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전은 얼굴을 무릎에 묻은 채 석상처럼 앉아 왕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하든지 참아
내리라고 다
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저 이 시각만 지나면 끝난다 그렇게만 다짐하며 바들바들 떨리는 마
음을 안간힘
을 다해 다잡는 것이다.
절대로 고개를 들지 말자 결심한다. 억지 심술을 부리는 그의 얼굴을 다시 보게되면 왕비
자신이 무슨
말을 어찌 내뱉게 될 지 모른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제발 신첩을 버려두고 나가 주옵소서.'
왕비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신첩이 그리 못마땅하고 미우실 양이면 예전처럼 머리통이라도 한 대 쥐어박으시고 돌아나
가 주옵소
서. 더 이상은 신첩이 마마를 상대로 인내할 수 없으니 어떤 불경을 저지를 줄 모르옵니다.
이미 장히도
신첩을 고약하다 하시고 미워하시고 계실 것이니 예전에 그러하셨듯이 신첩에게 발길질이나
하시고 돌
아 가오소서.'
그러나 그저 왕을 외면한 채 침묵하고만 있었던 것이 그의 격한 성미를 정통으로 건드린 것
이 분명하였
다. 왕이 격한 숨을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사납게 왕비의 머리타래를 잡아 자신 쪽으로 고개
를 돌리게
하였다.
“왜? 왜?"
거친 숨소리가 아주 가까이 들렸다. 격한 눈 속에 타고 있는 빛이 무척이나 슬펐다. 중전의
눈에 눈물이
반쯤 어린 터라 생긴 착각일 것이다.
'이 밤에 짐 꼴도 보기 싫다 이 말이더냐? 짐 같이 어리석고 모자라고 불측한 인간하고는
눈길도 마주하
고 싶지 않다 그 말이냐? 허기는 명민하고 부덕높은 중전께서야 천상 선녀라 하시니 짐 같
이 멍청하고
천지분간 못하는 폭군하고는 어울리지 않다 여기는 게지? 같잖고 고약한 계집! 저가 무엇
그리 잘나서
… 짐을 보라 하였다!”
왕이 벼락을 치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와들와들 떨며 겁에 질린 눈초리로 왕비는 보라 하시니 마지못해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용
기를 내어 왕
의 눈길에 자신의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중전은 등골을 타고 오르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
었다. 왕의 찢
어진 호목에는 시퍼런 불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못마땅함이나 오다가다 벌컥벌컥
터뜨리던 버
릇 같은 노화하고는 아예 성질이 틀린 으스스한 분노, 혹은 자존심의 상처.
왕의 눈에 담긴 그 시퍼런 불이 실상 어린 지어미에게서 버림을 받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
움, 혹은 홀로
남겨진 외로움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였다는 것을 중전이 읽을 수만 있었다면 그 밤의 두 사
람 사이는 무
엇인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사내의 그 복잡한 마음을 알지 못하는 어린 소녀.
그저 왕의 그 눈빛이 자신에게 억지 트집이나 잡고 괴롭히려고만 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뿐
이었다. 그래
서 뼈아프도록 서럽고 고통스럽고 분하였다. 왜 이 분은 이토록 나를 미워하고 나만을 못마
땅해할까?!
그렇다면 차라리 아까 말씀대로 나를 폐하여 쫓아내면 될 것인데…
이미 눈물이 찰랑거리는 커다란 눈을 노려보는 왕은 어금니를 꽉 물고 있었다. 터지기 일보
직전인 격한
분노를 억지로 참아내듯이…
왕은 한 손으로 중전의 머리타래를 아프게 휘감고 또 한 손으로 소름끼칠 정도로 부드럽게
중전의 볼을
쓸어갔다.
"그래. 이렇게 짐을 보는 게야. 짐을 향해 외면하지 말고 짐을 보아주는 게야. 너가 아무리
잘난 척 하여
보았자 너는 계집이야. 짐이 하자 하면 무엇이든 다 하여야하는 짐의 계집이라 이 말이다!
감히 짐을 상
대로 제 고집이나 부리고 건방을 떨어대기에 짐이 그를 경계를 하였으면 반성을 하고 제 몸
가짐을 진중
히 가져야 하는 것이 중궁의 법도이거늘, 이 것은 못난 것이 같잖게 짐을 상대로 발딱 고개
치켜들고 독
이나 부리고 한데서 저 잘났다 시위하며 짐더러 오라 가라 하였것다? 응, 그래. 너 참 잘났
구나?"
