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200)

중전은 얼굴을 무릎에 묻은 채 석상처럼 앉아 왕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하든지  참아 

내리라고 다

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저 이 시각만 지나면 끝난다 그렇게만 다짐하며 바들바들 떨리는 마

음을 안간힘

을 다해 다잡는 것이다. 

절대로 고개를 들지 말자 결심한다.  억지 심술을 부리는 그의 얼굴을  다시 보게되면 왕비 

자신이 무슨 

말을 어찌 내뱉게 될 지 모른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제발 신첩을 버려두고 나가 주옵소서.' 

왕비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신첩이 그리 못마땅하고 미우실 양이면 예전처럼 머리통이라도 한 대 쥐어박으시고 돌아나

가 주옵소

서. 더 이상은 신첩이 마마를 상대로 인내할 수 없으니 어떤 불경을 저지를 줄  모르옵니다. 

이미 장히도 

신첩을 고약하다 하시고 미워하시고 계실 것이니 예전에 그러하셨듯이 신첩에게 발길질이나 

하시고 돌

아 가오소서.' 

그러나 그저 왕을 외면한 채 침묵하고만 있었던 것이 그의 격한 성미를 정통으로 건드린 것

이 분명하였

다. 왕이 격한 숨을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사납게 왕비의 머리타래를 잡아 자신 쪽으로 고개

를 돌리게 

하였다. 

“왜? 왜?" 

거친 숨소리가 아주 가까이 들렸다. 격한 눈 속에 타고 있는 빛이 무척이나 슬펐다.  중전의 

눈에 눈물이 

반쯤 어린 터라 생긴 착각일 것이다. 

'이 밤에 짐 꼴도 보기 싫다  이 말이더냐? 짐 같이 어리석고 모자라고  불측한 인간하고는 

눈길도 마주하

고 싶지 않다 그 말이냐? 허기는  명민하고 부덕높은 중전께서야 천상 선녀라 하시니 짐 같

이 멍청하고 

천지분간 못하는 폭군하고는 어울리지 않다  여기는 게지? 같잖고 고약한 계집!  저가 무엇 

그리 잘나서

… 짐을 보라 하였다!” 

왕이 벼락을 치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와들와들 떨며 겁에 질린 눈초리로 왕비는 보라 하시니 마지못해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용

기를 내어 왕

의 눈길에 자신의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중전은 등골을  타고 오르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

었다. 왕의 찢

어진 호목에는 시퍼런 불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못마땅함이나  오다가다 벌컥벌컥 

터뜨리던 버

릇 같은 노화하고는 아예 성질이 틀린 으스스한 분노, 혹은 자존심의 상처. 

왕의 눈에 담긴 그 시퍼런 불이 실상  어린 지어미에게서 버림을 받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

움, 혹은 홀로 

남겨진 외로움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였다는 것을 중전이 읽을 수만 있었다면 그 밤의 두 사

람 사이는 무

엇인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사내의 그 복잡한 마음을 알지 못하는 어린 소녀. 

그저 왕의 그 눈빛이 자신에게 억지 트집이나 잡고 괴롭히려고만 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뿐

이었다. 그래

서 뼈아프도록 서럽고 고통스럽고 분하였다. 왜 이 분은 이토록 나를 미워하고 나만을 못마

땅해할까?! 

그렇다면 차라리 아까 말씀대로 나를 폐하여 쫓아내면 될 것인데… 

이미 눈물이 찰랑거리는 커다란 눈을 노려보는 왕은 어금니를 꽉 물고 있었다. 터지기 일보 

직전인 격한 

분노를 억지로 참아내듯이… 

왕은 한 손으로 중전의 머리타래를 아프게 휘감고 또 한 손으로 소름끼칠 정도로 부드럽게 

중전의 볼을 

쓸어갔다. 

"그래. 이렇게 짐을 보는 게야. 짐을 향해 외면하지  말고 짐을 보아주는 게야. 너가 아무리 

잘난 척 하여 

보았자 너는 계집이야. 짐이 하자 하면 무엇이든  다 하여야하는 짐의 계집이라 이 말이다! 

감히 짐을 상

대로 제 고집이나 부리고 건방을 떨어대기에 짐이 그를 경계를 하였으면 반성을 하고 제 몸

가짐을 진중

히 가져야 하는 것이 중궁의 법도이거늘, 이 것은 못난 것이 같잖게 짐을 상대로 발딱 고개 

치켜들고 독

이나 부리고 한데서 저 잘났다 시위하며 짐더러 오라 가라 하였것다? 응, 그래. 너 참  잘났

구나?" 

