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하지 않으신지 살피지도 못하느냐 노화내신 후가 아니옵니까? 며칠이나 교태전 아니 듭신
터로 중전마마께서 직접 차를 끓여 내오신 터입니다만......."
"헌데 왜 짐을 보지 않고 돌아갔더냐?"
성급히 되묻는 왕의 목청이 잦아들었다. 짐작하여 우려한 일이 생긴 게다. 심장이 울컥울컥
뛰놀았다. 장내관이 망극한 얼굴로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월성궁 마마를 알현 중이시라 아뢰니 허면 차만 받치련다 하시고는 돌아가셨나이다."
"흥! 꼴에 저도 계집이라, 감히 월성궁 누이를 두고 투기라도 하였단 말인가? 웃기는도다!
저가 지어미라 할 것이면 짐더러 수라상 올리고 잠자리 보살피는 일을 당연히 하여야지, 식
은 찻물 한잔 바치고 지존입네 하면서 휭하니 돌아가? 무에 그리 방자한가?"
짐이 월성궁 누이를 궐로 불러들여 희롱하였다 오해를 하였을까? 돌아가서 속 상하여 혹여
울지는 않을까? 찻잔을 비우는 짧은 순간 온갖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맴을 돌았다. 민망함
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심하여 간신히 교태전에 든 터가 아니던가?
'억지로 원자를 핑계대며 앞으로는 다정하자 약조하게 해놓았는데... 서로의 몸을 얽고 자신
을 나누었는데... 여린 그 사람이 아파하고 두려움에 떠는 것이 괴로워 두 번째 밤에는 옷고
름도 풀지 못하고 손만 잡고 침수하였는데, 그래도 좋았는데... 향기롭고 따스한 몸이 두
팔 안에 가득히 안겨들었지.'
그 때 비로소 외롭지 않다 생각하였다. 마침내 짐이 와야할 곳에 와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
였다. 헌데 이날 또 오해를 하여서 짐을 밀어내면 어쩌지? 쌀쌀맞게 짐을 바라보지도 않게
되면 어쩌지? 불안한 그늘이 담담하고 향기로운 차 맛조차 음미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왕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교자 준비하여라. 짐이 교태전 가서 수라 할란다. 초이레이니 짐이 중궁드는 날이 아니더
냐?"
"예, 전하."
그러나 서온돌에 있어야 할 중궁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상감마마께서 기별도 없이 불쑥
납시자 무수리들을 지휘하며 소제를 하고있던 김상궁이 기절할 듯이 놀라 부복하였다. 주인
이 아니 계신 틈을 타서 서온돌에 놓인 장롱이며 문갑 등 기물들을 정갈하게 걸레질하다가
마치 자신이 큰 잘못이나 한 듯 당황한 얼굴로 전하께 아뢰었다.
"비(妃)는 날이 저물어가는데 오데 가셨노?"
"우원전 나가시었다가 그대로 침향정에 납시셨나이다. 그 곳에서 수를 놓으신다 하셨습니
다."
"중전이 수침을 즐긴다 함은 알고 있으되 왜 그이는 번듯한 중궁전을 놓아두고서 항시 그
외지고 적적한 곳에서 수를 놓는다는 것이지? 저가 못나고 촌 것이니 그런 궁벽한 곳이 좋
은 것이라... 여하튼 태생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입귀 비틀며 괜히 한마디 쌀쌀맞은 트집이시다. 그리운 사람이 없다 싶으니 그렇지 않아도
넓은 중궁이 더 휑하니 보였다.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마루앞에서서 바라보다가 왕은 고개
를 돌렸다.
"아무리 수침이 좋다 하여도 말이지. 수라는 하여야 할 것이 아니냔 말이야. 서온돌에서 수
라 받으리라."
"기별하여 당장 모셔오겠나이다. 전하."
"그만 두라. 금세 들어오겠지. 흥, 이것은 말이야... 짐이 수라를 하였는지 안 하였는지 도무
지 관심도 없고 챙길 줄도 모르니 이게 무슨 부덕이 높다고 것이야? 해가 질 무렵인데 여인
이 때도 모르고 내전을 비우니 윗전으로서의 체통이라 하나도 없는 것이다. 나가보아라. 짐
은 예서 수라하며 잠시 기다리련다."
