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 이것
난리가 났구나.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다 하면서 심지어 중신들이 허연 수염을 떨면서 가
내(家內)의
어린 아들에게까지 물어보고 다니는 일이 벌어졌지만 지금껏 아무도 풀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용지의 하소연을 들은 강두수 역시 난감하였다. 기대에 찬 눈빛을 한 그 앞에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 역시도 학문 높고 지혜롭다 말을 들었지만 아니 바람을 공물로 보내라니. 어떻게 형체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바람을 가두어 공물로 보낸단 말인가?
"소신도 깊이 생각하여야 할 참입니다. 집으로 돌아가 곰곰이 생각을 하여보겠습니다."
이러는데 대전의 장내관이 보따리를 들고 중궁전으로 들어오다가 미소를 머금고 읍을 하였
다.
"학사께서 강학을 끝내시고 돌아가시는 봅니다. 수고하시었습니다."
"중전마마께서 옥체 미령하시어 옥안도 뵙지 못하고 문 앞에서 돌아가는 중입니다."
"아, 참 그러하시지요. 옥체가 가냘프시니 찬바람에 고뿔기가 심하시다 하시는 말을 전해들
었나이다. 이
늙은 것 정신머리가 이러합니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대전마마께서 중전마마께서 미령하시어
근심하심
이라, 이리 약제를 보내시어 신이 들고 들어갑니다."
"허면은 볼일 보십시오. 신등은 나가보렵니다."
강두수와 하용지가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읍을 하였다. 장내관도 맞절을 하고 문을 나서는
그들을 배웅하
였다. 잠시 장내관은 두 사내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있었다. 그
의 눈은 한
동안 강두수에게로만 박혀 있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참으로 잘난 사내란 말이지. 아무리 학문 높고 인품 훌륭하다 하여도 젊으나 젊은 데다 보
기드문 미장
부라. 저런 이가 날마다 중궁전을 드나든다는 것을 상감마마께서 아시면...... 어쩐지 광풍이
불 것만 같
단 말이지.'
늙은 생강이 맵다 하였다. 노회한 장내관, 남들 보는 데서는 하냥 모진 구박에 북풍한설(北
風寒雪)이시
되, 속으로는 안절부절 말 그대로 어린 지어미를 금이야 옥이야 생각하는 외사랑에 빠진 상
감마마 속내
를 은근히 짐작하는 참이었다. 그만큼 깊은 독점욕과 아끼고 감추고 싶은 그 애달픈 마음도.
사내 아닌
내관들조차도 늙은 자신말고는 젊은이들은 중궁전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는 왕이 자신도
모르는 새,
중전 마마 앞에 저토록 어질고 잘나고 늠름한 글스승이 매일같이 찾아온다는 것을 안다면?
허구헌 날
고개 맞대고 글을 읽고 함께 시간을 보냄을 알게 된다면?
'흠. 주상께서도 한번 뒤통수를 후려맞음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아무리 그러하여도 그렇지
어진 중전마
마를 그리도 홀대하시고 괴롭히심이라니. 쯧쯧쯧. 뒤늦게 후회하시고 나중에서야 잘못하였소
하면 무엇
해?'
장내관은 손에 든 보따리를 내려다보며 쯧쯧 하였다.
'여하간에 철모르는 어린애시라니까. 덩치만 장성하신 터이지 도무지 가녀린 여심(女心)을
헤아리지 못
하심이라. 죽도록 괴롭혀놓고 나중에 잘하여 준다 난리이시면 무엇하나? 그리고 뭐라? 몸살
기라 고뿔이
드신 분더러 잉태를 잘하는 보약을 지어가라 하시면은 어찌하란 말이더냐?'
철딱서니 없는 주상 하는 일에 전부 다 못마땅한 장내관, 여하튼 하명을 받았으니 전갈은
해야지. 중궁
으로 들었다. 윤상궁이 그를 맞이하였다. 왕이 하는 짓이 밉살스럽다 싶으니 그를 모시는 장
내관까지도
미운 터다. 바라보는 눈길조차 쌀쌀맞았다. 저는 죄가 없는데, 상전의 허물이 바로 제 허물
이라. 장내관
은 어름어름 땀도 나지 않는 이마를 훔쳤다.
"흠흠흠. 윤상궁. 금일 유난히 고와 보이오."
"아니. 객쩍은 소리하시러 예로 오시었소?"
"헛허. 내가 무슨 말을 하였다고 눈날부터 세우고 그러시나? 중전마마 옥체는 좀 어떠하시
오?"
