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200)

얼거리고 있었다. 그만 목매고 죽어버릴까?...... 

자신 스스로가 흩날리는 티끌보다도 부질없고 하찮은 존재라는 느낌... 또다시 귀 아래로 흘

러 배개잇만 

하염없이 적시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다.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드는 베갯잇이 쓰

라리고 아프

다. 지난 사흘동안 그러했듯이 관 같은 침전에 담겨 죽음 같은 잠을 청해보지만, 왜 이 밤은 

반가운 잠도 

오지 않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하지 말자. 진정하며 내 마음을 다스리자 하여보아도  잦아지지 않는 치열한 분

노. 처참함. 

혹은 피맺힌 자존심의 상처. 중전은 악머구리처럼 달려드는 서러움과 비참함을 가리려는 듯

이 이불을 

들어 얼굴 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렇게 하면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도망칠 수 있기라

도 하듯이. 

'아버님.......' 

주르르 눈물방울이 야원 볼을 아프게 훑고 흘러내렸다. 차마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는 어린 

중전은 이불 

속 어둠 안에서나 비로소 부를 수 있는 사친을 가만히 불렀다. 

'아버님. 소혜가 많이 괴롭소이다.  견디기 힘드옵니다. 이런 날  아버님의 어진 얼굴이라도 

뵐 수 있다면 

좋으련만. 구중천(九重天) 높은담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으니 어찌 이 문드러진 심사 함부로 

발설하리

오? 어진 아버님이시니 소혜의 이런 형편 들으시면 억장이 무너지어 늙은 가슴이 터지시리

라. 허니 나

는 아버님을 뵈어도 그저 웃어야 하는 팔자려니,  말도 하지 못하는 이 내 심사. 대체  누구 

있어 말을 하

리오?'   

지아비를 모신 첫밤에 그 분이 지어미인 그녀를 못마땅해 하여 잠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는 망신. 그

러나 깊은 수모와 능멸감보다 더 쓰라렸던 것은 수줍고도 일편단심인 사모지정이  거절당했

다는 부끄러

움이었다. 평생 가야 지워지지 않을 상처. 쿡쿡 쑤시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차마 어찌  스스

로를 위로해

야 할지 모르는 어린 소녀는 끅끅 억눌린 흐느낌만을 이불 안에서 뱉어낼 뿐이다. 

죽어도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굴욕감. 원망. 무엇이든 다  드리고 싶었는데... 달라 하면 다 

드릴 것이데 

일편단심 사모한 그 분은 그 마음 필요 없고 귀찮다 하셨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분에게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이다.' 

여인으로 부인당하고 경멸 당한 처참함보다 더 큰 괴로움은 바로 그런 자각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어

린 왕비는 자신이 자리보전 할 적에 윤상궁이 한시도 곁에 떠나지 않고 머리맡을 지킨 이유

를 알 것 같

았다. 그녀는 이 며칠 동안 정말 장도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밖에 없

었기 때문이

다. 

소문은 바람처럼 빠른 궐이니 벌써 아랫것들도 쑥덕거리며 나를 비웃고 있겠지... 너무 못난 

터라 천한 

잉첩에게 밀려 초야에서부터 지아비에게 버림받더니 인제 두 해 만에 비로소 지어미 구실을 

하기는 하

였지만, 그 재미며 계집의 요염도 없어 전하께서 자리차고 나가버렸다 하는 민망한 그 소문

은 이미 궐 

한바퀴를 돌아 월성궁까지 흘러 들어갔을 게다. 

교태전에 앉아 있는 중전은 허수아비요 실제 왕비는 월성궁에 앉은 큰마마라, 오직 주상 성

총 붙박이니 

천하 박색 중전 운명은 오직 월성궁 큰마마 손가락 끝에 달렸다 하였던가? 

단국의 양귀비라 하였다. 모란꽃보다 더  곱다하는 월성궁 계집의 화려하고  고운 화용월태

(花容月態)를 

떠올리며 중전은 마냥 슬프고 아프다. 그런 고운 계집의 품에 하냥 놀으시는 분이니 허기는 

이 못난 중

전의 무엇이 고울 것이냐? 

