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전하, 한마디 모르는 척 당나라 사신의 억장을 확 긁어내리었다. 저들이 씌운 수모를
고대로 갚
아주었다. 억울하고 분한들 저들이 어찌할 것이냐? 꿀 먹은 벙어리모양 고개만 조아릴 수밖
에 없었다.
왕이 턱을 쓰다듬었다. 실쭉 심술맞은 미소가 붉은 입술에 걸렸다. 이번에는 네 놈들 차례
라. 어디 한번
망신을 당하여 보렴?
"당국의 국왕께서 수수께끼 풀기가 작은 희락이라 하시니 짐도 재미삼아 동참을 하여드리고
싶구려. 짐
이 작은 수수께끼를 낼 것인즉 국왕께 보여드리시오. 물론 당국의 국왕께서도 짐처럼 삽시
간에 풀겠지
요?"
"대체 어떤 난제이시옵니까?"
"내년에 그대들이 짐을 찾아 예물을 바칠 적에 반드시 재로 만든 새끼줄로 상자를 묶어 오
시되, 살아있
지만 산 것이 아니며 죽어야 사는 것을 담아 오시오."
끙. 말문이 막힌 당국의 사신들 얼굴이 볼만하였다. 아니 재로 만든 새끼줄이라고? 불에 탄
재로 어찌
새끼줄을 꼰단 말인가? 게다가 산 것이되 산 것이 아니며 죽어야 사는 것이 대체 무엇이
냐? 내년에 그것
을 알아서 가져오지 못하면 이야말로 망신이라. 눈앞이 아뜩하고 기운이 떨어져 고개 떨구
고 물러날 도
리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젊은 상감마마. 당당하게 단국의 위신을 세웠다. 주상 당신의 영명함을 떨친 것
이었다.
그를 수모주고자 작정하였던 대국 사신들, 마치 꽁지 말은 개처럼 풀이 팍 죽고 기가 꺾이
니 마치 도망
이나 치듯이 궐 문을 나서 도성을 나섰다. 전하, 그 입술에 싱긋이 비웃음을 담고 용상에 앉
아 그들의 당
황한 모습을 팔짱을 끼고 지켜보실 뿐이었다.
"참으로 절묘하십니다. 중전마마. 어찌 그런 지혜로운 대답을 찾아내신 것입니까?"
막 중전의 학강이 끝난 참이었다. 글스승 강두수가 주섬주섬 서책을 챙겼다. 늘 그러한 대로
조촐한 다
담상이 사제지간에 올려졌다. 드옵시지요 하고 중전이 찻잔을 권하였다. 대국난제의 일의 전
말을 들은
터라 칭찬을 하는 스승 앞에서 중전마마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저가 풀어낸 것이 아니라니까요? 전하께서 찾아내신 것입니다. 저는 다만 전하께서 바른
대답을 찾으
시도록 들어만 주었을 따름입니다. 전하께서 나날이 학문 높아지시고 사리분별이 또렷하시
니 참으로 이
나라 홍복이옵니다."
"헛허. 그러하시지요."
이러는데 바깥에서 고변이 들었다.
"중전마마. 호조좌랑 들었나이다."
"모시어라."
문이 열리고 호조좌랑 하용지가 허리를 굽힌 채 들어왔다. 옥주렴을 사이에 두고 중전마마
에게 옆얼굴
을 보인 채 엎드려 절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날이 풀려가고 비가 곱게 오시니 올해 농사가 그만할 듯 합니다. 영감께서
는 강녕하신
지요?"
"신은 별일 없사옵니다, 중전마마. 그동안 옥체 만강하시옵니까? 항시 하던 대로 내탕금 일
로 들었나이
다."
"민망하옵니다. 말로만 중전이되 하는 일이 없는 이 사람. 거한 내탕금 받기가 날이 갈수록
면구하구려."
하용지가 내탕금 물목이 적힌 두루마리를 받쳐 올렸다. 중전은 윤상궁이 전해드리는 내탕금
물목을 의
례상 한번 들어 보이고는 옆에 앉은 김상궁에게 건네주었다. 중전마마에게 잘 보이려 상감
마마께서 중
궁전 내탕금을 두 배로 올렸다 자랑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물목 길이가 예전과는 달랐다.