"흥. 몰라서 물으시오? 몸살 들고 고뿔 들어 신열이 끓어오르는 분이 가엾지도 않나? 그리
걱정이시면
당신 상전더러 중궁전 못 듭시게 하여 주구려. 허구헌 날 가엾은 분을 사람 구실도 못하게
짓밞아 놓고
무어라? 이리 약 보따리 들고 오면 누가 얼씨구나 좋다 할 것 같소?"
"참 윤상궁 자네도 대단하오. 외소박 대차게 맞는 상감 사정도 좀 알아주시오."
윤상궁이 눈을 있는 대로 흘기며 장내관 손에 든 보따리를 잡아채 갔다.
"중전마마 아직도 미령하시오. 제 정신이 아니올시다. 허니 금일 밤은 대전마마께서 제발 우
원전에서 침
수하시도록 장내관이 힘을 써보시오."
***********
장내관이 휘유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맘대로 하고 사시는 분의 성정을 몰라 저이가 나에
게 이런 말을
하는가? 어름어름 눈치를 살피면서도 대꾸하였다.
"그, 그야 말씀은 올려 보겠으되 상감께서 하시는 일인지라 감히 미천한 내가 어찌 막을 것
이오?"
"허면은 이 밤도 또 주상께서 중궁전 듭신다 하시었답니까?"
"내가 말씀 올렸지. 중전마마께서 미령하시고 옥체 허하시니 편안하게 쉬시옵도록 우원전에
서 침수하옵
시지요."
"헌데요?"
"대답 대신 전의부터 불러 약 보따리 챙겨라 합디다. 그게 상감마마 하답이라,. 이 밤도 중
궁전 가련다
돌려치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오? 참 내 기가 차서! 이게 무엇인지 아시오? 여인들이 잉
태 잘하게 돕
는 약재라 하오."
장내관 말을 들으며 기가 차서 윤상궁이 뒤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뭐라? 이 분이 참으로 불쌍한 지어미를 잡아죽이려 작정을 하였고나.
월성궁 계집이 아프다고 엄살 부리니 당장 조하 일도 작파하고 쪼르르 달려가서 중전마마
억장을 홀라
당 뒤집은 것도 못 참을 일이었다. 강새암 나서 눈 뒤집혀진 월성궁 계집에게 닦달을 당한
분함을 중전
마마께 푸신 것도 그러하지만, 어쩌다가 장난질 한번에 웃은 것이 무슨 죄라고 종아리까정
후려갈기고
대망신을 주었다. 그로도 모자란가? 기어코 인지당까지 쫓아가서 죽도록 괴롭힌 것으로도
심에 차지 않
았는지 폐비시켜 주마 무섭게 을렀다고 하였다.
마음 아프고 몸도 아프고 도무지 살아갈 기운조차 없는 중전마마. 혼몽한 얼굴로 시름시름
앓기 며칠.
저 때문에 몸 망가지고 마음 문드러진 이라면 염치가 있어야지. 예전에는 오셔라 하여도 고
개돌리지도
않더니 이제는 오지 마소서 하여도 줄기차게 찾아온다. 중전마마 옥체가 심히 미령하시니
동온돌서 침
수하시지요 하여도 묵묵부답. 서온돌에 기수 배설하라 하시고는 끝끝내 신열 돋아 끙끙 앓
는 중전마마
옆에서 당신은 코만 골며 잘도 주무시는고나.
이런 만고에 없는 변이 있나. 아무리 그러하여도 그렇지, 뭐라? 이제는 잉태 잘하는 보약까
지 먹여서 어
찌 하겠다고? 수저 들 힘도 없으신 분을 당신 맘대로 내려 눌러 겁간하시겠다는 뜻이냐?
윤상궁이 하도 어이없고 기가 막혀 핫! 하고 허공을 향해 웃음을 날렸다.
"참으로 기가 막히구먼요! 왕대비전께서조차 근심이라, 손수 연자죽까정 쑤어오신 터로 기운
없으시오
두어 저분 하시다 만 분더러 침수 시중 들라 보약을 먹여요? 참으로 주상께서 맨정신이시
오?"
대전의 저 분이 시정의 사내라 할 것이면 엎어놓고 물볼기라도 치련만은! 이를 득득 갈면서
도 그러나 상
전이니 어찌하랴? 막 윤상궁이 약 보따리를 안고 막 돌아서는 참이었다. 뜻밖에도 부원군이
오시었단
기별이 바깥에서 들어왔다. 얼굴이 근심걱정이 가득한 김익현이 잰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에구머니. 부원군대감께서 기별도 없이 듭시었나이까? 오르시옵소서."
