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200)

시끄러운 날라리 소리가 행렬을 선도하였다. 화려한 군복을 차려 입고 손에 채와 병기를 갖

춘 호위 무장

들이 수백 명 앞장서고 그 뒤로 주상전하께서 타신 화려한 연이 다가온다. 그 뒤로 말을 탄 

상궁, 내관들

이 가득히 뒤따르며 줄줄이 육조 관속들이 함께 행렬을 이루었다. 지존의 용안을 감히 맞대

면할 수 없음

이라, 강두수는 다른 사람처럼 멀리 물러나서 처마 그늘 밑에  몸을 가리고 왕의 행렬이 지

나가기를 기다

렸다.   

   

한 계절에 한번씩 성균관으로 납시는 것은 왕의 오랜 버릇이었다. 

처음에는 어린 나이라 신하들이 시키는 대로하는 의례적인 행차였다. 하지만 보령이 높아지

시니 인재 

육성이 국운의 근본이다 하는 것을 깨달으시었다. 하여 왕은  성균관의 행차를 무척 좋아하

였다. 또한 바

른 말 잘하는 젊은 선비들을 만날 유일한 기회인지라 성균관에 납시시기만 하면 하루 종일 

학사들과 어

울려 지내시다가 이슥해서야 환궁을 하시곤 하였다. 

그 날도 아침 일찍 나가시어 학자들과 강학을 하시었다. 망극하게 성균관 학사들이 받는 상

으로 거칠다 

아니하시고 수라를 받으신다. 그리고 오후 내내 유생들과 학사들과  제강을 하는 모습을 흐

뭇하게 지켜

보시다가 늦게야 들어오시는 길이었다. 

상감마마께서 타신 연이 가까이 오자 강두수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흙바닥에 엎드려 고

개를 슥였

다. 호피 방석 위에 도도하게 앉아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왕은  그저 오만한 턱을 들고 정

면만 응시할 뿐

이다. 길가에 엎드린 어느 누구에게도 일별도 주지 않는다. 하물며 길바닥에 엎드린 선비 한

사람이 무에 

그리 대수일 것이냐 무심하게 왕의 행렬은 강두수를 스쳐 지나갔다. 

   

'한 마리 늠름한 대호(大虎)같으시구먼.' 

   

천천히 일어난 강두수는 저만치 지나가는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강두수 그가 왕의 용안을 이렇게 가까이 본 것은 벌써 두 번 째였다. 

왕을 처음 보았던 것은 벌써 십여 년 전. 그때 그가 제술 양원 양과를 장원급제하였을 적이

다. 관모에 꽃

을 꽂고 앞으로 나아가 어주를 한잔 하사받았을 때, 강두수에게 술을 한잔 내려준 그 분 왕

은 겨우 열 두

어 살 난 어린애였다. 

강두수의 그때 기억으로 소년 왕은 몹시도 하얀 얼굴과 총명한 눈동자를 가졌었다. 우뚝 솟

은 콧날이며 

칼 같이 뻗친 검미가 도도하였다. 어린 그분 왕은 강두수 그가 처음 보는 잘난  소년이었다. 

대국의 사신

들조차 별명을 지어 부르기 '단국의 반악'이라고 부른다더니 과연?  싶을 만큼 아름다운 용

모를 가진 선

동(仙童)이었다. 

어린 나이이되 저보다 많게는 몇 십여 살이나 많은 선비들 틈에서 조금도 기죽은 빛이 없었

다. 의젓하게 

의례를 진행하셨다.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긴 행사 동안 조금도 그 근엄한 태도를 흐트러지

지 않는 모습

으로 미루어보건대 천상 지존으로 태어나신 분이라 싶었다. 다만  몹시도 오만한 기상과 급

하고 고집이 

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옥에 티일 것 같구먼... 싶었을 뿐이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약관 스물이 넘으시사 연을 타고  지나치는 주상 전하의 옆모습은 그

때 어린 티를 

완전히 벗었다. 그때처럼 귀까지 뻗친 검미이며 옥 같이 하얀 용안은 변함이 없으시되, 거뭇

해지는 턱수

염이며 떡 벌어진 어깨가 늠름하였다. 누구라도 한번은 돌아보며  감탄할 만큼 훤칠하고 아

름다우며 잘

난 사내꼴이 완전히 자리잡힌 모습이시다.   