"나가서 맞추어 보시게. 허고 은재는 들고 들어오너라."
중전마마의 하명에 따라 나인 두명이 낑낑거리며 산더미 같은 보따리 두개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하용지 앞에 놓았다.
"이번에는 중궁전 나인뿐 아니라 창희궁 할마마마부터 시작하여 아래로는 생각시들까정도
다 참여하여
의대가 다소간 넉넉히 만들어졌습니다. 좌랑께 부탁드리노니 항시 하던 대로 서소문통 나가
시어 한 벌
씩 딱한 사람들을 찾아 나누어주시구려."
"참으로 감읍할사! 이토록 아름다운 덕 앞에서 신이 더 이상 할말이 없음이라. 중전마마의
어진 덕은 그
야말로 하늘에 닿았다 할 것입니다."
감격한 하용지가 고개를 조아려 어린 중전마마의 어진 덕을 칭송하였다.
"중전마마 침선 솜씨가 참으로 신기이시니 쇤네들이 따라가기 힘이 드옵니다. 어진 덕성이
참으로 아름
다우시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따름입니다."
"아이고, 윤상궁은 별일 아닌 것을 괜한 말로 내 얼굴에 금칠 하지 말게. 면구하구먼."
처음에 중전마마께서 그 일을 시작하실 적서는 중궁전 아랫것들 모다 어찌 이런 일을 하실
까 의아해하
고 궁금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실로 좋은 일이었다. 밤잠 주무시지 않고 부지런히 지으신
의대를 몰
래 궐 바깥에 내어가는데 서소문 다리 아래서 가난한 노인들 수소문하여 한 벌씩 나누어주
시었다.
물론 중전마마께서 직접 나갈 수는 없으니 호조를 통하는 것이기는 하나 좋은 일을 하였다
싶은 그 기분
이 실로 상쾌하였다. 이제 중궁전 아랫것들은 모두다 이 의대 짓는 일을 이제서는 당연히
참여하는 것으
로 알고 있었다. 처음서는 몇 벌 아니 되던 의대가 날이면 날마다 늘어나 이제는 천벌이 예
사라. 운이 좋
아 서소문통 아래 가면은 새 의대를 공짜로 준다 하는 소문이 퍼지어 이맘때다 싶으면은 벌
써 가난한 노
인들이 줄을 며칠 전서부터 서있다 하였다.
중전도 궁금하니 가끔씩 중신을 불러 궐 안팎 사정 듣고도 싶은 터였다. 허나 워낙에 주상
께서 내외척
발호함을 경계하시고 중전마마를 사람으로 취급 아니 하시며 작은 일로도 퉁박주고 수모주
는 버릇이 있
었다. 하여 중전은 일부러 쓸데없는 오해를 아니 받는다하여 절대로 중궁전에 사람을 불러
들이지 아니
하였다.
다만 호조의 일이 철마다 중궁전 필요한 각종 물품이며 내탕금이며 사람쓰는 일을 담당하여
안팎으로
들고나며 그것을 나르는 일이었다. 호조좌랑이 드나드는 것은 그러려니 하고 넘기시니 오직
중전마마
대전 사정 듣자오시는 것이며 궐 바깥의 궁금한 일을 하문하시고 심부름시키는 이가 바로
호조좌랑 하
용지 한 분이다.
"내전의 아녀자가 무어라 간섭하기는 좀 그러합니다만, 그래, 당국의 사신들은 잘 떠났습니
까?"
"예, 마마. 어제 떠났습니다. 항시 국운을 믿고 당국의 사신들이 거만하게 거들먹거린다 하
였는데 주상
께서 이번에 단단히 뒤통수를 돌려박으신 터라, 앗 뜨거라 하며 꽁지말며 떠난 줄 아옵니
다."
중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용지가 고개를 조아려가며 대전에서 벌어진 일의 전말을 세세히
아뢰어 드
렸다.