나직하고 음산한 목청이 무서웠다. 단 한순간도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눈빛이 얼음보
다 싸늘하고
날카로웠다.
"천하 박색 촌 것을 짐이 한 순간 실수하여 지엄한 중궁에 앉혀두기 몇 해라, 너가 인제 눈
에 보이는 것
이 없어졌구나? 감히 짐을 상대로 건방이나 떨어대며 말대꾸나 꼬박꼬박 하면서 아주 짐의
비윗장을 건
드리기까정 하니 말이다. 그래보았자 짐이 한 손으로 목줄 눌러버리면 꼼짝도 못하고 엎드
릴 것이......
너, 무엇이 그리 잘났더냐?”
“…신첩이 잘난 것이 없으되 사람의 도리는 다소 아옵니다. 할마마마께서 가르침을 주시기
로 항시 아랫
것들을 다스릴 적에 사리분별을 눅게 하고 그들의 허물을 어질게 돌려 경계하며 그 들의 어
려운 사정을
돌보아주는 것이 상전의 도리라 하였습니다. 이 밤에 그 가르침을 따라 행한 것이니 신첩은
잘못한 것도
없고 그러니 성상께 불경하였다 여기지도 않나이다. 허나 마마께서는 신첩의 마음과 다르시
니 신첩에게
못마땅한 것이 많으실사, 회초리를 치셨으니 이 밤에 그로써 경계를 하신 것이 아닌지요?
헌데 어째서
예까정 오시어 다시금 신첩을 핍박하심이 이리도 모지시옵니까?”
“닥쳐! 너 잘났다 하는 소리는 이 밤에 물리도록 들었으니 입 닥쳐라 이 말이야! 짐도 할
말이 없는 줄
아니? 너, 지금 상전의 도리를 가지고 짐을 꾸짖었더냐? 허면 짐이 말하여 보까? 짐 또한
이 밤에 너 하
는 양이 줄줄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여인으로 중전으로 안해로서 너가 무엇을 그리 잘 하
였더냐? 감히
짐이 내전에 들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리옷 갈아입고 침수들 작정을 하고 있었으니 그 것이
안해로서 옳
은 도리이냐? 중전이라 하는 자리는 바로 사직의 안주인이며 국모라, 그 언행이 진중해야
하는 것이며
털끝만큼도 어리석음이 없어야 하는 것인데 꼴같잖게 나인을 상대로 장난질이나 하고 있었
으니 그 것
또한 중궁전 부덕을 벗어난 일. 하물며 짐이 너를 찾아 내전에 들었으면 계집이 되어서 말
이야. 버선발
로 달려나와 생긋 웃으며 살살 요염떨고 두 팔 벌려 반기는 빛을 보여야 그 것이 올바른 일
일 것이지. 헌
데 이 목석 같은 것은 짐이 없다고 오히려 좋아 날뛰니.. 너. 그러고도 짐더러 너를 어여뻐
해 달라 잘난
척을 할 수 있느냐? 천하의 목석도 너보다는 영리하고 부드러울 것이다.”
광인인 양 왕이 말을 하며 히죽히죽 웃었다. 보는 왕비로 하여금 등골에 소름이 돋도록 차
갑고도 잔인한
웃음이었다. 한번도 자존심이 다쳐보지 않은 도도한 그가 짓는 우울한 웃음. 좌절감에 휩싸
인 상처받은
웃음..
왕의 싸늘한 손이 왕비의 매끈한 턱을 쥐고 얼굴을 치켜올린다.
“그래, 말을 하자하니 그렇구먼. 허기는 목석보다 더 독하기는 하더라? 짐은 너 같이 독하
고 모진 계집
은 보지 못하였다. 못난 것이 계집다운 애교나 있을 것이면 짐이 그나마 곱다 할 것인데 그
것도 없지! 영
리하고 어질다 도도하게 도사리고 앉아 짐을 아래로 깔고 보기나 하고.. 그런데 대체 짐이
너를 무엇을
두고 곱다 할 것이냐? 그래, 네가 짐의 비(妃)라 하였으니 진정으로 너가 짐의 계집인지 이
밤에 확인하
련다!”
