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200)

신임하는 아랫것을 두어두고 희란마마 억울하고 분하다 기가막히다 난리를 부리며 장한  울

음소리를 내

었다. 

"방금 전에 이 몸을 위하여 천하를 주마, 절대로 앞으로는 누이 눈에서 눈물나게 하지는 않

을 것이야 하

신 분이 이토록 손쉽게 당신 하신 맹서를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으실 줄이야. 기가 막혀서! 

그리도 곱다 

하며 이 몸을 추켜 주시던 분이 어찌 이리 달라지신 것이고? 교인당, 아무래도 내가 불안하

이! 자네는 

당장 신당에 나가 주상과 나 사이에 살이 끼인 것은 없는지 살펴보고 그 살풀이를 좀  하게

나. 중전 그년

에게 주상이 발길을 다시 하지 않게 하는 비방도 좀 하고  말이야!… 무엇인가 주상의 심경

에 변화가 생

긴 것이야. 내가 아무래도 그런 직감이 들어…” 

이러는데 글공부를 마친 아들 혁이놈이 유모와 함께 방에 들어섰다. 제 어미가 울고 있으니 

어린것이 무

엇을 알까마는 울먹울먹 무릎에 와서 쓰러졌다. 

"어머니. 어찌하여 우시오? 왜 그러시오? 주상전하께서 오시었는데 금방 가시어서 섭섭하여 

이러시오?" 

희란마마 눈에 절로 다시 눈물이 돋았다. 이 놈만 왕자로 인정받았다면 나의 팔자는 탄탄한 

반석일 것

을..... 그 빌어먹을 왕대비전 늙은 것이 일을 틀어버려 오늘날 내신세가 이렇게 첩첩하고 불

쌍하게 변하

였고나. 아들을 끌어안고 흑흑흑 서럽게 울음을 울었다. 

"어머니. 우지 마시오, 소자가 주상 전하께 서찰보내어 얼른 오십시오,  할 것이야요. 오시면

은 어머니 은

애하여 주시어 소청드릴 것입니다. 저가 세자 되면은 어머니 눈에  눈물 뺀 것들은 다 죽일 

것이오. 전하

의 발길 가로막는 중전 고년부텀 저가 박살을 낼 것이니 우지 마시오 응?" 

어린것의 말이 한없이 독하였다. 허구헌 날 제 어미가 아들을 끼고 넌 왕자다, 조만간  동궁

에 앉아 세자

되어 천하를 호령하게 될 것이다 간살거리고 속살거린 탓에 혁이  이놈. 지금 저가 마치 세

자인양 교만하

게 맹서하였다. 가만히 듣고있던 교인당이 에고머니 하고 질색을 하였다. 

"아이고 도련님. 그런 말을 어디 가서 함부로 하면 아니됩니다. 제발 마옵소서. 잘못하면 억

적이라. 당장 

금부에 잡혀가 장살당할 것이오." 

"흥. 아이의 철없는 말에 무엇 그리 놀라는가? 자네는 나가서 아버님을 들어오시라 하게. 내 

이 참에 우

리 혁이를 왕자로 인정받는 일을 성사시키고 말 것이네. 앞날이 보이지 않으니 나도 살길을 

찾아야 하지 

않는가?" 

아들놈 머리 쓰다듬으면서 희란마마 입술을 짓씹으며  한숨중인데 그럼, 말타고 환궁하시는 

주상전하의 

심사는 어떠하신가? 

좋이 지내자. 짐을 은애하라 하여놓고 그 밤에 월성궁 가신 무정한 님의 소식에 기운 쭉 빠

져 시름찬 눈

빛 들어 저문 밤하늘을 바라보는 어린 중전마마는 또 어떠하신가? 

첩첩하고 엇걸리는 그 사연은 다음 장에서 볼 일로구나.   

***********

<9>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터였다. 궐을 향하여 말을 달리며 왕은 어금니를 악물고 있었

다. 아무리 

참자 하여도 참을 수가 없고 아무리 진정하자 하여도 속속들이 기분 나쁜 그 감정을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었다. 

어찌 하든 월성궁에서 한발이라도 더 멀어지려니. 질풍 노도처럼 잘 달리는 말을 연신 채찍

질하였다. 때 

아니게 매를 맞은 말은 히이힝 울음을 울며 바람처럼 달려가니, 행여 낙상이라도 하시면 어

찌하나. 따라

붙는 호위밀사들만 간덩이가 졸아들었다. 

