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리보전하였다는 이야기를 하면 바로 전하께서 만사작파하고 월성궁으로 달려오실 것
이다. 자신
만만하였던 희란마마의 예상과는 다소 달랐지만 여하튼 그녀가 앓아 누웠다는 말 한마디는
효과가 있었
다. 곧 월성궁으로 나가마 하시는 전하의 말씀을 듣고 돌아서는 김내관 놈의 입가에 역시
나! 하듯이 실
쭉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흥, 전하께서 은근히 중전마마하고 새 정분이 드느니 하는 말은 말짱 헛소문이다! 연해 중
궁전으로 납
시었으면 무엇해? 침방 나인들 말로는 매일 밤마다 중전마마를 구박하고 능멸하며 심지어
쥐어박기까
지 하여 울음보를 터뜨리게 하셨다는데… 이러니 저러니 하여도 큰마마께서 아프다는 말 한
마디를 듣자
마자 당장 월성궁으로 나가시겟다 하는 분이시거늘? 지난번 일로 다소 노화가 나셨지만은
시각이 지나
니 심화도 가라앉으신 게지. 이만 보아도 상감마마 심중에 월성궁 마마는 견줄 데가 없이
소중한 여인이
라는 것이 다시 한번 증명된 셈이 아니고 무엇이냐? 두 분 사이 정분이 예전만 같지 않다는
소문은 말도
아니 되는 헛소문인 게야.’
그러나 김내관의 자신만만과는 달리 교자타고 편전을 나가는 왕의 이맛살은 찌푸려져 있었
다. 영명하신
분이니 희란마마의 병치레가 반은 꾀병이라는 것을 보지 않아도 직감하셨기 때문이다.
'허구헌 날 짐을 두고 손가락 끝으로 오라가라 하던 이가 아니냐? 지난번 일로 짐이 경계하
느라 발길을
끊었더니 노란 게지. 게다가 짐이 중궁전에 든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니 그 강새암인 이가
벌벌 방바닥
을 기었을 것이다. 짐이 나가면 그야말로 패악질이 볼만하겠구먼? 시퍼런 은장도를 목에 대
고 죽느니
사느니 또 한번 난리를 칠 것이다. 알만 해. 참말 미치겠구나!'
지금까지의 희란마마 행태에 어디 한두번 당하였어야지. 월성궁에 나가면 그녀가 어찌할지
졸졸 꿰고
있는 왕이었다.
지금껏 조금이라도 소년 왕이 자신에게 섭섭하게 하면 희란마마는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온
통 넋을 빼
놓고는 하였다. 어리숙한 왕을 후려잡는 기승스러운 짜증과 그 패악질이 하도 장하니 솔직
히 왕은 도무
지 그것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바보멍충이처럼 누이 말대로 하오 한발 물러선 것이 부지
기수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왕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월성궁 누이의 패악질과 앙탈을 어찌 감당하지 하는 근심걱정보다 몹시도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
다. 싫든 좋든 그녀갸 부르니 반드시 월성궁으로 나가야한다는 것에서도 무척 짜증스럽고
기분이 상하
였다.
'짐은 왕인데 짐이 가고 싶으면 가는 것이고, 아니 가고 싶으면 아니 가는 것이지! 감히 누
구더러 오라
가라 하는 것이야? 여인이면 정숙하게 내전을 지키고 있으면서 짐의 발길을 기대리는 것이
근본이거늘,
이 것은 말이야. 꼭 저가 주인이라도 된 양 오라 가라 마음대로 이니.. 제길! 짐이 그 동안
누이 버릇을
너무 잘못 들여놓았구나.’
일의 전후 사정은 어찌 되었건 희란마마가 난리를 칠 적이면 소년왕은 무작정 짐이 잘못하
였소 하고 먼
저 엎드린 적이 많았다. 당연히 희란마마가 이 나라의 여황(女皇)이요, 지존이신 왕은 겨우
월성궁 마마
의 치마꼬리나 들고 다니는 처지라는 민망한 구설이 아니 날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희란마마도 그렇거니와 그런 소문을 믿는 모든 사람은 참말 큰 오판을 하고 있었다.
