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두 개째, 시장하기도 하였거니와 중전이 보내준 터라 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진 터였다.
왕은 체면
도 없이 다시금 차 한모금을 마시고 진달래 화전을 집으며 윤상궁에게 싱긋 웃어 보인다.
"이는 필시 알뜰한 그 사람이 짐을 주려 일부러 장만한 것일 게야. 남아 있으면 밤에 중궁
전에 가서 또
달라 하여야겠다."
가만있었으면 될 것을.. 윤상궁은 주상께서 중전마마를 두고 칭찬을 하신 것이 너무 기쁘고
신기하여 그
만 아니 드려도 될 말을 올린 것이 사단의 시초였다.
"성상께서 즐거이 젓수시니 쇤네가 그저 황공하옵니다. 이 것은 중전마마께서 직접 부친 꽃
전이옵니다.
허니 정성을 듭신다 여기시옵소서."
"뭐라? 곤전께서 직접 꽃전을 부치셨단 말이냐? 거 참! 지존께서 험한 일을 어찌 다 하신
것이야?"
"오정에 왕대비전하께서 잠시 건너오셨기로, 꽃전이나 먹고지고 하시었나이다. 하여 중전마
마께서 중궁
전 아랫것들과 시를 공부하러 강학을 하시는 학사와 더불어 침향정까지 나가셨사옵니다. 할
마마마께 드
린다하여 직접 불을 앞에 두고 꽃을 따서 부치신 꽃전이올시다."
미소를 지은 채 달콤하고 향기로운 화전을 다시 하나 집어들던 왕이 갑자기 죽일 듯이 윤상
궁을 노려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삽시간에 웃음이 사라지고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용안에 퍼져나간다.
잔뜩 뻗친
칼 같은 미간에 서리던 것은 윤상궁조차 소름이 짝 끼칠 정도로 선연한 노여움이었다.
왕은 윤상궁의 말 중에서 중전이 학사와 더불어 산책을 나갔다가 그 꽃전을 부쳤다는 대목
에서 순간적
으로 격렬한 불쾌감을 느낀 것이다. 주빈은 왕대비전하였으며 줄줄이 아랫것들이 뒤따랐다
는 것은 염두
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하나. 왕 자신조차 놀랄 만큼 훤칠하고 잘난 그 사내와 더불어 중전이 웃음을 지으며
후원을 거닐
며 시를 짓는다고? 같잖게스리 지아비인 짐을 놓아두고서 외간 사내와 더불어 시간을 보낸
다 이 말이더
냐? 마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이다. 심산 청송처럼 고고하던 그 선비 놈과 중전
이 나란히 웃
으며 후원을 거니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격렬한 어떤 반발심 같은 것. 단순한 못마땅함보다 더
음침하고 내
밀하며 무거운 어떤 감정, 그 것의 이름을 왕은 아직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입귀를 비틀며 왕은 윤상궁을 노려보았다. 마치 그녀가 왕비라도 되는 듯이
그는 냅다 고
함질부터 시작하였다.
"무어라? 중전이 학사 놈과 후원을 거닐다가 부쳐먹은 꽃전이라? 흥, 글공부를 하라 학사를
보냈었더니
쓸 데 없이 그딴 신선 놀음질이나 하고 있다니. 같잖은 것! 매사 하는 짓이 그리도 어리석
고 방자한 것이
냐? 에잇, 짜증난다! 이딴 것, 짐은 아니 먹으련다!!
그리도 좋다 하여 방금까지도 즐겨 듭시던 것이다. 그러나 왕은 한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
을 냅다 윤상
궁을 향해 내던져버렸다.
"하는 짓이 어찌 그리도 매사 고약하고 멍청한가? 명색이 사직의 안주인이니 지켜야할 체통
이 있을 진
대, 감히 외간 사내와 더불어 글이나 외며 하릴없이 후원이나 거닌다고? 무에 그리 기막힌
것이 다 있는
가? 나가라! 너도 못마땅하니 당장 물러가라!"
억지 트집을 잡으셔도 유분수이지. 아니 왕대비전하를 뫼시고 잠시 금원으로 나가 즐거움을
찾으신 것
도 트집거리이더냐? 인제는 글 스승과 더불어 중전마마께서 시공부하는 것까지 노화를 내시
다니. 윤상
궁은 하도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않고 절을 한 다음 조용히 뒷걸음으로 물러나간다.
