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하여 주오. 봄빛이 너무 좋으니 운치있게 춘설 한 잔이나 하고 싶소,"
망연히 봄빛 무르익은 바깥 뜨락을 내다보시는 중전마마의 쓸쓸하고 조용한 옆얼굴을 바라
보며 윤상궁
은 속으로 우리 불쌍한 중전마마... 중얼거릴 뿐이다.
주상께서 우원전 침전으로 월성궁 계집을 불러 시침을 드는 것으로도 모자랐던가. 감히 무
도하고 방자
한 그 계집이 대청 마루 하나 사이에 두고 중전마마 서온돌에 버젓이 계신데도 침전 동온돌
로 상감을 모
시어 침수 시중 들겠다고 나서기까지 하였다는 기함할 소문이 퍼진 이후부터였다. 그 이후
중전마마께
서 이 가정당에서 주무시기를 즐겨하기 시작하였다.
깊은 인간적인 모멸감이었으리라. 아무리 왕이 중전 저를 지어미 취급 아니 하시고 허수아
비로 여기신
다 하여도 교태전은 오직 중전마마 영역이었다. 그런데 그곳까지 월성궁 계집이 들어오겠다
고 나선다
니. 그건 사람 노릇이 아니었다.
주상 당신의 공간인 우원전에 붙은 침전도 아니요 대청 하나 넘으면 중전마마 눈과 귀 버젓
이 있는 터에
잉첩이라 하는 월성궁 여인네가 같이 침수 들겠다고 나섰다면 이것은 중전더러 그 계집이
대놓고 하는
조롱이오 무시함이 아닐 것이냐? 감히그 계집이 그런 짓을 하겠다고 나섰다면 이것은 지아
비이신 왕이
방조함이 없으면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 비록 그날 왕이 노화를 내며 단칼에 그 말
을 잘랐다 하
여도 어린 중전마마 마음에 박힌 원망은 깊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순결한 사모지심만 가지
며, 부덕을
쌓고 기다리면 될 것이거니 하던 순진한 기대가 무참하게 박살이 난 것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히고 아뜩한 일이라. 아무리 어진 중전이라도 심화가 아니 끓을 것
이며 분기가
아니 날 것이던가?
실로 왕이 중전마마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시는가 게서 드러난 것일지니, 조용하나 결기 곧
고 자존심이
강한 중전마마, 웬만하여서는 왕이 교태전에 들 적에 서온돌에 계시고 싶어하지 않으셨다.
가정당은 비록 작은 건물이었으나 높은 곳에 있어 전망이 시원하였다. 아름다운 후원에 둘
러싸여 있으
니 조용하였다. 보고 듣기 괴로운 일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아무리 그 여인네 총애
하시고 심지
어 내전까지 부르시어 같이 계신다 하여도 예는 이 중전의 영역이니 못 들어 올 것이다 한
곳이 가정당
이었다. 은밀한 여인네 거처이기 때문에 그 곳 주인이 부르지 못하면은 주상께서도 발길을
못하시는 곳
이이었다. 어린 중전마마께서 사가의 후원 초당처럼 조용하고 외진 그곳에 자주 발길을 하
심은 마음의
괴로움을 잊어보고자 함도 있으나 또한 옛적 초당에서 유모와 조용히 살던 그때를 그리워함
이요, 그 철
없이 맑고 근심없이 뛰어놀던 그때를 그리워함이라.
"실로 날도 좋구나. 이런 날, 그네라도 뛰어 보았으면... 아니면은 잠시 궐 밖에라도 나가 보
았으면... 초
파일이 언제더냐?"
"닷새 남았나이다. 왕대비 마마께서 초파일이면 봉은사로 나가시니 전하께 주청하시어 같이
다녀오시지
요."
"그럴 수는 없지. 불사야 사사로운 믿음이나 나는 중전이 아닌가? 그리 하면 조하가 발칵
뒤집혀질 것이
야. 전하께서 우세가 될 것이니 어찌 함부로 하겠느냐? 게다가 이 중전이라 하면은 무엇이
든지 조롱하
시는 전하이시니 내가 입을 벌리면은 금새 타박하실 것이다. 휴우- 헛 된 꿈이라... 후원이
나 한 번 거닐
것이다. 따라 오지 말아라. 홀로 걷고 싶느니라."
월동문 넘어서서 수풀 짙은 후원에 들어서는순간, 언제나 마음이 편안하였다.
대궁 안 넓은 후원은 주상 전하와 중전마마 이외에는 윤허가 없으면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
하는 곳이다.