"여하튼 이번 해 대국 사신들이 불만이 많았나이다. 역관 숙소까정도 이번 절기 지내면서
문루가 허물어
져 공사를 해야하니 허물어진 채로 그냥 있어 볼품이 없었으며 조정에일이 많다 핑께를 대
고 대접이 시
원찮다 말이 많이 났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난제를 풀지 못하였으면 큰 불만이라, 사단이 은
근히 크게
났을 것입니다."
"역관 숙소 문루가 허물어졌어요?"
"예 마마. 문루를 고치려 해도 수천 금이 들 것인데 도통 전하께서 윤허치 않으십니다. 그깐
놈들 한해에
두어 번 와서 지내는 곳을 수리한다 수천금을 쓰느냐 일갈하시고는 차라리 그 돈으로 아리
수에 다리나
놓아라 하시었나이다. 수리를 하기는 하여야 하는데 없는 돈에 살림을 살자니 저의 처지가
좀 그러합지
요. 게다가 금전도 금전이거니와 높은 곳의 공사라 사람이 다칠까봐 더 걱정이올시다. 사다
리를 설치하
자니 약하고 발판을 빙 둘러 다 만들자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지경이라 어찌해야할지 도통
요량이 아니
생깁니다 "
"그렇군요. 게다가 발판은 공사가 끝나면 다시 허물어야하니 낭비가 극심함이라. 영감께서
걱정이겠습
니다."
제 처지를 알아주고 동정해주는 중전마마 앞에서 하용지가 고개를 조아렸다.
"하여 감히 신이 중전마마께 말씀을 올리옵니다. 마마께서 영명한 지혜를 갖추었다 함을 이
리저리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혹여 이번 일에 작은 지혜를 빌려주실 수 있을련지요? 사내들이 야무지
지 못하여 도
통 요량이 없음이라. 감히 신이 중궁전 든 참에 마마께 여쭈옵니다."
"아이고, 내전의 아녀자가 알면 무엇을 알 것입니까? 대청에서 의논들을 하여보시지요. 사람
들 입이 많
아지면 지혜도 더 깊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말씀으로는 겸손하게 사양하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모양이다 정작
하용지가 나
가려 하는데 중전마마가 잠시만 하고 다시 그를 불러 앉혔다.
"경이 어리석다 말을 하시 않으시면 내가 말씀을 한번 드리렵니다."
"예 중전마마."
"먼저 경은 일주야 전후로 하여 장에 나가 도성의 장작단을 다 사 모으십시오."
"장작단을요?"
문루 공사하는데 웬 장작단을 사란 말인가?
강두수도 윤상궁도 하용지도 의아한 얼굴로 중전마마만을 바라보았다. 중전은 조용한 미소
를 머금고 설
명하였다.
"그 장작단이 문루만큼 높이 쌓일 것이면 그것으로 튼튼하고 넉넉한 발판을 쌓으십시오. 그
리고 사람들
이 그 위에서 올라가 기외 공사를 끝내면 될 것입니다. 일이 끝나면 다시 그 장작을 장터에
가져다가 파
십시오. 다소 눅은 값으로 정할 것이면 애초의 장작 값만은 못하여도 몇푼 안 들여 발판공
사를 끝낼 참
이니 괜찮으실 것입니다. 허고요, 제가 부탁드릴 일은..."
중전은 하용지를 바라보며 당부하였다.
"금세 춘궁기가 다가옵니다. 나라의 일을 할 때 가능하면 밥 굶는 기민들 중에 장정들을 뽑
아 공사를 맡
기시오. 허면 그들도 이익이오 나라에서도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셈이니 이익
이 아닐 것
입니까?"
어질고 영명하시었다. 알뜰하고 셈이 빠르며 또한 먼데 일까정 바라보시는 눈이라. 둘러앉은
모든 사람들이 다시 한번 중전마마에게 감탄하는 순간이었다. 이러저러 하여 소반과 받고
잠시 환담하고 일어서는 참이었다.
시간이 다른 때보다 늦어 글스승 강두수, 책보를 끼고 잰 걸음으로 궐을 나갔다. 헌데 공교
롭기도 하지.
하필이면 성균관 납시셨다가 환궁하시는 상감마마 거동과 마주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