나직하고 음산한 목청이 무서웠다. 단 한순간도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눈빛이 얼음보

다 싸늘하고 

날카로웠다. 

"천하 박색 촌 것을 짐이 한 순간 실수하여 지엄한 중궁에 앉혀두기 몇 해라, 너가 인제 눈

에 보이는 것

이 없어졌구나? 감히 짐을 상대로 건방이나 떨어대며 말대꾸나 꼬박꼬박 하면서 아주 짐의 

비윗장을 건

드리기까정 하니 말이다. 그래보았자 짐이 한 손으로 목줄  눌러버리면 꼼짝도 못하고 엎드

릴 것이...... 

너, 무엇이 그리 잘났더냐?” 

“…신첩이 잘난 것이 없으되 사람의 도리는 다소 아옵니다. 할마마마께서 가르침을 주시기

로 항시 아랫

것들을 다스릴 적에 사리분별을 눅게 하고 그들의 허물을 어질게 돌려 경계하며 그 들의 어

려운 사정을 

돌보아주는 것이 상전의 도리라 하였습니다. 이 밤에 그 가르침을 따라 행한 것이니 신첩은 

잘못한 것도 

없고 그러니 성상께 불경하였다 여기지도 않나이다. 허나 마마께서는 신첩의 마음과 다르시

니 신첩에게 

못마땅한 것이 많으실사, 회초리를 치셨으니  이 밤에 그로써 경계를  하신 것이 아닌지요? 

헌데 어째서 

예까정 오시어 다시금 신첩을 핍박하심이 이리도 모지시옵니까?” 

“닥쳐! 너 잘났다 하는 소리는 이 밤에 물리도록 들었으니  입 닥쳐라 이 말이야! 짐도 할 

말이 없는 줄 

아니? 너, 지금 상전의 도리를 가지고  짐을 꾸짖었더냐? 허면 짐이 말하여  보까? 짐 또한 

이 밤에 너 하

는 양이 줄줄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여인으로 중전으로 안해로서  너가 무엇을 그리 잘 하

였더냐? 감히 

짐이 내전에 들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리옷 갈아입고 침수들 작정을 하고 있었으니 그 것이 

안해로서 옳

은 도리이냐? 중전이라 하는 자리는  바로 사직의 안주인이며 국모라,  그 언행이 진중해야 

하는 것이며 

털끝만큼도 어리석음이 없어야 하는 것인데 꼴같잖게 나인을 상대로 장난질이나 하고  있었

으니 그 것 

또한 중궁전 부덕을 벗어난 일. 하물며 짐이 너를 찾아  내전에 들었으면 계집이 되어서 말

이야. 버선발

로 달려나와 생긋 웃으며 살살 요염떨고 두 팔 벌려 반기는 빛을 보여야 그 것이 올바른 일

일 것이지. 헌

데 이 목석 같은 것은 짐이 없다고 오히려 좋아  날뛰니.. 너. 그러고도 짐더러 너를 어여뻐

해 달라 잘난 

척을 할 수 있느냐? 천하의 목석도 너보다는 영리하고 부드러울 것이다.” 

광인인 양 왕이 말을 하며 히죽히죽 웃었다. 보는 왕비로  하여금 등골에 소름이 돋도록 차

갑고도 잔인한 

웃음이었다. 한번도 자존심이 다쳐보지 않은 도도한 그가 짓는 우울한 웃음. 좌절감에  휩싸

인 상처받은 

웃음.. 

왕의 싸늘한 손이 왕비의 매끈한 턱을 쥐고 얼굴을 치켜올린다. 

“그래, 말을 하자하니 그렇구먼. 허기는 목석보다 더 독하기는 하더라? 짐은 너 같이  독하

고 모진 계집

은 보지 못하였다. 못난 것이 계집다운 애교나 있을 것이면 짐이 그나마 곱다 할 것인데 그

것도 없지! 영

리하고 어질다 도도하게 도사리고 앉아 짐을  아래로 깔고 보기나 하고.. 그런데 대체  짐이 

너를 무엇을 

두고 곱다 할 것이냐? 그래, 네가 짐의 비(妃)라 하였으니 진정으로 너가 짐의 계집인지 이 

밤에 확인하

련다!” 