한 마디 하시는 말씀이 늘 그렇듯이 차갑고 쌀쌀맞으시다. 아랫것들이 나가고 홀로 서온돌
에 앉은 왕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 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교태전을 비우고, 그를 기
다리게 하는 중전에 대한 작은 원망이었다.
"흥, 날도 어두워지는데 냉큼 돌아오라 이 말이지. 침향정은 금원에서도 제일 깊은 곳인데
어찌 그리 자주 갈까? 날이 어두워지면 종종 산짐승도 나온다는 곳이 아니냔 말이야. 여인
이 되어 가지고 장히 간담도 크지? 겁도 없이 만날 게로만 가서 살다시피 하고... 흥, 후원
에 정자며 전각이 어디 그 곳뿐이냐? 훨씬 경치 좋은 청량전도 있고 교태전에서 제일 가깝
기로 서현정도 있는데... 또 도성을 볼 수 있는 고요정도 가까이 있음에랴. 헌데 왜 매일 게
로만 가는 것이냐? 누가 보면 짐을 피하여 도망가는 것이라 하지 않겠어? 만날 짐이 아니
가는 곳만 찾아다니지?"
입이 만발은 튀어나왔다. 중전이 금원으로 나간 것이 대전까지 차고들어온 희란마마 때문에
심기 상한 것임을 지레 짐작한 터라 왕의 마음은 도무지 안정되지 않았다. 수라상을 물리고
내관 시중 받아 의대 갈으시고 소세하시면셔도 중얼중얼 투정이었다.
"침향정? 흥, 게가 천리 만리나 된다더냐? 휭하니 들어와야지. 밤이 깊어가지 않냔 말이지.
추운 밤에 사람이 담백하고 소박하니 항시 그렇게 좁고 궁벽한 곳만 좋아하더라? 그 넓은
금원 전부 다 제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이가 항시 제일 외진 침향정만 가는 이유가 무엇인
고? 흥. 하나도 볼 것이 없는 그곳에를 왜 만날 가는 것이냐 이 말이야. 쳇! 할 일이 없구
나. 이런 날에 저가 예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짐이 그러면 수라하고 저 금원이라도 한
번 같이 나갈 것이오 할 것이 아니냔 말이야. 같이 나가다가 짐이 설화꽃도 한 가지 꺾어주
고 말이야. 모르는 척 손도 한 번 잡아 볼 것이 아닌던가? 여하튼 어리석어 도대체 짐의 마
음을 몰라. 헌데 대체 왜 아니 들어오는 것이야?'
투덜투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주상 전하, 그런데 단정하고 향기로운 서온돌에서 어린 지어
미를 기다리는 그 심사는 참으로 이상야릇한 것이었다.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이상하게 설
레이기도 하고 좀 흥분되기도 한 그런 느낌. 희란마마 때문에 속이 뒤집어져 있을 중전에게
무엇이라 첫말을 시작하여야 할까 생각하면서 왕은 아득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다 싶었
다.
'...탁 터놓고 미안하다 할까? 하지만 짐이 무엇을 잘못하였는데? 짐이 누이더러 들어오라
한 것도 아니지 않아? 오히려 호통치고 단속하였는데...... 저가 정 궁금하면 짐더러 물어야
지. 홀로 오해하여 속만 상하나? 흥! 애꿎은 짐만 미워하고......'
무어라 말 한 마디 한 적 없다. 아직 중전 얼굴도 제대로 본 바 없고 서로 입을 열어 내심
을 토로한 적도 없다. 그러나 스스로 민망하고 불편한 심사를 어쩌지 못하였다.. 홀로 앉아
앞으로 들어올 중전을 대할 일이 막막한 상감마마. 제풀에 노화하고 제풀에 토라지고 제 풀
에 짜증이다. 그만큼 싹트는 수줍은 연정에 당황한 마음이 갈팡질팡,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
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것이다.
홀로 용안을 붉히며 씩씩대던 왕은 발을 쭉 뻗었다. 보료 위에 반만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가, 기다리는 시각이 무료하였다. 마치 호기심 많은 아기가 어미의 경대를 뒤집어보
듯이 중전의 서안 위에 놓은 책장을 펼쳐보기도 하고 향그러운 체취를 맡으려듯 그 위에 놓
인 비단 수건을 코에 대보기도 하던 상감마마. 벙싯 입가에 웃음이 물렸다. 노란 색이 더
짙어진 모과 열매가 소중한 보물처럼 중전의 이단 화초장 위에 신주단지처럼 모셔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필시 그때 짐이 준 모과가 분명하렸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구나.'
