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같이 쫓
겨나게 되었으니 그냥 곱게 나갈 수 있나? 눈물 철철 흘리며 발악이었다. 엄상궁이 매섭게
그녀의 볼을
후려치며 호령하였다.
"입 닥치지 못할까? 네년이 월성궁 계집의 위세업고 전하 곁에서 살살거리며 눈질 하여서는
지존이신
전하의 행적을 졸졸이 월성궁으로 꿰다 바친 줄 모르는 줄 아느냐? 목이 딱 잘릴 것을 그나
마 전하께서
어진 처분하여 귀양으로 끝난 참이니 어데서 억울하다 잘난 척을 하느냐? 네가 진정 주리돌
림부터 하고
내쫓길 것이냐? 여보시오! 고약한 이 년들을 당장에 궐 바깥으로 내동댕이치시오!"
때아닌 궁녀들의 울음소리가 궐 안에 진동하는구나. 제일 고소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중궁전 윤상
궁이며 제일 간이 졸아든 사람은 대전의 김내관이다.
희란 마마 연줄이라 입 한 번 잘못 놀리어 다른 궁녀들 모다 날벼락을 맞게 한 김내관. 저
는 어찌 어찌하
여 이 봉욕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그저 가시방석이라. 방에 쪼그리고 앉아 휴우- 하고 긴 한
숨뿐이다.
'참으로 큰마마께서 그리도 어리석은 분인 줄 내가 처음 알았다. 아무리 분하고 노여우시더
라고 그렇지
어떻게 전하 옆에 눈과 귀를 두었다는 말을 대놓고 하는 것인가? 그야말로 역모라,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날 것이면 당장에 창경궁 왕대비전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인데 어찌 그리하셨던 것인고? 내
참!... 인제
궐 안에 큰마마 위세라 다 지나갔다, 제길!'
그렇게 간이 쪼그라들어 전전긍긍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십 년 묵은 체
기가 다 가신
듯이 신이 난 사람도 있다. 바로 윤상궁 이하 중궁전 궁녀들이다.
윤상궁은 김상궁을 옆에 두고 궁문 누루에 올랐다. 희란마마 줄인 궁녀들이 모다 생선 두름
엮인 것처럼
아무렇게나 몰림을 당하여 죄인들 타는 나무 수레에 내팽개쳐져서 귀양 가는 모습을 보아하
며 한마디하
였다.
"아이고 속시원하구나! 흥, 저년들이 월성궁 계집의 줄로 궐에 들어와 은근히 중전마마 무시
하여 속살거
리는 입질이 고약하고 우리 중궁전 상궁들 깔고 보았지? 어, 시원하다! 감히 제 년들이 무
엇이라고 전하
의 동정을 살펴 바깥으로 입질하여 지존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것이야? 천 년 묵은 쳇증이
다 가시는 것
이다. 조년들, 고생을 진탕 하여야 정신을 차릴 것이니 내가 병정들보고 삭주 가는 도중 고
년들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라 하였지?"
노회한 윤상궁, 그 동안 월성궁 계집년의 위세업고 중궁전 무시한 궁녀들에게 분한 감정이
쌓일 대로 쌓
은 터였다. 눈치 빠르게 쪼르르 궁녀들 호송하는 경비대장에게 전낭을 쥐어주고 온 참이다.
조 년들이
전하의 행적 눈질하여 바깥으로 경박하게 소문피우고 분란을 만든 아주 고약한 것들이오.
허니 단단히
버릇을 고치게 하소! 하고 술값을 준 것이다. 그 뜻이 무엇이더냐? 이 돈 가지고 고기반찬
술 한 상 잘
받아먹고 고년들 아주 들들 볶아 골병들게 괴롭혀 주시오 이런 뜻이다.
그렇게 하여 희란 마마 입질 한 번 잘못한 터로 주상 전하, 그녀의 간교하고 음험한 속내를
상당 부분 깨
달은 것이었다. 그것을 기회로 궐 안의 궁인들이 싹 물갈이가 된 것이다.
