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200)

중전마마 그때 침향정에 올라 수를 놓다가 돌아오시는 참이었다.  수침에 몰두하고 있는 그

녀의 모습은 

겉으로 볼 적에는 그저 평상심을 유지하는 잔잔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덤덤하니 앉아 바늘

을 찌르는 그 

일은, 실상 아무데도 마음 붙일 곳이 없는 어린 그녀의 마지막 도피처나 다름이 없었다. 

이레만에 궐의 주인인 전하께서 환궁하시었다. 

마음에 가라앉은 모진 참담함과 미움과 아픔은 허울좋은 법도  안에 가로막히고, 여하튼 별 

일 없이 돌아

오셨다 하니 반가운 척이라도 해야하였다. 다행이로다 말하며 정성껏 차를 우려내어 보내드

린 터였다. 

그러나 그 분을 직접 뵈올 수가 없었다. 그 밤의 일이 못내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그저 무서

웠다. 그 전에 

상감께서 못난 것이 짐 앞에서 알짱이는 것이 싫다 대놓고 능멸하신 후부터 중전은 감히 대

전 쪽으로는 

얼굴도 돌리지 못하는 것인 줄 알고 살았다. 이 날도 문안 인사 여쭈러 나갔다가 타박만 당

할까봐 두려

웠던 것이다. 주상 당신께서 중궁전을 찾지 않으시는 고로 아녀자인 왕비가 먼저 대전에 발

길을 하였다

가 전하께서 버릇없다 경을 칠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나가? 그래서 피신 삼아  침향정으로 

수를 놓자 하

며 나간 터였다. 

그러나 그런 중전의 마음을 모르는 왕은 중전이 분하고 노여웠다 그저 밉고 섭섭하였다. 당

신이 궐을 비

운 후 이레만에 돌아왔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집을 나가면 궁금하여서 한번 더 돌아본

다 하였는데, 

저는 또한 명색이 지어미가 아닌가? 중전이  그저 그를 피하고 반기지 않음이다 싶어  울컥 

분하였다. 저

가 진정 짐의 지어미라 할 것이면 이럴 수는 없다. 홀로 생각하고 홀로 분하여서 주먹을 움

켜쥐고 씩씩 

콧김을 내뿜으며 왕은 교태전으로 발길을 하였다. 

"수라를 아니 하였어." 

누가 물어나 보았나? 서온돌 듭시어 대뜸 하시는 말이 그것이었다. 어디 한번이라도 중궁전

서 수라를 

하신 적이 있던가? 아연 놀란 중전은  아랫것들을 재촉하여 밤 수라상을 급히 올리게  하였

다. 골이 난 듯 

기미상궁이 듭시오 하자마자 퍽퍽 수저질을 하였다. 가만히 앉아  다른 곳을 보고있는 중전

을 향하여 눈

을 흘겼다. 

"게는 수라 아니 하나?" 

"신첩은 성상이 듭신 후에 할 것입니다. 드옵소서, 시장하실 것입니다." 

"흥, 짐이 시장할 것이라 짐작하면 말이지, 먼저 나와서 수라 하였나 아니 하였나도 살피고, 

짐의 용체가 

곤고하지 않나 물어는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그대 높다  자랑하는 부덕(婦德) 아닌

가?" 

"......잘못하였나이다. 앞으로는 명심봉행 할 것입니다." 

오자마자 트집질이라. 저가 무엇 그리  잘하였나? 속이 상하여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무조건 

그리하마 자

그맣게 대답하는 중전을 바라보며 왕은 탁 하고 수저를 놓았다. 입맛이 쓰다는  표정이었다.  

"에잇! 고만 할란다. 차수 올려라!" 

예전대로 할 것이면 자리차고 일어나가야지. 중전을  걷어차듯이 중궁전 기둥한번 본때나게 

걷어차고는 

휭하니 월성궁 달려가야지. 헌데 왕은 그러하지 아니하였다. 뚱한 얼굴로 양팔을 포갠 채 석

상처럼 앉아

만 있다. 대체 저 분이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 중전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몰

라 슬슬 불안

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밤에는 무슨 억지 트집을 하려고 이렇게 들어와 나가지를 않으시나? 