   

'그나마 다행일까? 전하께서 월성궁에 나가시어 나를 두고 그 천한 계집과 입질하기 비웃고 

깔깔댈 것

이라 생각하여 내가 딱 죽어질 것 같았거늘, 전하께서 게를 가시지는 않으신 것이라...  그러

고 보면, 윤

상궁 말대로 그분이 그나마 나를 끝까지는 능멸하시지 않은 것이라 할 것인가? 휴우- 죽고 

싶다... 정말 

죽어지고 싶다!' 

누가 중전 자리 달라 하였더냐? 중전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가슴에서 들끓는 심화(心火)가 

너무 치열하

여 잠일 이를 수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어린 왕비는 고래고래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녀의 운명을 헝클어버린 조화

옹(造化翁)

이 앞에 있달지면 허연 수염을 잡아 뜯어버리고 싶었다. 옷깃을 박박 찢어내고 용잠빼어 미

련없이 던져

버리고 땅바닥을 구르면서 패악질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단 한 번도 왕비되기 원한 적 없었다. 오직 아버님 모시고 조용히  글 읽고 부덕 쌓으며 침

선 배워 가솔거

느리며 살다가 때되어 어진 지아비 만나 가난하여도 좋으니 알뜰살뜰 살고 싶은 생각뿐이었

는데... 

언젠가 사친과 친우이신 두곡 아저씨께서 농 삼아 열 일곱 여덟 되면 아기씨를 며느리 주오 

하신 것을 

엿들었다. 

'날벼락 같은 간택에만 들지 않았으면 이제  나의 나이 열 일곱이니 올해쯤  혼인을 하였을 

것이다. 내 지

아비가 될 분이라면 재응 오라버니이니, 두곡 아저씨 닮아 점잖고 다정하시었지. 그리  혼인

하였다 할 것

이면 못난 나도 어쩌면 지금 행복한 새아씨로 살고 있을 지도 몰라...' 

그렇게 된다면 이토록 무정하고 잔인한 주상 당신을 사모하여 심란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녀

는 정말 중

전 자리 물러나고 싶을 뿐이었다. 운명은 그리 가혹하여 소박하고 조촐한 그녀를 아홉 겹의 

담 안에 가

둬두고 허울만 좋지 중전마마, 조롱 안의 새이며 허수아비로 살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하를 다시는 뵙지 못할 것이니 그는 슬퍼. 싫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작은 목소리가 하나 차고 올라왔다. 왕비는 돌아앉았다. 하늘에 뜬  반

달이 새어들

어와 슬픔어린 작은 얼굴을 창백하게 비춰주었다. 

가슴에 비수를 꽂듯이 대놓고 무안주고 호통친 후에 망설임 없이 등돌려 문을 박차고 나간 

지아비이다. 

그로도 모자라서 허구헌 날 딴 계집만  찾아가시어 속을 꺼멓게 멍들이는 무정하고  잔인한 

분이다. 

그리도 피맺히게 모욕당하고 능멸 받아져도 왜 그 분을 사모하는 마음은 잘라지지 않을까? 

불가사이. 소혜 아씨 순결한 열 다섯 여린 방심에 꽂힌 오직  한 분 사내가 누구인가? 친영

날 가마 문을 

열어주시며 싱긋 웃던 지아비 상감마마 그 분이시었다. 분홍빛 수줍은 연심(戀心)은 날이 갈

수록 진한 

빛으로 변해 가는데 무정한 정인은 이 내 마음을 그저 하찮게 여김이고 귀찮게 여김이고 필

요없다 하심

이구나. 

'일편단심(一片丹心) 사모하여 그저 그 분만 따라가는 가난한  눈길은 어찌 이리 질기고 강

한 것인가? 지

금껏 나에게는 웃음 한 번 눈길 한 번 제대로 돌려주지 않는 무정한 그 분에게 첫눈으로 반

하여 오직 그 

분만 보여지니 이 마음을 어찌 하란 말이냐? 차라리 미워질  수 있다면은... 정말 아무 기대

도 없이 그저 

죽은 듯이 법도대로 형식적으로 살아 갈 수 있다 할 것이면 이 쓰라리고 슬픈 마음은  없을 

것이다...' 

다시 잠자리로 돌아온 어린 왕비는 가만히 자신의 봉긋한 젖무덤 쪽을 살며시 어루만져보았

다. 난생 처

음으로 단 한 사내에게 허락한 순결한 열 일곱 꽃봉오리.  혼자 가만히 봉긋한 젖가슴을 만

져보는 가녀린 

손길이 한없이 슬프다. 

