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200)

왕의 주먹이 꽉 움켜쥐어졌다. 쓰디쓴 노염의 말 한마디가 입술 사이로 배어져나왔다. 

"아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딴 일도 아니고 짐의 선물을 안고 간 반가운 사람이거늘! 버

선발로 뛰어

나와 반겨도 시원찮을 것인데 욕간통 안에 앉아 제 손으로도 아니고 아랫것 손으로 짐의 선

물을 열어 감

사하다 하기는커녕 왜 떨잠이 세 개가 아니냐고 신경질을 내어? 기가 막혀서!" 

왕은 지금 솔직히 희란마마가 하였다는 행동에 노엽기도 하고 또 너무 섭섭하였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선물이 어떤  선물이냐? 전하께서 작정하고 누이 생일 선물로  아주 

멋진 것을 하

여줄 참이다 싶어 황금 수십 량을 아깝다 않고 장만한 패물이었다. 사직의 안주인인 중전을 

맞이할 적에 

대례 치장으로 내려간 패물도 그만은 못할 것이다. 왕이 보아도 귀하고 호사스러워 입이 딱 

벌어졌었다. 

동도 채 트기 전에 엄상궁을 시켜 빨리 들고 나가라 채근한 이유는 무엇이냐? 그것을 받고 

좋아죽는 희

란마마 입에서 황공하옵니다, 감사하옵니다 한  마디를 들을 것이라 기대를 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귀한 것을 받고 한 마디 군입으로 감사하다 하지 않고 오히려 짐더러 세 개를 하여주지  않

는다 불만을 

하였다고? 

"아니, 나이가 그만 먹고 세상 물정 알만한 사람이 어찌 그리 철이 없고 어리석은가?" 

머리치장을 할 적에 떨잠 세 개를 꽂는 이는 오직 천하에서 한사람, 왕의 정궁 뿐이다. 선대

왕 아바마마

께 그리도 사랑받았던 희빈 어마마마께서도 정 일품 빈(嬪)이셨으되 겨우  두 낱을 하신 떨

잠이다. 헌데 

왕의 사랑을 가없이 받는 것은 분명하지만 희란마마는 정식 첩지가 없는 서인이다. 그런 터

로 월성궁의 

희란마마가 머리에 보패떨잠 두 개를 꽂는 것도 실상은 법도에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지금껏 짐이 묵인을 한 것이되 이제는 교만하고 눈이 높아진 것이라? 중전하듯이 저

에게 세 낱을 

아니하여준다 앙탈인 게야? 누이는  정말 자신이 짐의 정궁이다  이리 생각하고 있는 것인

가? 아무리 짐

이 저를 사랑한다 하여도 저는 짐과 지친이며 한 번 혼인한 과부였으니 죽었다 깨어나도 짐

의 정궁은커

녕 후궁도 되지 못하는 신분인 줄 아직도 모르는 것인가? 그런 누이를 짐이 지금껏 사모하

여 가까이한

다고 짐이 선비들에게 불측하다 비난을 받는 터인데 인제는 저더러 정궁 대접하여달라 고집

인가? 대체 

누이는 짐을 얼마나 더 망신을 시켜야 직성이 풀리는가?' 

김내관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족제비처럼 간교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은

근히 성상의 

속내를 떠보았다. 

"전하, 이 날 오후에 월성궁에 납시신다 하지를  않으셨는지요? 지금 월성궁 아랫것들이 두

어 번이나 다

녀갔사온데 무어라 전할까요? 큰마마께서 큰상 벌려두고 오직 전하께서 어보 옮기어 주시기

만을 기다

리고 있다 하옵니다. 말에 등자를 올릴 것입니까?" 

"...멍청한 놈! 짐이 지금 조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네 눈에는 보이지를 않느냐? 입  닥치고 

나가라! 사사

로이 짐이 잉첩 생일잔치 참석하려 조정의 일을 작파하고 나설 것이냐? 망신스럽게..." 

말을 한 사람이 참으로 무안하였다. 왕은 도승지가 상에  받쳐들고 들어온 장궤 두루마리를 

잡으시며 쌀

쌀맞게 김내관을 물리쳤다. 속이 배배 꼬여지고 토라진 터이니 전하, 속으로 누이가 짐 심사

를 상하게 

한 것이니 누이 심사도 상하여 보라지!! 이런 억지였다. 

이리 하여 하루 내내 전하께서 오신다 기다렸던 희란마마만 하릴 없게 된 것이다. 

주상 전하께서 딴 날도 아니고 희란마마 생일인데 아니 오신다.  이것은 혹여 두 분 사이가 

슬슬  떨어지

는 것이 아닐 것이냐? 눈치는 빤하니 아첨군들 생각이 그런  쪽으로 기우는 것은 당연지사. 

부부인이 그

것 보시오!! 하고 한 마디 또 희란마마 억장을 뒤집었다. 