"흥! 짐이 나가기를 바라는구먼"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가 이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불안한  터로 어린 중전은 간을 달달 

떨다가 눈을 

오끔하니 뜨고 슬쩍 돌아보았다. 마침 저를  보고있던 왕과 그만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비웃듯이 입

꼬리를 실쭉 내려뜨리며 왕이 이죽거렸다. 

"......"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보니 그게 진심인 게지." 

"......아, 아니옵니다. 마마께서는 이 궐의 주인이신데 어디를 가든 어찌 막으리오?" 

"짐이 이 궐의 주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구먼? 헌데 왜  짐이 이 방에서는 반갑지 않은  객

(客)처럼 느껴지

는 지 모르겠네." 

".......객이라니 천부당만부당 하신 말씀이옵니다." 

".......기수 배설하라 이 말이야. 짐이 원행길에 심히 곤하구먼. 지어미라 하면서 짐이 어떠한

지 그 사정

도 못 헤아려주나?"   

이제 겨우 초저녁, 민망하지 않으신가? 금침을 내려라  하였다. 에그머니, 중전의 간이 철퍼

덕 땅바닥으

로 떨어졌다. 지난번에 당한 그 일을 또 당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였다. 그렇게  못마

땅하다 골을 

내고 뛰쳐나간 왕이 다시 그 일을 하리라 작정하고 중궁전에 들었을 줄이야 생각도 못하였

다. 

"시, 신첩의 일과가 아직 남아서...... 동온돌에 기수 배설할 것입니다." 

"게는 할 일 하란 말이지. 짐은 예서 침수하고 있겠다 이 말이지." 

끝까지 나간다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골난 얼굴로 왕비는 쳐다보지도 않고 뚝

뚝하게 말을 

잘랐다. 중전이 곁방에서 수라를 마치고 소세를 하고 늘 하던 대로 내훈과 글씨연습을 하고 

돌아가니, 

왕은 그때까지 잠들지 않고 있었다. 대체 이 분이 왜 이러시나? 나더러 목석보다 못한 계집

이라고 능멸

하신 후이니, 그 재미 바라고 들어오신 것은 아닐 것이고, 대체 왜 저리 하시나? 중전의  섬

약한 마음이 

더욱더 긴장하였다. 달달 떨렸다. 

금침 안에 누워 눈을 말똥말? 뜨고 그저 어린 안해를 기다렸다. 모르는 척 금침 안에 들어

와 주면 얼마

나 좋아? 헌데 중전이 무정하게도 돌아앉아 윗목에서 수틀을 집어들자 왕은 쳇! 하고 벽 쪽

으로 돌아누

웠다. 

'멍충이, 천하의 멍충이. 저 이는 정말 천하의 못난 멍충이다.' 

     

아무리 순진하고 멍청하여도 그렇지, 지아비가 이른 밤부터 침전에 든 이유가 무엇일까? 눈

치를 탁하고 

채어주어야지. 못이기는 척 모르는 척 상긋 웃으며 안겨들어야지. 그럼 짐도 저를 안고 그때 

미안하였다

고, 심하였다고 사과하고 다시 한번 정분을 이어볼 것이 아니냔 말이다.   

'답답이. 세상에 저리도 어리석고 모자란 계집이 어디 있을까?' 

왕은 속으로 장성한 사내 마음일랑 조금도 몰라주는 어린 중전에게 욕을 한바탕 끓어 부었

다. 그럼에도 

왜 고개가 그 쪽으로만 돌아갈까? 

그림처럼 앉아 조용히 수를 놓고 있는 중전의 모습. 

왕의 눈은 한동안 작은 손가락을  재게 움직여 수를 놓는 왕비의  섬섬옥수에 박혀 있었다. 

스스로도 모르

게 배어나오는 깊은 탄식. 후회와  자책감과 또 민망함이 섞인 한숨이  자꾸만 왕의 입에서 

배어나왔다. 

짐의 어린 비는 여리고 향기롭고 정결한 사람. 짐이 망쳐버린 초설 같은 사람. 왕은  돌아누

웠다. 

'지금이 아니면 짐은 평생 말 할 기회가 없을 지도  몰라. 저이와 짐이 평생 멀어지느냐 가

까워지느냐가 

달려있는 것이야. 말하여야 해. 짐은 말하여야 해. 미안하다고... 짐도 지금껏 편안치  않았다

고... 실상 

짐은 그대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고 말하여야 해.' 

