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중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한 채 곱게 웃었다.
"대전의 장태감이 어쩐 일이신가? 대전마마를 수행하여 재성 나갔다 하였거늘. 먼길 다녀오
신 분이 노
구인데 나가서 쉬시지를 않고 어이 중궁전부터 듭신 것이오?
"천한 소인의 행보를 그리 밝게 알아주시니 참으로 황읍하옵니다. 중전마마. 소인이 상감마
마 하명을 받
잡고 중궁전 들었나이다."
"그래요? 대전마마께서 무슨 하교를?"
중전은 고개를 갸웃하였다. 왕이 재성으로 거동을 나간 지 벌써 닷새 째였다. 장내관이 더
깊이 고두하
였다.
"전하께서 그럭저럭 재성 일을 다 보시어 간다 합니다. 이틀 후에 환궁할 것이니 짐의 행보
에 궁금치 말
라 전하라 하셨나이다."
"......나가실 때는 기별도 없이 급히 행차를 하시더니 환궁하실 날은 가르쳐 주시니 그는 감
사할 일이네.
분주한 행차에 옥체는 상하지 않으시었는지 걱정이로구먼."
누가 물어보았던가? 이젠 궁금치도 않소이다. 중전은 속으로 홀로 중얼거렸다. 허나 입 밖으
로 무엄하
게 그런 말을 낼 수는 없는 일. 알았소이다, 곱게 대답을 하였다. 환궁을 하시든 말든 어차
피 중궁전 쪽
으로는 고개도 다시 돌리지 않을 분이라, 기다리지도 않소이다. 쏘아붙이고 싶을 마음을 억
지로 참으며
중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환궁하시는 시각이 미시(未時) 무렵이 될 참이니 점심 수라는 노량목 행궁에서 잡
수시게 될 참
이라. 그 곳으로 차를 보내주어 하였나이다."
"차를 보내주오 하셨다고?"
"중전께서 끓이신 차가 참으로 천하일미라. 그를 맛보지 못한 지가 여러 날이라. 짐이 그 맛
을 잊지 못하
고 그저 그립느니. 행궁으로 보내다오 하셨나이다. 쇤네를 보내면서 두 번이나 다짐하였나이
다. 꼭 중전
더러 차를 보내주어 기별하라 하였나이다."
"기가 막히다. 일껏 전하느니, 겨우 차 한잔을 보내다오 하시다니. 허면 지금껏 누가 상감마
마 차 시중을
들었소?"
"상감마마께서 입맛이 보통 까다로우신 것이 아니옵니다. 다른 것은 모르되 특히 차를 즐기
심에 있어서
한번도 남들의 손을 빌리지 않으셨나이다. 돌아가신 영모궁(상감의 생모 희빈 홍씨)마마께서
차를 올려
드림에 익숙하여지시니, 영모궁마마께서 돌아가신 연후에는 망극하게 직접 차를 우려내시어
드신 터입
니다. 소인도 실로 신기하니 전하께서 차를 다오 하신 분은 오직 중전마마 한 분인 줄 아옵
니다."
장내관이 들고 온 작은 함을 바치었다. 윤상궁이 용문(龍紋) 홍보자기에 싼 그것을 소반에
얹어 중전마
마께 가져다 드리었다.
"재성의 관속이 바친 차(茶)인 줄 아옵니다. 전하께서 중전마마께 전하여라 하시었나이다.
잘 보관하여
향기가 좋으니 이것으로 끓여 보내다오 하셨나이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궁리궁리. 왕이 일껏 생각해낸 핑계라 하는 것은 차 한잔이었다. 도성으
로 돌아가라
호령질을 할 때는 언제람? 말을 타고 막 행궁을 나서려는데 나인 아이가 달려나왔다. 상감
마마께서 가
지말고 기대려라 하였다 전하였다. 얼마 후 불러 들어가 보니 차합(茶盒)을 건네주었다.
"중궁전으로 가져가거라. 짐이 내일 출발하여 도성으로 들어갈 지면 아마 모레 오정쯤에 노
량목 행궁에
서 낮것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 차를 보내주어 하여라."
"명심하겠나이다."
