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하다 보니 억울하고 분하여 중전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스며들었다. 왕이 흥 하고 콧
방귀를 끼었다.
"허면, 못 믿고 못살면 도망이라도 갈 참이냐?"
"궐 문 닫히고 담벼락 높아 못간 것이지, 문만 열려보시오. 내 발로 궐 문 걸어나가고야 말
지!"
"아주 짐을 잡아라! 웃기는 소리하고 있구먼. 흥. 중궁전이라 사직의 안주인이거늘 그토록
그 자리를 보잘 것 없이 여김이라. 너언제고 한번 큰 경을 치라라. 무에 저리 방자한 것이
다 있는고? 폐비되어 제 발로 걸어나간다 하지를 않나...... 너가 그 사이 아주 겁이 없어졌구
나?"
"지금껏 당하고 산 것만도 일평생 겪을 환란 다 겪은 터이라. 아무 것도 겁나지 않으니 마
음대로 하옵소서."
"참말이지? 참말 짐 마음대로 하라 말이지?"
쫑알쫑알 되받는 앙큼함이 어찌 그리 귀여운가? 너도 계집이라, 월성궁 누이 꼴을 보고 은
근히 강새암을 할 것이로구나. 피식 하는 웃음이 왕의 입술에 번졌다.
"흠, 정궁이라 하는 위세를 너가 이 날서 다 부리는구나? 웃기게스리! 이런 말짱한 투기심으
로 짐을 괴롭히는 이가 어진 중전이라고 칭송을 받는다 말이니? 아주 세상을 속였구나?"
왕은 금침 모서리를 한쪽 걷었다. 밍기적거리며 왕비 쪽으로 한뼘 다가갔다. 고개는 돌리지
도 않은 채 더듬어 팔목을 잡았다.
"침수나 하자 이 말이다. 잔소리하여 보았자 될 일도 아니고., 이렇게 짐이 교태전 들어온
것으로 짐의 마음을 모르겠니?"
".......말씀을 아니하시니 신첩이 그 마음을 어찌 알 것입니까? 허구헌 날 쌀쌀맞으시니 신첩
이 어찌하리오?"
"허면, 말로 하면 믿어는 줄 것이야? 입에 발린 소리라고 또 타박질을 할 것이면서? 말을
하여도 소용없지 않니? 이리 와. 소원이라 할 것이면 짐이 싫도록 말을 하여 주께."
비외비언. 동온돌 불이 꺼졌다. 손만 잡고 같은 이부자리에 누운 것만으로도 그저 좋은 상
감마마. 어둠 속에서 히죽 웃는다.
***********
<7>
까치가 깍깍 우는 날이었다. 반 자나 쌓인 눈길을 헤치고 달려오는 말 두 마리가 있었다.
붉은 옷을 입고 령(令) 자가 적힌 깃발을 휘날리며 호호탕탕 달려간 곳은 옥동의 아흔 아홉
칸 기와집. 중전마마의 사친이신 오성 부원군 댁이었다.
근동에서 가장 번듯하고 화려한 집이다. 허나 항시 적적한 절간처럼 인적이 드문 집이기도
하였다.
계산골 초옥에 살던 부원군 이하 일가가 중전마마께서 간택을 받아 교태전에 좌정하신 이
후, 전하께서 하사하신 이 곳으로 이사를 온 지 벌써 두 해째. 명색이 왕의 장인께서 사는
곳이니 권신(權臣)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 만도 한 곳이다. 하지만 워낙에 부원군께서
청결하시고 외인을 꺼리시는 분이다. 허니 청지기는 어쩌다가 찾아오는 사람들을 문간에서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게다가 중전마마께서 하냥 전하께 소박당하고 외면당하는 처지이니
궐 사람들이 드나든 적도 거의 없는 터였다.
이런 형편이니 혹여나 중궁전 통하여 벼슬자리 알아보러 기웃거리는 이도 없을 터이고, 오
히려 오랜 벗들도 못된 구설이 날까 부원군께서 꺼려하시니 오히려 적막하기는 계산골 때보
다도 더한 사정이었다.
중전마마께서 입궐하신 초입에는 그래도 달랐었다. 한 분 남은 병약한 사친이 근심되어 종
종 상궁을 보내어 문안인사를 드리게 하고 하서를 내리시기도 여러 차례였기 때문이다. 왕
대비전하께서도 마음씀이 깊어서 종종 전령더러 다정한 서간도 보내시고 별찬을 마련하여
봉물군을 내보내시기도 하였다. 중전마마 역시 중궁에 좋은 것이 생기면 그 날로 아버님께
보내거라 하면서 중궁전 상궁을 내보내시었다.
