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200)

'만날 중전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천하  멍충이에 그저 목석인 줄 알았거늘…  실로 사리분별 

또렷하게 하고 

짐의 못된 성질머리를 대놓고 경계하는 결기를 가진 이더라고.  이제보니 짐이 가장 가까운 

곳에 면돗날

보다 더 날카로운 간언 한 사람을 둔 것이 아닐 것이냐? 항시 아바마마께서 이르시기 짐더

러 꿀 바른 듯 

아첨하는 이는 짐을 망치는 독이요 귀에 듣기 거북한 쓴소리를 하는 사람이 진실한 벗이라 

하였거늘, 실

상 중전이야말로 짐에게 가장 번듯한 벗인지도 모르지.' 

에잇! 모르겠다. 왕은 벌러덩 다시  누워 버렸다. 이 밤은  면구하니 그만두고, 내일 아침에 

솔직히 잘못하

였다 사과하면 되겠지! 제멋대로이고 자기 중심적인  왕은 다른 사람 마음도 다  저만 같은 

줄 알았다. 

'젠장, 희란 누이하고 기분이 상한 터로 괜스리 중전에게 풀었으니 짐도  할말이 없다. 하지

만 월성궁 갔

다가 저에게 다시 돌아온 것을 보면 모르나? 저도 짐의 이 마음을 알아주어 이해를 하여 주

어야지. 쳇! 

그러니까 짐도 없는데 왜 웃음을 지어?  짐은 한번도 들은 적이 없는 저의  웃음소리인데… 

짐이 없는데 

웃는다 싶어서 짐이 격분한 것이 아니냔 말이야. 사람이 참으로 쌀쌀맞고 무심하기도 하지! 

짐이 이토록 

저를 보고 있다는 것을 어찌 그리 몰라주냔 말이야.” 

제정신이 드니 왕은 그제서야 교태전을 차고 나간 중전이 지금껏 들어오는 기척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

았다. 이미 야심하여 어둠이 깊어만 가는데 대체 어디로 나가서 아니 들어오는 것인가. 덜컥 

걱정이 밀

려들었다. 바깥의 아랫것에게 소리쳐 시각을 물었다. 

“지금 막 파루를 친 것이니 자정이 되었나이다. 전하.” 

“벌써 자정이라? 그래, 허면은 중전께서 서온돌로 다시 듭셨느냐?” 

“안즉 듭시지 않으신 줄 아옵니다. 윤상궁께서 중전마마를 따라 나섰으니 걱정 마옵소서.” 

“웃기는 소리! 누가 그 방자한 것을 걱정한다 한다 하였느냐? 입 닥쳐라, 이놈아.” 

하문하는 말씀에 대답을 하는 것 뿐, 아무 죄도 없는  홍내관에게 왕은 불퉁하게 소리를 질

렀다. 그러나 

목청은 크지만 속내는 결코 편안치 않는 상감마마이시다. 이미  시각이 한참 지났는데 중전

이 아니 돌아

왔다 하니 터무니없는 걱정이 슬슬 솟아오르는 것이다. 

‘이미 자정이 넘었는데 대체 어디 가서  청승을 떨고 앉아있을꼬? 그 못난 것이  도도하고 

결기는 강하니 

이 것, 혹여 짐에게 당한 수모를 잊지 못하여 목을 매러 간 것은 아니더냐?’ 

겉으로는 못났다 발로 걷어차고 다니는 어린  지어미가 실상 그저 소중하고 안타까운  젊은 

상감마마. 별

별 심술에 억지는 장하였지만 또 그녀가 보이지 않으니 그저 두렵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이었다. 그가 

막 아랫것에게 소리쳐 중전을 찾아오라 할 참이었다. 

윤상궁이 들어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중전마마께서는 이 밤을 인지당에서 지새신다 고집하시옵니다.  성상께 불경하여 죄를 받

은 처지이니 

어찌 감히 전각을 차지하고 편안하니 잠을 잘 것이더냐, 이  밤은 근신함이 옳을 것이다 하

셨습니다. 상

감마마께서 용서를 하셔야 교태전에 돌아라도 올 것이니 신첩의 다음 행적은 오직 전하께서 

정하실 일

이라 하였습니다.” 

“날이 아직 차고 꽃샘바람이 부는 날이라. 하물며 인지당은  중궁에서도 가장 외지고 궁벽

하여 바람막이

도 제대로 되지 않는 곳인데 게서 하룻밤을 샌다고?" 

왕은 벌떡 일어나 맞고함을 질렀다. 

