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200)

"중전마마께서 소녀 시절 친하게 지내시던 일가 언니들이 부원군께서 같이 들어오시었답니 

다. 반가워서 중전마마께서 그리 좋아하셨답니다. 다담상을 내리시고 환담하신 다음 금원이 

며 궐 구경 이리저리 하시옵고 금세 부원군께서 나가시려 하는 것을 중전마마께서 못내 만 

류하시었답니다. 사친의 소매자락을 잡고 분부하시기를 제발 석수라만 같이 받자옵고 나가 

시옵소서 하셨답니다. 하여 부원군께서 못 이겨서 석수라 같이 받으신 것인데 중전마마께서 

부원군 상머리에 앉아 손수 나물 반찬 정하게 무쳐 올리라 하시어서는 그 반찬을 수저에 놓 

아 드리면서서 딸년 소혜가 아버님께 진지상 이제야 차려 드립니다 하였기로 모두다 울었다 

합니다. 기어코 부원군께서 더 있지 못하리라 하시며 나가시려 하시니 중전마마께서 직접 

수놓으신 부모은중경 병풍을 하사하시었는데 부원군께서 그만…" 

"부원군께서 그만, 이라니?…. 무슨 일이 있었느냐?" 

왕은 눈을 치뜨며 장내관을 바라보았다. 장내관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아, 아니옵니다! 별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옵고…" 

"허면은?" 

"너무 감격하신 터라 그만 부원군께서 그 점잖은 체면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눈물을 보이셨 

다 합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조복을 적실 정도였으니, 중궁전 월동문 넘어 나가시면서 

까정 계속 노인이 울고 가시는지라...... 중전마마께서는 차마 사친 보고있는 데서는 울지 못 

하시고 강잉히 참으시며 누루에 올라 그저 부원군께서 나가는 것을 보며 한동안 서 계시었 

는데, 그러다가 부원군께서 아니 보이시니, 아버님!하고 부르시며 그저 울고 계신 참이라, 

중궁전 궁녀들이 모다 따라 울었다 하옵니다." 

말 한마디도 아끼는 점잖은 부원군이 따님이신 중전마마께서 하사하신 부모은중경을 받고 

그저 울며 나갔다 하는 말을 들으셨다. 그 순간에 용안에 붉은 기가 확 돋았다. 쓰고있던 

붓을 휙하니 던져버리며 뇌까렸다. 

"흥, 기가 막혀서. 오랜만에 사친 만나지어 즐거운 날에 울기는 왜 우는 것이야? 중궁전에 

때아닌 초상이라도 난 것이더냐? 같잖도다! 노인께서 그리 눈물을 보이셨다 함은 바로 짐 

을 비난하는 것이다. 제 모자란 딸년 소박 준다하여 짐더러 시위하는 것이 아니겠더냐? 짐 

이 그럴 것이다 생각하여 부원군이 중전 찾아 입궐하는 것이 마땅찮았던 것이다!" 

가긍하고 애타는 중전마마와 부원군 사연을 들은 사람이라면 모두다 울컥 눈물이 나는 것이 

상궤인데 오직 한분 상감마마만 코웃음이었다. 당장 장내관의 말에 노여운 기색을 역력하게 

보이며 치받았다. 쌀쌀맞기 그지없고 모질었다. 입꼬리가 절로 비틀어지며 내뱉으시는 말씀 

이 그렇게 심술궂은 억지가 전부였다. 

솔직한 심사로 따질 것이면 왕은 참으로 마음이 불편하였다. 

부원군의 그 눈물이 바로 왕 당신에게 쏘아지는 원망이겠지. 그야말로 하루종일 좌불안석 

(坐不安席). 마음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고 불안하였다. 

나이 사십줄에 하나 얻은 외딸을 궐에 들여보내고 하냥 그리워하였을 아비의 심사가 오죽하 

랴? 그저 안타깝고 가엾었을 것인데 게다가 그 딸의 처지가 도무지 행복하지 않다 함을 눈 

으로 보았을 것이니 어찌 노인의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질 것인가? 

행여 그럴 리는 없지만은 성정 곧은 부원군이 중전의 손을 잡고 데려갈까 왕은 솔직히 하루

종일 

가슴이 떨렸다. 그런 불편함과 이유없는 두려움이 극도의 심술궂은 반응으로 나타나게 되었 

다. 왕은 짜증스럽게 말을 비틀어 한마디 더하고야 만다. 

"제 역성 다 들어주는 친 아비이니 구구절절 심중의 말을 다 털어놓고 대놓고 짐을 원망하 

였겠지. 짐 욕을 많이 하였을 것이다? 제 못난 꼴은 생각지도 않고 짐더러 저를 버려 둔다 

했을 게야. 심지어 우원전까정 희란 누이 불러 침수하는 염치없는 폭군이라 짐을 비웃었을 

것이다. 듣지 않아도 뻔하다!" 