몇 년 동안 고심하여 주상의 주위에 제 사람 박아놓고 위세 부리던 희란 마마, 그 소식 듣
고는 발을 동동
구르며 속이 쓰리지만 어쩔 것이냐. 당장에 저도 날벼락 맞게 생겼으니 머리 싸매고 끙끙
앓는다.
대체 왜 전하께서 저리 갑작스런 처분을 하신 것이며 큰마마께 노염이 크신 것이오? 하고
정안로가 궁
금하여 묻지만은 희란 마마 입을 꼭 다물고 있을 뿐이다. 곧 죽어도 저가 전하의 동정 살펴
강새암을 못
이겨 난리를 부리다가 날벼락을 맞았다는 말은 못할 참이다.
그야말로 그 일은 역모나 꾀하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만일 그것이 소문이라도
나면 왕대비전
이나 중궁전에서 내금위 무사 보내어 그녀를 장살한다 하여도 구원해줄 사람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래서는 아니 되겠다. 정말 이러다가 내가 홀라당 성총을 잃고 나락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
냐.
아연 위기 의식을 느낀 희란마마가 제법 반성하는 태를 내비치며 소복(素服)하고 대궐로 들
어온 것은 대처분이 있은 지 사흘이 지난 날 오후였다. 항시 왕이 그 앞에서는 마음이 약하
여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희란마마 어미요 주상의 이모뻘 되는 좌의정 정안로의
안해 정경부인이었다. 노염이 크신 상감께서 저를 보지 않으리라 할까봐서 제 편 들어줄 정
경부인을 앞장세워 처연한 눈물을 흘리며 입궐하였다.
어지간히도 노염이 크신 참이었다. 언자나 희란마마 저가 들어오면 조하 일이고 강학이고
당장 작파한 채 달려들어오던 왕이었다. 헌데 그 날은 근 서너 식경이나 희란마마를 기다리
게 하였다. 밤수라 받을 즈음에 간신히 우원전에는 들어오시었는데 힐끗 일별하는 눈빛이
차고 엄하였다.
왕은 아무 말도 없이 상석 보료에 좌정하였다. 인사를 해도 답례도 없다. 입을 꾹 다물고
그저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보았자 한번 살살 긁어주고 할끔할끔 울며 간청
하면 헤벌레 풀리실 것이야 자신만만, 속으로 아무리 그래보았자 왕은 내 치마폭 아래 새이
다 교만한 생각으로 들어온 희란마마. 아연 긴장한 순간이었다.
이것 큰일 난 게다!
저가 지은 죄가 참으로 예사 일이 아니었구나. 기승스럽고 방자한 성정 꾹 누르고 애초부터
납작 엎드린 참이었다.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고변하는 애끓는 사설이 유창하였
다.
"흑흑흑. 전하, 신첩이 잘못하였나이다. 한번만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인네 좁은 소견머리로
행여나 전하의 성총을 잃어버릴까, 빼앗길까 마냥 두려워 고약한 짓을 감히 하였습니다. 부
대 한번만 용서를 하여 주십시오. 다시는 마마의 심사 어지럽히는 짓은 하지 않겠나이다."
묵묵부답. 본 척 만 척 대답 없는 왕의 얼굴은 희란마마 저가 처음 보는 용안이었다. 냉혹
하고 무서웠다. 이것 제대로 풀지 않으면 내가 이날 죽는 꼴이다. 처음에는 이것쯤? 하였던
방자한 마음대신 슬슬 불안함과 두려움이 샘솟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마마, 어찌 신첩의 애원에 한 말씀이 없으시느뇨? 이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마마께서는 신
첩의 사정을 알아주셔야 하지 않나이까? 흑흑흑. 아무리 신첩이 깊은 성총을 붙박이로 맡아
놓았지만 첩지없는 잉첩이올시다. 전하께서 신첩에게 주신 마음을 자르신다 할 것이면 누이
는 딱 죽을 일만 남은 것이 아닙니까? 사냥터 그 일 있어지고 나서 비수로 목을 찌르고 죽
었어야 할 이 누이가 오직 이날까지 살아남은 것은 전하의 그 맹세가 영원하리라 믿은 때문
이랍니다. 흑흑흑."