"짐이 모레 일을 끝내면 중궁전 들어간다 하여라. 그때까지도 옥체 미령하시어 자리보전하
실 양이면 짐
이 큰 노염을 낼 것이야. 서온돌에 불을 확 싸질러버릴 것이다. 허니 짐이 갈 때까정 반드시
일어나시어
중궁전 위엄을 보여다오 전하여라. 알았느냐?"
말씀은 퉁명스러웠다. 너 계속하여 앓고 있으면 혼 날줄 알아라. 허니 좋은 말할 때 일어나
라 하는 협박
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서 낯은 왜 붉혀?
궁시렁궁시렁, 그런 어린것을 중궁전에 두어두니 짐이 우세를 하는구나. 지아비 모시면서 자
리보전이
라, 망신인 줄 알아야지. 짐더러 오지 말라고 시위(示威)하는 것이냐? 같잖게스리! 싸잡아
중얼중얼 욕
질이라, 그런데도 끝말은 그것이었다. 다시 중궁전 갈 것이니라 하는.
왕이 다시 교태전에 든 것은 그 이틀 후, 저녁 수라상 받을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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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궐에 도착한 것은 저녁 수라상이 막 올려질 즈음이었다. 잠시도 쉴 틈이 없이 이리저
리 움직이신
거동인지라 아무리 강건한 분이라 하여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였다. 우원전에 듭시자마자 제
일 먼저 욕
간부터 하시겠다 하였다.
"짐이 심히 곤하느니라. 이 밤은 편안하게 쉬련다. 아무도 알현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뉘든
발길을 막아
라. 시끄러운 것이 싫으니 외간 사람들일랑 가까이 출입시키지 말거라."
장내관을 불러 엄히 하명하셨다. 이제나저제나 기회만 보았다. 희란마마가 월성궁에서 눈이
빠져라 기
다린다고 말을 해야하는데 고변 할 기회를 놓친 터라 김내관이 발을 동동 굴렀다. 장내관이
얄미운 김내
괸놈 하는 양을 바라보며 눈을 흘겼다. 매몰차게 전하께서 욕간하시는 방문을 닫았다. 사람
들을 몰아냈
다.
편안한 의대로 갈으시고 좌정하시었다. 수라상 들일까나 이러는데 왕이 다시 문 바깥에 엎
드려 있는 장
내관을 불렀다.
"너, 비(妃)가 지금 오데 계시는지 알아 오너라. 짐이 잠시 볼 것이다."
"아까 전에 쇤네가 전하께서 환궁하셨다 알려드리러 들어갔기로 내전에는 아니 계시고 침향
정에 가 계
신다 하옵니다, 마마."
장내관이 아뢰었다. 나란히 엎드려있던 옆의 김내관의 얼굴이 묘해졌다. 전하께서 한번도 그
러하신 적
이 없거늘 거동 나가시었다가 제일먼저 찾으시는 분이 중전마마라고? 이것 참으로 심상치
않다 하는 놀
람이었다.
문 바깥으로 못마땅한 듯 왕의 혀 차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퉁명스럽게 씹어뱉듯, 이 갈리
는 목청이 사
나우셨다.
"흥, 같잖은 것!"
방안에서 왕은 홀로 이를 갈았다. 행궁으로 차(茶)를 보내주어 하였다. 그 정도면 이제 그만
화해합시다
그려, 짐이 미안하였소이다 하는 뜻을 척 알아들어야지. 무어라? 짐이 환궁하든 말든 침향정
에서 저 혼
자 노닥거리고 있어?
"기가 차서! 아니, 무에 그런 방자한 것이 다 있느냐? 지아비인 짐이 이레만에 환궁을 하였
으면 지어미
된 도리로 대전에 나와서 문안인사를 들여야 그것이 법도에 맞는 일이거늘! 장도에 지치지
는 않았는지
살펴 묻고서 제호탕이라도 올려야 그것이 내전에 있는 여인의 부덕이라 할 것이다. 짐더러
모자란 것은
없었는지 먼저 알아서 저가 챙겨 내보내어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 것이냐? 헌데 이 것은
짐이 궐을 나
가든 말든, 죽든 살든 도통 관심도 없다함이니 무에 이런 고약한 것이 다 있는가?"
