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이 천냥으로 무명필을 산다 할 지면 얼마나 살 수 있소?"
"원하시는 대로 넉넉히 살 것입니다. 헌데 어찌하여 그리 많은 무명이 필요하신지요? 중궁
전서 피륙이
필요하면은 창고에 있으니 분부하시면은 내다 드리겠나이다."
"그것이 아니라... 이 중전이 속으로 다소간 요량한 것이 있음입니다. 이 중전이 가난한 집안
서 살다 들
어온 이라 저 마음대로 써라 하시며 몇 만냥 떼어주시는데 너무 엄청나고 쓸데가 없답니다.
그래서 몰래
속으로 생각한 일을 하고 싶니이다. 삼천 냥 내어드릴 것이니 좌랑 영감께서 육의전 나가시
어 이 돈으로
의대를 지을 무명필과 솜이며 사다 주시오. 이 중전 허물나지 않게 잘 살피어 몰래 들여 보
내주시면 더
좋겠나이다. 후에 그리고 좌랑 영감께 부탁을 할 일이 또 있을 것이니 제발 싫다 말으시고
가납하여 주
십시오."
중전마마의 분부이니 그대로 행하여야지 무슨 되물음이 있을 것인가? 부탁하신 대로 무명
삼백여 필과
솜뭉치며 사서 중궁전 들여보내고 잊어버렸다. 구월 초가 되어서였다. 중전마마께서 그를 부
르셨다. 나
인이 커다란 보따리 세 개를 내놓았다. 모두다 솜옷들이었다.
"밤낮으로 앉아서 지어 보았습니다."
"마마, 대체 이것들 다 무엇입니까?"
"이 중전이 사가 있을 적에 침선이 다소간 자랑이더니 중궁전 나인들과 같이 힘을 합한 고
로, 사다주신
무명필로 의대를 하였소. 각각 대. 중. 소로 나누어 백 벌씩이라. 영감께서 이것을 가지고 나
가셔서 겨울
돌아오는데 솜옷 한 벌도 못 얻어 입는 가난한 노인네들 찾아 한 벌씩 나누어주시구려. 이
중전 소원이
어려운 백성들에게 다소간 도움이 되자 함이오. 해마다 사시사철 이 일을 할 작정입니다. 좌
랑 영감께서
잘 살피어 부대 어려운 백성들에게 조그만 기쁨이라도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오. 허고요, 반
드시 이 의대
는 저가 아니라 주상 전하께서 몰래 내리시는 것으로 하여 줍시오. 정사 보시는 주상전하께
서 어질다 소
문나야 하명의 위엄이 설 것이며 백성들이 감격하여 이르기를 전하야말로 참된 어버이시다
이리 칭송하
지 않겠나이까? 이 중전 뜻을 잘 헤아리사 부대 들어주시오. 또 하나 부탁하기 절대로 이
중전이 이리
하였다 하는 것을 전하께서 아시면 아니 됩니다! 이 중전 매사가 못마땅하고 싫다 하시는
주상 전하이신
지라 이것을 알면은 필시 쓸데없는 일을 한다 노화내시고 다시는 못하게 할까봐 그러합니
다, 꼭 비밀을
지켜 주십시오."
그토록 어질고 따뜻하시었다. 중전마마 그 일을 하시기를 벌써 삼 년, 하용지만은 주상께서
중전마마를
애꿎이 수모주시고 조롱한다 소문들을 때마다 불끈 치밀어 분심을 참기 어려웠다. 이토록
곱고 어질며
덕성 높으시어 전하의 낯을 세워주시는 분이 오직 중전마마 한 분이시거늘 어찌 이토록 눈
이 어두우십
니까?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사실은 오늘도 새 의대 다 지었다고 가져 내가라 하시는 명이 살그머니 왔다. 하용지, 그 일
끝나고서 재
동 쓸쓸한 부원군 댁에나 가서 술 한잔 줍시오, 하고 괜히 주정을 할 작정이었다.
"어디 그것뿐인가? 내탕금 알뜰히 아끼시어 혜민국이며 구휼원 내리시고 남으면 모두다 백
성 피 같은
조세라 하시며 다시금 호조에 반환하신다네. 윗전마마를 여러분 뫼시었지만 이런 분은 내
평생 처음이
네."
"참으로 아름다우신 분이지요. 하늘에서 내린 생보살입니다."
