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라 잘못 자리잡으신 도도한 기상이 깎여지지 않는 바라, 선비라는 하는 것은 목을 내놓고
간언함이 옳
다 배웠나이다."
"멀리서 본 바가 전부라 생각하지 말게나. 상감께서 보령 어리신 터로 용상에 올라 그릇된
면이 없다 말
못하고 실책 없다고도 말못하되, 벌써 십 여년. 이제는 나날이 눈 밝아지시고 영명함을 회복
하시어 진정
한 성군의 길을 걸어가심이네."
"진정한 성군이라. 허면 월성궁의 편액이 어찌하여 아직도 버젓이 걸려있는지요?"
"어린 날 마냥 외로우시어 잉첩의 요염에 잠시 홀리신 것일세. 모다 상감께서 그저 방탕하
시고 실책만
되풀이 하는 분이라 비난하지만 그가 전부는 아닐세. 열 한살 어린 보령으로 사직을 감당하
사, 이 정도
이기가 어디 쉬운 줄 아는가? 그분이 저지른 실덕은, 다만 그야말로 어린 날 실수임에랴. 석
전, 조심하
시게. 그대는 중전마마에 대한 충심으로 상감의 허물을 깨우치려 하였겠지만 그것이 두 분
께 꼭 좋은 일
은 아닐세. 나나 예판이 몰라 간언 아니 드리는 줄 아는가?"
대제학이 쯧쯧 혀를 찼다. 의기충천하여 감히 왕을 상대로 나서 한마디 똑 부러지게 간언을
드린 강두수
를 칭찬함이 반. 또 깊이 근심함이 반이었다.
"자네는 우리 늙은이들을 두고 입 없다 비웃을 테지만 곧게 찔러들어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
니란 말이지.
날카롭고 영명하신 분일세. 허나 오만하고 성품이 독선전이며 비틀려있어 아무리 바른 소리
이고 당신이
옳다 순응하시는 말씀이라도 대놓고 잘못하였다 하면 보란듯이 거꾸로 가고 비켜나시는 분
이라네. 하여
말씀을 드릴 참이면 말태를 부드러이 돌려 아뢰어야지. 이 일로 전하께서 하냥 자네를 꼬아
보시게 된
듯하니 참으로 내가 한숨만 나오네 그려."
"제가 심히 못마땅할 사 전하께서 그러하시면 스스로 저가 먼저 강학을 그만둘 것입니다."
"이 사람. 어찌 그리 생각이 짧으신가? 지금 내가 걱정하는 것은 중전마마란 말일세. 자네의
간언 때문
에 심기 상하신 터로 만약 전하께서 중전마마더러 강학 그만두라 하시면 어찌할 터인가? 우
리 가엾을
손 중전마마. 단하나 즐거움이 자네와 글공부하는 일인 줄은 더 잘 알 것이 아닌가? 하냥
내전에 갇혀
사시는 그 분이 바깥 세상을 전해 듣고 답답한 가운데 한줄기 바람을 쏘이는 일인데 그것을
못하신다 생
각하여 보시게. 딱하지 않는가?"
강두수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대제학이 찔러주자 아차 싶었다. 당장 반성하여 고개를 숙
였다.
"혈기에 눈이 어두워 이리저리 사정을 다 헤아리지 못 하였나이다. 제가 큰 실수를 한 듯
하옵니다."
"평상시 하던 양으로 할 것이면 당장 불벼락이 떨어지고 벼루가 면상에 날았을 것이야. 헌
데 꾹 참으시
고 끝까지 웃는 용안이시라, 꾹 참으시어 당장은 노염 아니 내신 터이네. 앞으로는 부대 조
심하여 주상
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게나. 중전마마를 생각하시란 말일세."
강두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한편 왕은 끝끝내 노염을 가라앉히지 못하여 씩씩대며 중궁전에 들었다. 그러나 왕비는 서
온돌에 없었
다. 가정당에 올라 수를 놓는다 아랫것들이 아뢰었다.
가정당의 지창(紙窓)을 열어놓았다. 소박한 낭자머리에 황금첩지 달고 봉잠 꽂은 중전마마,
금박물린
연초록색 당의 아래 진달래 붉은 치맛자락 곱게 펼치고 앉아 무릎에 수틀 올려놓고 수를 놓
는 모습이 내
다보였다. 가정당 석계(石階)를 올라가다 왕은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심란하고 짜증스럽고
우울했던
모든 것이 중전의 고운 자태를 보자마자 삽시간에 사라지는 듯 하였다.
인기척을 느낀 중전이 무엇인가 이상하여 고개를 들었다. 왕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깜짝 놀
라 몸을 일
으키어 그를 맞는 얼굴이 치맛자락처럼 발그레하였다. 왕은 허리를 굽혀 가까이 핀 두견화
한송이를 꺾
어들었다.