이제 장성한 사내로 자라나신 그 분 어린 왕은 관옥 같은 그 모습이 짝을 찾아보기  힘들만

큼 아름다우셨

다. 지존으로서도 사내로서도 기틀이 딱 자리잡혀 누가 대하여도 절로 승복하게 될 만큼 당

당하고 또 장

엄하시다 싶었다.     

   

'허나, 그때의 그 도도한 고집이며  오만한 기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시구먼.  허기는 뉘가 

있어 지존의 

허물을 가르치고 경계하여 고쳐줄 것이냐? 윗전의 노릇을 하실 대비전은 이미 오래 전에 비

워진 터이며 

왕대비전 한 분이 계시되 척이 지어져서 왕래가 끊긴 지 오래이니 말이야. 하물며 대군들께

서는 월성궁

의 이간질로 대궐문을 넘지 못하게 된 지 오래. 뻗치는 그 성질을 달래고 가르치실 분이 아

무도 없음이

라... 쯧쯧쯧.. 하는 수 없는 것이야. 천성대로 살아가시는 것이지.' 

   

강두수는 홀로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고약한 일이지만, 중궁전 강학을 담당하면서 지켜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제 멋대로 뻗치는 

왕의 방자한 

행동은 바깥에서 볼 때보다 더 장하였다. 월성궁의 요녀(妖女) 때문에 멀리하는 중전마마를 

대하시기 

거칠고 체모에 벗어날 정도로 무정하다 함은 상상보다 더하였다. 

'가엾을 손 우리 중전마마라. 저런 분을 지아비로 여기며 평생을 사모하여 바라보아야 한다

니. 지존이라 

허울만 좋으면 무엇할 것이며 호사광영을 누리면 무엇하나. 마음에 낙이 없고 허구헌 날 살

얼음판. 천하

에서 가장 귀한 분을 모셔다가 저리도 괄세하고 박대하시는 분이 무슨 성군이란 말인가? 수

신제가 치국

평천하라 하였거늘...' 

행렬이 거의 지나가자 강두수는 몸을 일으켜 천천히 발길을 재촉하였다. 

그런데 무슨 얄궂은 운명일까? 궐 문을 나서는 강두수는 꿈에도  모른다. 연을 타고 무심히 

지나치던 왕

이 문득 그를 보고는 유심히 눈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에 왕은 관복을 입은 사람들만이 드나드는 궐에 하얀 무명 도포를 입은 선비가 나타난 

것이라 의아

하였다. 신기하기도 하였다. 아니 보는 척 하며 곁눈질로 찬찬히 보았다. 또한 그 선비, 참으

로 잘난 사

내라! 옆구리에 책 보따리를 끼고 무명 도포에 헌 갓을 쓴  조촐한 모습이되 훤칠하고 사내

다운 모습이 

그야말로 낭중지추요 군계일학이 아닌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터로 왕은 가까이 있는 장내관을 손짓하여 불렀다. 

   

"너 보았느냐? 저이가 누구냐?" 

"뉘를 말씀이십니까? 전하?" 

"아, 행각 처마 밑에 고개 조아리고 있던 선비 말이다. 대체 뉘냐? 관복도 입지 않은 선비가 

사사로이 궐

을 드나들다니." 

   

장내관이 고개를 학처럼 빼 뒷눈질을 하였다. 종종걸음으로 연 가까이 다가와서 아뢰었다. 

"아, 마마. 보셨습니까? 아까 그 분은 중궁전 강학을  담당하는 성균관 진감인 줄 아옵니다. 

매일 이 시각

에 강학을 마치고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뭐라? 저 젊은 선비가 중궁전 강학을 담당하는 글스승이라고?" 

   

깜짝 놀란 기색이 왕의 용안에 어렸다. 심지어 용체를 내밀어 다시 한번 궐 문을 막 나서는 

강두수의 뒷

모습을 바라보기까지 하였다. 장내관을 바라보는 눈빛에 경악이 어려있었다. 

   

"참이더냐? 진정 저 선비가 비(妃)의 글스승이란 말이냐?" 

그렇다고 대답을 하던 장내관이 흠칫 할 정도였다. 대체 또 무슨 트집을 잡으시려고 이렇게 

몇 번이고 

하문하시는가 근심이 될 정도였다. 그렇게 왕의 목청에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 같은 것이 서

려 있었던 것

이다. 

내가 대답을 잘 하여야겠다 싶어 약간 긴장하며 장내관은 고개를 조아렸다. 

