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짐의 잘못이다. 다 짐이 실책을 한 것이야. 중전을 향해 짐이 먼저 대놓고 물건인양 함
부로 대하고
갈가마귀라 놀림하며 올바른 사람으로 대접해 주지도 않았는데 누가 중전을 귀하게 아껴줄
것이냐? 하
물며 희란 누이는 짐을 두고 중전과 성총을 다투는 처지이니 그저 중전이 밉고 싫어서 그런
악설을 더
하고 싶었을 터인데 말이야. 짐이 그 것을 애초부터 경계하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다고 동조
하여 웃었다
가 그 어진 사람에게 이런 꼴을 당하게 하는구나… 다 짐의 잘못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
말을 탄 그대로 중궁의 문을 박차고 들어서며 왕은 결심한다.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을 두고 함부로 입질하지 못하게 할 것이야! 명색이 사직의 안주인이
며 국모인데
그런 사람을 두고 아랫것들이 함부로 경시하고 은근히 능멸한다면 그 것은 바로 짐을 망신
주는 일과 같
아! 다른 누구도 안돼! 짐말고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야! 절대로
다치지 못하
게 할 것이야!’
밤이 제법 깊었으니 중궁의 내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왕은 말 등에서 그대로 발을 내밀어
숙장문을 냅
다 걷어찼다.
천하에서 왕궁의 대문을 발로 걷어찰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분, 주상 전하밖에 없다.
전하께서 납시셨다 싶어 허둥지둥 나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중궁의 나인들 모두다 화들짝
놀라는 얼굴
이었다.
날이 채 저물기도 전에 말달려 월성궁에 납시셨다 하였다. 아주 작정하고 월성궁마마가 소
매 걷고 성총
다툼에 나선 듯 하니 어찌 하랴? 아마도 몇날 며칠 미혹하여 질탕한 춘몽을 꿀 것이야. 우
리 중전마마
가엾으시다. 다시 한번 소박을 맞으신 것 아니더냐?
삼삼오오 기둥 그늘에 모여 앉아 소곤소곤 대전마마 야속하다. 우리 중전마마 참으로 불쌍
하다 눈물을
닦았다. 어진 분이 체면이 있으니 차마 속상하다 말씀은 못하시고 고개만 푹 숙인 채 밤 늦
다이 바느질
만 하시었다. 수라상 올려드렸더니 반절도 못하시고 물리셨다.
밤이 늦었으니 중문 닫아라. 이러면서 텅 빈 밤하늘. 대전 쪽을 향하여 눈 한번씩은 다 흘긴
나인들이었
다.
헌데 이 것이 왠일인고? 상감마마께서 중궁에 돌아오시었구나.
설마 전하께서 있는 요염 없는 애교 다 부리는 월성궁 마마를 버리고 중전마마께 돌아오신
것이냐? 정
말 대전마마께서 우리 중전마마만 사모하게 된 것이더냐?
왕은 말 등에서 바로 월대로 훌쩍 내려섰다. 막 중궁 마루로 올라가려던 용안이 갑자기 찌
푸려진 것은
바로 그때. 분명 서온돌 중전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여인들의 웃음소리, 그것도그가 한
번도 들은 적
없다 싶은 중전의 웃음소리가 아닌가?
왕이 다시 환궁을 하였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중전은 그때 서안을 펴놓고 글씨 연습을 하
고 있었다.
심란하고 서러운 마음에 울적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의대를 짓는다 바늘에 실을 꿰
어보아도 손
이 나가지 않았다. 화계에 이른 꽃망울을 피운 매화를 바라보아도 아픈 것은 똑같았다. 찾는
이 없이 어
둠에 잠겨가는 하얀 꽃망울이 어찌 그리 불쌍한 중전 자신의 처지와 똑같은가. 야속한 지아
비. 믿지 못
할 사내의 말이라. 가만히 내려다보는 옷감에 눈물 한방울이 똑 떨어졌다. 손가락으로 그 얼
룩을 지우며
처연하게 한숨만 내쉬었다.
'허기는 나에게 바라는 한가지는 원자를 낳는 것이라 하였지. 그 마음속 정을 쏟는 여인은
월성궁 계집
뿐이라 하였는데, 그런 계집이 깊은 병이 났다. 곧 죽어진다 하였으니 어찌 마음이 쓰이지
않으리.'
수심에 젖어 참으려 하여도 한숨만 났다. 수라상도 채 비우지 못하는 어린 중전마마 심란한
속을 듣지
않는다 해도 모를 리가 없는 중궁전 상궁이었다.