"짐이 중전 주려 가져왔지? 치맛자락 색하고 꼭 같지 무어야?"
두 손으로 건네주는 꽃을 받아드는 입술에 한포기 여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무리 니가 짐
을 깔보고 중
전더러 짐을 흡뜨이 보도록 속살거려도 이이는 짐의 비(妃)란 말이지. 왕은 방석을 권하는
중전의 옆얼
굴을 바라보며 킁하고 허공에 떠오른 강두수를 비웃었다.
"소반과 올리리까?"
"잠시 후에 내려가 수라하고 석강 들어가야 함이라. 그냥 두고 차나 한잔 주소."
맨숭하니 그냥 앉아있기가 면구하여 중전이 아랫것에게 소반과를 올려라 하명하였다. 왕은
손을 훼훼
저었다.
"실상 예로 온 것은 중전이 끓여준 차가 마시고 싶어 그러하였소이다. 곤전이 끓인 차의 향
기가 천하 일
품이니 어디서 짐이 이 향기를 다시 찾을까?"
칭찬이 드문 그이지만 오직 한 가지. 차를 끓여주는 것을 두고 언제나 행복하다 말해주는
왕이다. 쌀쌀
맞은 그가 드문 청을 하자 여린 중전의 작은 심장이 은근히 기쁨으로 두근거렸다. 다구를
준비하라 시켰
다. 돌아앉아 물이 끓어오르는 것을 기다려 알맞게 식혔다. 차 한잔을 정성껏 우려냈다. 지
어미인 그녀
가 지아비 전하께 해 드릴 수 있고 좋다 하시는 유일한 일. 왕은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내
미는 찻잔을 받
았다.
왕은 눈을 지긋이 감은 채 그 향기로움을 깊이 음미하였다. 적요한 침묵. 그러나 예전 마냥
불편하지 않
고 편안하고 다정한 여백의 공간이었다.
왕비는 옆으로 돌아앉아 다시 수틀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수를 놓기 시작하였다.
어느 사이, 자신도 모르게 왕은 찻잔을 든 채 멍하니 왕비가 작고 여린 손을 재게 놀려 수
틀을 메워가는
것을 정신없이 바라보기만 하였다. 아무리 아니 보려 하여도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는 것이
었다. 어린 안
해는 왕에게 있어 그렇게나 사무치고 그리운 사람이다.
감탄스럽고 곱다 여기지만 동시에 자신이 곁에 있는데도 수틀에만 골몰한 것이 약간은 섭섭
하고 화도
난다. 왕은 기어코 불퉁한 목청으로 한마디 지청구를 주고야 말았다.
"참 사람도... 짐이 곁에 있는데 그렇게 수만 놓을 것인가? 짐이 하릴없으니 실로 앉아있기
면구하구려."
당황하여 고개를 숙인 중전의 얼굴이 불고추 먹은 듯이 빨갛게 변하였다. 서둘러 수틀을 치
운다. 바느질
바구니를 치마귀 뒤로 숨기는 모양을 바라보며 왕은 쯧쯧 하였다.
"그만 하오. 잡아먹지 않을 것이오. 왜 그대는 항시 짐을 대함에 있어 그렇게 두려워만 하는
것이오? 짐
이 다시는 심술을 부리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소?"
"마... 망극하옵니다, 전하. 신첩이 시일이 촉박하여 이렇게나 결례를 저질렀나이다. 부대 너
그럽게 용서
하옵소서."
"무엇이오? 며칠이나 골몰하시는 일이라. 음. 이것 내훈(內訓) 아니오?"
"할마마마 진갑이 다음달이 아니옵니까? 하여 신첩이 직접 수놓아 하례물로 올려 드릴까나
하옵니다."
궐에 들어와 오직 한 분 어진 그 분의 비호로 살아오는 세월이다. 중전은 그 어진 할마마마
께 은혜를 반
드시 갚고 싶었던 것이다.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전의 어른 일이오. 이번 진갑 잔치는 중전께서 관장하여 처리하시구려. 짐도 내일 예조를
불러 말을
하겠거니와 할마마마께서 비를 신임하시는 고로 심중을 알아 오시오. 짐이 할마마마 진갑잔
치를 맞이하
여 당신 마음에 흡족한 선물을 하여 드리고 싶구려."
아이고. 의젓하시고 사리에 온당한 분부를 하심이 처음이로구나. 왕이 픽 웃었다.
"왜? 짐은 그런 것 하나 헤아릴 줄 모르는 이였던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신첩이 기쁘고 황감함이 한량없어 그렇사옵니다."