'기가 차서, 참으로 기가 차서!' 

말 그대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무어라, 중전더러 더러운 년이라? 짐을 미혹하여 성총을  빼앗으려 한 음탕하고 천한 년이

라 하였더냐? 

감히 짐의 비(妃)에게? 사직의 안주인이며 나라의 국모에게 같잖게스리 저가 무엇인데 감히 

그런 방자

하고 못돼먹은 막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냐?' 

생각만 해도 으아악!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왕은 다시 한번 이를 으드득  갈았다. 치켜 뜬  

눈에 시퍼런 

불이 식지 않고 훨훨 타올랐다. 

솔직히 왕은 희란마마에게 그런 악설을  듣던 순간, 마치 정수리에 찬물을  퍼 부운 것처럼 

소스라쳤다. 

자신이 사랑했던 누이가 이토록 표독하고 잔인하며 경우도 모르는 여인인가 하는 놀라움 혹

은 섬칫함 

때문이었다. 

‘허기는 예전에도 그렇게 느낀 적이  있었다. 감히 저가 교태전에 차고  들어가 짐의 침수 

시중을 들겠다

고 나섰을 때야. 그때도 마치 짐이 알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낯설고 두려웠었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야.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감히 그러지 못해.' 

그 때에 강하게 경계하지 못한 탓이려니. 저절로 민망하고 염치가 없어 한숨만이 나왔다. 씁

시레한 자조

의 웃음이 시금털털하게 입가로 새어나왔다. 

'짐이 그저 멍청하였다. 무조건 누이 말이라 할지면 어름어름 경우없고 방자한 청이라도 어

지간히 들어

주었더니 이제는 완전히 눈이 뒤집혀진 게야. 기가 막혀서. 감히 중전더러 음탕하고  더러운 

년이라고 짐 

앞에서 욕까지 하다니… 참말로 누이는 저가 짐을  능가하는 여황(女皇)이라고 생각하고 있

는 것이 아닌

가? 저가 무슨 말을 하든지, 저가 무슨 일을 하든지 짐은  허허 웃고 가납하여 주는 천하의 

제일가는 멍

청이, 제 허수아비라 굳게 믿고 있지 않으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젠 안돼! 

왕은 말 배를 사납게 걷어찼다. 어둠을 노려보는 눈 빛이 칼날이었다. 

‘못해! 아무리 그러하여도 작작 하여야지. 이젠 더  이상 짐 앞에서 중전을 함부로 능멸하

고 조롱하지 못

하게 할 것이야! 너무 귀하여 짐도  차마 그 손목을 잡을 자격조차 없다  여기는 그 사람을 

다시는 제 깐 

것이 수모주게 하지 못하게 할 것이야’ 

만약 희란마마가 왕자신에게만 강새암부리고 악설을 퍼부었다면  아마도 참았을 것이다. 그

러나 그녀가 

아무 죄도 없는 중전을 상대로 그렇게 입에 담지 못할 능멸과 욕을 하는 순간 왕은  격분하

다 못해 이성

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대체 중전이 무슨 죄가 있는가? 

왕은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중궁전에 먼저 든 이는 그였다.  싫다 하여도 죽어라 찾아가 어린  사람을 욕심내어 억지로 

안은 것도 그

였다. 돌아보고 찾아가고 가까이한 것은 언제나 그가 먼저였다. 

은애하기는 커녕, 그를 바라보아 주지도 않는 무정하고 그리운 사람더러 짐 좀 보아주어 하

면서 빙빙 돌

았다. 괜히 골을 내고 괜히 건드려 보고 괜히 투정부렸다. 그가 먼저였다. 전부다 그가 그랬

다.   

오늘 밤 희란마마가 강새암한 것처럼 만약  중전이 작정하고 그에게 웃어주고 손을  내밀고 

먼저 안겨들

었다면 어땠을까? 왕은 아마 이미 희란마마 따위는 한참 전에 버렸을 것이다. 

'어질고 말이 없으며 참으로 순후한  사람이 아닌가? 저에게 드나드는 짐더러  중전이 아무 

말도 아니하

고 그저 가납을 하여 주고 있으니 저가 무사히 잉첩  노릇하며 권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지. 

만약 비(妃)

가 내명부의 법도를 들어 짐더러 월성궁 여인을 내쳐라 하면 짐도 어쩔 수 없다 하는  것을 

아직도 모르

는가? 제 목숨이며 운명이 어진 중전의 자비에 의해 연명되고 있음을 안다면 저토록이나 중

전을 상대로 

고약하고 방자하게 굴지는 못할 것이다!’ 