"아이고, 전하! 천부당 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어찌 어질디 어진 중점마마께서 감히 전 

하를 두고 그런 무엄한 구설을 입에 담으실 것입니까? 아니옵니다! 허고 부원군께서도 오직 

중전마마께 되풀이하여 당부하시기를 사직의 안지존으로서의 부덕과 위엄을 기르는 공부를 

하시라 그 말씀뿐이었다 합니다. 그런 말씀은 마옵소서," 

"흥, 뻔할 뻔 자(字)지. 짐은 눈도 없고 귀도 없더냐? .아무 것도 모르는 멍충이인 줄 알았 

느냐? 못난 것이 꼴값을 떤다고 눈물보 터뜨린다 하였을 적에 이미 알아보았다! 아비라 그 

저 제 편이니 그저 미주알 고주알 짐 욕을 하였겠지. 천하에 고약하고 같잖은 것 같으니라 

고!" 

장내관은 억지뿐인 상감마마 말씀에 더 이상 할말이 없어 그저 고개만 조아렸다. 

아무리 아니라 한들 이렇게 당신이 먼저 지레짐작하여 믿어 버리는 데야 어쩔 것이냐? 어질 

디 어진 분이며 생보살 같으신 분이 우리 중전마마이시거늘. 어찌 가장 곱다 하셔야 할 분 

인 지아비이신 전하께서만 저리도 매사 그분을 두고 심술에 억지이며 애맨 트집질이실까? 

'전하와 궁합이 가장 좋다하는 처자로 골라서 간택한 분이 바로 중전마마인데 어찌 이리 매 

사가 아니 맞고 뒤틀어지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이유를 알 수 없음이다. 전하께서는 대체 

왜 중전마마라 할 것이면 그저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인지… 휴우-실로 내가 근심이로다. 

대체 이 늙은 것이 어찌하면 두분 마마께서 다정한 정분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두분께 

서 다른 부부지간처럼 정분이 좋으시다 할 것이면 이 늙은 것은 당장에 죽어도 여한이 없 

다. 내가 훗날 저승에 가면 동궁을 부탁하마 하신 선대왕 전하를 뵈올 면목조차 없는 것이 

다.' 

전하께서 말도 없이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는 장내관을 힐끗 바라보았다. 

"멍청하게 게서 꾸벅꾸벅 졸고 있지 말고 나가라. 너는 꼭 짐이 침소에 들면 나간다 고집 

피우더라? 노인이 나가서 편하게 잘 일이지 굳이 게서 무엇하는 것이냐?" 

심술 부리던 뒤끝이라 목청은 불퉁하셨되 나가서 편안하게 자라 하시었다. 늙은 장내관의 

사정을 보아주는 다정한 말씀이시다. 겉으로는 다소 쌀쌀맞으시되 부당하게 잔인하거나 차 

가우신 분이 아니다. 명민하고 사리분별 밝다 어렸을 적부터 소문나신 분이엇다. 그런데 오 

직 한 분 중전마마께만은 어찌 그리도 무정하고 모진 것일까. 

'월성궁 아니 가시고 교태전에 듭시면 무엇해? 어젯밤 몽상궁이 살짝 귀뜸하기를, 투닥투닥 

괜스리 중전마마를 말로 후려잡으시고는, 교접도 아니하시고 침수만 하시었다 하더구먼. 휴 

우- 이래서야 언제 원자 아기씨가 생길 것이며 두 분 사이 정분이 날 것이더냐?' 

늙은 장내관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대전을 벗어났다. 

가엾은 우리 중전마마… 장내괸의 노안이 어느새 젖어들었다. 어린 중전마마가 하염없이 가 

엾고 안타까웠다. 그저 울면서 궁문을 나섰다는 부원군이 불쌍하였다. 

장내관을 내보내고 기오헌에 홀로 앉으신 전하께서는 그럼 어떠한가? 

왕은 붓을 놓고 그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깊은 후회이다. 낯뜨거운 민망함이다. 

아니 괴로운 자괴감이다. 

'그저 부원군께서 울다가 나가셨다?...... 중전도 그저 까치발을 한 채 사친이 나가시는 것을 

바라보며 울었다지? 그 부녀의 눈물은 실로 짐을 원망하는 것일지니, 짐이 그들에게 못할 

짓을 많이도 하고 있다. 대체 중전이 무슨 말을 하였길래 점잖은 노인이 한없이 울다 나갔 

다 이 말이냐? 그이가 짐의 원망을 많이도 한 것인가? 허기는 제 입으로 궐문 열리면 폐비 

되어 걸어나간다 하는 사람인데 오죽할까?' 