내쫓듯이 윤상궁을 내보내고는 왕은 오래도록 노여움을 씹듯이 질겅질겅 접시의 화전을 삼
켰다. 그래도
중전이 그를 위하여 보내준 것이라 하니 남 주기는 아까웠다. 그릇에 담긴 고운 분홍빛이
어젯밤 품에
안겼을 때 느껴진 중전의 고운 속살과 같다. 분노를 삼키듯이 어이없는 투기심을 지우듯이
왕은 계속하
여 화전을 목메이게 씹었다. 왕비의 고운 손가락을, 아름다운 미소를, 비단같이 보드라운 살
갗을 떠올린
다.
가슴 안으로 먹물처럼 까맣게 젖어드는 격렬한 감정의 파동. 이 꽃전을 부칠 때 그 학사놈
이 곁에 있었
을까? 아마도 짐에게는 드물게 지어주는 웃음을 그 학사 놈에게 하냥 지어주었겠지?
왕은 깊은 생각에 잠겨 벽만 바라보며 말이 없다. 아랫것들이 수건으로 어수를 닦아주는 것
도 아랑곳 않
고 허공만을 바라보는 왕의 눈빛은 칼날이었다.
-무어라, 감히 누구와 어쩌고 어째? 감히 학사 나부랑이 주제에 짐의 비를 두고 겁도 없이
친밀한 척을
해? 그이가 누구인데. 천하 위에서 군림하는 사직의 안주인이거늘 천한 백면서생 주제에 중
전을 두고
같이 산책을 하고 같이 웃음을 지어? 짐 앞에서는 한번도 지어주지 않으면서 그 놈 앞에서
는 웃는다고?
이 것들을 그냥...
자신도 모르게 왕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손아귀 속에서 분노처럼 애꿎은 은저분만 구겨
진다. 왕은 훌
쩍 일어섰다.
"내일 아침 입조하자마자 대제학을 들라 하라! 짐이 물을 것이 있다!."
그럴 리 없어. 왕은 주먹을 쥐고 중얼거렸다. 불길 같이 타오르는 투기심. 혹은 불안함. 아니
그보다도
더 큰 감정은 어떤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짐의 여인이다! 그이는 짐의 것이야.'
왕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감히 어떻게 그 하잘 것 없는 놈이 중전을 곁눈
질하겠는가.
왕비는 어떤 사내도 감히 곁눈으로도 볼 수 없는 지존의 정비이며 사직의 안주인이었다. 구
중심처에 몸
담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인(神人)과도 같을 진대,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는 것이겠지.
'짐 또한 너무 아깝고 소중하여 차마 건드릴 수조차 없다 귀이 여기는 사람이니라. 그런데
감히 제 놈이
비(妃)를 가까이 하여 신임을 얻고 귀애함을 받아? 웃기는 소리!'
왕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도 모르는 격한 충동이었다. 불안함이 밀물처럼 치미어
올랏다. 이
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이며 또 성급한 그리움이었다. 마치 어미가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하
고서야 안심하
여 노는 어린애처럼 그는 교태전에 틀림없이 계실 자신의 어린 지어미를 확인하여야 직성이
풀릴 것이
라 생각한 것이다.
'안돼!'
왕은 지긋이 어금니를 물며 발을 내밀었다. 내관이 태사혜를 신겨주는 것을 기다리며 그는
거뭇거뭇한
중궁전의 처마 끝을 건너다보았다. 왕의 입꼬리는 비틀어져 있었다.
'짐의 것이야. 저 계집은 짐의 것이라고! 어떤 놈도 못 보게 할 것이야. 어떤 놈에게도 보여
주지 않을 것
이야. 저 계집을 본 놈의 눈을 파내어 버리고 웃음지은 입을 짓뭉개버릴 것이다. 짐 아니면
안돼. 저 계
집을 가질 사람은 오직 짐이니까!'
