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200)

어? 천지간에 너처럼 쌀쌀맞은 계집도 없을 것이다." 

"......신열로 끙끙 앓는 신첩더러 침수시중 들라하시는 분은 그럼 잘하신 것인가?"   

"하여 밤 내내 찬물 수건 갈아주고 탕제 마실 적에 단물 생강 접시 건네준 이는  그럼 누구

냐? 밤 내내 행

여 불편할까 일어났다 잠들었다 하면서 보아준 사람은 또 누구더냐? 짐이 아니고 딴 놈이더

냐?" 

모든 것이 다 귀찮고 짜증나고 하릴없어 외면하였다. 왕 너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상관 아

니 할란다 하

면서 찬바람 날린 것은 중전이되 사실, 밤 내내 곁에  붙어서는 아랫것들 다 물리치고 병시

중 들어준 것

은 왕이었다. 그 대목에서 입이 막힌 터라 중전은 입술만 꼭 깨물었다. 왕이 억센 팔로 휙하

니 중전의 작

은 몸을 자신 쪽으로 돌려 안았다.  머리타래 위에 턱을 얹고 주저리주저리 내뱉었다.  어찌 

그리 야속한

가, 사내 맘 따위는 도무지 몰라주고 보아주지 않아 애타는 심사를 반쯤 슬며시 들어보였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짐도 하여보까? 너. 짐더러 방탕하니 제멋대로 계집들 사이 날아

다닌다 비난

은 장하다만, 짐은 할말이 없는 줄 아니? 교태전의 정궁이라는 너가 손목도 잡지 못하게 하

고 다가가기

만 하면 자지러져서는 짐을 밀어내는데, 짐이 어쩌란 말이냐?  하물며 짐더러 눈 똑바로 뜨

고 다른 계집 

찾아가라 하는 지어미라. 이래놓고 무어? 야아야, 그러지 말아라? 짐더러 살길 찾아놓고 밀

어내라? 지

금 너가 하는 일은 부덕높은 어진 중전 처신이더냐?" 

"신첩이 언제 어진 중전이라 하였나이까? 매사 못나고 어리석은 폭비올시다." 

"허면 날마다 짐을 외소박 놓겠다는 말이냐?" 

"좋아라 하며 안겨드는 계집 많다면서요? 그리로 가시면 되지? 예전마냥 하시어요. 싫다 하

는 이 계집 

머리통 한번 쥐어박으시고 중궁전 기둥 걷어차고 나가셔요. 이젠 놀랍지도 않습니다." 

"지, 짐이...... 언제 기둥을 걷어찼다고?...... 그, 그것은 한번뿐이잖어!" 

지은 죄가 없다 말못하니 왕의 목청이 높아졌다가 다시 잦아졌다. 머리통 쥐어박은 것도 모

자라서 여린 

볼따귀까정 후려친 터라. 면구하고 염치가 없어 어둠 속에서  눈만 굴렸다. 어차피 나온 말, 

끝까지 한번 

가보자구나. 잘못되면 폐비되어 쫓겨나기밖에 더하겠어?  어차피 각오한 일. 중전은  나직한 

목청으로 고

춧가루 뿌리듯이 쏘아붙였다. 

"한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니, 그것이 바로 버릇이라 합니다." 

"그래서? 짐더러 지금 못된 버릇 가진 못난 사내다 하는 말이냐?" 

"매사 거동에 있어 점잖으시고 아랫것들의 귀감이 되시어야 할 분이  상감마마 아니십니까? 

헌데 신첩더

러 하시는 일을 보면 매사가 짐작되느니, 격한 성정 못 이기시고 조그마한 일에도 벌컥벌컥 

노화 내시고 

골 부리시고 앞뒤 가리지 않으신 채 격한 처분 내리심이라. 그리고 훗날 후회하시면 무엇합

니까?" 

"......비(妃)가 이렇게 경계를 하여 주면 되지 않니? 짐도  영 어리석은 터라 남의 말을 도통 

알아듣지 못

하는 이는 아닐진대, 입 봉하고 있지만 말고 짐더러 잘못하였다 하여라." 

"보령이 높아지시면 영명한 지혜와 덕성이 따라  높아짐이 당연할 것입니다. 오로지 지아비

만 바라보는 

지어미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여인이 마음주어 마냥 의지하고 믿고 은애하는 것에도 지아

비께서 보

여주시는 것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중전을 안은 왕의 팔에 힘이 풀렸다.  자존심이 몹시 상한 듯, 등을 보

이고 휙하니 

돌아누웠다. 이토록 협량(狹量)이었다. 아주 조그만  말도 저에게 못한다 아니다  하는 말을 

듣지 못하고, 

듣기 싫은 이야기는 외면만 하려한다. 중전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허구헌 날 쓴소리에 매사 못마땅함이라, 신첩에게  만정이 떨어졌을 것이니 알아서 처분하

시옵소서. 신

첩은 다만 이 말씀만 드리옵니다." 