하잘 것 없는 모과 열매를 중전이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기억만 하여
도 가슴이 아리고 미안한 초야의 그날, 적어도 삐약이가 죽은 오후에 왕이 자신의 진심을
중전에게 내비추었고 중전 또한 쓰라린 외로움과 상심을 위로하고자 했던 왕의 애틋한 마음
을 받아 들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말은 아니 하였으되 그날만은 우리 마음이 하나가 되었던 게야. 그 밤에 짐이 조금만 참았
다면... 다정하였다면 중전도 짐의 마음을 다 알아주었을 것인데......'
왕의 용안에 스미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울적함과 뼈아픈 회한이었다. 남들 앞에 내비추인
적 없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왕은 손 가까이 놓여진 수틀을 돌아보았다. 하얀천으로 가려진
그것에 호기심이 생긴 터로 한 무릎 다가앉았다. 수틀을 가린 하얀 천을 훌러덩 뒤집었다.
참으로 기이하고 아름답다...
첫 참에 떠오른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직은 완성이 덜 된 수폭은 오색 수실로 땀땀이 놓아 가는 풍경은 전설에 나오는 무릉도원
이었다. 도화서의 화공이 그려준 화폭을 천에다 그대로 모사(模寫)하여 표현한 그 화폭의
수침은 도저히 사람의 솜씨라고는 말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겉으로는 사냥이나 즐기고 격구채나 휘두르면서 거칠고 방탕하게 노시는 듯만 보여도 왕은
실상 섬세하였다. 스스로 난도 치고 귀하고 아름다운 기물들을 사랑하시는 예민한 감각을
지닌 터였다. 그런 왕의 눈에 비친 중전의 수침은 실로 기가 막힐 정도였다. 검은 공단 바
탕에 피어오르고 있는 무릉도원의 모습은 꿈인 듯 꿈이 아닌 듯 신비롭고 절경이라 왕은 자
신도 모르게 감탄하여 혼잣말을 하였다.
"짐이 미처 몰랐거니, 중전의 수침 솜씨가 실로 신기(神技)로구나! 이렇게 정교한 바느질은
짐은 처음 보았다. 이것을 어찌 사람의 솜씨라 하겠더냐? 나이도 어린 사람이 수십 년 수를
놓는 궐의 상침보다 오히려 윗길이라! 실로 중전의 솜씨는 하늘이 내린 것이라 할 것이야.
헌데 딴 것도 아니고 어째서 중전은 하필이면 죽은 사람이 간다하는 도원경을 수놓는 것인
가?"
문득 왕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여, 이 사람은 짐 곁에서 사는 이 궐 살림이 너무 힘
들어 이 곳으로 도망가고 싶다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믄득 든 상상은 터무니없었지만 강렬한 충격이었다. 순간 왕은 격한 노염에 곱다 느낀 그
수폭을 발로 와지끈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뉘 맘대로? 누구 맘대로 도망을 간다는 것이야?"
왕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중전이 앞에 있었으면 머리통이라도 한 대
쥐어박을 듯이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저는 짐의 안해인데, 천지신명이 정하여준 연분인데, 누가 마음대로 도망가게 내버려 둘 줄
알고? 평생 저는 짐 곁에 있어야지. 할마마마와 천지신명이 짐에게 지어미로 정하여준 여인
이 바로 저일진대 감히 짐 곁에서 도망을 간다고? 웃기는 소리! 저가 없으면 짐이 얼마나
쓸쓸한데... 저가 짐에게 어떤 사람인데? 마음에 박힌 못인데... 미안하다 말도 한 번 못하였
는데... 평생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인데...'
깊이 감추어둔 마음을 스스로에게 읽혀버린 터였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 왕이다.
그는 살며시 다시 천으로 수틀을 가려 주었다. 그 때였다. 중전이 돌아온 듯 인기척이 나고
맑은 목청이 문밖에서 들려왔다.