"허구헌 날 폭군 노릇만 한다고 짐 싫어한다며?"
"신첩이 언제?......"
살며시 눈흘기는 중전의 눈에 비로소 진심어린 미소가 담겨졌다.
밤이다. 중궁전 서온돌. 그냥 촛불 아래 전하께서는 서안 앞에 놓고 책 읽으시고 중전마마는
바느질을
하는데 서로 나누는 한마디 말씀도 없으신 터다.
허나 가끔 마주치기 눈길이 정겨웠다. 중전이 고개 숙이고 바느질에 골몰하는 것을 가만히
그저 바라보
신다. 무엇인가 이상하여 중전이 고개들면 눈이 마주치는 것이라. 서로 부끄러워 설풋 외면
하고 다시 서
로의 일에 골몰하였다. 다음 번에는 중전이 전하 서책 읽으시는 그 잘난 얼굴을 문득 넋을
잃고 바라보
시는구나. 실로 헌헌 장부이시고 아름다운 미장부이시니 어찌 저리 잘나셨을까?... 전하, 그
시선을 눈
치채시니 고개 드시는데 놀라 고개 숙이는 중전의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이 들었다. 한참동
안 조용하여
몰래 다시 수줍은 눈을 들었는데 아이고 창피하여라. 그때까지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전하
의 눈길을 다
시 만났다. 얽힌 채 움직이지 않는 눈빛이 수줍고도 연분홍빛이었다.
마침내 왕이 서책을 놓고 중전의 가까이 한무릎 다가왔다.
“무에 그리 하냥 수를 놓는 것이오? 이번은 내훈이 아닌걸? 무엇을 만들 참이오?”
“별 것이 아닙니다. 사친께 보내드릴 서책을 저가 스승님께 부탁하여 몇 권 구하였나이다.
싸서 보낼 보
자기에 수를 놓자 이리 합니다. 못난 솜씨이니 저리 가소서. 신첩이 부끄럽나이다.”
"중전의 침선이야 신기인 줄을 짐이 아는데 어찌 그리 겸손하오? 봅시다. 아, 한번 보자니
까!"
냉큼 왕이 중전의 무릎에 놓인 천을 채가려 했다. 뺏으려고 하는 왕과 뺏기지 않으려 하는
중전마마 잠
시 힘을 겨루는데 어찌 여인이 사나이를 이길 것이더냐? 작은 다툼이라, 중전과 전하 모처
럼 함께 웃으
시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깔깔거리는 중전의 웃음소리를 왕이 처음 들은 것이다.
마치 은종이 울리는 것처럼 맑고도 고운 웃음소리였다. 촛불에 어린 말간 볼이 복사빛이 되
었고 환하게
빛이 나는 작은 얼굴이 실로 곱고도 순수하였다. 비단천에는 부원군이 좋아하는 소나무와
학이 살아 움
직이고 있었다. 실로 영묘로운 침선이었다. 그저 들여다보며 감탄하시는 전하의 칭찬에 중전
마마 다시
웃으시니 잘랑거리는 웃음소리가 방문을 넘었다.
“웬 웃음소리니까? 마마님?”
“조용히 하여라! 두 분 마마께서 함께 계시느니라. 너도 잠시 기다렸다 들어가서 금침 펴
드려라. 두 분
방해하지 말고. 휴우- 교태전에서 두 분 마마 웃음소리가 난 것이 실로 처음이로다. 혼인하
신지 삼 년이
꽉 차고 난 후라. 두 분 마마의 정분이 돋는 것일지니, 실로 대례를 이날서 올려야 하였다.
..”
바깥에서 듣고있던 윤상궁이 한숨과 함께 탄식을 하였다.
그 옆에서 교활한 눈을 돌리고 선 계집이 선이라 하는 나인이다. 중궁전안에서 금침 펴고
개키며, 방소
제. 금침 간수하는 계집중 하나이다. 헌데 이것이 실은 희란마마가 중궁전에 박아둔 눈인 것
이다. 은근
히 방안 동정에 귀를 귀울이는 그년 표정이 어쩐지 표정이 묘하였다.
속으로 선이 고년이 깜짝 놀란 참이었다.
항시 중전을 잡기 고양이 쥐 몰 듯이 후려 잡으시거나 애먼 억지로 벅벅 심기 긁는 상감마
마 버릇이었
다. 툭하면 중전마마 머리통 후려박고 걷어차는 상감마마 하는 양을 지밀 나인인 저가 제일
잘 안다. 헌
데 어찌 이 밤에는 지금껏 그리 냉랭하고 멀던 두 분 마마 입에서 같이 하는 웃음소리가 들
리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