"입에 단 소리는 몸을 망치고  귀에 쓴소리는 짐을 이롭게 하느니.  짐인들 영 천치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할 것 같으냐? 타고난 성정이 격하고 급한 터로, 애초에 짐은 왕이니 

꾹 놀러주어 

다스리는 이가 없음에랴. 구부러지고 못돼먹은 것만 넘치어서 이 모양이 되었다. 짐도  알고 

있으니 나 

못났다 너 잘났다 하는 잔소리 그만 하여라." 

왕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밉살스러운 듯이 중전을 쏘아보았다. 작은 어깨를 눌러잡고  으르

렁거렸다. 

"하여서? 그래서 너가 짐을 지아비로도 아니 여기고 은애 아니한다 그 말이니?" 

"언제 그러하였나이까? 지어미가 지아비를 사모하는 것에도  그 연유가 있음에랴, 전하께서 

그런 분이어

야 신첩이 믿고 의지하고 사모할 수 있다 한 말입니다." 

"짐이 성군(聖君)되고 믿음직한 사내되면은 너, 짐을 은애하고 사모하여 준다 그 말이잖어." 

"팔자이려니 하고 지아비이시니 전하를 마음에 담습니다만은, 하나 소원이라. 전하께서 아름

다운 성군

이 되시면 신첩 역시 보람찬 삶이라. 아니라 말못하겠나이다." 

"짐은 곧 죽어도 폭군인데 평생 가야 너는 짐을 사모 아니하겠다?" 

어린 날 꼬아만드는 타래과를 장히도  잡수셨나보다. 한마디만 하면 무조건  비비 꼬아듣는 

버릇이 다시 

나왔다. 중전은 침착하게 대꾸하였다. 말 아니하고 입 다물고 잘못하였다 한다 하여 이 사내

가 누그러지

고 좋이 듣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다. 말이나 하고 죽고지고. 그래야 여한이 없지. 

"스스로 허물을 내어 말하시면 그것이 어찌 허물이라 할 것입니까? 허물을 아시면 고치시면 

되는 것이

지요. 신첩은 당당하니 허물을 알고 고치련다 하는 사내를 은애하옵니다." 

"삼대뿌리를 고아 먹었니? 졸졸졸 말도 잘하는고나. 요것! 눈 똑바로 뜨고 짐더러 경계하는 

것이 기가 

차는구나. 훗날 너의 태에서 태어나는 원자는 실로 영명하고  대가 찰 것이다. 모후(母后)가 

이토록 바르

고 곧고 결기차니 그 가르침을 받는 아기가 어찌 어리석어지리?"     

         

어이없어 왕은 흐흐거렸다. 아니 감탄하여 흐뭇하게 웃었다. 그 앞에서 너 잘못하였다, 앞으

로는 잘하여

라 쏘아붙인 인간은 중전이 처음이라. 당하고 나니 아프지만 어쩐지 속이 시원하였다.  긁은 

대바늘로 가

렵게 쑤셔대던 고름 주머니 하나를 툭 터뜨린 기분이 그러할까? 얄밉게 앙앙대는 지어미 입

을 막는 수

는 딱 한가지. 에라 모르겠다. 귀여워서  죽겠는데 나중 일은 나중에 하잔  이 말이다. 냅다 

달큼한 즙이 

흐를 것 같은 앵도를 따 물었다. 

"아이고, 신첩을 아니 건드리신면서요?" 

"옷고름 아니 푼다 하였지 요것 아니 먹는다는 말은 아니 하였다? 흥."     

   

볼을 마주 대인 채 음흉하게 웃는 왕을 올려다보며 중전이  기가 차서 웃었다. 어이없어 웃

은 그 웃음 하

나로도 용기가 솟았다. 화해를 한 것이다. 저이가 나를  용서한 게야 싶었다. 손가락으로 야

들한 볼을 건

드리며 상감마마, 난생 처음으로 중전마마더러 잘못하였다 빌었다. 

"짐이 다 잘못하였으니 중전이 한번만 더 짐을 보아주란 말이야. 앞으로 잘하여  볼 것이다. 

성군되고 바

른 성정 가지려 노력하겠으니 게는 짐 옆에서 요런 잔소리를  하여 달란 말이야. 항시 중전 

말은 잘 들으

려 할 것이니 짐을 경계하여 달란 말이야." 

부부지간 칼로 물 베기. 이러고 저러고 하여 끝장내자, 갈라서자 하였던 상감마마와  중전마

마. 그 놈의 

미운 정 덕분에 또 한번 더 첩첩하게 묶여지고 말았것다?     