"아침에 그리 제조상궁 수모주어 쫓아낼 적부터 내가  알아보았소이다! 주상 전하 심부름을 

한 이이니, 

전하께서 오신 것이나 진배없는 터가 아니오? 마마께서 그리  박대를 하신 터라, 어찌 전하

께서 심기가 

상하지 않을 것인가? 다 큰마마께서 자초하신 일이오!" 

희란마마 월성궁에서 새끈거리고 펄펄 뛰어보지만, 아니 오시는 주상  발길을 저가 어쩔 것

이더냐? 저 

잘났다 위세 당당하다 소문낼 잔치가 그렇게 어이없이 파장이  났다. 열불이 난 희란마마가 

꽃가마 타고 

대궐 들이닥친 것은 전하께서 석강을 하실 무렵이었다. 

"짐이 분주하다! 누이더러 우원전 침전서 기다리라고 하여라!" 

예전만 같으면 상감마마. 희란마마가 들었다 할 것이면 석강이고  조하중신 알현이고 다 내

팽개치고 달

려들어가신 터이다. 그러나 그 밤은 쌀쌀맞게 상궁더러 이르고  석강 끝날 때까지 그쪽으로

는 눈도 돌리

지 않으셨다. 희란마마, 서럽고 분하고 열불이 돋은 것은 당연지사. 전하께서 들어서시자 훌

쩍훌쩍 눈물

부터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달래주기는커녕 왕은 아무 말도 없이 보료 위에 정좌를 하

였다. 딱딱하

고 불퉁한 용안이 펴지지 않으니 너만큼 나도 화가 났다 이런 뜻이다. 

희란마마 그저 처연하게 흑흑거리었다. 고집이라 장하니 왕도 끝까지 달래주지 않고 침묵이

다. 

그러나 사내란 것은 약한 것. 단단히 마음을 먹고 누이 버릇를 가르쳐 줄 것이야 싶어도 상

감마마 희란

마마가 아직은 소중하고 좋으니 우는 꼴이 안타깝고 속상하다. 딴 날도 아니고 생일인데 짐

이 너무 심한 

것은 아니야? 그저 짐만 보고 사는 사람인데 짐이 보아주어야지. 저리 울고 있는 누이가 가

엾다 싶은 생

각이 아니 드실 수는 없는 것이다. 

얼마 후 차상이 들어왔다. 그제서야 전하, 한 마디 겨우 하신다. 

"좋은 날에 짐 보러 와서 눈물은 왜 흘리시오?" 

"흑흑흑.... 마마, 대체 이 희란이 마마께 어떤 존재입니까?" 

전하께서 먼저 말을 거시니 인제는 불퉁한 그 억지가 풀렸구나. 희란마마 속으로 배싯 웃는

다. 그럼 그

렇고 말고! 먼저 엎드리는 쪽은 항상 주상이면서 저렇게  억지고집을 피우신다니까? 어떻게 

하면 주상을 

다잡아 제 치마폭에 휘감고 말랑말랑하게 녹여버릴까 간교한 속내 굴리며 그러나  수완좋은 

그녀는 겉으

로는 여전히 눈물을 떨구었다. 스산하고 처연한 어조로 되물었다. 

"누이가 어떤 존재이긴요? 몰라서 물으시오? 일편단심 짐이 사모하는 사람이 아니오?" 

"이 날이 허면은, 무슨 날입니까?" 

"누이 생일 잔치하는 날이라 알고 있소." 

희란마마 옷고름으로 곱게 눈물을 닦았다. 쓸쓸하고 가련한 눈빛으로 왕을 곁눈질하였다. 연

해 볼에 눈

물이 흐르는 것이 어찌 그리 비에  젖은 모란꽃 같은가? 전하 역시 희란마마를  곁눈질하였

다. 늘상 강단

있고 기승스럽고 당당하게 노는 꼴은 자주 보았다. 이렇게 처연하게 흐느끼고 우는 꼴은 드

문 것이라. 

나름대로 또 귀엽고 안타깝고 안아주고 싶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사내 마음 홀려감는 수단이라 꿰지 못한 것이 없는 희란마마가 아니냐? 특히 주상전하께서 

저에 대해 

청상 과부 홀몸되어 돌아온 누이가 가엾고  불쌍하다 생각하는 그 대목으로 미혹할  작정을 

하고 있는 줄

도 모르는 순진한 상감마마. 이 밤도 또다시 간교한 희란마마 그물에 잡히고 말았구나.... 

"작년이던가요? 신첩의 생일날서 그날은, 전하께서 신첩을 대궁 보진재에 부르시었사옵니다. 