혼잣말에 벌써 심술이 덕지덕지 붙었다. 왕은 벌떡 일어났다. 나인들이 문을 열기도 전에 당
신 손수 문
을 열고 벼락쳤다.
"교자 대령하여라! 짐이 그 못난 것을 잠시 보아 버릇을 가르칠 것이다! 같잖은 것이 지성
으로 짐을 모신
다 하여도 귀여울까 말까 하는데 하는 양이 매사 이토록 어리석고 미욱하니 짐이 무엇을 곱
다 할 것인
가? 건방지고 고약한 것 같으니라고!"
결국 중전마마를 찾으시는 것이 꾸짖으러 가신다는 것이었다. 냉큼 교자를 준비하러 섬돌
아래로 내려
서며 김내관 놈, 그럼 그렇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 바깥 그늘아래서 하냥 기다리고 있던 월성궁 나인이 손짓하였다. 전하께서 환도하신 터
이니 희란마
마가 냉큼 보낸 것이다. 반드시 주상전하의 발길을 다잡아 월성궁에 납시게 하여라 분부하
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김내관의 기별이 없으니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던 참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전하께서 월성궁 나가신다 하시지요? 저가 아주 간이 졸아 다 타버렸나이다."
"아마도 이 밤에 아니 나가시리라. 용안을 살폈으되 나갈 뜻이 없는 듯 하시었소. 허니 그냥
돌아가소."
"아이, 어떡하지? 반드시 모시고 와야한다 몇 번이고 당부하셨으니 내가 그냥 돌아가면 큰
마마께 경을
칠 것이다..."
월성궁 나인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괜스리 아
랫것들에게 골
을 내고 패악질을 부려 분을 푸는 앙칼진 희란마마의 성정이다. 그를 아는지라, 오늘 돌아가
면 필시 본
때나게 뺨따귀라도 한 대 후려맞을 것이 확실한 지라,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김내관이
손짓하여 은
밀히 귀를 청하였다.
"전하께서 이 밤에 월성궁 아니 나가시는 것보다 더 큰 변이 있소이다. 큰마마께 꼭 고하
소."
"아이고. 무엇인데요?"
"전하께서 회궐하시자마자 다시 중전마마를 찾으시오. 겉의 기색은 중전마마 행동이 못마땅
하여 꾸짖음
을 내린다 하시지만, 여하튼 그 전서는 고개도 아니 돌리시던 교태전 사정을 하문하시는 지
라, 그것이
큰일이 아니오? 허나, 조심하여야 하니 내가 전하의 동정을 살펴 큰마마께 아뢰다 알려질
것이면 큰마
마나 나나 큰 경을 칠 것이니 반드시 큰마마만 들으시게 은밀히 알려드려야 하오!"
월성궁 나인 눈에 표독한 날이 섰다. 간절히 발길을 청하는 제 주인이 아니라 전하께서 못
난 중전을 찾
는다 하니 약이 오른 것이다. 흥! 하며 바람소리 나게 치마자락을 날리며 그녀가 사라지고
난 후,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김내관은 교자를 대령하였다.
평상복 차림으로 전하께서 침전을 나오셨다. 마루에 서서 발을 내미시니 김내관이 신발을
신겨드렸는데
대령한 교자에 앉으시다 문득 다시 내려라 하였다.
"번잡하게 따를 필요 없다. 짐이 그 못난 것을 본다 하여 행렬 이끌고 갈 것이냐? 재관이
너만 따르라.
잠이 잠시 산보 삼아 걸을 것이다."
아무도 따르지 말라 하시었다. 항시 곁에 두시는 지밀위사인 윤재관만 뒤딸리고 전하께서
교태전으로
가신다. 멀직히 사라지는 주상전하 뒷모습을 김내관 놈이 또다시 기묘한 표정으로 지켜보았
다. 윗전께
서 따라오지 말라 하셨으니 따라갈 수는 없되 저가 반드시 따라가서 대전마마께서 중전마마
상대하지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행동을 하시는지 알아야 희란마마에게 고자질하여 전낭을
부풀릴 것인
데 이것 기회를 놓쳤구나 아쉬운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