 언제고, 무안주어 스스로 걸어나가게 심술 부리시는 작태는 또 무엇
이더냐?
왕이 강두수를 앞에 두고 억지로 용을 쓰며 격한 성질머리 꾹 참아낸 것을 모르는 왕비는
기기 차서 한
숨을 내쉬었다. 그 뻔한 성질에 어련하시었겠어? 그녀에게 하던대로 혹시 노화난다 하여 스
승께 벼루라
도 내던진 것은 아닌가 이 말이다.
왕비는 왕비대로 왕에게 섭섭하여 그러고 있는데 왕은 왕대로, 주강 받으면서 홀로 씩씩대
고 있었다. 중
전이 또 그 잘난 놈하고 마주 앉아 다정하니 글줄 읽고 있으렷다? 이유모를 투기심이 모락
모락 김이 되
어 피어올랐다.
어제는 꾹 참았지만, 간신히 억눌렀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하고 분하였다. 두고두고 질겅
질겅 씹히
는 이물감. 왕 된 체면에 꾹 참고 의젓하게 내보낸 터로 씻기지 않은 무안함과 격렬한 신경
질을 잦힐 수
없어 하루 종일 심기가 불편하였다. 어젯밤에 왕비 앞에서 민망하고 짜증나는 기색을 하나
도 보이지 않
으려고 얼마나 노력하였던가?
허나 정작 다시 서책 들고 있으려니 어제 강두수에게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말짱하게 당한
분함이 새록
새록 솟아나서 환장할 참이었다.
'비(妃)가 감히 짐도 읽기 어려운 태극도설을 읽어? 게다가 무어라? 좌씨 춘추를 두고서 옳
다 그르다 강
평도 잘한다고? 쳇 가만히 생각하니 그 놈더러 일갈(一喝)하여야 하지않았나 이 말이다. 은
근히 괘씸하
단 말이다. 고금에 이르기를 여인네는 절대로 펼쳐서도 가까이 해서도 아니 되는 책이 춘추
라 하였거늘,
감히 제 놈이 법도를 어기고 중전 앞에 그 책을 펼쳤다 이 말이냐? 그래, 알만 하다. 그러면
서 짐더러 방
탕하니 주색 잡기나 하는 어리석은 인간이라 얼마나 속으로 비웃었을까? 언젠가는 이 나라
를 망치고야
말 어리석은 폭군이라 비웃음을 하고 있으렷다?'
그런 놈에게서 글줄을 배우니 중전도 은근히 그저 고개 숙이고 순명하옵니다 하면서도 심중
으로는 짐을
비웃는 것이지. 씻어내지 못하는 자격지심. 왕은 으드득 이를 갈며 서안 앞에 놓인 서책을
벽으로 냅다
집어던져 버렸다. 당국에서 들어온 춘추대전(春秋大典)이 날아가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나이도 어린 중전이 읽어내는 서책을 읽어서 무엇하랴? 짐은 왕인데. 짐은 사내인데. 그이보
다 훨씬 연
치도 높은데... 그는 미간에 신경질적인 빛을 띄우며 서안에 놓인 다른 책도 냅다 집어던졌
다. 그러고도
분심을 참지 못하여 박박 찢어버리기까지 하였다.
-"중전마마께서도 그런 글을 읽으시는데 전하의 학문 진척이 얼마만한 지, 신이 무어라 말
씀드리리까?
공부라 하는 것은 자신을 착하게 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진정
그런 공부를
중전마마께서는 하심이라. 성상께서도 당연히 그리 하시겠지요?"
당당하고 준엄하게 되받아치던 강두수의 잘난 얼굴이 떠오르자 또다시 왕은 노화가 끓어올
라 거의 환장
할 지경이었다.
용포만 입어 왕이지, 대체 네가 무엇이 그리 잘났느냐? 너는 그래봤자 천하의 어리석은 폭
군이요 강상
(綱常)의 기본인 인의(仁義) 효덕(孝德)도 지키지 못하는 불측한 인간임에랴. 그런데 너가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잘난 척을 하며 보위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느냐? 강두수가 조용히, 그러나 단호
하게 되받아
치던 말은 바로 그런 뜻이 아닐 것이더냐?
천하의 괘씸한 놈!!
왕은 다시금 이를 으드득 갈았다.
선대왕의 오직 한 분 혈손으로 탄생하여 금이야 옥이야 떠받들음만 받으면 자라신 분이다.
또한 겨우 한
돌만에 다음 보위를 이을 세자로 책봉되었던 터이며 하물며 철이 들기도 전에 이미 보위에
앉으신 분이
라, 천하에서 당신의 그 도도함과 오만을 가로막을 자가 누가 있을 것인가?
지금껏 천하에서 제일 잘났다 날마다 칭송을 받고 사셨던 분이다. 대국 사신들을 상대하여
당국왕의 기
를 꺾어버릴 만큼 강골이며 영명한 군주이시다. 대국 사신들조차 '단국의 반악'이라고 칭송
할 만치 잘난
미장부이기도 하였다. 이렇듯이 태어나서 지금껏 모든 사람에게 그저 우러름을 받고 귀애함
만 받으며
살아온 터이라 왕은 이렇게까지 무안하고 민망하고 분한 경우를 단 한번도 당한 적이 없었
다. 그래서 노
염은 더 장하였고 무안함은 더 컸으며 모욕당한 자존심의 상처는 씻을 길이 없는 것이다.