지아비 전하께서 세차게 움켜쥐고 빨아대어 시뻘건 피멍까지 남은  바로 그 자리. 얼음처럼 

쌀쌀맞은 무

안이 쇠말뚝으로 콱 박힌 바로 그 자리이다.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꼭 감싸안은 채 중전

은 가난한 연

정을 빌었다. 

-"지어미라 하면서! 짐이 지아비라면서..... 짐더러, 짐더러......  못난 것! 대체 그대는 언제야 

자라겠어? 

지어미라 하면서 이리 짐을 밀어내는 것이야? 중궁의 이름이 부끄럽다. 천하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계집 같으니라고!" 

밀어내지 않았는데, 상감마마 당신을 지아비로 밀어낸 적 없는데...... 다만 어찌할 바를 몰라, 

그분이 다

정하게 대하여주시기만을 기다렸을 뿐인데. 

'나,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 그저 전하께서 차가운 모습말고 단 한번만이라도 다정

하게 대해주

시면은 좋겠다. 여인으로 은애하여 어여쁘다 하여  주지 않아도 좋아. 그냥 세상 사람  사는 

것처럼 덤덤

하게 지어미로나마 대접하여 주신다 할  것이면 정말 원이 없겠다. 나는  언제쯤 되어야 그 

분 마음에 들 

수 있을까? 이 못난 얼굴은 어쩔 수 없다 하여도 내가 노력하여 의젓한 중전의 덕성을 쌓아

질 것이면 조

금은 나를 곱다 하여 주실까?... 그리하다 할 것이면 내가 죽도록 노력할 것인데...' 

아기씨라도 낳아지면 날 곱다 해주실까? 

중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중전의 지엄한 책무라 하는 것은  그 제일이 상감의 용정을 받

아 원자를 배

태하는 것이라 하였다. 죽도록 아프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서 

그의 씨를 

받아 원자를 가진다면, 그리하여 무정한 주상께서 조금이라도 그녀를 지어미 대접을 해주신

다면 중전은 

천번 만번이라도 다시 그의 품에 안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눈 꼭 감고 죽도록 무서운 그 일

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다음 새벽. 아랫사람들에게 약조한 대로 왕비는 평상시 담담한 얼굴을 회복한 채 이부자

리에 앉아있

었다. 한참동안 창문을 열어놓고 아스라이 밝아지는  산그림자를 바라보며 앉아있는 얼굴은 

석상같이 무

표정하고 굳은 것이었다. 인간다운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내비치지 않는, 중전마마의 얼굴.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벽이었다. 숙명처럼  목에 걸려진 여인이라 하는 것을, 중전이라  하는 

굴레를 벗어 

던질 수 없는 그녀이다. 운명이 그녀에게 앉힌 자리를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답답하고 서

글픈 처지. 왕

비는 마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씻어내듯이 욕간 준비하라 아랫것에게 하명한다. 정결하게 

온몸을 닦

고 머리 단장 마치신 후에 속의대까지 진솔로 갈아라  하시었다. 창희궁으로 왕대비전 문안

인사를 들인

다 하시었다. 돌아오신 직후 박상궁을 불러 수틀을 매어라 하셨다. 

"허고 윤상궁은 도화서로 나인을 보내 효자도를  가져오시오. 사친의 환갑이 내년이니 내가 

친히 수를 놓

아 선사를 하여 드릴 것이오. 내가 비록 중전이되 도무지  쓸모 없는 밥벌레라 내탕금 쓰기

도 무서워 사

친께 번듯한 선물 하나도 못할 것이라. 오직 믿느니 이나마 곱다하는 침선이라, 글로 면피나 

할 것이다." 

어진 표정, 담담한 목청이 겉으로 보아지면 평상시 중전마마 그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중

궁전 아랫것

들은 하나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수틀 잡고 앉은 후에 밤잠도 잊고 골몰하는 

중전의 그 

모습은 실상 마지막 절망에 허물어지고 처참함에 가슴이 메여지는 상념을 잊어버리고자  함

이다. 

"마마, 행궁서 돌아온 장내관 들었나이다." 

"모시게." 

담담하고 맑은 옥음이 장지문을 넘어왔다.  장내관은 들어와 고두하여 절을 하였다.  수틀을 

앞에 놓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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