그런데 두어 달포가 겨우 지난 후 부원군께서 중전마마께 서간을 보내시었다. 지엄한 분이
사사로이 봉서를 자주 내리시면 궐 안의 일이 사가에 알려지는 것이라 그 것은 좋은 모양새
가 아니옵니다. 십분 자제 하옵시고 마음만 보내시옵소서 경계하신 글이었다.
어찌 이렇게 아버님께서 이 몸에게 무정하신가 섭섭하였다. 허나 중전은 얼마후에 부친이
경계를 하신 사정을 알게 되었고 기막혔다. 중전마마께서 부친에게 사간을 보내는 일조차
중신들의 입질에 오르내리는 흠거리가 되다니. 부원군께서 중전마마를 움직여 조하 일에 눈
치를 주시려 합니다 하는 모함거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명색은 사직의 안지존이되 한 분뿐인 부친께 서간 한 번 마음대로 내리지 못하
게 되었다. 참으로 조롱 속의 새 신세라. 그 얼마나 망극하고 상심하였던가? 말로만 부녀지
간이되 남보다 오히려 먼 사이라, 외롭고 병약한 사친만 생각하면 저절로 중전마마 옷깃이
하염없이 젖어가곤 하였던 것이다.
그날도 다른날과 다름없이 조용한 날인데 뜻밖에도 오정도 채 되기 전에 전령이 말달려 나
타났다.
부원군께 비단 보자기에 싼 봉서를 소반에 받쳐 올렸다.
"중전마마께서 내리시는 하서이옵니다. 허고 주상전하께서 분부하시기를 내일 입궐하여 중
전을 뵈오 하신 터입니다. 허니 부대 궐로 들어와 주사이다. 이미 중전이 가례를 치른 지
두해가 넘되 한번도 사친을 뵙지 못한 것이라 부녀지간 인륜을 끊은 셈이니 짐이 어찌 마음
이 편안할 것이냐 말씀하셨나이다."
오성 부원군 김익현, 이 것이 꿈이냐 생시이냐. 참으로 전하께서 이 늙은이를 입궐하라 하
명하신 것이오. 점잖은 체면도 다 잊고 몇 번이고 묻는 참이다.
"예, 대감 마님. 분명, 그리 하명하신 터이옵니다. 실상 중전마마께서 가례 치르신 이후 입
궐하시어 교태전에 앉으신 지 벌써 두해라. 원래는 이맘 때 사가로 거동을 하시어야 하는
것이되 사정이 편안치 못하여 못 나오신 것입니다. 일단은 부원군께서 입궐하여 두 분의 정
을 잇도록 하라 하시었나이다. 중전마마께서 부탁하시기를 부대 오실 적에는 일가친척 두루
수소문하여 반가운 분들을 뵈올 것입니다 하셨나이다."
김익현, 어리디 어린 따님을 어거지로 궐에 들여 보내놓고 들려오는 소문이 하도 기가 막히
고 억장이 무너진 터로 그 사이 근심걱정만 늘었다. 삼 년 전보다 한결 여위고 병색이 완연
하였으며 심중의 걱정이 모두다 백발로 변한 것인지 머리카락은 한층 더 하애졌다. 그러나
그
주름진 노안에 웃음이 환하게 물리었다. 그만큼 기쁘고 반갑다 이런 뜻이다.
"아이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 늙은 것에게 중전마마 옥안을 보올 수 있는 기회를
윤허하셨으니 그저 이 노신이 여한이 없나이다."
감격하여 북쪽을 향해 사배(四拜)를 올리는 부원군. 하루종일 마음이 설레어 어쩔 줄을 몰
라하신다. 말씀 없고 더없이 점잖으신 양반이 마치 명절을 기다리는 어린애인 양 들뜬 기색
이 역력하였다.
그 다음, 새벽부터 일가들을 몰아 나서신다. 아침 일찍 염치도 다 잊고 입궐을 한 부
원군은 일단 제일먼저 편전부터 들었다. 궐의 주인이자 사위인 전하께 문안인사
부터 들인 것이다.
마침 그때 전하께서는 삼정승을 모아놓고 삭주의 장성 쌓는 일이며 앞으로 닥쳐올 춘궁기
넘
기는 일을 의논하고 계시다가 장인을 맞이하였다.