실상 왕이 희란마마의 말이라면 무작정 들어주고 그녀의 도를 넘는 방자한 패악질까지 덤덤
하게 넘기고
마는 것은 사람들이 알고 있기로 그녀를 이기지 못하여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대왕의 오직 한 분 혈손으로 태어나시었다. 자라기도 앞으로 보위를 이으실 분으로 떠받
들음만 받으
셨고 왕이 될 교육만을 받으신 분이다. 하여 왕은 짐은 지존이다 하는 자의식이 누구보다
강할 수밖에
없었다. 도도하고 자존심이 강한 천성에다 그런 자의식이 겹쳤으니 왕은 어느 누구도 자신
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눈 동그랗게 뜨고 방자하게 덤벼드는 꼴도 보지 못
하였다. 오죽
하였으면 팔십이 넘은 노신(老臣)들에게 너라고 막말을 하며 삿대질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 얼굴에
두루마리를 던지기까지 할까?
단 한사람, 왕이 무엇이든 참아주고 무작정 들어주는 이는 딱 한사람 희란 마마였다. 그녀를
비길 데 없
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끼고 은애하는 여인이므로 행복하게 해주어야만 했다. 명색이 사내 대장부로써 정
분을 준 여
인의 눈에서 눈물을 빼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하는 의무감. 바로 그것이 희란마마의 방자
한 앙탈을 용
서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또 하나, 씻을 수 없는 깊은 죄책감도 한몫하였다. 홀몸이 되어 돌아온 청결한 누이의 정조
를 짐이 깬
터. 그 인생을 흙탕물로 만들었으니 책임을 지마 하는 의무감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지못해
서, 혹은 즐
거이 희란마마가 바란 모든 것을 양보하고 이루어주었던 왕이었다.
하물며 왕 된 체통과 위엄이 있는데 계집과 더불어 있다가 그녀를 다스리지 못하여 큰소리
가 나면 사내
인 왕 자신만 망신이라. 도도한 자존심을 가진 왕이 희란마마에게만 져주는 것은 그런 이유
도 큰 몫을
하였던 것이다.
'제길. 짐이 지금껏 그저 제 말을 웬만하면 들어주었더니 말야. 아주 짐을 먹물로 아는고나?
제 손가락
질 하나로 움직이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야! 제길. 다시는 가지 말아 버릴까보
다.’
왕은 희란마마의 엄살과 협박에 휘둘린 자신의 지난날을 비로소 깊이 후회하였다. 오냐, 오
냐만 하다가
못된 버릇을 들여놓고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할 깊은 늪에 빠져들었다는 어떤 불길한 자각으
로 등골이 오
싹하였다.
'그러니 감히 짐 곁에 눈을 붙이고 짐의 행적을 알자 하며 사사건건 간섭하려는 짓까정 하
였겠지. 짐이
게로 들어가면 필시 죽는다 난리를 칠 것이다? 다시는 중전을 돌아보지도 말라 패악질을 하
겠지. 같잖
다! 천한 잉첩주제에 사사건건 짐의 발목을 잡고 짐을 제 맘대로 움직이려 하다니… 짐이
허구헌 날 제
치마 자락 안에서 노닐던 열 다섯 어린애인줄 아는가? 이번에도 또 죽어버린다 난리를 치
면… 어디 한
번 죽어 보라 일갈을 해버릴까? 정말 죽는지 한번 보지 뭐.’
그런 생각을 하다가 왕은 문득 소스라쳤다. 짐이 누이더러 죽어 버려라 고함을 지른다고?
어떻게 짐이
이런 생각까정 하게 되었는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왕이 무서운 자각을 하게 된 것은…
처음 반억지 깡고집으로 희란마마를 얻었을 적에 왕은 잠시도 그녀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으면 벌벌
떨었다. 잠을 잘 때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혹여 자신이 침수를 할 적에 희란마마를 왕대비
가 끌고 나가
목을 칠까봐 두려워서 밤낮으로 눈앞에 두어야했었다. 침수를 할 적에도 그녀가 없으면 내
가 잠이 든 순
간 누이가 끌려나가 곤욕을 치르지는 않을까 근심이 되어 곁에 두어야만 했었다. 그만큼 깊
이 깊이 사모
하여 얻은 사촌누이에게 집착을 했었던 지난날이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왕은 느낀 것이다. 자신이 희란마마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이제는 간
절하고안타까
운 예전같지만은 않다는 것을, 더 이상 주상 된 위엄까지 희생해가며 그녀를 참아내고 보살
피고 싶지는
않다는 것을…
다만 광증(狂症)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일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게 그녀에게 집착했
던 칠팔년의
정염는 그렇게 한 순간에 식어가는가? 편전의 월대를 걸어가던 왕은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
버렸다.