아무리 그러지 말자 스스로를 다독여도 도무지 진정되지 않는 이상한 이 기분. 이성을 마비
시키는 격렬
한 질투. 혹은 가눌 수 없는 분노였다. 왕 스스로도 충격을 받을 만큼 잘났다 여긴 그 사내
와 중전이 마
주 앉아 있는 그 상상만으로도 왕은 견딜 수가 없다. 중전이 그를 배신하고 그 학사와 정분
이 난 것도 아
닌데 어찌 심란하고 짜증스럽고 분한 이 기분은 가시지 않는 것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쁜
그 감정을 가눌 수가 없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시커먼 불안감. 혹은 도도한
자존심으로
도 가릴 수 없는 투기심은 깊고 검었다.
어린 지어미를 홀로 외사랑하여 속을 끓이면서 왕에게는 어느새 새로이 생긴 병증이 있었
다. 그 것은 바
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내가 중전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곁눈질하는 것조차 싫다 생각하는
치열한 독점
욕이었다.
그러한 독점욕과 집착이 얼마나 강하였으면 심지어 사내라 할 수도 없는 내관들까지 중궁전
을 드나드는
이들은 모다 환갑을 넘긴 늙은이들뿐이었다. 왕에게 있어서 내관들은 사람이 아닌 편리한
도구에 불과
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런 내관들에게조차 젊은 놈들에게는 중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싫은 마당
에 하물며 훤칠하고 멋지며 당당한 미장부라. 왕 자신조차 한눈에 반할 만큼 뛰어나던 그
학사 놈에게는
더더욱이나 아니다.
"중궁에 들리라. 가자."
"예, 전하."
교자 위에서 흔들리며 왕은 다시금 이를 악문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대는 짐 아니면 절대로 그 웃음을 지어주면 안 돼!'
왕은 마치 자신 앞에 왕비가 있기라도 하는 듯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그늘 아래, 자신의 울
타리 안에 가
두어두고 보호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싶은 유일한 그 사람. 작고 여리고 어진 자신의 지어미
를 왕은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린 왕비는 왕에게 있어 작고 향기로운 꽃이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꼭꼭 감추어두
고 소중하게
자신의 뜨락에 가꿀 귀한 꽃 한 송이. 자신만이 어루만지고 향기를 맡고 그 여린 꽃잎을 헤
칠 수 있는 아
름다운 꽃 한 송이다.
또한 그녀는 고운 새이기도 하였다. 자신의 새장 안에 간신히 잡아 가두어둔 작은 새. 아직
은 길들이지
못하였되 그러나 언젠가는 길들이고야 말 것이라 여기는 작고 아름다운 새 한 마리이다. 자
신의 손안에
서만 지저귀고 날아올랐다 돌아올 고귀하고 작은 한 마리 새라 여긴다.
여리고 작고 투명한 그 여자. 천하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람. 오직 짐만이 바라보고
사랑하고
소유할 수 있는 짐의 여인.
아무 것도 모르는 왕비는 서안을 앞에 두고 글씨 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왕을 맞이
하였다. 차마
그대로 말씀을 전할 수 없어 상감마마께서 몹시도 기뻐하시더라 하는 말로 돌려 아뢴 윤상
궁 덕분에 아
직 중전은 삐뚤어지고 격하고 거친 왕의 투기심과 이상한 열등감을 조금도 알지 못하였다.
살포시 미소
지으며 왕을 맞이하였다. 꼬박꼬박 중궁에 들어오고 요즈음 들어 심술도 다소간 사라졌으며
말도 잘 들
으려 하는 것이 노력하겠다 약조한 자신의 말을 지키려 함이라. 요즈음 중전과 왕의 사이는
혼인한 후
가장 좋은 때라고 할 수 있었다.
"수라를 아니하신 듯 하옵니다. 중궁서 하실 양이면 올릴 것입니다."
"......주오. 시장하오."
아무 것도 모른 채 아랫것들에게 수라 차비를 시키고 이것저것 하명을 하는 중전의 옆얼굴
을 바라보며
왕은 단전에 뭉쳐진 채 도무지 풀리지 않던 커다란 숨을 천천히 토해냈다.
여기 이곳 짐 옆에, 수십 겹의 담 안에 틀림없이 계신 이 사람. 조만간 짐의 아기씨를 낳아
줄 것이며 평
생 짐 곁에서 해로할 짐의 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