하물며 강두수 그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바 인격이 훌륭하고 학문이 높으며 고결하고 염직
한 선비라는
데서 왕은 더 큰 분노와 뼈아픈 패배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잘났다 스스로 자부하였던 주상 당신보다 더 뛰어나고 잘난 사내가 있다는 것을 안 충격은
엄청난 것이
었다. 하물며 난생 처음 왕이 기이한 경쟁심까지 느낀 강두수 그가 더더구나 주상 당신을
상대하여 기가
죽지 않고 맞상대를 할 정도로 당당한 사내라 하는 것은 도도한 왕에게 있어 엄청난 긴장감
을 주기에 충
분하였다.
그의 모든 것이 왕 자신 스스로 모자라다, 잘못하였다 하는 부분을 건드리는 역린의 존재라
왕은 더 분
하였다. 스스로 잘못하였다 느끼고 부끄러워하는 모든 일이 강두수라 하는 강직하고 고결한
인물로 인
하여 더 뚜렷이 드러났다. 자신이 저지른 실덕이 스스로 면구하고 더 망신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 잘난 선비 강두수를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다는 패배감. 왕 평
생 가장 싫어
할 존재가 있다면 바로 강두수 그가 될 것이다라고 직감하는 것이다.
'쳇, 그런 놈이 글 스승이라 하여 중전 곁에 딱 버티고 앉아있었던 게야! 날마다 그 순진한
이를 상대로
속살거리기를 짐의 실덕을 꼬아바치고 비웃었을 것이니 어찌 중전이 짐을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을 할
것이더냐? 어찌 그리도 그이가 짐을 멀리하고 꺼려할까 항시 의아하였더니 그런 속사정이
있었던 게야!
기가 막혀서... 비의 학문을 가르쳐라 하여 그놈더러 강학을 시켰더니 이놈은 그 분수도 모
르고 지금껏
짐과 그이 사이를 이간질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짐은 그런 사정을 까마득
히 몰랐던
터로 참으로 기가 막혀서...'
중전이 자신을 꺼리고 좋아하지 않는 것을 전부 강두수의 탓으로 돌려 치며 그는 또다시 으
드득 이를 간
다. 날이면 날마다 왕비가 강학을 한답시고 강두수와 나란히 앉아 자신을 두고 일러 가로되
폭군이라 같
잖게 여기고 비웃을 것이다 싶으니 왕은 으악!! 고함을 지르며 발광이라도 하고 싶다.
'하지만 그래보았자 이미 짐의 것이거늘! 네 놈이 아무리 꼬아 이간질을 하여도 중전은 이
미 짐 가까이
온 사람이란다. 흥.'
평생 붙박이. 그깟 놈이 아무리 날뛰고 이간질을 하여도 천지신명이 정하여준 지어미가 아
니더냐. 어디
저가 감히 짐을 거역하고 도망갈 수 있을 줄 알더냐? 이미 우리 정분은 한참 깊었고, 굵은
동아줄로 엮
어진 사이거늘... 왕은 다정하고 행복한 어젯밤을 떠올리며 광증(狂症) 걸린 사람인 양 실죽
웃었다.
시시각각 변덕이라, 노화 내었다가 짜증부렸다가 홀로 히죽히죽 웃었다가...... 냅다 서안 걷
어차고 서책
을 던져버리고 박박 찢다가 또 맹한 얼굴로 헤벌레...... 곁에 시립한 대전 내관과 상궁들이
가슴이 조마
조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저것저것, 혹여 정말 주상께서 광증이 걸리신 것은 아니가?
전의더러 진
맥을 하라 하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조만간 중전이 원자를 낳아지고 시간이 흐를 것이면 이렁저렁 살아지는 것일 테니 그래보
았자 짐 손바
닥 안에서 노니는 새이거늘.. 저가 감히 어찌 짐을 벗어나겠다고? 암만, 절대로 짐이 저를
놓아줄 줄 알
고? 천하가 짐의 것인데 저가 이 구중심처에 들어온 이상 어쩌겠다고...... 음음음. 인제 저도
짐에게 마
음열고 웃어주는 것 좀 보라지. 귀엽기도 하지. 고것 참..... 암암, 이렇게 사는 게야. 시간이
흐르면 우리
도 다른 부부지간처럼 은애하는 마음이 깊어질 것이야. 언젠가는 저도 짐을 사모하여 줄 것
이야. 헌데
학사 그 것이 감히 중전을 부추겨 짐을 망신스럽게 여기게 하고 거역하게 만들어? 천하에
같잖고 고약
한 놈. 어디 두고 보자!'
이러는데 바깥에서 고변이 들었다.
"전하. 부름 받자와 예조판서 들었나이다"
허연 수염을 떨면서 예조판서 김장집이 들었다. 왕은 내관더러 방석을 드려라 손짓하였다.
바깥에서는 봄날같지 않게 장대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서녘 하늘이 밤처럼 캄캄
하였다. 먼 곳
에서는 뇌성벽력도 은은히 울리고 있었다. 그 비를 헤치고 막 퇴청하려던 김장집이 고두하
고 왕의 부름
에 따라 편전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