"벌써 시각이 늦었구려. 오래도록 수를 놓아 팔에 톳이 선 게야. 내가 시장하오. 수라상을
올리...... 무, 무어야? 전, 전하께서 듭시었다고? 어째서 그 말을 인제야 하는 것이오?"
아무 것도 모르고 고단하다 말하는 목청이 봄 내가 물씬 풍기듯이 상쾌하였다. 왕은 빙긋이
올로 웃었다. 어린 안해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였다. 문득 중전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잦아들었다. 그가 내전에 들었다는 말 한 마디에 그만 축 주눅드는 목소
리. 그만 대하면 저절로 겁에 질려 두려움에 떠는 갑작스런 변화에 기분이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왕은 퍼런 날이 선 눈초리로 문 쪽으로 힐끗 노려보았다.
'아니, 무어야? 짐이 들었다 할 것이면 좋아서 달려 들어와도 모자라거늘, 좋아하기는커녕
그저 덜덜 떨고 두려워하여? 하여튼 저것이 짐의 지어미가 맞는 것이야? 명색이 짐의 안해
라 하면서 어찌 저리 짐을 무서워하고 꺼릴까? 짐이 저를 두고 어찌 하였다고 저리 첫 참부
터 덜덜 떨며 난리인 것이냐? 저러니 짐이 저를 두고 무엇이 곱다 할 것이며 무엇이 어여쁘
다 할 것이냐? 제길! 짐은 오늘 일 사과 아니 한다! 짐이 어찌 하든 무작정 짐을 꺼리고 싫
어할 계집에게 짐이 미쳤다고 비위를 맞출 것이냐?'
자기도 모르게 젊은 상감마마, 벌써 이마에 퍼런 심줄이 서고 주먹이 쥐어지며 입귀가 비틀
어진다. 어지하든 다정하게 하여주고 중전의 마음을 달래주어야겠다고 결심하여 어렵사리
듭신 전하의 그 심사가 또다시 헝클어지니 실로 근심이구나...
차 한잔 보내주어 하신 터로 빙천을 물을 길어오라 분부하였다. 숯불을 준비하여 들어온 윤
상궁이 살살 꾀었다.
"차만 보내시려고요?"
"응. 이맘 적 하여 차를 보내주어 하신 터이잖어."
맹한 대답을 하는 왕비에게 윤상궁이 눈을 흘겼다.
"식은 차는 비린 맛만 난답니다."
"좋은 차는 그렇지도 않네. 식은 차를 즐기시는 분도 많은걸?"
"다구(茶具) 들고 나가시어 직접 끓여드리시는 일은 왜 못하십니까?"
코밑에 다가앉아 따져 묻는 말에 할말이 없었다. 윤상궁이 물주전자를 안고 들어서는 나인
에게서 물병을 빼앗아들었다. 휭하니 일어섰다.
"너희는 다구 챙기고 화롯불 옮기어라. 중전마마께서 우원전 나가시어 대전마마께 차를 올
릴 것이다."
"내가 언제?......"
지아비 치뜬 눈을 바라만 보아도 간이 내려앉는 어린 중전마마. 작은 목청으로 항의하였다.
아녀자가 대전 쪽으로 고개돌리는 것도 허락치 않으시는 분인데 하명도 없이 나갔다가 감히
오데를 드나드느냐고 호통을 치면 어찌할 것인가?
달거리를 맞이하여 전하께서 서온돌 아니 듭시는 것이 오히려 안도할 정도인 철없는 어린
소녀. 오늘 내일 하여 달거리가 끝나면 또 상감을 모시어 무서운 밤을 같이 지새워야 하나,
어쩌나...... 민망하고 무서워서 말은 못하고 홀로 고민중인 중전마마가 아닌가? 그러나 중전
마마의 말은 들은 척 만 척 윤상궁이 나인들을 시켜 다구를 들게 하고 내보냈다. 냉큼 일어
서라 채근하였다.
"자꾸 뵈어야 정도 붙고, 다정하게 지내셔야 대전마마께서 중궁전을 곱다 하시지요. 어떤 사
내든 여인네가 먼저 다정하게 대하여주는데 싫다 하실 분은 아니 계십니다. 모른 척하고 차
한잔 올리옵니다. 하고 상긋 웃어주시어요.
"하지만 여인네가 사사로이 어찌 대전마마 계시는 곳으로 나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