상감마마와 중전마마께서 가례를 치른 지 꼬박 두 해. 그 사이 궐 쪽으로는 고개 한번 돌리
지 않았던 부원군이다. 인제서야 겨우 한번 입궐한 부원군은 그저 좋은 낯빛을 하고 용상에
앉은 전하께 문안인사를 드리었다.
"전하를 뵈옵기로 용체 강건하심을 감축드리옵니다."
"항시 부원군께서 병약하다 비가 근심하는 고로, 강건하신 모습을 뵈니 짐이 안심입니다."
왕은 덤덤하니 반절로 장인의 절을 받았다. 실로 정중한 인사를 드리고는 그것으로 입을 봉
하고 마는 늙은 부원군. 그 얼굴에서는 아무런 기색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항상 자격지
심(自激之心)인 왕은 장인의 그 담담한 얼굴에서 원망을 읽어내고야 만다. 자신의 딸을
버려 두고 딴 여인을 보고 돌아다닌 것도 모자라서 허구헌 날 월성궁 그 계집의 치마폭에
싸여 폭군노릇이나 한다더냐 하는 주상 자신에 대한 깊은 분노와 준엄한 꾸짖음을 듣는 착
각에 빠지는 것이다.
누가 무어라 군입 한마디 떼기라도 하였던가? 아니면 찡그린 낯빛을 하기라도 하였던가?
부
원군의 정중하고 점잖은 인사를 받는 왕 혼자서 괜히 무안하여 얼굴이 저절로 붉으락푸르락
하였다. 중전을 버려 두고 소박주고 방탕하는 자신 스스로에 대한 민망함은 깊고 깊다 그
말이었다.
"모처럼 입궐하신 것이니 중전을 만나보시고 마음껏 정담을 나누고 돌아가십시오. 짐이 조
하일에 분주하여 오래도록 부원군을 대하지 못할 참입니다. 빙장께서도 한시바삐 중궁전부
터 드시고 싶으시겠지요? 중전께서 하냥 까치발을 하고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정중하지만 쌀쌀맞았다. 입발린 말 한마디로 무안함을 가리고서 왕은 금세 부원군을 편전에
서 축객하였다.
'출가외인이거늘! 짐이 비(妃)를 두고 어찌 대하든 무슨 상관이냐? 저가 아비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시정의 뭇 사내들 모다 잉첩두고 드나들기 예사라, 짐이 홀로 허물이라 말할 수도
없는 것이지. 흥!'
마치 싸움질 하던 상대를 노려보듯이 홀로 부원군의 뒷통수를 노려보며 되튕기는 왕이었다.
그러나 억지가 반인 왕의 반발심은 어느새 민망함으로 변하고 있었다.
선대왕 아바마마께서 제일 아끼셨다는 부원군이다. 곧고 어진 성품과 깊은 학문으로 인하여
올곧은 선비들이 스승으로 여기고 존중한다는 바로 그이이다. 그런 사람이니 짐을 어찌 볼
까? 짐이 지존이니 말은 대놓고 하지 못할 것이되 심히 짐을 원망하고 있을게야. 사촌누이
와 불측한 연분을 맺어 제 딸을 돌아보지 않는다 하여 짐을 은근히 경멸하고 있을 것이야.
뒷걸음으로 물러나서 문 밖으로 사라지는 부원군의 뒷태를 바라보며 왕은 한 손으로 짜증스
럽게 턱을 문질렀다. 앞에서 배행하고 있던 좌의정 정안로가 한마디 조심스럽게 물은 것
은 그때였다.
"전하, 어쩐 일로 부원군께서 입궐을 하신 터입니까? 소신은 저이가 입궐을 한다 하는 기별
을 듣지 못한 터이옵니다."
난 데 없이 부원군 김익현이 입궐을 하여 전하께 배알을 청하자 간이 떨어질 정도로 놀란
좌의정이었다.
솔직히 정안로는 김익현이 이날 입궐한 그 것 자체가 아주 불길한 징조라 느꼈다.