용안이 붉으락푸르락 하였다. 그러나 왕은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부인하듯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비는 어질고 착한 사람이니 아무리 사친 앞이라 하여도 그런 말을 대 놓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야… 하지만은 도대체 그이들은 짐을 두고 무슨 말을 하였을까? 짐은 정말 궁금 

하다. 실상 후회하느니, 두해 만에 가례를 치른 후, 처음 입궐하신 분인데 짐이 다담상 하나 

도 내리지 않은 터라, 짐이 무정하다 소리를 들어도 할말이 없는 것이다.' 

왕은 한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심각한 생각을 할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허공을 바라보 

는 눈빛이 쓸쓸하였다. 

'그런데 중전은 실로 좋겠구나. 그나마 그이에게는 제 속마음 털어놓고 이해하여줄 아비라 

도 있으니 말이야. 천지간 짐은 오직 홀로인데… 오직 한 분 남은 할마마마까정도 척이 져 

서 짐의 낯도 제대로 보아 주시지도 않는데. 멀디 먼 숙부 두분 뿐, 지어미인 저하고도 그 

리 멀고 사이가 나쁘니 말 한마디 마음놓고 나눌 수도 없는 처지인데… 그이는 그나마 제 

아비라도 있으니 얼마나 든든할 것이던가? 솔직히 짐은 중전이 너무 부럽다.' 

부원군이 중전을 만나 하루종일 같이 지낸 시간동안 왕의 심사에 돋아나던 기묘한 투기심이 

있었다. 부원군을 대함에 있어 무엇인가 난처하고 부끄러움이 생기는 것 못지 않게 왕의 깊 

은 심사에서 무럭무럭 자라던 이상한 마음 하나, 그것은 뜻밖에도 중전 그대는 참으로 좋겠 

구나하는 일종의 쓸쓸한 부러움이었다. 

'그래, 그나마 그대는 네 처지 가려주고 같이 아파해 주는 아비라도 있으니 좋?구나. 짐은 

천지간 오직 혼자인데… 그나마 그대는 사친이라도 있으니 둘러칠 뒷곁이며 의지가 아닐 것 

이냐? 짐은 오직 혼자인데… 짐은 그렇게 사무치게 외로운 사람인데 중전 그대는 그래도 사 

정 편들어주고 역성들며 아껴주는 아비라도 있으니 짐보다는 나은 처지로 사는 사람이다.' 

왕은 훌쩍 일어섰다. 중전 그대는 짐에게 있어 유일한 사람. 천하에서 가장 외로운 짐의 마 

지막 마음곁이라. 이 밤에 그대에게 가련다. 

***********

밤이 이미 깊어 가는 지라 사방은 적요하고 천지는 캄캄하다. 중궁도 어느새 불이 거의 꺼 

지고 몇 개의 방에만 불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불이 아직도 켜진 그 방 중 하나가 중전마마가 앉아있는 서온돌 침전이었다. 

자리옷으로 갈아입고 금침 깔린 아랫목에 귀밑머리를 풀고 있었다. 그러나 왕비는 밤새도 

깃을 접고 잠이 든 지금까지 하염없이 그저 서안에 팔을 기대고 앉아만 있었다. 

아무리 마음을 가라앉히자 하여도 심란하고 우울하여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 밤에 나 

처럼 아버님께서도 집에 돌아가시어 가련한 딸년 팔자 생각하시며 필시 잠 못 주무시고 앉 

아 계시겠거니..... 

중전마마 여린 볼에 주르르 눈물이 흐른 것은 바로 그때. 

"아버님…" 

홀로 나지막히 사친을 불러보는데 어린 왕비는 정말로 외롭다 싶었다. 천지사방 아무도 없 

는 적망강산에 오직 혼자 버려진 느낌. 차라리 뵙지 못하고 애써 외면하고 살 적에는 차라 

리 나았었다. 그러나 정작 초췌하고 늙어진 사친의 어진 노안을 뵈옵고 나니 그 그리운 정 

은 하염없으며 서러운 마음은 갈수록 깊어지니 어찌할 것이더냐? 

'아버님. 할 수만 있다 하면 소혜가 당장에라도 사가로 나가서 아버님 시중 들어드리고 그 

노안에 깊어진 주름살을 펴드릴 것인데…… 심중의 시름이 깊으시어 그리 늙으신 게지요. 

필시 소박데기 면치 못하는 이 어리석은 여아를 근심함으로 주름살이 깊어짐이라. 저가 그 

저 불효입니다. 아버님. 소녀가 부덕이 부족하와 지아비 성총 얻지 못한 고로 이리 뒷방신 

세라, 그 망극함을 아버님께서 대신 견디심이니 어찌 하오리까?' 

