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200)

'서로 마음을 열어 한마음 한몸이 되자 약조를 한 것이 불과 어젯밤인데…  그 약속이 얼마

나 되었다고 

짐이 월성궁에 나간다 하면… 중전은 짐을 옳은 사람으로 아니 보아줄 것이야. 짐더러 헛맹

세나 하고 입

에 발린 거짓 약조나 하는 실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겠지. 이런 짐이 그이에게 어떻게 사랑을 

받겠어? 그 

것을 바라는 것이 염치가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란 누이를 버릴 수도 없지 않아? 

왕은 턱을 쓸어내렸다. 그의 고민은 바로 그 것이었다. 

홀몸되어 돌아온 누이의 청결한 정조를 함부로  깨뜨렸다 하는 것은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이다. 게다가 그녀 하나를 얻자고 그가 벌인 실정(失政)이 어디 한 두가지여야 말이

지. 

희란마마는 왕이 부끄러워하게 된 과거의 다른 이름이다. 자존심 강하고 도도한 왕으로서는 

지난날에 

저지른 잘못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희란마마와의  관계도 부인하고 싶지 않

은 것이다. 왕

은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체념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무어라 해도 짐이 누이는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절대로 버리면 아니 되지! 짐이 외로웠던 

지난날, 오

직 한사람 짐의 위로가 되어주고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던 이가 누이인데 어찌 짐이 그 사람

을 버리리? 

하물며 평생 책임지마 맹세하고 그 사람을 취하였던 터인데 사내 대장부가 한번 입 밖으로 

낸 맹세를 지

켜야 하지 않는가 이  말이다. 중전은 이러니 저러니  하여도 정궁(正宮)이 아니냐? 아무리 

우리 사이가 

멀어도 결국 짐 곁에서 사직의 안지존으로 위세부리며 살 것이지만 누이는 첩지 하나도 없

는 처지이니 

짐이 돌아보아 주지 않으면 그 날로 가련하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신세가 되는 사람이다. 중

전과 누이는 

그 신분으로 하늘과 땅 차이라 중전과 누이를 어찌 비교할 것이냐? 항시 약자는 누이인 것

이라, 짐이 누

이 편을 들어주어야지. 하물며 중전이 회임하여 원자를 낳아지면 훗날도 대비전으로 광영이 

자자할 것

이지만 누이는 짐이 흥하면 그 길로 삶이 가련해지는 여인이다. 오직 짐만을 바라보며 살아

가는 여인이 

누이인데 짐이 그이 편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중전에게는 훗날이라도 있지만 누이에게

는 오직 짐

만이 전부이지 않느냐?’ 

평생 짐은 중전을 올려야 하는구나. 그 순간 가슴이 빠개지도록 아팠다. 저절로  신음소리가 

흐를 정도로 

고통스러워 왕은 견딜 수가 없었다. 방탕하고 더할 나위없이 오만무도하였던 지난날이 자신

이 그렇게 

미워질 수 없는 순간이었다. 

바람도 없이 훈김을 머금은 고운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심란한 주상 당신의 마음처럼 비가 

하염없이 내

리는 것을 바라보는데 바깥에서 내관의 고변이 있었다. 당국  사신들이 도성에 들어온 터로 

그들을 수행

하여 온 효성군께서 오정이 넘어서 입시를 하신 것이다. 

"전하. 북도에 당국 사신을 맞으러 나가셨던 효성군 대감께서 행보를 마치시고 환도를 하셨

나이다. 다녀

오신 일을 고변하려 한다 알현을 청하시옵니다." 

"어서 뫼시어라! 짐이 이제껏 효성 숙부를 기다렸던 터이다!" 

   

효성군이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편전에 듭시었다. 왕은 서안을  앞에 두고 용라도 우수영에

서 올라온 장

궤 두루마리를 읽고 있던 참이었다. 병조판서 남회를 곁에 두고 좌우수영 사정을 듣던 터로 

두루마리를 

접으며 엎드려 절을 하는 효성군 대감에게 가까이 다가와  앉으시라 손짓을 하셨다. 주위를 

물리쳐라 하

였다. 