"참말 장히 간담도 큰 계집이구나. 독한 것.. 계집 주제에 종종 산군(호랑이)도  내려온다 하

는 금원 가까

이 있는 그 곳에서 홀로 밤을 새운다니.. 이것은 완전히 짐을 협박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까 짐더러 

지금 저에게 교태전으로 돌아오시오 하고 직접 빌러 오라 그 말이 아니냐?” 

풀 수 없을만큼 비비 꼬여진 심술이다. 걱정과 근심, 미안함으로 막 풀어지려던 왕의 심기가 

윤상궁이 

전하는 말로 다시 한 번 뒤집어지고 말았다. 주먹을 움켜쥐고  이를 으드득 갈던 그는 갑자

기 벌떡 일어

났다. 

“그래, 간다! 가면 될 것이 아니냐? 고약한 것! 짐을 상대로 끝까지  건방을 떨고 방자하게 

군다 이 말이

야? 그래, 네 맘대로 하여 주마! 그래 주면 될 것이 아니더냐?” 

“저..전하. 어찌 이러 하오십니까? 제발 고정하옵소서.” 

벌컥 노화를 내며 당장 중전의 머리채라도 휘어잡아 내동댕이칠 것 같은 사나운 왕의 기세

였다. 윤상궁

이 자지러질 듯이 놀라 만류를 하였다. 왕은 윤상궁을 힐끗 노려보았다. 

“왜 짐을 막는 것이냐? 지금  중전이 짐더러 건방을 떠는  것이 네 눈에는 보이지를  않느

냐? 지금 그 고약

한 것이 감히 짐더러 잘못하였다고 먼저 엎드려라  하는 것이거늘! 그래, 그리 하여준다 이 

말이다. 흥, 

너들이 말을 아니 하면 짐이 모를 줄 알더냐? 너들 또한 짐더러 모다 잘못하였다 하지 않았

더냐?” 

왕은 이를 득득 갈면서 궁등을 든 장내관만을 앞세우고 인지당으로 찾아갔다. 

***********

인지당은 중궁에서도 가장 외지고 궁벽한 곳이다. 왕대비전하께서 희란마마와의 불측한  정

해로 천지분

간 못하고 날뛰던 주상을 경계하는데 지쳐 모든 것이 꼴 보기 싫다 하시며 자경전을 벗어나 

경희궁으로 

이어하신 후이다. 비워진 지 오래인 자경전 담과 이어진 곳이니 인적이 드문 곳이라 중궁전 

궁녀들도 자

연히 인지당에는 발길을 꺼려하게 되었다. 

또한 워낙에 인지당 자체가 무서운 곳이었다. 자경전과 교태전의 내전마마들께서 교만한 후

궁들을 경계

하시거나 잘못을 저지른 궁녀들을 치죄하는 곳이 바로 인지당의 마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어쩐지 

음침하고 가까이 가기 어려운 곳이라는 분위기가 떠돌고 있는  곳이었다. 하여 인지당은 한

낮에도 사람

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었다. 

어찌 되었건 잘못하였다 하여 왕에게 종아리를 맞은 죄인이다. 그래서 중전은 이 밤에 자신

이 서온돌에 

머무는 것이 마땅치 않다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며 인지당으로 나온 것이

다. 

제빌 이리 고집을 피우지 말고 돌아 가옵사이다 윤상궁이 만류하였으되 거절을 한 것은 무

슨 이유에서

였을까? 

중전은 새파랗게 뜬 열 엿새 달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였다. 

‘싫었던 게야. 나는 그 분과 같은 처마  밑에 머무는 것이 싫었던 게야. 나를 사람  취급도 

아니 하시며 무

작정 당신 내키는 대로 하시는 그 분이 인제는 지긋지긋하던  것이다. 그 분은 오직 월성궁 

계집의 정인

이다. 나는 그 분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야. 그런데 그 분이 주신 잠시 잠깐의 변덕에 속아 

이 마음 다 

주려 하였다가 오늘과도 같은 수모를 당한  것이니… 나, 다시는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야. 

그 분에게 기

대하였다가 또다시 이 마음에 칼질하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 아니할 것이야.’ 

이미 눈물도 말라버렸다. 작은 가슴에 가득히 넘치고 있는 것은 쓸개즙보다 더 씁쓸한 패배

감. 악 바친 

오기였다. 아니, 텅 빈 허무요 끝이 보이지 않는 무서운 공허였다. 