왕의 사나운 손길이 갑자기 중전의 자리옷저고리 고름을 북  뜯어냈다. 그리고 연이어 풀어

도 남는 치마 

고를 더듬으며 그는 그녀를 차가운 맨바닥에 깔아뭉갰다. 

움직이지 말아라!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피할 수가 없었다. 왕비의 몸을 타고 올라 

누르며 왕

이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이 밤에 짐을 피하면, 네 마음속에 예전의 그 사내가 있다 여긴다 하였다! 짐을 외면하고 

배신한 터로 

짐이 반드시 그 놈을 참하여 버리고 말 것이니 가만히 있으란 말이다!” 

어느새 왕의 손 아래로 그녀의 의대가 하나 둘 떨어져 나간다. 중전은 한 겹 남은 속적삼도 

벗겨진 채, 

바닥과 왕의 몸 사이에 끼여 달달 떨고만 있는 참이다.  파랗게 질린 절망적인 얼굴이 보이

지도 않는 것

인가? 왕의 손이 한사코 부여잡고 있는 속고의까지 다가왔다. 

“짐은 사내니라. 그대는 계집이고 사내와 계집이 밤서 만나면은 항시 이런 일을 한다는 것

은 안즉도 모

르느냐? 짐이 그렇게 가르쳤건만! 이 손을 놓고 순응하지 못하겠느냐?” 

그는 중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윽박지른다. 상처받은  맹수가 마지막 자존심을 내

세우며 단발

마의 비명을 지르듯이… 

“짐을 사모한다 하였지 않느냐?  다정하게 대하여 준다  약조하지 않았더냐? 짐을 피하지 

않는다 하지 않

았더냐?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짐을 꺼리고 짐의 손길이 닿는 것을 싫어하느냐? 말하여 보

아라! 짐이 너

에게 대체 누구이니? 너에게 짐은 대체 무엇이더냐?-" 

'마음을 열고 다정하게 하여 주신다 약조하신 분이 누구인데? 지난밤에 한 마음으로 다정하

게 되어 원

자를 낳아져라 하시며 안아주신 분이 누구인데? 그래놓고서, 그 귀한 맹세를 하룻밤만에 깨

버리고 월성

궁 천 것을 찾아 나가신 분이 누구인데? 그 계집과 사랑싸움 한 터로 괜한 분풀이를 신첩에

게 해댄 분이 

그럼 누구인데?' 

중전 역시 가능하다면 손톱을 치켜들고 뻔뻔하고 염치도 모르는 왕의 얼굴을  할퀴어버리고 

싶었다. 고

래고래 소리지르고도 싶었다. 왕의 손길과  입술이 자신의 몸을 더듬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

각하며 몸부림을 쳤다. 

- '이토록 신첩을 모욕하고 억장을 뒤집은 다음에 당신이 동하신다 이 몸에 손을 댄  다고? 

누구 맘대로? 

내가 한갓 노류장화 천기(賤妓)라 하여도 이럴 수는 없는 것이지. 싫어!  다시는 내 몸에 손

을 못 대게 할 

것이야! 이렇게 함부로 나를 막대하지 못하게 할 것이야.' 

“월, 월성궁 계집에게 가시어요! 못난 신첩말고 항시  곱다 하시던 그 계집에게 가시면 되

지 않아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왕비는 똑바로 무서운 왕의 눈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아무리 여리고 조용한 그녀라 하여도 이판 사판 이었다. 중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이

다 싶었다. 

왕에게 대들면 엄청난 불경죄라 아마 내일쯤 내 목을 베라  하시겠지? 그래도 좋아! 죽어도 

좋아! 더 이

상 이렇게는 살지 않을 것이야. 이렇게 견디기 힘든 능멸을  당하고 매사 수모를 받으며 사

느니 난 죽어 

버릴 것이야! 그래서 당신 가슴에 못을 박아 줄 것이야! 죽어도 난 절대로 당신을 사모하여 

그 눈길을 바

랬다는 이야기는 하여 주지 않을 것이야! 내가 죽어서라도 당신을  거부하고 미워했다는 느

낌을 가지게 

해 줄 것이야!- 

왕이 몸을 더듬던 손을 멈춘 채 중전의 눈을 멍하니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 얼굴은 지금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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