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직하게 대답하는 목청에는 짙은 안개 같은 체념만이 어려있었다. 설사 내가 입벌려 힘들
다, 아프다 하
여도 어찌 하시렵니까? 아버님께서 도와주실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서럽게 항명하듯이 들
렸다. 기어코
김익현의 노안에 물기가 흘러 바닥을 적시었다.
"마마, 그저 신이 죄인이올시다."
".......어찌 아버님이 그러십니까? 불민한 여식의 잘못이올시다. 부덕하고 모자라 매사 성상의
눈에 못
마땅함 뿐이라, 휴우, 아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내일이면 기운차려 일어날 참입
니
다."
그러더니 힘겨워 하는 기색을 보인다. 다시 금침 안으로 누우시던 중전마마. 문득 희미한 눈
을 떠서 그
리운 사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벽만 바라보았다. 아무리 참자 하여도 주르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구나. 짓밟히다 못해 문드러진 속내야 차마 어찌 말할까? 가만가만 한마디가 서
러웠다.
"아버님. 저승에 가신 할머니가 보고 싶어요...... 저도 그리 가면 어머니와 할머니를 뵈올 수
있을까요?"
".......망극하옵니다. 마마. 사위스럽게 어찌 이미 돌아가신 분들 말씀을 하시는지요? 강잉히
이겨내십
시오. 아비가 있지 않사옵니까?"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꼬박 하루를 곁에 붙어앉아 시립하여 모시었는데도 중전마마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무 대답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끼니때가 되어 죽상이 올라와도 입에 대지를 못하였다. 분명 상감마마와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짐작만 할 뿐이었다. 낮수라 할 적에 중전마마께서 섬약하사 옥체 미령하시니 근심이시라,
상감마마께
서 보내셨소 하며 대전에서 붉은 보를 씌운 상이 들어왔다. 허나 돌아보지도 않고 내쳐 누
워만 계신다.
밤 수라 할 무렵인데 왕이 들었다 고변이 들어왔다. 서온돌로 듭시는 발소리가 들리자 간신
히 몸을 일으
키는데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멀거니 그것을 바
라보고 있는
아비 김익현의 마음이 어떠했을 지는 오직 천지신명이 아실 일이었다.
"부원군께서 듭시어 위로를 하신 터라 중전의 안색이 훨씬 낫구려. 역시 그리운 사람을 보
시니 기분이
좋으신게지요."
용포자락를 떨치고 앉으며 왕이 한마디하였다. 분명히 다정한 위로이고 병문안인데 김익현
이 듣기로 어
쩐지 조롱 같았고 비웃음 같았다. 중전마마께서 손도 대지 않은 죽상을 힐끗 바라보더니 그
저 고개를 숙
이고만 있는 중전을 돌아보았다.
"훗날 원자를 생산하셔야 할 옥체가 유약하여 짐이 만날 걱정이오. 많이 젓수셔야 자리에서
금세 일어나
지 않겠소? 짐이 보시는 곳에서 죽상을 받으시구려."
중전마마 앞에서는 항시 쌀쌀맞고 무정하다 말하던 왕의 목청이 부드럽고 상냥하였다. 헌데
왕이나 중
전이나 서로의 얼굴을 끝까지 바라보지도 않았다. 왕은 무연히 지창(紙窓) 쪽만 바라보고 있
었고, 중전
은 왕의 강권에 죽물을 넘기기는 하는데 은숟가락을 든 손이 하냥 달달 떨리고 있었다. 무
슨 일이 있기
는 있는 게다. 허나 어찌 지존더러 캐물을 수 있을 것인가? 김익현. 아무 말도 못하고 가슴
만 타는 것이
었다.
"밤이 깊어갑니다. 부원군께서는 나가시었다가 훗날 다시 들어오시구려. 다음에는 중전께서
친하던 일
가친척들을 모시고 오시오. 병환으로 인하여 옥체에 원기가 부족하고 마음이 괴로우시니 예
전 사가 생
각이 많이 나시는 듯 합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리 하겠나이다."
