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않았구
나. 못났다 하여 조롱이나 하고 옳은 지어미로의 대접 한 번 해준 바 없으며 그저 하냥 구
박하며 조롱거
리로나 삼으셨다. 이 새를 얻을 그때도 미물이나마 아껴주고 가엾게 여기니 실로 어지시오,
한 마디라도
해주셔야하였는데 희란 마마가 곁에 있으니 혹여 오해하고 짜증부릴까 봐 오히려 더 조롱하
시고 비웃으
신 터가 아니더냐?
허나 그 일이 아직까지도 왕의 가슴에 걸린 자책의 못이다. 생명을 귀하게 여길 줄 아니 윗
전으로 아름
답구려, 어진 덕성을 갖추었으니 훌륭하오 해야했는데.... 혹여나 정인인 희란 마마의 비위를
거슬릴까
봐 전즌긍긍. 장하게 소박 주는 것도 미안한 노릇이거늘 매사 눈을 흡뜨고 무조건 못마땅하
게 억지트집
만 잡았구나.
마치 넋이 나간 듯이 한동안 일어나지도 않고 멍하니 쪼그리고 앉아만 있는 중전이다. 왕은
문득 무섬증
이 들었다. 대체 이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 것인가? 분명 몸은 그의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
하고, 넋은 구
중천을 헤매고 있는 듯, 텅빈 공허만이 생기잃은 작은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왕
은 문득 중
전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물어보고 싶었다. 그대는 어디 있소? 지금 그대는 짐 눈앞에 있는
것이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어느새 억센 손으로 중전의 여린 어깨를 잡아 뒤채고 있었다. 두려움
이 담긴 맑은
눈에, 고여있을 뿐 차마 흐르지도 못하는 눈물이 가득 담겨있었다. 거짓말처럼 주르르 흐르
는 눈물. 투
명하기까지 한 작은 볼에 자꾸만 빗물이 흘렀다. 자기도 모르게 왕은 손을 들어 중전의 눈
물을 지워주고
있었다. 지워도 지워주어도 자꾸만 흐르는 옥루.
아무 것도 아닌데, 이 여인은 짐에게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무딘 칼로 심장을
에이는 듯
한 아픔이 너무 낯설어, 정말 지독해서 왕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옥루를 그치오."
"예, 전하....... 훌쩍."
작은 입술을 꼭 깨물며 중전이 고개를 떨구었다. 말로는 아니 운다. 진정하였다 하는데도 잡
기조차 아쉬
운 여린 어깨는 계속하여 들썩이고 있었다. 왕은 중전의 작은 손을 꽉 잡았다. 무작정 끌고
걷기 시작하
였다.
"하냥 예서 있지는 못할 것이라. 아마 필시 밤수라도 아직 아니하셨을 것이다. 갑시다. 짐이
중궁전 데려
다 주겠소. 마음을 진정하오."
실로 두 분이 나란히 어깨 맞대고 옥보를 옮기시는 것은 가례를 올린 지 두 해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교태전까지 긴 길을 가시면서도 그러나 두 분 사이 말씀 한 마디가 없다. 중전은 왕께서 못
난 것이 감히
입을 벌린다 조롱하실까 봐 두려웠던 것이고, 왕께서는 중전을 다시 울릴까봐 말을 못 하였
다.
"짐이 언제고 반드시 그대에게 새 새끼 대신에 다른 길짐승 한 마리 가져다주리오. 너무 상
심을 마오."
중궁전 월동문을 넘어가며 고작 그 한 말씀이 전부이다. 허나 중전으로서는 실로 처음 들어
보는 다정한
위로였다. 가슴 설레고 감사하여 눈물이 또다시 핑 돌았다. 그 말씀을 하신 연후에 우원전으
로 나가시는
전하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하냥 그대로 서 있기만 한 중전이다.
몇 발자국 걸어나가던 왕은 자꾸만 뒤가 끌리었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 고개 숙인 채 그 자
리에 우두커
니 서 있기만 하는 어린 중전의 작고 쓸쓸한 모습이 눈에 밟히고 가슴에 가시로 푹 박혔다.