실로 궐 안 호사며 사치가 딴 곳이 아니라 바로 이 곳이었다. 왼갖 기기묘묘한 괴석이며 기
이한 화초며
수풀이 아름다웠다. 게다가 고운 새들이며 토끼며 다람쥐며 산짐승이 많으니 어린 짐승 좋
아하시는 중
전마마 성품에 가장 좋은 곳이라. 딴 곳은 몰라도 중전마마, 궐에 들어와 후원에만 들어 서
시면은 그래
도 내가 궐에 잘 들어왔지? 싶으신 터였다. 후원 별칭이 금원(禁苑)이라 함은 실로 적절한
것이었다.
걸어서 거의 두 식 경을 가면 후원 가장 깊은 곳에 도착한다. 게에는 주한산 계곡물이 모여
만들어진 호
수가 하나 있는데 아름이 천제연이었다. 그 위에 날아갈 듯이 선 정자가 있으니 침향정이라.
그 곳을 중
전마마는 궐 안서 제일 좋아하였다.
봄이면 주위의 버들이 푸르고 여름이면 거울같은 수면에 솟아오는 연꽃이 장하였다. 가을이
면 앉아서
바라보는 먼 산 단풍이 화려하였고 겨울에는 유리창 너머 바라본 설경이 아득하니 그 곳에
앉아 계시면
그저 평화롭고 적요로왔다. 그 곳에 올라 글씨를 쓰시고 서책을 읽으시고 시를 읽으실 때면
중전마마는
당신 처지가 얼마나 답답하고 가엾은 것인지 가끔 잊어버리곤 하였다.
주상께서도 가끔씩 귀한 손님들 대접하는 주석을 게서 베푸시곤 하였다. 허나 침향정은 많
은 사람이 즐
기기에는 장소가 협소하니 왕은 그곳보다는 한 사 오리 멀리 떨어진 앞쪽의 보진재를 더 좋
아하셨다. 보
진재 앞에는 주상 전하께서 어린 날 동궁시절에 사가의 풍습을 배우기 위해 선대왕께서 지
어 주신 아흔
아홉 칸 기와집이 있었다. 두 분 윗전 마마 다 계실 적 그 행복한 시절을 상기하는 곳이니
가끔씩 전하는
울적하거나 곤하시면 그 곳에서 주무시는 경우도 있으시었다. 그러니 그 가까운 보진재에서
주로 연회
를 베푸실 뿐 침향정 쪽에는 거의 나오시지 않으시니 중전마마는 속으로 이 곳은 이 중전만
의 장소이다
생각하고 계신 참이었다.
옥보를 천천히 옮기어 침향정까지 가시는데 길섶의 우담화 한송이 꺽어 손에 드시고 새소리
에 귀를 기
울이시며 생긋 미소지으시니 볼이 복사빛이다. 한번도 주상 전하 앞에서는 드러내지 못한
얼굴이니 그
표정이 귀엽고 아담하였다.
침향정에 오르시어 중전마마, 먼 하늘 바라보시며 봄바람에 실려오는 궐 바깥 생각도 하시
다가 어린 시
절 동무들 생각도 하다가 그네 뛰던 옛적 생각을 하시며 살짝 이 깊은 후원 고목에 그네를
달아주오, 부
탁하여 볼까 궁리하신다.
'단오에 그네 뛰는 것은 남들도 다 하는 풍습이니 이 중전이 뛰는 것도 흠은 아닐 것이야?
이렇게 깊은
곳에 달아두고서 홀로 그네를 뛰는데 뉘가 흉을 볼 것인가? 전하께서 아니 들어오시면 이
중전만 들어
오는 금원인데 말이야...'
일단 왕대비마마께 그리하여도 될까요? 여쭈어 보고서 그네 달아다오 하리라 생각하시며 중
전마마, 길
을 돌아가다가 문득 이런!! 하며 해연히 소리치셨다.
"아, 이 참혹한 일을 어찌할꼬? 필시 족제비 짓일 것이다..."
바닥에 흉하게 떨어진 새집이 있었다. 그 속에는 털도 아니 난 뻘건 새 새끼가 두 마리가
고물거리고 있
었다. 아마도 어미 새는 제 새끼며 새집을 지키려다 죽은 듯 싶었다. 날개가 반쯤 뜯긴 채
죽어가고 있었
고 휙 하고 달아나는 그림자가 꼬리가 길었다. 그 입에는 이미 새 새끼 한 마리가 물려 있
었다. 실로 참
혹하고 불쌍한 광경이니 어린 중전마마 절로 눈에 눈물이 글썽하였다.
"만물이 생동하는 이 봄에 너는 털도 아니 난 것이 생명을 잃어버리는 불쌍한 처지더냐? 어
찌 그리 이
중전하고 똑같은 신세더냐?"
