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200)

용안이었다. 가당찮고 기가 막히다는 빛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짐을 사모한다 말을 잘하면서 누이는 왜 이리 짐을 난처하게 하오? 버선목  헤집듯이 짐의 

마음을 후려

쳐놓고, 이것 달라 저것 달라 조르기는 잘하면서 왜 이날 짐의 난처한 처지는 생각 않고 그

저 누이 생각

만 강요하오? 참으로 한심하오! 짐이 누구요? 이  나라 왕이오. 신민의 귀감이 되고 백성의 

아비가 되는 

자이니, 짐의 모든 것은 청사에 기록될지라! 이제 짐이 강상을 어긴 폭군이 되다 못하여 잉

첩 하나 이기

지 못하여 심지어 정궁이 거처하는 교태전까지 끼고 들어가 희롱하였다고 청사에  기록되게 

하고 싶으

오? 무엇이 이리 무도한가?" 

"저, 전하.... 지, 지금 이 희란더러 잉첩 주제에 감히 교태전에  들것이냐 호통치시는 것입니

까?" 

"어지간히 하오! 아무리 하여도 그렇지  벌려진 입이라고 감히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가? 무어라? 교

태전으로 들어가? 짐을 낳으신 생모마마조차도 그토록 총애깊고 세자인 짐까지  생산하시었

으되 감히 

장경왕후마마 거처인 교태전을 넘보지는 못하였소이다. 헌데 지금  무어라? 짐더러 한갓 잉

첩인 누이를 

끼고 교태전으로 들어가자고? 대체 얼마나 짐을 망신시켜야 그 성미에 직성이 풀리나?" 

격하고 급한 성미답게 왕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손을 훼훼 저었다. 꼴같잖다는 듯이  발로 

이불깃을 차

냈다. 보기 싫으니 안전(案前)에서 사라져라 하는 뜻이었다. 버럭  바깥을 향하여 고함을 질

렀다. 

"게에 누구 있느냐?" 

"예, 전하." 

"들어 짐의 의대 정제하여라. 당장 교자 대령하여라, 짐은 서경당으로 갈 것이다." 

희란마마가 황당하여 멀거니 바라보거나 말거나 왕은 내관의 시중을 받아 의대를  차려입었

다. 돌아보는 

눈빛이 칼날이었다. 

"고얀......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으니, 대체 저가 무어라고 생각하는가? 짐의 마음을 희롱하

고 시험하

여도 유분수이지, 같잖게스리 어디서 감히...... 당장  나가시오! 다시는 짐이 부르기 전에 우

원전으로 들

지 마오." 

"전, 전하...... 어찌 이러시옵니까? 어찌 이  희란을 버리십니까? 잘못하였습니다. 흑흑흑. 신

첩이 성총을 

믿자와 하여서는 아니 되는 말을 올렸나이다. 용서하옵소서." 

이것 큰일 났다. 내가 너무 나갔구나. 아연 긴장하였다. 희란마마, 썩썩 의대 정제하고  문을 

나서려는 왕

의 발길을 필사적으로 만류하였다. 그러나 왕의 미간에 잡힌  노염의 주름은 쉽사리 없어지

지 않았다. 씹

어내뱉는 말은 그야말로 칼날,  희란마마 저의 자존심과 교만함을  단번에 후벼파는 시퍼런 

칼날이었다. 

   

"울며 부인하면 한번 뱉은 말이 없어진다던가? 어여쁘다 하여 항상 짐이 누이를  곁에 두었

으되 오늘밤

은 실로 실망이 크오! 누이의 심보에 붙은 가당찮은 욕심보를 이제 짐이 읽었소이다. 흥! 감

히 겁도 없이 

중궁전 뽑아들이기 제 손가락으로 하였다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아니 될 말을 안팎으로 하고 

다닐 때부터 

알아보았다. 어디서 감히 천지신명에게 고변하여 맞아들인 사직의 정궁 자리를 잉첩 주제에 

침노하여 

짓까불고 난리를 피우나? 꼴같잖아 같이 있기가 싫소이다!" 

부르거나 말거나. 옷깃을 잡거나 말거나 왕은 기어코 씩씩거리며  침전의 문을 나서고 말았

다. 생각하면 

할수록 열불이 치밀어 올랐다.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이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루종일 

희란마마로 

인하여 쌓였던 노염과 섭섭함과 분함이 간신히 가라앉았다가 다시 더 커다란 불꽃으로 터졌

다.   