지금껏 중전이며 부원군 일에 관심조차 없고 고개도 돌리지 않던 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원군의 입궐을 허락하고 중궁전 사정을 보아준다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
엊그제 입궐하신 큰마마는 코가 석자나 빠진 얼굴로 월성궁에 돌아왔다. 혹 떼려 갔다가 혹
을 붙인 격이니, 다시는 대궐에 무상출입하지 말 것이며 짐이 부를 때나 오시오 하는 엄한
하명을 받았다 하였다. 대전의 윤허도 없는데 큰 마마의 가마를 함부로 들였다고 궁문을 지
키는 병정들이 내금위로 끌려가 늘씬하게 곤장질을 당하였다고도 하였다. 그렇지 아니하여
도 떨어진 간이 예기치 않은 부원군의 갑작스런 입궐을 보자하니 더 내려앉았다.
'이것, 전하께서 슬슬 중전마마에 대하여 그 마음이 달라져 가는 것은 아닐까? 큰마마께서
감히 주상전하 곁에 귀를 붙여놓았던 일이 발각이 됨이라 이제 궐 안에서는 큰마마를 경계
하는 빛이 뚜렷하였다. 그럼 참에 밤마다 월성궁 대신 교태전에 드심이라, 이제는 부원군까
지 가까이 두심이라? 하, 이것 큰일났고나'
벽파 저들 일당이 눈에 가시로 여기는 재야 선비들이며 서림파 신하들이 정신적인 기둥으로
여기는 이가 부원군 김익현이다. 비록 조정안에서 권세는 없다 하여도 왕비의 부친이다. 종
실의 가장 큰 어른인 진성대군과 금석지교(金石之交)를 맺은 사이기도 하였다. 종실에서도
조하에서도 부원군의 말은 무시 못할 무게를 지닌 것이니 정안로는 무작정 김익현이 밉고
꺼리었다.
따지는 듯한 정안로의 말에 왕이 고개를 들었다. 서안 위의 두루마리를 펼치며 무관심하게
대답을 하였다.
"사사로이 부원군이 중궁전을 만나러 온 것이라 대청서 알 일도 없을 것이오. 올해가 국구
의 환갑이니 아마도 곤전이 손수 수를 놓아 병풍을 만든 모양입디다. 짐더러 간청하기 사친
께 하사를 할 것입니다 하는데 집이 거절을 할 수가 없었소. 환갑이라 하는 명분도 있고 하
여 그러면 들어오시게 하여 하루 아비를 뵈옵시오 하였소이다. 짐이 무엇을 잘못하였소?"
되받아묻는 왕의 목청은 퉁명스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감히 네가 무어라고 지금 짐이 궐안
에서 하는 일에 이래라 저래라 토를 다는 것이냐 되묻는 듯 성깔이 묻어난다.
"잘못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잘 하셨나이다. 실로 중전마마께서 효심 지극하
사 한 분뿐인 사친에 대한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신도 아옵니다. 전하께서 그리 대접함이
라 당연하신 처분이지요!"
온화한 성품을 가진 우의정 최환지가 정안로와 왕 사이에 오가는 눈싸움을 막았다. 궐의 사
사로운 일이니 좌상은 입질을 그만 하시오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어린 왕을 두고 이래라
저래라 하던 버릇이 하루 아침에 없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자한 정안로는 기어코 다
시 나서고야 말았다.
"부원군께서 사사로이 입궐하심은 금세 구설거리가 될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지존의 가
장 가까운 지친이 아니옵니까? 부원군께서 이리 자주 궐에 드나드실 것이면 인척들이 파벌
내세워 조하 일을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것이라 오해를 사기 알맞음이라. 신은 그것이 걱정
입니다."
"국구께서 두 해만에 이제 겨우 한번 입궐을 하신 터인데 좌상의 말씀은 너무 박하시구려.
게다가 부원군의 인품은 소문이 난 터가 아니오? 설사 날마다 드나드신다 하더라도 파벌 만
들어 조하 일 간섭하실 분이 아니니 그 말씀은 듣기 고약하오이다."
말없이 옆에 앉아있던 영의정 홍윤성 또한 너무 심하다 싶었던지 정안로를 타박하였다.
비록 벽파의 영수이고 갈라선 길은 달라도 영의정 홍윤성은 김익현의 고아한 인품을 존경하
고 있었다.
중전마마께서 간택받아 입궐하신 이후 한 분뿐인 외따님이되 부원군께서 궐 쪽으로는 고개
한번 돌리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인정상 차마 그리 못할세
라! 그런데 그런 분이 상감마마의 윤허를 입자와 사사로이 한번 입궐하신 것을 당장에 트집
잡자 하는 것이라. 인간으로서 차마 하지 못할 너무 박하고 고약한 일이다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