나는 평생 이렇게 뒷방 신세. 당신이  내키는 대로 차고 다니는 보잘 것  없는 돌멩이 같이 

살아가겠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철저하게 잊혀진 계집으로 살며  천한 잉첩이며 아랫것들에게까지 온

갖 비웃음에 

수모를 당하다가, 어느 날 그분이  흥하시면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죽음까지  그 분 곁에서 

같이하여 허울

좋은 안해로 같은 유택에 누워야겠지? 

중전은 등골을 타고 오르는 으스스한 냉기로 작은 몸을 떨었다.  무릎을 세우고 두 팔로 자

신의 몸을 단

단히 끌어안았다. 자꾸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을 이겨내려는 듯이.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차라리 누가 나를 죽여준다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마음이 

아프지도 않

을 것이고 이 견디기 힘든 치욕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라.  누가 중전 자리 달라 하였더냐? 

난 한 번도 이 

자리를 원한 적이 없었다. 아버님께서도 그러하니 나를 바라보시며  차마 말씀은 하지 못하

셨되 우리 나

가 같이 죽어 버리자꾸나 그런 눈빛이었겠지. 나, 정말 죽어 버릴까?’ 

왕이 인지당의 마루에 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작은 촛불이 하나 켜진 어두컴컴한 방. 아랫목으로 윤상궁이 이부자리를 깔아놓았지만 중전

은 그리로 

들지도 앉고 윗목에 앉아 자신의 무릎을 껴안고 동그마니 얼굴을 묻고 있었다. 

왕은 무심코 방문을 들어서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그만 문을 들어서던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싸늘한 기운이 가득한 허전한 방에 홀로 앉아 왕비는  우두커니 무릎에 얼굴을 묻고있었다. 

그 모습이 그

에게는 마치 어떤 외침처럼 느껴졌다. 내가 당하는 이  모든 것이 싫어! 하고 말하는 것 같

은.. 

왕은 그런 중전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가 지금 당장 자신에게서 도망을 칠 것 같다는 생각

을 한다. 자

신이 손을 대기라도 하면 흔적도 없이 금방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위태위태한 느

낌. 안타깝기

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한 그런 복잡한 기분으로 한참동안 문간에 서서 고

개를 말고 있

는 왕비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아직은 이렇게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것에 안도하였다. 하지만  또한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

고 도도하게 

앉아 있기만 한 그녀의 모습이 몹시도 밉기만 한 그런 이율배반적인 느낌이기도 하였다. 

미안하오 이 한마디면 될 일이다. 

짐이 잘못 하였소 하면 끝날 일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지금껏 남에게 해보지 않았다. 곧 죽어도 잘못하였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도도한 왕이 

가진 약점이요 일을 더 꼬이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왕은 자신이 한참동안 그렇게 서 있건만  끝까지 돌아보지도 아는 척도 아니하는  왕비에게 

거의 머리에 

김이 날 정도로 자존심이 상하였다. 

같잖은 저것 하나 때문이 짐이 지금껏 단 한번도 화를 낸 적 없는 월성궁 누이에게  고함에 

삿대질까지 

하고 난리를 부린 것이 아닌가? 죽네 사네 하며 생난리를 부리는 그녀를 놓아두고 정작 짐

이 대궐로 제

게로 돌아왔는데. 그렇다면 감사하다 말하고  생긋 웃으며 안겨들어도 모자라거늘, 이  것은 

곧 죽어도 저

가 잘났다 표독하게 눈이나 치켜뜨고 짐의 비윗장이나 슬슬 긁고 말이야… 참말 못난 것이 

같잖고 방자

하구나. 

심통이 난 왕은 냅다 발길을 굴려 애꿎은 문짝만 걷어찬다. 

“예서 자든 말든 맘대로 하여라! 얼어죽으면 짐이야 더 좋단다. 천하 박색 못난 네 까짓것 

대신 명문대

가 고운 처자 다시 간택하여 비로 앉힐 것이니 제발 죽어져 주렴.” 

그러나 중전은 끝까지 대꾸 한마디하지 않고 미동도 없이 가만히 얼굴을 묻고 앉아 있기만 

했다. 너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나는 아니 들으련다. 너는 인제 나에게 사람도 아니니 너가 무슨 말을 하

든지 나는 아

니 들으련다 하는 뜻이 너무 여실한 그녀의 무응답에 왕의 인내는 거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

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린 지어미의 눈을 자신에게 돌리고 싶었다. 어떻게 하든지 저 도도하

고 무서운 침

묵을 깨버리고 싶었다. 자신을 미워해도 좋으니, 증오하고 거부해도 좋으니 아까처럼 자신에

게 사람다

운 반응을 보이는 중전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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