"그 맹세 믿은 사람이, 허면 짐 곁에 불측한 눈 붙여두고 무엇 하나 눈 흡뜨이 뜨나? 손 하
나로 하늘을 가리려 함이니, 참으로 고약하오. 짐을 사모한다 그 말조차 염치없이 들리오!
흥, 감히 어디서 짐을 누르려 하나? 역모라 하여 목을 베이고 싶나? "
자신이 기분이 나쁘면 왕은 그 상대가 누구든지간에 제 멋대로 모진 말 하고 하고싶은 말
다 풀어헤쳐 사람 속을 북북 긁어대는 버릇이 있었다. 지존이시니 아무도 그렇게 하시면 아
니됩니다 가르쳐 주지 못한 탓이엇다. 워낙 천지분간 못하는 정해에다 마냥 곱다 하던 누이
앞에서 내뱉는 첫 말씀이 그리도 독하고 쌀쌀맞았다. 희란마마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찔하였
다.
"흑흑흑. 어찌 그리 신첩에게 아프고 모진 말씀을 하시옵니까? 아프옵니까? 전하. 어찌 이리
이 누이 마음을 몰라주셔요? 세월이 흐르고 지나갑니다. 자꾸만 전하께서는 보령 높아지시
니
장성하신 잘난 사내라. 더없이 늠름하여지고 아름다우신 터인데 이 누이는 해마다 사위
워져가는 달처럼 늙어져간다 싶었나이다. 이 어찌 아니 불안할 것인가? 딴 뜻이 있었던 것
은 아니옵니다. 그저 상감마마 그 성총이 혹여 다른 계집에게도 옮겨지는 것은 아닌가 두려
워 그리한 것입니다. 흑흑흑... 전하 한번만 용서를 하여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방자한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누이가 강새암에 잠시 정신이 나가서 한 짓입니다. 전하. 흑흑흑.."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 곧 죽어도 분하여서 울지 슬퍼서는 울지 않는 기
승스런 희란마마가 한번만 용서해달라 눈물 철철 흘리는 꼴은 제법 가련하였다. 흐느낌 반
사설 반인 고변은 애처로웠다.
그러나 웬만하면 누그러질 것도 같은 전하의 노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주절주절 늘어놓
는 희란마마의 애원을 그저 묵묵히 듣고만 계시었다. 아무리 달래고 울어보고 애원하여도
여전히 미간에 어린 노염의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실로 왕의 가슴에 얼음말뚝처럼 콱 박힌 치열한 배신감은 쉬이 삭혀질 것이 아니었다. 딴
것도 아니고 감히 짐을 감시해? 지존인 짐 곁에 제 눈 박아두고 짐을 살핀다 할 것이면 그
것이 무엇이냐? 바로 역모인 게지. 저가 무어라고 감히 지존인 짐의 행적을 졸졸 꿰고 감히
입질을 하기를 대놓고 저가 잘하였다 난리를 부리고 강새암이냐?
도저히 풀지 못한 괘씸함과 노여움이 쌓은 터라 희란마마에 대한 정해가 아무리 깊더라도
이는 선선히 용서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반쯤 고개를 외로 돌리고 입을 그저 봉하고 계실
뿐인 상감마마 앞에서 날 살려다오! 희란마마 방바닥에 푹 엎드려 울부짖었다.
"전하, 전하! 흑흑흑. 신첩의 사정을 통촉하여 주십시오! 오직 한 분 전하의 사랑만 믿고 살
아온 이 누이의 진실은 전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신첩은 아무 욕심도 없나이다.
오직 전하의 성총 하나만 바라느니 그 욕심이 지나쳐서 이런 발칙한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
"......참으로 염치가 없구려. 누이가 두고두고 짐의 성총 받을 자격이나 있다 싶소?"
끊어질 듯 하면 이어지고 이어질 듯하면 짜증나는 울음 소리라, 되풀이되는 사설에 귀가 아
파오기 시작하였다. 왕은 짜증스럽게 쌀쌀맞게 내뱉았다.