   

"숙부께서 이렇게 짐을 위하여 고생을  하시니 짐이 그저 송구하오이다.  허나 짐이 숙부께 

은밀히 중임

(重任)을 부탁한 터라 궁금하여서요. 노독이 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싶었지만은 염치없으되 

이내 듭시

라 하였소이다. 효성 숙부께서는 이리 더 가까이 다가앉으시오! 바깥에 들릴까봐 짐이 모다 

수하를 물리

친 참이오이다. 허면은 그들이 이번서도 말을 끌고 왔소이까?" 

"예, 마마. 아주 튼실한 군마(軍馬)로 하여 오백여 필을 끌고 온 줄 아옵니다." 

   

나직한 효성군의 말에 왕의 미간에 주름살이 졌다. 격한 성정이시니 전하, 이를 악물며 서안

을 주먹으로 

쳤다. 

   

"망할 놈들! 죽지 않을 만큼만 감질나게 질금질금 준다는 말이렸다? 흥, 너들의 군마가 아니

면 짐이 말

을 구할 방도가 없는 줄 아느냐? 미곡만 내어 준다 할 것이면 국경의 호진족들이 당장에라

도 한혈마를 

이천여 필 몰고 온다 하였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으되 이 몇 년간 계속하여 왕은 당국에서 군마들을 사들이는 형편이었

다. 단국에

서 키우는 말의 종자라 하는 것이 겨우 등짐 몇 가닥 실어 나르는 조랑말 수준이라, 도무지 

병사들이 타

고 전장에 나갈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함이 항시 불만이었다.  강병 키우는 일에 관심이 많으

신 터로 그리

하여 상감마마, 은밀히 이 몇 년 동안 계속하여 대국의  준마들을 사들여 제주 땅에서 키우

시는 중이시

다. 

이번에도 효성군 이하 신하들을 시켜 사신들 마중을 내보내면서 은밀히 하명하시기  천금을 

준다 하더라

도 이번서도 군마(軍馬) 천여 필은 구해 보시오 하였다. 그러나 저들과 국경을 마주한 터로 

아무리 선린

이라 하지만은 군마를 한꺼번에 그렇게 푸는 것이 마땅찮은 사신들이 이번서도 겨우 오백여 

필만 끌고 

왔다 하는 기별에 왕은 답답증이라. 괜히 골이 나신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요, 숙부. 허면은... 짐이 부탁한  그 일은 어찌 되었소이까? 붕랑기포는 

구할 수 있

을 것 같소이까?" 

   

상감마마 목청이 더 낮아졌다. 마주하여 하답하는 효성군의 목청도 한층 더 낮아졌다. 

   

"구하였나이다! 전하. 사신의 우두머리가 북도 어림군 도독과 한통속이어서 어렵게 신이  사

정하여 구하

였나이다. 게다가 화약까정도 가져온 터입니다." 

   

군마(軍馬)의 일로 구겨졌던 왕의 용안이 다소간 밝아졌다. 실상 전하께서 은밀히 효성군에

게 밀명을 

내리시기 잘 통하는 사신들과 밀착하여 어찌하든지 대국서 내놓지 않는 불랑기포를  구하여

보시오 분부

를 내리신 터였기 때문이다. 

   

"잘하였군! 역시 숙부께서 그리 큰일을 해내실 줄을 알았나이다. 짐이 비로소 다소간 근심을 

덜었소이

다. 헌데 그들이 그 대가로 금은 얼마나 바란다던가요?" 

"대놓고 말은 하지 않으되 한 이 삼백근 정도.." 

   

전하, 효성군의 말에 혀를 쯧쯧 찼다. 

   

역시 당국놈들은 통도 큽니다 그려. 그렇지 않소이까, 숙부? 아국의 금 생산량이 겨우  일년

에 천여 근인

데 저들이 바라기 삼백 근을  바래요? 날강도 같은 놈들..." 

"대신 불랑기포가 열 문이나 되옵니다." 

   

상감마마, 이를 갈며 흥 하고 코웃음을 날렸다. 

   

"그래보았자 겨우 십여 문이 아닙니까? 지금 저  놈들은 짐더러 그 불랑기포 열 문과  황금 

수백근 을 바

꾸자 이리 겁 없이 나서는 양  아닙니까? 기가 막혀서! 은근히 저들 나가가  대국이라고 그 

위세를 업고 

짐을 핍박함이 이리도 어이없으니 나라가 작은 탓이지요. 그 설움이올시다. 헌데 짐이  궁금

하오이다. 절

대로 내놓지 않을 불랑기포까정 몰래 빼돌리며 북도 어림군이 황금을 구함은 대체 어인 뜻

인고?" 