"중전마마께서 옥체 미령하시다는데 어떠하신가? 내 지금 대전마마께서 기별하시어 급히 입
궐하라 하
명 받았네만, 정신이 하나도 없어 어찌 온 줄을 모른다네."
"그저 예사로운 고뿔입니다. 몸살 기운이 겹치신 듯 자리보전하신 것입니다. 너무 근심마옵
소서. 날도
쌀쌀한데 상감마마와 잠시 한데로 산보하신 연유인 듯 하옵니다. 일단 듭시지요."
이것이 어인 영문이냐? 상감께서 중전마마를 위하여 부원군을 입궐케 하여 주었단 말이었
다. 마음 속으
로 깜짝 놀란 터이지만 일단 윤상궁이 중전마마 자리 누우신 방문 앞에서 고변하였다.
"중전마마. 부원군대감께서 들었나이다."
"무어라? 아버님께서? 모시어라."
문안에서 가냘픈 중전의 목청이 새어나왔다. 금침 안에 누우신 터로 부원군께서 듭시자 억
지로 일어나
시는데 옥체 가리신 하얀 자리옷보다 더 해쓱한 얼굴이시다. 그래도 기별도 없이 반가운 사
친을 뵈오니
반가우신 터라 입가에 보스스 꽃잎 같은 미소가 피었다.
"아버님. 날도 찬데 어찌 어려운 걸음을 하시었어요?"
"마마께서 미령하다 하는 기별을 받은 터라 이 늙은 아비가 정신이 하나도 없이 그저 굴러
들어왔나이
다. 상감마마께서 어찰을 보내신 터라 중전마마를 보옵고 하루 놀다 가시오 하셨기에 그저
염치도 없이
마마를 한번 더 뵈오련다 하면서 들어왔습니다. 그저 성덕에 황감할 따름이옵니다."
"아 예. 주상 전하께서 부러 서찰까정 보내시어 발길을 청해주시다니. 은덕이 넘치옵니다."
중전 역시 예상치 못한 일이었는지 하답하는 목청이 흔들렸다. 허나 여간 쇠약한 것이 아닌
지 몇 마디
말을 하는데도 힘겨운 티가 역력하였다. 띄엄띄엄 목청에 한숨이 섞였다. 그렇지 않아도 조
막만한 얼굴
이 그 새 반쪽이 되었다. 김익현, 가슴이 무너져 자신도 모르게 한 무릎 다가앉았다. 감히
따님의 옥수를
부여잡고 너 어찌 이러느냐? 오데가 아파서 이러느냐 묻는데 목청에 물기가 절로 돋았다.
"오데가 편찮으시어 이리 자리보전까정 하신 것입니까? 구중심처 귀인께서 옥체를 보존하시
어야지요.
이 늙은 아비 아무 일도 못하고 가슴만 꺼멓게 타옵니다."
"날이 풀린다 하였기로, 저가 경솔하게 몸조심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바람 좀 쏘이련다 하면
서 금원을
산보나갔다가 찬바람을 만난 듯 싶어요. 탕제를 먹고 가만히 누웠으니 곧 일어날 것입니다.
괜한 근심
마시어요."
"마마께서 편안치 아니하시면 이 아비, 만 배나 아프옵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어찌 모르겠습니까?"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직하게 대답하는 중전마마, 꼭 깨문 입술이 터질 듯이 아프다. 꺼멓게
딱지가 앉은
입술은 까칠하고 소금꽃이 피어있었다. 그리도 뵙고 싶은 사친을 앞에 두고도 도무지 맑은
눈에 영채가
돌지 않았다. 무작정 편을 들어주는 따뜻한 아비 앞에서조차 말로 하지 못하는 슬픔과 괴로
움이 엿보였
다. 이렇게 누군가를 마주하는 것조차 힘겹고 마냥 귀찮을 뿐이다 하는 기색이었다. 어린 중
전마마의 상
심과 슬픔을 앞에 두고 그렇지 않아도 바닥에 떨어진 김익현의 심장이 산산조각이 나서 깨
어졌다.
"마마. 말씀을 하여 보십시오. 신이 보기에 심중에 사무치게 맺힌 무엇이 있는 듯 하옵니다.
자리보전하
고 누우실 만큼 심화가 돋으셨나이다. 무슨 일이 있었나이까?"
"다 부질없는 듯 하옵니다. 아버님. 말을 하자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며, 또 말을 한다
하여도 달라
질 것이 없음이라.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