"흥, 짐의 눈에 누이 얼굴이 철면피로 보이는구려. 지금 누이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 알고나
있는지 몰라?"
노려보는 눈빛 앞에서 희란마마 그저 죽여줍쇼 엎드려 숨을 죽이었다. 흑흑흑 애잔한 눈물
로만 호소하였다.
"진성 숙부나 할마마마께서 이번 일을 아신다 할 것이면 당장에 누이를 목베라 할 것이다.
무어라? 어찌 하였어? 감히 짐 곁에 눈을 붙이고 짐을 감시해? 무엇이 모자라고 무엇이 그
리 부족하여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하는 것이오? 짐이 누이에게 드린 것은 실로 흠 하나
없는 순정이었고 무엇이든 넘치게 달라 하는 대로 다 드리었소이다. 짐은 그랬거늘 누이가
짐을 이리 기만하고 배신을 해? 짐은 인제 딱 누이가 꼴도 보기 싫소!"
"한번만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시는 감히 방자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니다. 흑흑흑."
"짐은 아예 월성궁 편액을 쪼개버릴 참이오! 흥. 같잖게스리 어디로 나서나? 천한 잉첩 주제
에 감히 짐을 감시하여? 짐이 어데를 가든 그건 짐 마음이지 어디서 감히 나서서 짐을 간섭
해?"
이러다가는 정말로 우리 큰마마께서 경을 치는고나. 우리가 다 죽은 목숨되겠다 싶었다. 주
상의 이모님인 정경부인이 끼어 든 것은 그때였다.
"흑흑흑 전하, 모다 이 늙은 것의 불찰이옵니다."
머리 허연 노인이 쾅쾅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통곡하며 한번만 제 딸년을 용서하라 애원하
였다.
"다 이 노물(老物)의 허물이올시다. 흑흑흑. 어미인 이 것이 큰마마의 곁에서 잘못 가르친
죄이옵니다. 큰마마께서도 말씀하시었다시피 어디 불칙한 마음을 품고 전하의 곁을 살피려
하였나이까? 오직 좁은 여인네 소견머리로 성총 다투는 그 마음이 넘치어 저지른 실책이 아
니옵니까? 한번만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시는 이런 일 일어나지 않게 이 노물이 잘 가릴
것입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옵소서."
어린날 생모를 잃고 어마마마 대신이오 하고 여긴 분이 아니냐? 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
맛이 더없이 썼지만 더 이상 어찌 할 것이냐? 모진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지난 날, 이 몸더러 오직 짐에게는 이모님이 희빈마마 대신이오 하고 다정하게 대하여주신
그 마음을 한번만 돌이켜 주옵소서. 이 늙은이의 간청을 한번만 가납하시오, 큰마마를 용서
합시오. 전하 흑흑흑."
제 몸 버려가며 딸의 허물을 덮으려는 이모님의 청을 마냥 무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왕은 손을 들었다.
"그만 하시오. 보고 있기 민망하오. 무엇하느냐? 이모님을 자리로 모시어라."
귀찮고 짜증나고 속 상하고 마음이 헝클어졌다. 왕은 훌쩍거리는 두 여인네를 바라보며 손
을 훼훼 저었다. 사정을 알았으니 그만 나가서 처분을 기다리오 하고 지친 어조로 그녀들을
내보냈다. 왕에게 차 한잔이 올려진 것은 그때였다.
"어인 차더냐?"
"망극하옵니다, 전하. 항시 이맘때에 차 한잔 주어 하신 터로 중전마마께서 차를 끓여 나오
셨나이다."
찻잔을 들고 향기를 음미하던 왕의 손이 흠칫 하였다. 혹시 월성궁 누이와 중전이 마주친
것이 아닌가? 짐이 그들을 알현하고 있음에 오해하여 울며 돌아선 것은 아닌가? 되묻는 목
청이 어쩐지 불안하였다.
"뭐라? 중전이 직접 우원전으로 나오셨더냐?"
"예, 전하. 지난번에 전하께옵서 지아비 하루 행적을 보아지면 수라는 하였는지, 용체는 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