"암만. 주상전하께서는 허구헌 날 중전 마마가 어리어서 어리석고 촌 것이라 아무 것도 모
른다 하면서
나에게 중궁전 내탕금 허투이 쓰는 것을 잘 살펴보라 하시었지만 아무리 트집을 잡자하여도
트집 잡을
데가 없다네. 오히려 그 알뜰하고 규모있는 쓰임을 내가 한 수 배울 참이라. 심지어 지난 여
름엔 어떠한
줄 아는가? 중궁전 미곡 쌓은 데서 비 새고 쥐가 파먹어 못쓰게 된 쌀가마가 제법 되는 것
인데 그것을
항시 내다 버리었거든. 그는 아무 흠이 아니라. 헌데 그것까정도 찰진 풀로 쑤어 내다 팔아
라 하시더니
그 돈을 가지고 무악재 넘어가는 돌다리 부서진 데 보태오, 내어주신 분이 바로 우리 중전
마마시라네.
참으로 선녀가 따로 없고 알뜰하고 영리하시기 기가 막히니 주상전하께서 중전마마 한 분은
기가 막힌
분을 모신 터라네. 게서 사는 이들 전부 중전마마께서 다리 보수하여 주신 줄은 모르고 전
부다 전하의
성덕만을 칭송하고 산다네. 우리 중전마마께서 궐에 들어오시어 전하께서 얼마나 용안에 금
칠하시는 줄
은 꿈에도 모르실 것이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중전마마 칭찬칭찬을 하던 하용지가 아, 참! 하며 이리저리 주변을 둘
러보았다. 강
두수를 끌고 행각 구석배기로 데려갔다.
"내 하도 답답하여 말이네. 학문 높다 하는 강학사에게 한번 물어나 봄세. 영명한 지혜를 좀
빌려주시려
나?"
"그것이 무슨 말씀이입니까? 소신이 알아 듣게 전후사정을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하용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망스러운 듯이 거뭇한 기와를 인 대전 쪽을 노려보았다. 가
능하면 말썽
만 일으키는 잘난 그 주상전하 면상을 콱 한 대 패주기라도 하였으면 좋으련만.
"지금 조하가 난리가 났다네. 며칠 전에 들어온 당국 사신들이 전하께 난제를 가져왔어요.
괄괄하시고
유난히 도도하신 분이니 아시지도 못하는 난제를 보시옵고 당장 풀었다 앞에서 큰소리를 탕
탕 쳐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사신들이 떠나는 날 그 하답을 하여준다 얼버무리기는 하였는데 사신들이
도성을 떠
날 날이 이제 겨우 이레 남았다네. 그 사이에 난제를 풀어야 하는데 하루 내내 죄 없는 중
신들만 들들 볶
고 계신다네그려."
하용지가 한숨을 천만번이나 내쉬며 하소연을 하였다.
"그런데 중전마마를 왜 찾으십니까? 난제야 풀면 되는 것이고 조하에 학문 높고 지혜 깊은
분들이 어디
한 두분이십니까?"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푸는 이가 없음이라. 예전에 중전마마께서 간택을 받을 적에 여러
사람을 탄복
하게 하는 지혜를 보이심이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셈치고 여쭈어 보려 하였다네."
일의 전말을 그러하였다. 하용지가 차근차근 강두수에게 털어놓은 바로는 그러니까 사흘 전
이다.
금원 연지(蓮池)앞 영회루에서 항시 그러했듯이 사신들을 환영하는 연락이 크게 베풀어졌다.
당국사신들이 도성에 들어온 지 벌써 열흘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연회는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오색 채단 의대로 성장한 가희들의 춤과 노래가 곁들여지고
산해진미가
올려진 주반이 낭자하니 이처럼 장한 연락이 벌어진 것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도도하고 강골(强骨)이시니 젊은 상감마마. 그러나 거들먹거리는 당국 사신들을 앞에 두고
심중의 오기
와 불만이 부글부글 넘치고 있다함을 바라보는 중신들은 다 알았다. 그러나 겉의 용안은 웃
는 빛이었다.
십여 년이 넘게 하여보신 접대이니 사신에게 건네는 말씀은 정중하시고 은근히 그들의 기를
살려주는
척 하신다. 다정하게 낭자한 배반을 연하여 권하시는 용안이 웃음빛이었다.
하지만 마주앉은 상머리의 당국 사신들 기분 또한 단국의 상감마마처럼 겉으로 웃는 낯이되
그저 흔쾌
하냐? 그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단국의 왕이란 저 사내. 성품이 강하고 자존심이 도도하니 예전부터 저들 당국사신
들 앞에서 뻣
뻣하기가 통나무였다. 다만 영명하신 분이기에 짐이 나라를 위하여 너들 비위를 맞추어준다
참고는 있
되 은근히 저들을 눈 아래로 깔고 본다함은 눈치 빠른 사신들이 더 잘 알았다.