축객령이었다. 그나마 다시 들어 오라. 중전마마 마음이 기쁘게 일가친척들까정 불러오너라
하시었으니
그로 위로를 삼아야지. 허나 아비가 일어서서 절을 하는데 어린 따님 하얀 얼굴에 스민 까
만 불안과 두
려움의 빛을 발견하고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김익현이 차마 떼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길을 돌려 궐 문을 나설 즈음, 서온돌에 나인들이
두 분마마 침
수를 위하여 기수 배설을 하고 있었다. 윗방에 전의가 들어와 중전마마의 진맥을 마치고 탕
제를 소반에
받쳐 올렸다.
"어찌 하냐? 중전께서 나아지신 게냐?"
"조섭 잘하시고 탕제 두어번만 더 하시면 나으실 것입니다."
"흥, 제 마음이 심약하여 일어나기 싫은 터라 그러한 것 아니겠어?"
쓴 약물에 진저리를 치며 냉수대접을 찾아 마시는 중전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상감마마 불퉁
하게 혼자말
이었다. 허나 눈 속에 든 것은 깊은 근심이었다. 보면 볼 때마다 살이 내리고 시들어가는 꽃
송이처럼 기
운이 잦아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뼈만 남은 듯 가냘픈 손목을 꾹 눌러 잡고 침수를 하시
기는 하는데,
몇 번이고 깨어 이 사람이 꼭 짐 곁에 누워있나 확인을 하여야 안심이 되었다. 시신처럼 미
동 없이 누워
있는 작은 몸을 꼭 끌어 안아보면 생기대신 차디찬 슬픔만이 흘러나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왕도 울고
싶었다.
짐을 보오, 짐을 보아주오.
잘못하였소이다.
짐이 잘못하였으니 그만 벌을 주시오. 짐을 용서하여 주시오.
중궁전에 들 적마다 말을 하여야지. 꼭 말을 하여야지 하면서도 정작 말 못하는 답답한 심
사. 배배 꼬인
심술도 하루 이틀. 도통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허공만을 떠돌고 있는 듯한 사람을
바라보면 아뜩
하니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중전 옆에 누웠어도 마음은 심란하고 편안치 않지, 풀리지 않는 대국 난제의 문제에다 제대
로 돌아가는
게 없다 싶은 조하의 복잡한 사정까지, 그날 밤 왕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전전반측. 이리
돌아눕다 저
리 돌아눕다 결국 벌떡 일어나 앉고 말았다.
"어이하여 침수 이루지 못하십니까? 심중에 불편하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곁에 누운 지아비가 잠을 이루지 못하니 중전 역시 편안치 못하였다. 따라 일어나 앉으며
자그마한 목청
으로 물었다. 인지당에서의 그 소동이 있고 나서 꼭 닷새 만인데, 중전이 먼저 왕에게 말을
건 것은 그것
이 처음이었다. 차디차게 응어리 져서 얼음덩이가 된 마음이지만, 도도하고 괄괄한 왕이, 곧
죽어도 힘
들다 편안치 않다 말하지는 않는 강한 그가 근심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있으려니 그것도 신
경이 마냥 쓰
였던 것이다.
"어, 아니 주무신 것이오? 침수를 하오. 짐이 다소간 마음에 심란하여 그렇소이다. 곧 짐이
자리에 들 것
이니 먼저 주무시오."
"무엇이 그리 편안치 않으십니까? 말씀을 하여 보십시오. 신첩이 어리석은 여인네이되, 들어
는 드릴 수
있습니다. 나누면 짐이 반이라 하였습니다."
"......짐이 다소간 곤란한 일이 부딪친 듯 하여 그렇소이다."
중전이 바쳐드린 자리끼 대접을 비우고 왕이 책상다리를 한 채 앉았다. 중전도 이부자리를
걷고 마주 앉
았다.
"음. 중전이 영명하시고 지혜가 뛰어나다 이리 생각하여서 하는 말인데 말이지. 짐더러 어리
석다 아니하
면 말을 하께."
"말씀하여 보십시오. 감히 뉘가 성상더러 어리석다 할 것입니까?"