이른 시간에 박상궁이 들어와 정성껏 욕간 시중을 들어 주었다. 이르게 침수나 하옵시오 하
였다. 날마다
덤비어 잠도 자지 못하게 괴롭히던 분이 아니 오셨으니 이 밤이나마 편안하게 침수하십시오
하여 일찌
감치 자리를 펴드린 것이다.
그리하여 중전마마 야리한 자리옷 차림으로 침수를 하려 하니 그것도 염치 없었다. 잠도 오
지 않는데 스
승님께서 숙제로 내어준 글씨 연습이나 하자구나 하여 나인을 불렀다.
이미 귀밑머리 내리고 직접 먹을 갈았다. 헌데 마침 실수를 하여 먹물 몇 방울이 중전의 의
대와 고운 볼
에 몇 방울이 튄 것이다. 중전은 자신도 모르게 어이없어 깔깔 웃어버렸다. 면경 속의 얼굴
에 뚜렷한 검
은 점이 몇 개 생겨난 때문이다.
“이 것 보아라. 화봉아. 이 중전이 못났다 소문이 자자한데 점까정 얼굴에 찍혔으니 실로
내일서 중궁에
귀신이 앉았더라 소문이 날 것이다. 홋호호. 너도 몇 개 그려 주랴? 너가 고우니 그 입가에
점 하나 찍으
면 더 곱게 보일 것이다.”
강학을 할 적에 노상 곁에서 시중드는 나인 화봉이가 중전마마와 연치 비슷한 열 일곱이었
다. 또한 순진
하고 명랑하여 신분은 다르지만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터였다. 중전마마, 장난삼아 옆에
앉아 시중
들던 화봉이 얼굴에 붓으로 점 하나를 찍어주었다. 순진한 소녀들이라 중전마마와 화봉이가
서로 손가
락질을 하며 홋호호 깔깔깔 웃음짓고 있는 바로 그때.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불쑥 들어선 분이 산돼지처럼 씩씩 콧김을 내뿜고있는 주상 전하이셨다.
날도 채 저물기 전에 전하께서 월성궁에 납시셨다는 전갈을 들었다. 월성궁 계집이 병이 나
서 죽네 사네
하며 옥보를 청하니 어지간히 급하셨는지 조하 일도 다 묻어두고 말 달려 가셨다 하였다.
월성궁 계집이 엄살떨며 발길을 청하자말자 조하 일도 채 돌보지 않고 왕이 허겁지겁 달려
갔다 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왕비는 어쩐지 온몸의 맥이 탁 풀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말로는 이 밤에 그가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니 괴롭지 아니하여 좋다 하였다. 교태전에만
들어오면 무작
정 육중한 몸에 깔려 온갖 무안을 다 당하고 아래로 고통스러운 교접을 하여야 하니 어린
왕비는 왕이
들어오는 밤이 긴장되고 무서웠다. 그것을 면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로고. 그러나 이상한 일이
었다. 깊은
곳의 심사는 어쩐지 달랐다. 안도감만은 아닌 기이하고 심란한 불쾌함. 혹은 시퍼런 투기심
같은 것이
무럭무럭 자라 오르던 것이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
왕비는 잠자리에서 자신을 발가벗겨 끌어안고 별의별 짓을 다하며 능욕하고 괴롭히는 왕이
정말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은근히 지금껏 제가 모르던 재미와 야릇한 일도 있는 것이라. 며칠전만 하
더라도 참으
로 민망하지만은 왕이 해주는 그 일이 좀 좋았다.
자연의 섭리라, 물오르는 열 여덟. 남녀지간 정분을 그리워하는 나이였다. 마음 깊은 한켠에
는 그가 또
자신을 찾아와 그렇게 안아주기를 바라며 은근히 기다리는 마음도 사실이었다.
그가 자신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여도 일편단심 수줍게 사모하는 그의 존재를 가까이
할 수 있다
는 것이 좋았다. 구박하는 듯이 퉁명스럽게 하여도 쌀쌀맞게 타박을 하는 듯 하여도 곰곰이
씹으면 은근
히 정다운 그 목소리가 참 좋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지아비를 자신의 잠자리에서 맞이하여
동침하며 밤
을 지낸다는 것은 중전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껏 말만 부부지간이요. 남남처럼 살며 온갖 구박만 당하여 왔다. 초야 첫날부터 너무 못
나서 지아비
께 소박맞은 계집이라는 낙인은 여리나 도도한 그녀가 평생 품고 있을 깊은 상처이다. 궐의
안주인이란
허울은 그럴 듯 하되 월성궁에 도사리고 있는 천한 잉첩에게 밀려 지금껏 뒷방신세라. 심지
어 천한 무수
리에게서까지 허수아비라는 조롱을 받고 있다는 것을 영리한 그녀가 모를 것인가?