그런 전하의 강한 성질이 대국 사신들 입을 타고 거만한 당 국왕의 귀에 아니 흘러 들어갈
수가 없는 것
이었다. 어럽쇼? 연치도 어린놈이 저도 왕이라, 감히 짐을 대적하여 까불어? 헛웃음을 지으
며 벼르고 있
었던 것이리라.
어디 한 번 두고보자! 하고 벼르던 차라, 사신이 출발하기 전에 국왕이 사신들 우두머리를
불러놓고 묘
한 분부를 하였다. 두루마리 하나를 쥐어 주는데 단국의 왕을 만나면 이 두루마리를 주고
그 속에 든 난
제를 풀어라 하라 하였다.
- "단국의 왕이 나이는 연소하되 영명하고 대가 차서 조정을 이끌어 가는 그 솜씨가 제법
견고하다 하였
다. 또한 그 야심이 은근히 가당찮으니 국경선 근처 군사 조련하는 품이 심상찮으며 연해
구하기 군마
(軍馬)가 아니더냐? 게다가 국경선 근처에 천리장성인가 하는 것을 쌓아간다 하니 이는 필
시 우리 당국
의 뒷통수를 칠 심산이라. 이번에 가거든 짐이 주는 난제를 그에게 주어서 풀게 하여라. 만
약 그가 풀지
못하면 짐이 그것을 빌미로 그를 한번 망신 주리라! 터도 작고 별 볼일 없는 작은 나라 주
제에 제법 문물
이 융성하다 하여 심히 도도하고 건방진 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 것을 기회로 짐이
필시 단국왕 그
자의 기를 꺾어 버릴 것이다."
애초부터 왕을 망신주어라 이런 밀명을 받고 온 참이었다. 게다가 전하께서 저들을 박대하
고 몇 날 며칠
이나 좁으나 좁은 사은사 건물에 처박아 둔 것이며 알현을 허락지 않았다. 수모를 받았다
싶어서 사신들
열불은 끓을 때로 끓어올라 있었던 참이다. 게다가 겨우 잔치라고 베풀어는 주는데 마지못
해 상을 차린
다 하는 기색이 너무 역력하였다. 어디 두고보자 하는 오기와 악심이 아니 돋는 것이 오히
려 이상하지.
그런 터로 당국 사신들, 갈수록 더 도도해지고 잘난 척 하는 상감마마를 상대로 어디 한번
너를 반드시
망신을 주고야 말리라 작심한 터이니 이것 큰일이 났구나.
"단국의 전하께오서 소신들을 위하여 이렇게 큰 연락을 베풀어주시니 그 은혜에 심히 감읍
하오이다. 단
국과 아국이 땅은 멀되 그 우의가 선린하는 사이라, 말 그대로 부자지간이라 일컬어도 모자
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항시 아국의 국왕 전하께서도 단국의 전하를 생각하시기 마치 친아들처럼
생각하시는
뜻이 깊으신 것입니다."
돼지처럼 살이 찐 사신의 우두머리가 인사말이랍시고 하는 말이 그렇게 같잖았다. 그 말에
벌써 전하,
비위장이 뒤틀렸다.
말을 듣자하니 심히 가소롭구먼?
상감마마, 젊고 도도한 혈기에 비록 겉의 용안은 웃는 낯이시되 속으로 코방귀를 흥! 하고
치시는 참이
다.
'지금 우리 단국더러 제 나라와 부자(父子)지간이라고 하였더냐? 허면은 네 놈들은 우리 단
국을 제 나라
속국이라 생각하는 게다 이 말이냐? 게다가 짐더러 무어라? 네 놈 나라 국왕이 짐을 소자
(小子)로 여긴
다고? 그 말은 바로 짐더러 한갓 제후에 불과하다 그 말이니 말로는 듣기 좋아라 하되 은근
히 짐을 깔고
보는 참이라, 이 인간들을 언제고 망신주어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야 말리라!'
홀로 으드득 이를 갈았다. 젊은 왕은 그러나 술잔을 들어보이며 싱긋 웃었다.
"짐을 항시 보살펴주시는 당국의 전하의 은혜가 하늘을 닿았으니 짐이 이 술잔을 들어 북쪽
에 계신 상
(上)의 만수무강을 기원할 것이오!"
다음에는 입에 종기가 나더라도 이런 낯간지러운 인사는 아니 하리라! 왕은 속으로 다시금
이를 으드득
갈며 쓰디쓴 입맛을 가리려는 듯 그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