아무리 왕 자신이 정궁으로 올린 중전을 하찮게 여긴다고 하여도 말이다. 아무리 정분은 하

나고 희란마

마 저를 중하게 대접한다 하여도 말이다. 해서는 되는 일이  있고 절대로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이 있는 법

이다. 자리를 보고 누울 데로 발을 뻗어라 하였다. 아무리 무도하여도 그렇지, 감히 잉첩 주

제에 교태전

까지 차고 들어가겠다니? 무엇이 이리 방자하고 천하에 무도할 데가 있던가? 

솔직히 왕이 부르지 않으면 중전도 들지 못하는 우원전의 침전에 희란마마 그녀가 든 것만

도 무상의 광

영이다. 그러니 중전이 있음에도 첩지도 없는 잉첩의 처지인 그녀가 안팎으로 <큰 마마>라

는 광영스런 

칭호를 받고 사는 것 아닌가? 

솔직히 왕은 누가 무어래도 일편단심의 깊은 마음이었다. 홀몸  되어 돌아온 누이의 청결한 

정조를 짐이 

섣부른 열정으로 감히 건드려 깨었다 하는 것은  죄는 순진한 젊은 왕이 꼼짝 못하고 평생 

얽매일 빚이었

다. 항시 왕이 조금만 섭섭해 하고 멀어진다 싶으면 심지어 은장도 꺼내들고 패악부리고 앙

탈 부리는 말

이란 그것이었다. 내 신세를 네가 망쳤으니 평생 책임을 져야 할 것이 아니더냐? 하고 몰아

세우는 희란

마마의 말에 순진한 왕은 대답할 말이 도무지 없었다. 순결한 동정을 받친 첫여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어마마마를 닮은 달덩이같은 누이를 사모한 정이 깊었다. 그래서 억지 고집 부려 제 여인으

로 만든 후에 

그저 오냐오냐 하여 주었더니, 참으로 버릇이 고약해진 것이었다. 

'고약한!! 해도 해도 참으로 너무 한다.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럴 수가 있느냐?" 

왕은 교자를 타고 금원의 서경당으로 가며 이를 갈았다. 저절로 주먹이 꽉 움켜쥐어졌다. 

아침나절, 왕더러 감히 보패 떨잠 셋 아니 준다 앙탈 부리는 것에서부터 꼴같잖고 가당찮았

다. 누이는 

대체 지금 저가 무어라고 생각하는가? 정말 저가 교태전의 주인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암만. 이제야 드러난 음험한 심보에 그런 속뜻이 없다 말못할 것이다. 사람이 제 분수를 알

아야지 말이

야. 죽었다 깨어나도 저는 짐의 정식 후궁조차 되지 못할 팔자라, 이토록 짐이 일편단심  저

에게 마음을 

모두다 주고 총애를 하면 저도 짐에게 해주는 게 있어야지.  허구헌 날 모자라도 더 내놓아

라 앙탈만 부

리고, 겁도 없이 조하 일에 간섭하며  짐의 눈을 가리고 까불더니. 이제는 감히  교태전까지 

내놓아라? 기

가 막혀서! 핫 기가 막혀서!!' 

희란마마가 왕을 상대로 수작부리기, 감히 저가 교태전에로 차고  들어가겠다고 한 이 말이 

바깥으로 알

려져 보아라. 왕은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다시 한 번 예조 이하 난리가 날 것이다. 이는 차마 사람으로서는 못 할  짓이 아닌가? 참, 

기가 막혀

서... 아무리 짐이 중전을 하찮게 여기어도 말이야. 명색이 정비(正妃)인데... 내외명부 안주인

이 거처하

는 곳이 바로 교태전인데... 짐도 중궁의 뜻을 살펴 함부로 발길 못하는 곳이 바로  게인데... 

아무리 하찮

게 생각하고 별 것 아니라  여기어도 그래도 정궁인데... 감히 저가  교태전을 탐내어? 기가 

막혀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 중전이 또 울 것이다.... 

갑자기 왕은 더없이 민망하고 면구하다 생각하였다. 

언제서부터 교태전에 버려둔 어린 왕비만 생각하면 가슴 한 쪽이 은근히 아리는 왕이다. 달

빛 아래 어진 

미소 머금고 색색 잠을 자던 어린 그녀. 손목 한 번도 잡지 못한 이름뿐인 지어미. 정결하고 

순진한 그 

작은 여자. 잠결에 보스스 웃으며 돌아눕던 작은 젖무덤을 떠올리며 왕은 문득 자신이 나날

이 그 어린 

사람의 눈물나도록 고운 순수함, 정결한 웃음을 잔인하게 짓밟고 망가뜨리고 있다 생각한다. 