치열한 갈등이다. 왕은 그러나 미안하오 사과하는 대신 이불을 끌어당기며 돌아누워 버렸다. 

왕비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몸을 돌이켜 도망치고 싶은 마음. 미안하다 말하고 싶은 마음과 그깟 

것하고 되 

튕기는 면구한 마음의 다툼이다. 

단 한번도 이렇게 난처하고 민망하여 불편한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다. 지존이신 지라 도도

한 자존심이 

그 누구보다 높은 분이 아닌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해야한다 싶으니 심히 자존심이 

상하였다. 

또한 대체 그 '사과'라 하는 것을 어찌 해야하는 것인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지아비가 지어미에게 밤잠자리 가까이  하여서 미안하오 이런 사과도 해야  한다더냐? 

어느새 입꼬

리가 심술맞게 비틀어졌다. 혼인하여 이미 두 해인데 말이지. 저도 나이가 그만하면 짐을 모

시는 그 정

도 공부를 하였어야지! 그 밤의 참담하고 가슴 아픈 순간을 떠올리며  왕은 다시 정말 화가 

치밀었다. 

'못난 것! 도통 짐에게 쓸모 없는 계집." 

씹듯이 중얼거리는 속내의 모진 말이 처음 느끼는 쓸쓸함.  슬프고 괴로운 심사의 표현이라 

함을 왕 자신

도 모른다. 

하지만 등돌린 왕의 진심은 사무친 슬픔이다. 어린 지어미의 작은 얼굴에 배어있는 우수, 건

들기만 하면 

주르르 눈물이 흐를 것만 쓸쓸한 얼굴과 항시 안개같이 흐려있는 눈동자를 바라보면 또다시 

지난 이레

밤 내내 그랬듯이 더없이 가슴아파 전전반측하게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었다. 지아비라 하

는 왕 자신을 

대놓고 꺼려하고 두려워하는 어린 지어미를 앞에 두고 느끼는 수치심과 민망함은 그리도 깊

었다. 

'싫다, 이렇게 마냥 밍기적거리며 불편한 것은 싫다 이 말이다.' 

이를 악물고 왕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불을 차내고 앉는  왕의 기척에 왕비가 화들짝 놀

랐다. 돌아보

는 작은 얼굴에 담긴 것은 역시나 두려움. 그를 거리끼는 불편한 기색이었다. 

"부, 불편한 것이라도 있나이까? 전하. 자리끼 올리리까? 아니면 매화틀이라......" 

"이리 가까이 오소." 

"예에?" 

"당장 짐 가까이 오라 이 말이오!" 

왕은 고함을 꽥 질렀다. 오라 하니  어찌하나? 다가와야지. 주저주저 수틀을 바구니에  넣고 

중전이 한 무

릎 왕 앞으로 다가왔다. 참지 못한 터로  왕이 더 먼저 중전 가까이 다가앉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

다. 불길이 타오르는 왕의 호목(虎目)을 올려다보며 중전이 바들바들  떨었다. 왕은 한층 더 

가까이 다가

갔다. 본능처럼 중전은 그를 피하여 뒤로 물러났다. 작은 얼굴이 두려움으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시 더 가까이. 왕은 앞으로 자꾸만 다가가고 왕비는 자꾸 피하여 물러나고...... 

"원자는 어찌할 것인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도망칠 수는 없음이지만 두렵기 또한 한량없음이라. 밀

려가다 못

해 마침내 등이 자개문갑에 닿았다. 더 이상은 피할 데가 없었다.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그

를 올려다보

는 중전에게 왕은 윽박질렀다. 

"짐과 그대의 책무라, 부부지간 화합하여  원자를 낳아야 하는 것  아냐? 꽃씨 뿌린다 하여 

원자가 생기지

는 않을 것이니 어찌할 것인데? 엉? 이리도  짐을 꺼려하고 피하니 대체 언제 짐이 그대에

게 씨를 뿌리란 

말이냐? 언제 원자를 낳을 것이냐고? 엉?" 

".......신첩이 목석이라....... 성상께서 꺼려하시는 줄로만 알고......." 

창백한 볼에 글썽글썽 고여있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왕은 손을 들어 사납게 그 눈물

을 지워버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