왕은 어디 두고 보아라 하듯이 이 밤에 또다시 중궁에  들 것을 작정하였다. 보란듯이 승은

주고 날밤을 

몰라라 한 채 중전만 끼고 누워 원자라도 잉태하게 하면 저가 어쩔 것인데? 잘난 척하면 짐

을 괴롭히는 

희란마마 너 아주 강새암 나서 죽어버리렴 이런 심술이었다. 

‘한 몇 달 월성궁에 발길을 끊고 중전만  싸고돌아 볼까? 짐이 그러면 어쩔 것인데? 계집

이라 하면 다른 

사람 눈치보이는 저 말고도 쌔고 쌨다.  보자, 보자 하니 참말 방자하고  경우가 없는 이라. 

어데 두고 보

자고! 앞으로 한번만 더 중전을 상대로 방자하게 굴고 짐을 화나게 해보아라. 아주 경을 칠 

것이다.’ 

희란마마에게는 정말 안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밤에 중전을 욕하며 주상을 건드린 것은 희

란마마가 놓

은 악수(惡手) 중의 가장 큰 악수였다. 

사랑스럽고 순진한 어린 지어미에 대하여 지닌 수줍은 외사랑. 마음 가는대로 얻지 못한 사

모지정 그 것

은 도도한 왕이 난생 처음 느끼는 감정의 혼란이요 극심한 괴로움이었다. 

지아비가 지어미를 사모하고 은애하는 것이 무에 그리 큰 잘못일까? 

하지만 왕의 마음은 늘 그러하였다. 짐은 못나고 불측한 폭군이라 그 어질고 순결한 사람에

게 다가갈 자

격조차 없다 여기는 자격지심은 뿌리깊었고  뼈아팠다. 하물며 이미 정분주고  책임지마 한 

희란마마가 

있으니 처음 느낀 그 깊은 사모지정을 애초부터 단념하여야  한다 마음먹었다. 짐은 죽어도 

희란 누이를 

버리지 못하리라. 중전을 울려도 누이를 책임져야 하는 게다 싶으니 얼마나 왕 스스로 갈등

이 심하고 괴

롭고 심란하였던 것인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신이 원한 것은 모두다 가졌고 행하였으며  이루었다. 늘 그렇게 살아

왔으므로 그

래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런데 난생 처음 자신이 사무치게 원하는 그 사람. 유일하게  왕이 아닌 한 사내로써 바라

는 그 여인을 

향한 마음을 희란마마 저 하나 때문에 스스로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을 어찌 그리 모르는가? 

왕 앞에서 

중전을 두고 별별 무도한 악설을 겁도 없이 하였을 때 희란마마는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왕

의 저에 대한 

마지막 죄책감 혹은 의무감을 스스로 뭉개버린 것이다. 

천격 잉첩에게서 이년 저년 애먼 능멸을 당하는 중전이었다.  초야부터 지아비를 저에게 뺏

긴 가련한 그 

소녀에게 무어라. 어째? 

어리석고 방탕한 자신이 희란마마와 더불어 중전에게 저지른 그  일들, 중전에 대하여 미안

하고 안된 것

들만큼 왕은 희란마마가 너무도 괘씸했다. 자신이 욕을 들은 것보다  수천 배는 더 기분 나

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그 노염과  분노는 시간이 갈수록 더 끓어오를  뿐 진정되지가 않아 

왕은 미치고 

환장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왕은 아까 희란마마가 중전을 두고 더럽고 음탕한 년! 하고  욕을 하였을 적에 자칫

하였으면 그 

가증스런 얼굴을 후려칠 뻔했었다. 

방문을 박차고 나온 것도 더 이상 그녀의 입에서 중전에 대한 무도한 악설을 들을 수  없다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더 듣는 다면 자신이 희란마마에게 어떤 짓을 할 지 모른다 싶어서 서

둘러 그곳을 

빠져나온 것이다. 

얼마 후 희란마마에 대한 분노는 쓰디쓴 담즙과도 같은 후회로 변해갔다. 겁도 없이 방자하

게 중전더러 

그런 욕을 할 수 있은 것은 주상 당신이 지난날 중전마마를 하찮게 여겨 그녀를 앞에  두고 

이것저것이라 

함부로 능멸했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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