"......허구헌 날 똑같은 잘못만 저지르는 짐이니 어리석다 하는 게지. 만날 중전을 상대로 맘
은 그러하지
아니한데, 고함질만 벅벅 하고 꼭 나중에 후회할 일만 골라서 하니 그런 게지. 음음음. 짐
이...... 음음음.
반성을 하였으니....... 음음 이젠 중전도 짐을 좀 용서하소?"
어둠 속에 벌개진 왕의 안색이 보이지 않았다. 허나 목청에 자꾸 헛기침이 돋고 흠흠거리는
것이 민망하
고 중전더러 대하기 부끄럽다 하는 뜻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잘못하였다 말씀은 아니
하시는 분이
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중전더러 용서하라 하니 어린 중전마마, 처음에는 귀가 잘못되어 잘
못 들었고나
싶었다. 병 주고 약 줌이냐. 언제는 죽이니 살리니, 별의별 희롱에 견디기 힘든 수모를 주시
고 사람을 살
지도 못하게 만들어놓더니 이제 와서 당신이 잘못하였다 용서해달라? 말 한마디로 당신 잘
못 가리려고
들며 미친 광증 덮어보려 하지만 어림도 없으십니다?
중전의 오기서린 목청이 서리발처럼 쌀쌀하였다.
"신첩이 감히 무어관대 성상더러 용서하고 말고 할 것입니까? 신첩은 벌써 잊었습니다."
"흥, 잊기는? 아직도 짐에 대한 원망이 사무쳤구먼?"
"모진 소리 좋아할 이가 누가 있으니까? 부당하니 당한 대접, 하루밤새 잊는 어진 덕성이
신첩은 다소
부족하옵니다."
"어진 중전이라며? 지아비 허물을 지어미가 아니 가려주면 대체 누가 가려준다니? 흥, 만고
에도 없는 일
들이라, 무어라? 너는 그럼 잘한 줄 아니? 지아비더러 잉첩 찾아가라 하는 안해가 도대체
이 천지간에
어디 있노? 그런 소리들은 사내가 얼씨구나 좋다 할 줄 아니?"
말을 하다 보니 다시 돋는 원망과 열불이라, 왕이 발을 내밀어 중전 베개를 툭 걷어찼다.
저 저 못된 버릇, 성질머리 하고는.....
중전마마,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기화로 눈을 오끔하니 뜨고 있는 대로 입을 삐죽
이고 눈을 흘
겨주었다. 말로만 잘못하였다 반성한다 하면 무엇하니? 무에 달라진 것이 있을까? 제 멋대
로 역정내고
제멋대로 풀어지고 제멋대로 삐치어대는 이 철없는 주상아. 내 이미 마음 접고 이 궐 쫓겨
나갈 생각하였
으니 어디 한번 붙어보자. 내 이 평생 처음이되 마지막으로 앙탈이나 대차게 하고 나갈련다.
"폐하여 목을 베신다면서 어찌 대처분이 없으신고? 신첩은 이 기회에 딱 폐서인 될 참이여
요. 희망도 없
고 앞길도 없으니 말씀하신 대로 대처분 하여 주시어요."
"흥, 이것 보아? 인제 너가 감춰둔 속내 낱낱이 드러나는구나. 중전 자리가 네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인 줄
아니? 방자하게 폐비시켜 달라 입질하게?"
"신첩이 먼저 하였나? 성상의 입으로 먼저 확언 하셨으니 명에 따르는 것이지요."
"부부지간 싸움은 칼로 물베기라 하는데, 너는 어찌 그리 모질어서 마냥 꿍쳐두고 꼬아서
짐을 들들 볶
고 괴롭히는 것이니? 짐이 다소간 격하여 천지 분간 못하고 헛소리 한 것이니 잊어버릴 일
이지. 흥."
"잊을 게 따로 있고 덮을 게 따로 있지. 아무리 참자 하는 여인네 덕성이 장하다 하여도 이
리는 못사니
쫓아내어 주시어요. 신첩은 딱 그리 알고 패물 따 싸놓았고 용잠 빼었으니 나머지는 성상이
알아서 할
일이지요."
중전의 야무진 반격에 왕이 씩씩거리며 휙 고개를 돌렸다. 있는대로 골을 내며 중전을 노려
보다가 푸후!
하고 격한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