자신도 모를
어떤 충동으로 왕은 화계에 선 앙상한 나무에 매달린 노란 모과 한알을 따 들었다. 다시 돌
아가 아무 말
없이 중전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니까 이것이라도...... 짐 마음이니까...... 삐약이는 또 잡으면 되니....... 어찌하든 눈물
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 말을 하는 왕의 얼굴이 벌겋다. 왕이 쥐어준
모과 한 알을
가슴에 품고 발치만 내려다보는 중전의 얼굴 역시 빨간 홍시였다.
"밤에 짐이 서온돌 들 터이니...... 그러니까 차라도 한잔 주어. 제발 우지는 말고......"
***********
"전하. 오데가 미령하시옵니까?"
"......음? 아, 아니오. 계속하시오."
편전에 앉아 석강 대신 3정승 승지들 앉혀놓고 양(兩) 평창이 비좁으니 도성 가까운데다 평
창을 하나 더
지어야 할까 의논하시었다. 헌데 그날따라 영 마음이 딴 데라, 듣기는 하시는데 시선은 엉뚱
한 곳을 헤
매고만 있는 듯 하였다. 가장 가까이 앉았던 우의정 한영회가 걱정이 되어 여쭈었다. 말을
묻는데도 왕
은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재우쳐 다시 여쭈오니 그때서야 대답을 하였다. 용안이 문득
벌갰다.
지금까지 딴 생각을 한 것이 면구한 듯 왕은 서탁 앞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집어들었다. 평
창 자리를 어
디다 잡으면 좋을까 공조에서 올린 장궤였다.
"세물이 많이 올라오는 곳이 이곳 노량목 쪽이니 아무래도 근처가 낫지 않겠소?"
"헌데 그 곳의 자리가 비가 들면 물이 쉬이 빠지지 않는 자리라서 망설이고 있다 하옵니다.
신등은 재포
나루 쪽이 더 나을까나 보고있나이다."
이러는데 바깥에서 장내관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나 중궁전 상궁 들었나이다."
"무엇이냐?"
"밤 늦다이 조하의 일로 곤고하심이라, 중궁전에서 작은 다담상을 올렸나이다."
"그래? 중궁이 기특하도다. 가납하느니라."
문이 열렸다. 윤상궁을 앞장세우고 나인들이 붉은 보를 씌운 다담상을 들고 공손하게 들어
왔다. 절을 한
연후에 아뢰었다.
"전하. 만기라 하는 성상의 분주한 일에 얼마나 용체 곤고하실까 하시며 중전마마께서 조촐
하게 다과상
올렸나이다. 가납하여 주옵소서."
"감사하다 전하여라. 내전에서 바깥을 살피는 뜻이 크니 아름답구나."
나인들이 한발 다가와 방안의 사람들에게 다담상을 놓아주었다. 왕 앞에도 상이 놓여졌다.
윤상궁이 안
고 온 청화 주전자를 기울여 조르르 차 한 잔을 따라바치었다.
"중전마마께서 손수 끓이신 차이옵니다. 전하께서 다례를 즐기신다는 소문을 듣자와, 빙천의
물을 손수
떠다가 끓인 터라 맛이 극진하옵니다."
"흠. 그래?"
잔을 들어 한 모금을 음미하였다. 왕의 용안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머금어졌다. 입에 발린 소
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기쁜 빛이었다.
"참으로 절미로다! 중궁이 이토록 법도에 맞게 차를 만드실 줄 알다니. 짐이 이제까지 가까
이 있는 사람
을 두고 멀리에서 차 맛을 찾은 것이 아니던고? 참으로 감사하니 잘 마셨다 중전에게 전하
여라. 허고,
명일부터는 반드시 조강과 석강 무렵에 짐이 차를 주오 하였다고 전하여라."
"아, 황공하여라. 성상께서 마다 않고 기뻐하시니 참으로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신은 돌아가
반드시 전
하여 드리겠나이다."
벙싯 웃으며 윤상궁 이하 중궁전 나인들이 돌아갔다. 즐거이 가납하시고, 심지어 사람들 앞
에서 중전마
마를 칭찬하신 것도 모자라서 내일부터 매일매일 차를 다오 하셨다. 이 말씀을 전하여 들으
면 중전마마
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랴. 가랑비에 옷이 젖으며 어진 심덕 이길 장사 없다 하였는데, 겉으로
는 밉다 차
고 다니시는 중전마마, 실상 대전마마께서도 은근슬쩍 마음을 열고 계심이 아니랴?