그런데 궐의 인심이라 하는 것은 실로 조변석개였다.
주상께서 연이어 교태전에 듭시니 당장 아랫것들 태도부터가 달라진다. 이러다가 중전마마
께서 회임이
라도 하시면은 월성궁 계집은 당장떨려나갈 것이라는 생각이 저들도 들은 것인가? 이 며칠
새로 중전마
마더러 허수아비라고 무시하는 것들이 자라목이 된 것은 불문가지.
중전은 그때 문득 자신이 왕에게 지어미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평생 이런 꼴일 것이다 하는
것을 뼈아프
게 깨달은 것이다.
그런 생각만이 아니라 하여도 중전은 주상 전하가 그리웠다. 어마마마를 부르며 마른 눈물
을 흘리던 그
를 안아주었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든든한 가슴에 꼭 안아주며 다정하게 등을 쓰다듬어
주시었다. 짐
을 사모하지? 몇번이고 어린애처럼 물으시던 그분. 사모하옵니다 입보시하는 한마디에도 싱
긋 웃던 그.
많이는 바라지 않으니 그가 그렇게만 자신을 대하여준다며 중전은 그를 진정 사모하고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편단심 지아비 전하 그 분을 바라보고 있었던 수줍은 자신의 마음을 다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왕에게로 살며시 벌어지는 자신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 것 마냥 월성궁 계집
이 다시금 왕
과 자신의 사이를 턱하니 가로막은 것이다.
중전은 병이 났다는 말 한마디로 왕의 발길을 단번에 돌리는 월성궁 계집의 그 수단에 도무
지 자신은 영
원히 그 계집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을 느꼈었다.
삼간택을 거쳐 사직의 안주인으로 들어온 중전 자신더러 제가 손가락질하여 중전 앉혔다고
들까불며 무
시하던 계집. 그리하여 대놓고 중전 자신을 온 궐의 웃음거리로 만들고 허수아비 노릇을 시
키는 것으로
도 모자라서 중전의 거처인 교태전까지 차고 들어오겠다고 나서던 무엄한 계집. 중전 자신
도 드나들지
못하는 우원전까지 들어와 그녀의 지아비를 차지하여 별별 낯뜨거운 치태를 다 부리던 그
간악한 계집.
하물며 주상 씨앗을 품었다 자랑하며 어디서 아들하나 생산하여 놓고 기어코 그 놈으로 하
여금 세자로
만들겠다는 천인공노할 무도한 심보를 감추지 않는 간특하고 영악한 그 계집이 아닌가?
그러나 하늘도 고개를 돌릴 만큼 방자하고 무도한 그 계집의 처신은 실상 주상께서 만든 것
이야.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났었다.
주상께서 그 악독한 계집을 무조건 비호하사 그녀의 말이라면 무작정 이루어주고 다 들어주
니 그 계집
의 위세가 그렇게 당당해진 것일진대, 말만 전하께서 지존이시되 실상 이 나라 강토는 그
계집의 치마폭
에 담긴 것이라.
이날도 병이 났다 한마디로 연하여 교태전에 듭시던 왕의 발길을 단번에 돌려놓는 기막힌
계집의 수완
이었다. 도무지 그런 일은 어린 중전 자신으로서는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지금껏
중전의 가슴
속에 가시처럼 박혀있는 것은 월성궁 계집의 화려하고 애교녹던 자태였다. 잘나기로 일등이
라, 실로 늠
름한 주상 전하와 짝이 될만하다 싶었던 모란꽃보다 더 풍염하고 무르녹던 그 계집의 화용
월태 미모를
생각하자니 중전은 새삼스레 못난 자신의 모습이 뼈아프도록 분하고 슬펐다.
그런 계집을 상대로 주상의 총애를 자신이 돌려놓는다는 것은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일인가..
그래서 중
전은 절망하여 많이도 아팠었다.
진정한 부부지간이 되자 하여 놓고서… 앞으로는 꺼리지 말고 진정한 지아비로 사모하라하
여 놓고서…
홀로 무정한 왕을 자그맣게 소리내어 원망하며 입을 삐죽여도 보았다.
다시는 그 분 약조를 믿지 않을 것이야. 다시는 그 분의 오다가다 한마디하신 무심한 말씀
을 약속으로
믿어 기대하였다가 상처받지는 아니할 것이야. 홀로 다짐하며 마음의 쓰라림을 억지로 가라
앉힌 터였
다.
그녀가 밤에 글씨를 쓰자한 것도 그런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자 한 이유에서였다.
월성궁에 나가신 지아비와 그 천한 계집이 서로 엉켜 나를 두고 얼마나 조롱하고 있을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