기억나시

는지요? 전하 옆에 신첩을 앉혀두고 우리 누이, 우리 누이 하시면서 신첩 낮을 세워 주시고 

산더미 같은 

선물을 주시어 이 누이 기쁘게  하여 주셨지요? 오직 짐은  누이 뿐이오!! 하고 맹세하시던 

그 옥음이 아

직도 이 희란의 귀에 쟁쟁하니...  흑흑흑... 전하. 헌데 그날만 같지  않고 이날서 이 누이가 

자꾸만 슬퍼

지옵니다... 흑흑흑." 

"어찌 그러하오?" 

"생일날이 결코 즐거운 날이 아니라 하는 것을 저가  인제서 겨우 깨달았답니다. 생일을 맞

이하였다 함은 

신첩이 나이가 더 먹었다는 것이며 그는 자꾸만 이 누이 못나지고 늙어지어 주상 성총 잃어

버리게 되는 

날이다 깨달은 때문이랍니다. 흑흑흑... 전하, 인제 이  누이가 늙어지고 미워지니 곱지 않으

시지요? 다

른 계집들이 더 어여쁘지요?" 

할끔할끔 눈물을 지으며 상감마마 바라보는 그 눈빛이 아련한 안개였다. 물기젖은 희란마마 

눈은 그야

말로 정해가 칭칭 얽힌 그물이니 단번에 순진하고 어린 주상 휘여감아 딱 제 치마폭 아래로 

다시 잡아들

인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상감마마 먼저 한 무릎 다가앉아  가련한 누이 손을 덥썩 잡아버

렸다. 

"그런 말을 마오!! 누이가 짐의 성정을 잘 알 것이니  짐은 오직 편협하여 한 번 쏠리면 그

이뿐이라오! 누

이를 사모하는 이 마음은 어떤 고운 계집을 가져다놓아도 변함이 없을 것인데 어찌 그리 불

길한 말을 하

오?" 

"헌데 그런 분이 어째서 이날 신첩에게는 와 주지 않으신 것인지요?" 

"대신 엄상궁을 보내어 좋은 선물 보내지 않았소이까? 짐이 조하 일이 산더미  같은데 사사

로이 어찌 발

길을 옮기리요? 오늘 하루종일 바빠서 짐은 잠시도 쉴 짬이 없었소. 누이가 항시 짐에게 말

하길 성군이 

됩시오 하였기로 짐이 조하 일을 열심히 보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짐이 그런 

것이 진정 

누이를 위하는 것이라 생각하였지! 허나 대신  이렇게 누이가 짐을 찾아 왔으니  되지 않았

소? 짐이 이미 

누이와 함께 즐기리라 하여 주안상 보라 하였으니  짐이 누이에게 축하한다 술 한 잔 내릴 

것이오" 

듣기 좋게 전하께서 희란마마를 살살  달래기에 골몰하였다. 좋은 날인데  짐이 노여웠다고 

한마디하면 

이이가 그러지 않아도 심기 상한 터인데  더 울 것이야 싶었다. 당신 상한  속은 입도 벙긋 

못하시는, 아니 

안하시는 전하이시다. 

그저 짐이 누이에게 잘하여 주어야지. 성급한 짐에게 청명한 옥체 한 번 허락하였다가 두고

두고 모든 사

람들에게 욕을 먹고사는 이 가련한 사람에게 짐마저 야속하게 굴면 이이가 대체 어디 가서 

비빌 것인

가? 평생 책임지고 사랑하여야 그것이 누이 건드린 짐의 실책을  가림이라. 짐은 평생 누이

만을 사모하

는 것이야!! 다시 한 번 스스로 다짐하며 주상 전하, 슬며시 희란마마 손목잡아 무릎에 앉히

신다. 

때를 맞추어 주안상이 올라온다. 퐁퐁퐁 은배에 술 한잔  따르어주며 슬슬슬 다시 희란마마 

왕을 꼬시기 

시작하였다. 

거나하게 한 잔 하였겠다, 눈물짓는 누이의 가련한 모습에 색다른 욕심이 생긴 터이라 왕은 

슬쩍 희란마

마 비단 옷고름을 풀어 내렸다. 

심중에 비수처럼 감춰둔 속셈이 있다. 일단 주상을 내 아랫도리로 휘감아 정신을 딱 못차리

게 하여두고 

그 다음서 내가 작정한 일을 성사시켜야지! 희란마마 또한 상감마마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진진한 유혹이니 감히 저가 먼저 주상 전하 용포 옥대 풀고 날가슴 슬슬 쓰다듬으며 두  팔

로 왕의 목을 

휘감으며 코맹맹이 소리이다. 

"이날서 신첩이 전하의 무릎그네를 탈 것이야요!! 단오절 고운 날이 멀지 않았으니 미리 연

습을 하여 두

어야지!!" 

이런 음탕한 말까지 서슴치 않고 하며 뱀같이 보드라운 손을 왕의 허리춤 아래로 가져가는

구나. 그의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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