왕은 상에 놓인 율란 하나를 입에 넣었다. 역시 그것도 입에 맞아 입가에 웃음이 머금어졌
다. 감히 저분
을 들지 못하는 신하들에게 권하였다.
"중궁이 조용하나, 말없이 내조의 공을 쌓는 어진 사람이 아니겠소? 모처럼 중궁서 내어온
다담이니 경
들도 자셔 보시오. 맛이 심히 아름답고 기이하오."
영의정 홍윤성이며 한영회가 서로 다투어 중궁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치하하였다. 입발린 소
리로 다른
사람의 치하에 장단을 맞추지만, 좌의정 정안로의 얼굴이 심상찮다. 다시 두루마리를 들고
설명을 전하
여듣는 왕의 용안을 흘깃 훔쳐보는 얼굴이 음산하였다.
'이것 참, 고약하구먼, 중궁전이라 하면 돌아보기는커녕, 드러내놓고 싫은 빛에다 조롱만 하
시던 분이
아니더냐? 헌데 아무리 체면치레라 하지만은 대놓고 중궁이 내조의 공이 크다 치하하시고
날마다 차를
다오 하시어? 이것 큰일이로다. 혹여 알게 모르게 전하께서 싫다 밉다 내친다던 중전마마와
정이 돋고
있는 형편이 아닌가?'
제 딸년 희란마마에 대한 붙박이 총애가 저들 벽파의 유일한 힘줄이 아닌가. 만에 하나 왕
의 총애가 월
성궁 마마에게서 중전으로 옮겨지면 곧바로 저들 일파는 나락이 되는 것이다. 아직 혁이 놈
일도 해결하
지 못하였으니 후사도 도모하지 못한 형편인데, 월성궁 마마가 왕에게서 내쳐진다면, 이것
큰일이 났다!
정안로, 고개숙여 열심히 일을 하는 척 하면서도 이 일을 어찌 수습할까 궁리라.
아무리 정분이 없는 사이라 하여도 알 수 없고 모르는 것이 사내와 계집의 일이다. 명색이
부부이다. 싫
어도 달포에 너덧번은 교태전에 듭셔야하는 것이 법도인데, 그 법도 따라 종종 보아지다 미
운 정이라도
든다면 큰일 아니랴?
감히 대전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못하던 중전이 먼저 다담상을 내어오는 것도 그러하였
다. 화답하여
빙긋 웃으며 중전에게 차를 다오 청하는 왕의 행동도 처음 보는 일이라. 이것 큰일났다!
밉다 밉다 하지만 미운정이 더 무섭다 하지 않더냐? 지금은 하냥 소박놓는 중전이지만 하룻
밤 어떤 변
덕으로 왕이 중전의 옷고름을 푼다 치자. 이러저러하다가 저들 손길이 닿지 못하는 궐 안에
서 중궁전에
서 은밀하게 왕과 중전 사이가 가까워져 이제 열 일곱. 막 피기 시작하는 중전이 덜컥 회임
이라도 한다
면, 원자라도 생산한다면......
정안로 등골이 서늘하였다. 정궁의 몸에서 태어난 원자라. 그 누가 감히 침노할 수 있으랴?
그 길로 월
성궁마마의 권세는 끝이 아닐 것이냐? 혁을 왕자로 올려 언젠가는 동궁만든 연후에 대대손
손 권세잡고
떵떵거리며 살겠거니 한 것들이 다 일장춘몽이라.
정안로, 교활한 눈을 들어 중전이 바친 차를 음미하는 왕의 용안을 다시 한번 살피었다. 찻
잔을 내려놓
고 승지더러 교서 써라 하명하는 눈빛이 어쩐지 써늘한 듯하여 가슴이 더 선뜻하였다.
편전에서 돌아온 왕이 장내관을 부르시었다. 음음 헛기침을 몇 번이나 하였다. 어쩐지 한참
망설이는 빛
이더니 이 밤은 교태전에 들것이다 하시었다. 중궁에 듭시는 날도 아닌데 갑자기 어찌 이러
시나? 의아
한 바이지만 여하튼 교자 등대하겠나이다 하였다. 용포 벗으시고 평상복으로 의대 갈으시면
서 다시 장
내관을 부르시었다. 조금 쑥스러운 용안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