"쉬쉬하는 일이되 지난번 당국서 남만으로 보낸 원정군이 실패하여 당 조정  창고가 말랐다 

하옵니다. 그

래서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군자금이 말라붙은 터라, 저들 세력  다툼이 치열하니 북도 어림

군 도독이 그 

세력 싸움에 밀리지 않으려고 그렇게 황금 구하기 혈안이 되었다 전해 들었나이다." 

"음, 당국의 임금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터이며 나이가 들어  노망이 났다 하더니 조정 이끌

어가는 꼴이 

그리 어리석은 것이겠지! 따지고 보면은  북도 어림군 도독이라 하는  자도 웃기는 놈이야! 

겨우 저의 영

달과 입신을 위하여 절대로 타국으로는 아니 내보낸다하는 불랑기포를 겨우 황금  수백근과 

바꾸자 함이 

아닌가? 그런 자를 믿고서 국경을 맡긴 터로 발뻗고 자는 당국임금이라, 실로 같잖다 할 것

이오." 

도도하게 왕은 코방귀를 뀌었다. 같잖고 어리석다 비웃는 양이었다. 효성군 쪽으로 몸을  내

밀고 한층 더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보다, 숙부. 황금으로 포를 구하였다 하면은... 이 말을 뒤집어 보면은 황금만 더 준다 할 

것이면 불랑

기포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더 살 수 있다 이 말이 아닌가요?" 

"그리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효성군 대신에 병조판서 남회가 곁에서 한 마디 하였다. 전하께서 싱긋 웃었다. 

   

"짐이 황금 삼백근을 내어드릴 것이니 이 밤 안으로  저들이 가져온 포를 인수하십시오. 짐

이 장내관에게 

이미 말을 하였으니 내수사에 가면은 황금을 내어줄 것이오. 허고 병판 그대는 심복을 시켜 

미복하고 그

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구할 수 있는 불랑기포를 흥정하시오. 살수  있는 대로 다 살 것이

되 급한 것은 

저들이라, 잘만 흥정하면 황금을 다소간 절약할 수도 있을 것이야. 포를 구하면은 바로 중수

영으로 내려

보내 감추어 두고 낱낱이 뜯어서 그대로 제작케 하여야 할 것이야. 김어진이 중수영에 숨어

서 이미 수십 

대의 불랑기포를 몇 년간 뜯어본 고로 인제 두어 번만 더 분해하여 본다 할 것이면 대강 비

슷하게 제작

을 할 수 있다 하였다. 그가 성공만 하면 인제 우리도 불랑기포를 가질 수 있음이라, 저들이 

난리를 부려

보았자 이미 물 건너간 일이 될 것이다." 

"분부대로 할 것입니다." 

"아국에서 불랑기포만 직접 만들 수 있다 할 것이면  왜구의 발호는 물론이요, 당병들 뒷통

수도 칠 수 있

을 것이다. 인제 천리장성이 다 쌓아질 것이면 게에다 곳곳에  포대를 만들어 서 포대를 장

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감히 우리 국경선을 누가 침범할 수 있을 것인가? 짐은 오직 이런 날만 기다리

고 있었던 것

이라. 선대왕 아바마마 뿐 아니라 국조 태조 대왕서부터 모든 열성조들의 염원인 북도 땅을 

짐 대에 이

르러서 회복할 수 있을 지 뉘가 안다더냐?" 

왕의 선명한 입술에 실죽 만족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고개를  들고 효성군과 남회를 바라보

았다. 

"짐의 이 뜻은 오직 숙부와 그대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니 다른 사람 눈에 띄어서 좋을 것

이 없다. 두 

분은 뒷문으로 은밀히 나가시오. 장내관이 안내할 것이야." 

   

효성군과 남회가 전하의 하명을 받잡고는 뒷문을 통해 사라졌다.  비로소 왕은 지루하게 뜰 

안에서 기다

리던 좌위정 이하 중신들을 불러 들이셨다. 

   

"짐이 숙부로부터 사신들 접대한 이야기를 듣느라  경들을 다소 기다리게 하였소이다. 허면

은 사신들은 

지금 사은사에 머물고 있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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