-“누이가 없으면 짐은 살 수 없소. 그러니 평생 짐의 곁에 있어주오.”
칠 년 전, 북문 사냥터에서 처음으로 금단의 정분을 맺은 후 희란마마를 끌어안고 맹세하였
다.
-“누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줄 것이오! 절대로 누이 눈에서 눈물을 빼게 하지
는 않을 것이
오. 천하를 달라 하여도 줄 것이오. 그러니 제발 짐을 받아주오!”
그 맹세를 지금껏 지켜왔다 자부한다. 스스로 폭군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며 그녀 한사람
의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고 왕 자신의 위엄까지 더럽혔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지난날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야!'
본능처럼 왕은 작은 제비꽃처럼 소박하고 향기로우며 고귀한 자신의 어린 비를 생각하였다.
소중하고
소중하여 차마 건드릴 수조차 없다고 여기는 그 사람. 짐처럼 어리석고 멍청한 폭군은 그
고운 사람에게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다 느끼는 그 마음을 떠올리며 왕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서
야 뚜렷하게
보였다. 왕 자신의 마음이 흘러가 샘처럼 고인 곳이 진정 어디인가를…
'누이를 사모한다 생각하였는데 이제 보니 다만 죄책감이요, 책임감이었구나. 짐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
하기 싫어 끝까지 사랑의 이름으로 눈을 가렸으되 짐은 실상 누이를 안은 그 순간부터 후회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누이와 맺은 세월지정이 너무 길어 뗄 수가 없구나. 누이는 바로 지난
날 어리석고
오만방자한 짐의 얼굴이나 다름없으니… 누이를 얻잡시고, 그 명분으로 무작정 하고싶은 대
로 이 사직
을 마음대로 어지럽힌 것은 짐이었다. 그런 짐이 저지른 실정의 원흉으로 희란 누이가 욕을
먹고 있는
것일지면 그이를 외면하고 거부하면 짐의 지난날 망신을 그이에게 떠넘기려 함이라… 그럴
수는 없지
않느냐…’
한없이 괴로운 자각이었다. 그런 터로 왕은 하루종일 몹시도 우울했다. 마치 자신의 발이 무
거운 족쇄에
매인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마음은 이미 떠났지만 그 몸을 움직일 수 없구나 하는 답답함
혹은 체념 같
은 것. 순결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어린 왕비가 보내온 찻물을 마시며 그는 더 우울하다.
'이제 겨우 짐의 마음을 조금 내보였는데… 비로소 어제는 그이도 짐에게 떨지 않고 안겨주
었는데…'
왕은 이 찻물을 끓였을 왕비의 투명한 손을 생각한다. 그가 입맞춤을 했을 때에 주저주저
자신의 볼을
살짝 어루만지던 수줍은 그녀의 손길이 너무 부드럽고 따스하여 그는 잠이 들 때까지 행복
했었다.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보드라운 볼에 얼굴을 비비며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었다. 맑
은 호수같이
순수하고 깨끗한 왕비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억지로나마 사모한다 하는 고백을 받은 지난밤
이 가장 행
복했다 생각한다.
'짐이 월성궁으로 나가면 비는 무슨 생각을 할까? 섭섭하여 울까? 짐이 저를 괴롭히지 아니
한다 안도를
할까? 저도 여인인데 투기를 해줄까?…’
중전생각을 하자 이미 월성궁 희란마마 생각은 뒷전이다. 병들어 곧 죽게 생겼네 난리치는
희란마마 걱
정은 하나도 아니 하고 왕은 중전생각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