왕의 사나운 손길이 갑자기 중전의 자리옷저고리 고름을 북 뜯어냈다. 그리고 연이어 풀어
도 남는 치마
고를 더듬으며 그는 그녀를 차가운 맨바닥에 깔아뭉갰다.
움직이지 말아라!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피할 수가 없었다. 왕비의 몸을 타고 올라
누르며 왕
이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이 밤에 짐을 피하면, 네 마음속에 예전의 그 사내가 있다 여긴다 하였다! 짐을 외면하고
배신한 터로
짐이 반드시 그 놈을 참하여 버리고 말 것이니 가만히 있으란 말이다!”
어느새 왕의 손 아래로 그녀의 의대가 하나 둘 떨어져 나간다. 중전은 한 겹 남은 속적삼도
벗겨진 채,
바닥과 왕의 몸 사이에 끼여 달달 떨고만 있는 참이다. 파랗게 질린 절망적인 얼굴이 보이
지도 않는 것
인가? 왕의 손이 한사코 부여잡고 있는 속고의까지 다가왔다.
“짐은 사내니라. 그대는 계집이고 사내와 계집이 밤서 만나면은 항시 이런 일을 한다는 것
은 안즉도 모
르느냐? 짐이 그렇게 가르쳤건만! 이 손을 놓고 순응하지 못하겠느냐?”
그는 중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윽박지른다. 상처받은 맹수가 마지막 자존심을 내
세우며 단발
마의 비명을 지르듯이…
“짐을 사모한다 하였지 않느냐? 다정하게 대하여 준다 약조하지 않았더냐? 짐을 피하지
않는다 하지 않
았더냐?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짐을 꺼리고 짐의 손길이 닿는 것을 싫어하느냐? 말하여 보
아라! 짐이 너
에게 대체 누구이니? 너에게 짐은 대체 무엇이더냐?-"
'마음을 열고 다정하게 하여 주신다 약조하신 분이 누구인데? 지난밤에 한 마음으로 다정하
게 되어 원
자를 낳아져라 하시며 안아주신 분이 누구인데? 그래놓고서, 그 귀한 맹세를 하룻밤만에 깨
버리고 월성
궁 천 것을 찾아 나가신 분이 누구인데? 그 계집과 사랑싸움 한 터로 괜한 분풀이를 신첩에
게 해댄 분이
그럼 누구인데?'
중전 역시 가능하다면 손톱을 치켜들고 뻔뻔하고 염치도 모르는 왕의 얼굴을 할퀴어버리고
싶었다. 고
래고래 소리지르고도 싶었다. 왕의 손길과 입술이 자신의 몸을 더듬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
각하며 몸부림을 쳤다.
- '이토록 신첩을 모욕하고 억장을 뒤집은 다음에 당신이 동하신다 이 몸에 손을 댄 다고?
누구 맘대로?
내가 한갓 노류장화 천기(賤妓)라 하여도 이럴 수는 없는 것이지. 싫어! 다시는 내 몸에 손
을 못 대게 할
것이야! 이렇게 함부로 나를 막대하지 못하게 할 것이야.'
“월, 월성궁 계집에게 가시어요! 못난 신첩말고 항시 곱다 하시던 그 계집에게 가시면 되
지 않아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왕비는 똑바로 무서운 왕의 눈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아무리 여리고 조용한 그녀라 하여도 이판 사판 이었다. 중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이
다 싶었다.
왕에게 대들면 엄청난 불경죄라 아마 내일쯤 내 목을 베라 하시겠지? 그래도 좋아! 죽어도
좋아! 더 이
상 이렇게는 살지 않을 것이야. 이렇게 견디기 힘든 능멸을 당하고 매사 수모를 받으며 사
느니 난 죽어
버릴 것이야! 그래서 당신 가슴에 못을 박아 줄 것이야! 죽어도 난 절대로 당신을 사모하여
그 눈길을 바
랬다는 이야기는 하여 주지 않을 것이야! 내가 죽어서라도 당신을 거부하고 미워했다는 느
낌을 가지게
해 줄 것이야!-
왕이 몸을 더듬던 손을 멈춘 채 중전의 눈을 멍하니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 얼굴은 지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