왕비는 사친의 말씀 중에 저가 부원군이 되지 않아야 했다는 말이 가슴에 사무쳤다. 그 말 

한마디가 늙은 아비가 심중에 깊이 감춰둔 진실임을 알고 있었다. 

지아비께 하냥 소박받는 따님을 바라보는 친정 아비의 가엾고 애달픈 심사. 차마 말로도 표 

현하지 못하는 피어린 아픔을 어찌 따님이신 중전마마께서 모르실 것이더냐? 

아버님… 

자기도 모르게 중전의 여린 볼에 또다시 눈물이 굴러 내렸다. 

'아까 중궁전에서 나가실 적에 소녀를 바라보시던 그 눈빛을 제가 압니다. 당장에 제 손목 

잡고서 예서 나가자구나 이러하실 참이셨지요. 단 한순간도 더 무덤 같은 이 곳에서 수모 

당하지 말고 우리 같이 죽어 버리자구나 이런 뜻이라...... 실상 아버님. 이 불민한 여식은 

아버님께서 소매춤에서 비수라도 내어주기를 바래었나이다. 이렇게 매사 지아비 구박덩이 

라, 살아도 산목숨이 아닌 것이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소녀의 이 참담한 심사. 아버님 

은 아시지요? 예. 아버님께서만은 이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사가로 나가고 싶다. 중전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님을 한번만 뵈오면 그것으로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 생각하였다. 헌데 정작 뵙고 나니 한번 더 뵙고싶고 그리웠다. 

'내일이라도 할마마마께 가서 주청을 드려야지. 새봄이 되면 궐에 들어온 지 벌써 세 해라. 

사가로 거동을 할 수 있다합니다. 한번만 내보내 주십시오 간청드릴 것이야. 나날이 병약해 

지신 터라, 언제 아버님께서 세상을 버릴 지도 모르는데 법도에 밀려 내가 아버님을 다시 

뵙지 못하고 행여 불행한 일을 당하면 내가 못살 것이다.' 

당장 모시는 윗전의 침전에 오래도록 불이 꺼지지 않니 어쩔 수가 없다. 물 

러가라 하는 하명을 기다리며 서온돌 문 앞에서 꾸벅꾸벅 중궁전 아랫것들이 그저 졸고 있 

구나. 그때 갑자기 날벼락이었다. 

내관 한사람에게 초롱 들리게 하고 나타난 검은 그림자. 미리 기별도 없이 상감마마께 

서 듭신 것이다. 

대전마마 듭시었나이다 고변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황황히 놀란 나인들이 고개 조아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왕은 급하고 격한 손길로 서온돌 문을 홱 하니 젖히었다. 입술을 꽉 다문 

용안이 심상치 않았다. 또 이 밤에 무슨 심술로 우리 중전마마를 괴롭히러 오시었노? 벼락 

같이 열리는 문소리가 요란하였다. 

"에구머니!" 

요란하게 문을 열어 젖히는 문소리에 중전은 간이 떨어질 듯이 놀라 자지러졌다. 본능적으 

로 자리옷 가슴을 두 팔로 가리며 동그란 눈을 들었다. 허공에서 왕과 왕비의 눈길이 딱 마 

주쳤다. 

아직도 채 지우지 못한 눈물자국이 여린 볼에 남아있는 것을 왕인들 왜 보지 못했을 것인 

가? 한발 들이밀던 왕은 어린 아내의 볼에 아직도 선연한 눈물 자국을 보던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주춤하였다. 그대는 또 울고 있었구나. 짐 곁에서 행복하지 않다 함이니 언 

제까지 그대는 짐 곁에서 울고만 살 것인가? 

눈이 마주친 그 짧은 순간. 왕비 또한 문을 들어서던 왕의 눈빛이 어쩐지 아련하고 슬프다 

느꼈다. 말하지는 못하나 가슴에 그득한 외로움. 짐도 그대처럼 안타깝고 서럽다 소리치는 

무언(無言)의 애원을 들은 듯 하였다.   

허나 중전은 재빨리 눈길을 떨구고 말았다. 항시 못났다 구박을 받았던 참이라 지아비 앞에 

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눈길을 피하게 된 것이 버릇이 된 것이다. 몰래 어린 지어 

미를 외사랑하는 왕에게 눈길을 피하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큰못으로 박히는 줄 어린 소 

녀는 까마득히 모른다. 

중전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어 고개 숙이며 옆으로 섰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어찌 이 야심한 시각에 신첩을 찾아 계시는지요? 무슨 일이 생겼나이 

까?" 

저를 두고 무엇을 어찌 한다더냐? 어린 지어미가 두려움에 달달 떨며 묻는 말에 왕은 그만 

기가 막히고 말도 못하게 무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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