짐이 왜 그것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왕은 입술을 굳게  악물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의 

이 마음조차 부인하고 싶을 정도로 아스라이 쓰리는 이 기이한 심사에서 왕은 그저 도망치

고 싶을 뿐이

다. 애써 부인하려 하는 그 마음. 차마 들추면은 아니 될 것  같은 깊은 그 마음. 스스로 자

책하는 바 많은 

터라, 짐은 그처럼 깨끗하고 순진한 그이에게 다가갈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 고결하고 순진

한 사람에게 

짐이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조차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야 여기는  그 마음. 도대체 그 마음

이 어떤 것일

까? 

'어차피 짐은 그것을 계집으로도 중전으로도 여기지 않은  것인데... 짐이 무슨 짓을 하든지 

입 봉하고 죽

은 듯이 엎드려 살 것이다 싶어 간택하여 들인 것인데 왜 짐은 새삼스럽게 그것에게 신경을 

쓰는 것이

지? 그만 두어라!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바로 짐이  일편단심이라 맹세한 누이에게 화가 

나서겠지. 오

늘 일을 기화로 단단히 버릇을 고쳐야 할 것이니, 월성궁  누이는 짐을 언제까지 열다섯 어

린 아이로만 

생각하는가?' 

거뭇한 어둠속에 묻힌 교태전의 용마루를 건너다보며 그냥 지나치는  전하. 등뒤로 하얀 달

이 따라간다. 

세월은 유수라. 다시 한 해가 흐르고  새 봄이 돌아왔다. 어린 중전마마,  이제 피어나는 열 

일곱 되신 터

이다. 

궐에 들어오신 지 이미 두 해 째이니 만물이 생동하는 사월이라. 

중전은. 가정당 대청 마루에다 수틀을 벌려 놓고 곱게 앉으시어 한 뜸 한 뜸 정성스레 수를 

놓고 있던 참

이었다. 

<부모은중경>. 검은 비단 바탕에 은빛 색실로 수놓는 글씨는 사친인 부원군을 생각하는 중

전마마 효심

이다. 지난 겨울부터 긴긴 밤 하냥 앉아 수 놓은 것이다. 완성하여 병풍으로 만들어  아버님

께 내려 드릴 

것이다 하였다. 다음 달이 부원군 생신이었다. 팔 폭 병풍 중 어느덧 일곱 번 째 폭이라 거

의 끝나 가는 

중이었다. 

"볕이 너무 따스하구나. 수틀 치우거라." 

중전은 문득 놓던 수틀을 치워라 하고는 손수 문을 활짝  열었다. 훈김이 흐르는 바깥의 춘

색(春色)이 기

가 막히다. 절로 중전마마 외롭고 우수 어린 양볼에도 웃음기가 돋았다. 가정당을 둘러싼 수

풀에 연두빛 

새싹이 좋고 금잔디 깔린 언덕은 벌써 초록빛이 무성하다. 목련은  흰 종같은 꽃을 달고 바

람에 흔들리며 

화사한 진달래는 진분홍 꽃잎을 조용히 벌리는 아름답고 조용한 봄날 오후였다. 

"실로 새 봄의 풍광이 기가 막히구나. 나는 교태전 울타리 안에서는 예가 제일 좋아. 조용하

고 조촐하니 

이 몸의 성정과 비슷하거든." 

혼잣말처럼 하시는 말씀이 고적하였다. 윤상궁이 옆서 망극하여 고개를 숙였다.  중전마마께

서 정전인 

교태전 넓은 치장 모두다 싫다 하시고 가정당을 좋아하는 이유를 그녀만이 짐작하는 터였기 

때문이다. 

가정당은 번잡하고 화려한 교태전의 후원에 호젓이 서있는 별당이다.  네 칸 대청 사이두고 

좌우로 방 하

나씩이 달려있는 작고도 우아한 전각인데 주로 어린 공주마마께서 장성하여 공주궁인  서궁

으로 가시기 

전에 유모와 머무르시며 어마마마인 중전마마의 곁에서  가르침을 받는 거처로 사용되었다. 

아직 공주가 

없으니 비워져 있는 전각인데, 언제부터 중전마마는 이곳 가정당을 심히 좋아하시어 주상께

서 교태전에 

아니 들어오시는 대부분의 날을 이 곳에서 거처하였다. 주상께서 월성궁으로 나가셨다 하면 

교태전 서

온돌을 두고서 이곳에 올라와 주무실 정도였다. 

"차를 한잔 올리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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