한 번 마음껏 저 하늘을 날지도 못하고 날개가 꺾인 새가, 피지도 못하고 소박 받아 시들어
가는 중전자
신의 팔자와 어찌 그리 똑같은 것인가? 중전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두 마리 새 새끼
중에서도 한
마리는 이미 머리가 으깨어져 숨이 끊어진 터이고 오직 한 마리만 살았다. 힘없이 삐약거리
는데 그 놈도
실은 죽을 둥 살 둥이었다. 중전은 그 불쌍한 새 새끼를 옷고름에 잘 싸서 안았다.
"내가 보지를 못하였으면 모르되 이리 보았으니 너를 어찌하든 살려볼 것이다. 미물이라 하
여도 생물은
귀한 것이니... 이제 내가 너를 삐약이라 부를 것이니라. 너가 살면은 이 중전도 살아갈 힘이
날 것 같구
나. 반드시 살아야 한다, 삐약아..."
그때였다. 요란스런 웃음소리가 저만치에서 가까워져 왔다. 주상 전하의 호탕하고 거침없는
웃음소리였
다. 그 웃음에 묻히어 여인네 요염한 앙탈이며 홋호거리는 방자한 웃음소리가 귀를 두드렸
다. 필시 월성
궁 그 계집이라, 오늘도 쪼르르 대궐에 들어와 왕을 미혹하여 하루 방탕한 모양이었다. 생각
하지도 못한
왕과의 만남에 중전은 순간 석상이 되어 버렸다.
왕께서 수하 예닐곱을 뒤딸리고 옥보를 옮기여 이 쪽으로 오시고 있었다. 봄날 한때 한적한
산보였다.
낭창한 허리 요염하게 흔들어 전하의 팔에 노골적으로 매달려 따라오는 이는 희란마마였다.
보진재에서
이 누이 풍류로 춤을 출 것입니다. 술잔이나 주시옵소서 눈웃음을 살살 친 참이다. 오랜만에
주안상이나
받자구나 하신 주상 석강도 작파하고 금원으로 나오신 것이다.
예상치도 않게 중전과 마주친 것이라 어린 그녀도 놀라서 석상이 된 터이지만 왕도 당황하
여 설핏 걸음
을 멈추었다. 희란마마가 끼고 있던 팔을 슬며시 왕이 먼저 풀어 내렸다. 아무리 하찮게 여
기고 네깐 것
이? 하여도 사촌누이인 잉첩을 옆구리 끼고서 방탕하게 놀자 나오시다 중전을 딱 마주친 참
이니 어쩐지
무척이나 면구하였다.
중전은, 먼저 허리를 굽히어 절을 하고는 한 발 물러났다. 고개를 숙인 채 전하께서 지나가
시기를 기다
렸다. 이 깊숙한 중궁전 후원까지 월성궁 여인네를 데리고 나오시는 주상 전하가 원망스럽
다 생각도 못
하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떨면서 다만 주상께서 오늘은 자신에게 트집 아니 잡으시고 그저
지나가 주시
기를 바랄 뿐이다.
못난 이 것이 대체 예서 무엇하는 것이야? 하듯 마뜩찮은 눈길로 왕은 중전을 바라보았다.
왕은 중전이
고름에 싸안은 것이 어린 새 새끼임을 금세 알아보았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바닥에 떨
어진 새집과
죽은 어미 새며 옷고름에 싸안은 어린새의 참혹한 광경을 보고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강 짐작하
였다. 그러나 왕은 흥! 하고 비웃으시며 그대로 지나쳤다. 오히려 보란 듯이 희란마마의 야
리한 허리를
팔로 끌어안아 죄었다. 유유자적 발걸음을 옮기시는데 일부러 중전마마 들으라는 듯이 심술
궂게 한마디
툭 던져다.
"그깟 새 새끼 한 마리에 유난을 떠는군. 저것도 중전이라고?... 쯧쯧쯧... 저 어린 것은 대체
언제야 철
이 들꼬?"
그깟 새 새끼 한 마리...
모퉁이를 돌아가며 요란스레 울리는 왕과 월성궁 여인의 방자한 웃음소리가 뼈에 아프다.
중전은 왕에
게 자신의 존재가 그러하단 말인 것 같아 바들바들 떨며 하릴없이 시선을 하늘로 주었다.
그깟 새 새
끼... 사나 죽으나 아무 거리낌없고 의미없는 존재... 가련한 중전 자신의 존재... 중전의 볼에
옥루가 주
르르 구른 것은 그때였다.
자기도 모르게 중전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눈물이 흘러 앞이 아니 보이니 걸을 수도
없었다. 죽은
어미 새며 새끼를 그냥 버려 두고는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뭇가지로 땅을 파 구덩
이를 만들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