   

"예, 전하. 영상대감과 대제학께서 심히 어질고 학문이 높으며 인품이 뛰어나다 서로 다투어 

천거하신 

분이라 하옵니다. 소인이 듣잡기로도 같은  성균관 진감들이 스승이라 이리  칭하며 학문을 

배울 만큼 심

오한 학문을 갖춘 분이라 이구동성으로 칭송하시는 분이랍니다. 그리하여 가히 중궁전 강학

을 하실 만

하다 하여 중전마마께서 글스승으로 모신 터라 하였나이다." 

   

그러나 왕은 그 대답만으로도 성에 차지 않은 듯 하였다. 다시 캐물었다. 

   

"이제 겨우 과거 급제나 할만한 젊은 사내가 벌써 성균관 진감이라고? 헌데 짐은 왜 저이를 

처음 보는 

것인가? 짐이 종종 성균관으로 나가지 않는가 이 말이다?" 

"잘은 모르오되 저 분께서 대국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신 지라 얼마 되지 않는다  하옵니

다. 그래서 성

균관 진감으로 들어가신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전하께서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대제학 대감

에게 하문하옵심이 어떠하십니까?" 

"알았다! 너는 당장 대제학을 불러라." 

   

급한 성격답게 왕은 당장 대제학을 불러라 장내관에게 하명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용

체까지 내밀

어 뒤를 돌아보시었다. 이미 궐 문을  나간 사람이 보일 리도 없겠지만, 모퉁이를  돌아버린 

행렬이니 다

시 볼 수도 없을 것이지만 자꾸 궁금하여 뒤가 끌린 탓이었다.   

왕은 정말 놀랐다. 아니 놀라다 못해 소스라쳤다. 솔직히 중전에게 글 스승을 천거하여 보내

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였다. 그저 대제학이 인품이 훌륭한 이를 영상

대감과 의논

하여 천거하였나이다 하였기로 알았으니 중궁전으로 보내라 하고는 그 뒤는 잊어버리신  것

이다. 그런데 

중전의 글스승이라 하는 자가 왕 자신도 감탄하여 돌아볼 만큼 아름답고 헌칠한 사내일 줄

이야!   

   

'참으로 기가 막히는구나. 학문 높고 염직하며 인품이 높아 모든 중신들이 칭찬하여 천거한 

학사라 하여 

믿었거늘. 짐은 그저 오륙십 줄 넘은 늙은이라고 생각하였더니 말이야. 심산의 청송인양  고

고하고 학 같

은 소탈한 인품이 짐으로서도 첫눈에 반할 만큼 멋진 사내라. 저이가 중전의 스승이란 말이

더냐?' 

   

어쩐지 가슴 부근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구중심처 궁궐에 앉은 터로 중전이 시정의 일과는 인연을 끊고 살아가는 줄로만 알았다. 헌

데 실상은 그

도 모르는 사이에 바깥 세상을 만나고 있었다니... 왕  자신만 바라보며 살아간다 하였던 중

전이 왕 자신

을 뛰어넘을 정도로 멋진 헌헌장부를 글스승이라 하여 곁에 두고 매일 같이 만나고 있었다

니. 이런 빌어

먹을 일이 있나! 

우원전에 들어 막 의대를 갈아입는데 바깥에서 고변하는 소리가 들렸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중궁전에서 윤상궁이 잠시 알현키를 청하시나이다." 

윤상궁은 소반을 든 나인을 뒤에 딸리고 있었다.       

   

"전하, 곤고한 일정을 무사히 마치시고 환궁하심을 감축드리옵니다. 분주한 하루에  잠시 여

유를 두시라

고 중전마마께서 차를 보내셨나이다." 

   

중궁전 궁녀가 이고 온 소반에는 중전이 정성껏 끓인 차와 함께 뜻밖에도 화전접시가 놓여

있었다. 아래

가 비칠 정도로 말간 찰부꾸미 위에 진한 분홍색이 그대로 남은 두견화가 올려진 화전이 고

왔다. 왕은 

벙싯 웃으며 은저분을 들어 덥석 그 것부터 집어들었다. 

   

"두견화가 피는 철이로구나. 중전이 알뜰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짐이 며칠 전에 떠도는 말로 

화전 부쳐

주어 하였더니 이리 보내실 줄은 몰랐다." 

"망극하옵니다. 시절 음식이옵니다. 부대 입맛을 달래시옵소서." 

"참으로 곱게 부친 꽃지짐이로다. 향기를 먹는 것 같지  않느냐? 짐이 이 근래 입맛이 없었

는데 이를 맛

보니 절로 기운이 솟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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