"헌데 말이지, 당국 난제 요것은 다 풀었지만 말이야.  중전. 짐이 그 사신놈들 머리 꼭대기

에 앉아 혼구

멍을 좀 내고 싶고나. 그들이 돌아갈 적에 짐도 당국  국왕에게 난제 하나를 보내려고 하거

든. 그 놈들이 

새파랗게 질릴 난제 하나 만들어보소." 

헝클어진 금침 안. 굼실굼실 용이 하늘을 날 듯이, 인동덩굴이 나무를 휘감듯이 구름과 바람

이 얽혀 녹

신하게 비(雨)로 내렸다. 땀이 밴 날가슴 안에  어린 지어미 향기로운 몸을 꽃송이 안 듯이 

담쑥 감싸안

은 상감마마. 꿀단지 차고앉은 곰마냥 느긋하고 행복하였다. 

중전이 상감마마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종알종알, 이러고 저러고. 요렇게 조렇게 하옵

소서, 음음

음. 그리하란 말이지? 옳타구나, 절묘하오. 흣흐흐. 그 놈들 이제 다 죽었다! 어디 한번 두고 

보자구

나!             

   

대국 사신들이 도성을 떠나는 날이 돌아왔다. 전하께서 당 국왕의 난제에 대한 하답을 하리

라 큰소리 탕

탕치며 약조를 하신 날이다. 

떠나기 앞서 실룩이는 볼에 심술통이 덕지덕지 붙은 사신 우두머리가 거만하게  배웅의식이 

벌어지는 대

청으로 나왔다. 그들 또한 머리를 싸쥐고 생각을 짜내어 보았으되 도무지 답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다

소간 풀이 죽은 터였다. 허면 어디 잘난 척 큰소리를 친 단국의 국왕이 얼마나 절묘한 하답

을 하는지 두

고 보자구나 그런 얼굴이었다. 

곤룡포에 익선관으로 성장하신 전하, 용상에 앉아 사신의 우두머리를 바라보았다.  여유만만

한 미소가 

용안에 스며있었다. 

"짐이 약조한 터로 사신께서 도성을 떠나기 전 난제의  하답을 하리라 하였소이다. 짐이 말

하기를 그대들

에게도 기회를 준다 하였는데 허면은 그대들은 그 하답을 찾았소?" 

약은 오르되 할말이 없었다. 우두머리는 고개를 조아렸다. 

"도모지 그 하답을 찾을 수 없는 고로 신등은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나이다. 영명하신 터로 

단국의 전하

께서 신의 안전(眼前)을 넓혀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실로 쉬운 문제가 아니오? 사신께서 너무 어렵게 생각을  하신 듯 하오. 모른다 하니 허면

은 짐이 대답

을 하리다! 먼저, 내년에 우리 단국에서는 당국에 부채를 많이  보낼 것이오. 대국서 바람을 

보내라 하는

데 바람을 보냄은 있을 수 없는  일. 그 말은 필시 달리 돌려친  말이 아닐 것인가? 바람을 

일으키는 물건

을 보내라 그 말인 듯 하오. 아마 우리 단국의 부채가 아름답고 유명하다 하니 국왕께서 대

놓고 요구하

기는 체통에 어긋나시니 그리 말씀하심이라 사료되오. 가서 아뢰시오. 짐은 내년엔 국왕께서 

흡족하실 

만큼 부채를 예물로 보내드릴 것이오!" 

사신의 입이 쩍 벌어졌다. 대전에 모인 중신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의기양양, 상감마마. 스윽 

노려보았

다. 어떠냐? 이놈들아? 코가 납작하여졌겠지? 

   

"허어- 바람을 보내라 하는 그 말이 부채를 보내라 하는 말이었다? 실로 사리에 온당한 말

씀이니 절묘하

옵니다. 허면은 다른 난제의 하답을 주시옵소서." 

"그는 더 쉬운 터요. 항시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며 무거운 것은 가라앉고 가벼운 

것은 뜨는 것

이 이치가 아니겠소? 원래 나무는 가지 쪽이 가볍고 뿌리 쪽이 무거운 것인데 물에 나무토

막을 띄워서 

가라앉는 쪽이 뿌리이며 뜨는 쪽이 가지 쪽이오."   

일순간 대전에는 정적이 흘렀다. 젊은 왕의 말이 너무 절묘하고  이치에 맞는 터로 대국 사

신들뿐만 아니

라 대전에 모인 중신들 모다 감탄하여 할말을 잊은 것이다. 

"이토록 쉬운 문제인데 그 것을 난제라 하여 만리 길을 마다 않고 품고 오셨다던가?  그 나

라의 국운(國

運)을 볼작시면 그 나라 인재의 힘을 보라 하였는데 이깟 것도 난제라  여기는 당국 인재를 

알만 함이

라... 쯧쯧쯧... 짐이 실로 근심하건데 당국의 앞날이 걱정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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